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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동양방송이 없어지던 날을 나 역시 선명하게 기억한다. 내 또래이지만 원조 동안으로서 언젠가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세상에 염정아의 아들로 나오기도 했던 안정훈과 이제는 전설이 된 듯한 강수연이 열연하던 어린이 드라마 <바람돌이 소년 장영실>과 '달동네'라는 신조어를 대한민국 국어사전에 등재시킨 드라마 <달동네>의 팬이었거니와 TBC의 마지막 날은 무척이나 슬펐다. 그날의 마지막 방송은 황인용 아나운서였던 것 같다. TBC가 없어진다기에 끝까지 본방을 사수하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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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5분... 5분이 참 야속합니다. 10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멘트는 울음에 젖은 동양방송 호출 부호였던 것 같다. 에이치 엘 어쩌고 하는. 나 역시 슬펐다. 7번 (당시 TBC 채널)이 이제는 안나오는구나. 이제 무슨 낙으로 사나. 하지만 다음날 내가 좋아하던 프로그램들은 거의 정상적으로 방송되기에 TBC는 없어졌으나 채널은 살아 있다는 걸 보고 마냥 좋아했지만. 

그렇게 단칼에 TBC를 없애 버렸던 것이 바로 언론통폐합이었고 그 주역이 허문도라는 사람이었다. 5공의 실세에는 세 명의 허씨가 있었다. 육사 17기 허삼수와 허화평. 그리고 허문도.

이 허문도는 군인 출신이 아니었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었고 일본 특파원도 역임했던 중견 언론인이었다. 1940년생이니 1980년이래 봐야 나이 마흔하나였던 허문도는 역사에 남을 대단한 기획 작품으로 자신의 출신지인 언론을 짓뭉개 놓는다. 그것이 언론 통폐합이었다. 그야말로 정권의 결정에 따라 수십 년 역사의 방송이 문을 닫고 신문사가 없어졌다. 지금과 위상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삼성그룹도 TBC를 빼앗겼고 동아일보는 동아방송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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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통폐합 조치를 기획한 허문도(좌), 이상재(우)

1도 1지, 한 도에는 한 신문만 있게 했고 그 와중에 꼬장꼬장한 기자들은 하루아침에 쫓겨나 술 취한 채 악을 쓰며 거리를 헤매야 했다. 이에 대해서도 허문도는 언론 통폐합이 자기의 소신이라고 우겼다. "언론과 재벌분리, 방송 공영화, 사이비 기자 정리"를 위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래도 다른 군바리들보다는 머리가 돌아가는 편이었다. 빈약한 정통성을 지닌 정권은 대개 색다르고 거창한 이벤트를 기획하여 국민의 관심을 그쪽으로 돌려서 자신의 구린 데를 감추고자 하기 마련이다. 허문도 역시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를 다잡고 광주의 피비린내를 지울만한 거대한 행사를 기획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그가 없애버린 민영방송 TBC의 한 행사였다. 1979년 8월, 박정희 대통령이 "나는 괜찮아."하며 쓰러지기 두 달 전 TBC는 제1회 "전국 대학생 축제 경연대회"를 연 바 있었는데, 허문도는 이 소박한 규모의 프로그램을 엄청나게 뻥튀기함과 동시에 제5공화국 헌법에 새로이 삽입된 '민족 문화 창달' 조항에 부응하는 어마어마한 관제 축제로 만들 계획을 세운다. 이것이 그 이름도 고풍스러운 국풍 81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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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도가 이 행사를 위해 얼마나 목을 매달았는지는 그의 포섭(?) 대상을 보면 안다. 그는 80년 12월 석방된 김지하를 찾아 전라도 해남까지 찾아간다 "문화적 리더쉽을 발휘해 달라." 그때는 정신이 명징했던 김지하는 당연히 이 청을 거부한다. "반파쇼 운동 전선 전체를 휘어잡아서 자기와 같이 ‘사쿠라 놀음’을 하자는 것이다!" 그래도 의지의 한국인 허문도는 그치지 않고 '아침이슬'의 김민기, 70년대 초부터 불기 시작한 탈춤운동의 대부로 불렸던 채희완, 소리꾼 임진택에게까지도 접근한다. "공개적으로 놀 수 있는 마당을 열어 주겠다." 그러나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놀 테면 너 혼자 놀아라"는 식이었다. 허문도는 마침내 혼자 놀 준비를 했다.

하늘을 나는 로케트도 떨어뜨리는 세도가의 기획이었다. 자그마치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KBS가 주관하는 가운데 "'새역사를 창조하는 것은 청년의 열과 의지의 힘이다"라는 가슴 벅찬 슬로건을 내건 국풍 81은 1981년 5월 28일 대단원의 막을 올렸다. 198개 대학의 수천 명의 학생과 그만큼의 일반인들이 행사에 참여하여 벌이는 온갖 민속놀이와 흐드러진 술판으로 온 여의도가 흥청거렸고 정권은 통행금지를 일시 해제하는 파격까지 베풀어 주었다. 그래도 허문도는 아쉬웠다, '민족 문화 창달'의 취지에 걸맞는 대학생 탈춤반들의 참여가 전무했던 것이다.

섭외는 물론 해 보았지만, 정권의 속이 뻔히 들여다보는 국풍 81에 참여하겠다는 탈춤반은 역시 없었다. 또 의지의 사나이 허문도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탈춤반 졸업생이나 군대에 있던 사람들까지 총동원하여 '서울대 탈춤반'을 급조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쯤 되면 그 의지가 가려함을 넘어 가상하다 싶을 정도다. 그러나 국풍 81은 철저하게 정치적인 행사였다. 허문도와 전두환의 친필 서명이 담긴 문서에는 국풍 81을 띄워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는 것이다. '학원 문제의 부분해소', '학원 문제를 국풍으로 유도, 축제 속에 매몰', '학원의 고질적 국면 타개', '문제서클을 차단 고립 소수화', '민속서클을 체제 속으로 흡수', '반체제적인 대학사회의 전통문화 붐을 체제화' 결과적으로 완전히 실패한 기획이었다. 그해 가을 국풍 81에서 우승했던 서울대 갤럭시의 서울대 공연 무대가 학생들의 분노 속에 박살 난 것으로 그 반증이었다. 

5공 중반 이후부터 최후까지 그는 통일원 장관이었다. 그가 통일원 장관이던 시절의 어느 날, 나는 담임 선생님에게 불려 갔다. "반공 웅변대회가 좀 크게 열릴 거다." 반공 웅변대회는 소소하게 있었지만, 이번에는 전교생 운동장에 세워 놓고 할 거라고 했다. "우리 반에선 경범이가 나갈 거니까. 니가 웅변 원고를 써 줘라. 근데 이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 장관 지침이다." 면서 프린트된 종이를 주셨다. 잡다한 '지침'은 망각의 늪에 들었지만, 다음의 기준은 지금도 기억한다. '좌경용공 세력의 통일전선 전술을 폭로하고 섣부른 통일론에 대한 경계' 이 지침을 근거로 나는 "지금 툭하면 시위를 벌여대는 서울의 대학생들은 그들이 북한의 장거리포 사정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웅변 원고를 써제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해 늦가을 이른바 금강산 댐 사태가 터졌을 때도 그는 통일원 장관이었다. 이건 장관지침인지 모르겠는데 담임 선생님이 반장을 불러 금강산 댐 반대 시위를 위한 피켓과 반 구호를 만들라고 하셨다. 시커먼 고딩들은 교련복 차려입고 반마다 마련한 구호를 외치며 운동장을 돌아야 했다. 몇 차례 선생님으로부터 퇴짜를 받은 후 우리 반이 채택한 구호는 "민족말살 획책하는 수공음모 말도 안 돼!" 였다. '말살'에 '획책' 등 유식한 말이 포함돼서 그랬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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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문제가 생겼다. 국민윤리 교육에 너무나 충실한 범생이들이 고심 끝에 정한 구호가 그 수용자인 우리 반 아이들에 의해 이상하게 변질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민족말살 획책하는 수공음모'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말도 안 돼'가 전두환더러 외치는 건지 김일성보고 외치는 건지 갑자기 애매모호해진 것이다. 거기에 데모는 데모, 인근의 동의대학생들의 시위를 봤던 아이들이 마지막 네 글자를 반복하는 대학생 시위 흉내를 내면서 분위기는 더 이상해졌다. 

"민족말살 획책하는 수공음모 마~~알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팔뚝에 힘줄 불거지며 새된 소리로 구호를 외치던 비장한 분위기는 갑자기 배꼽 잡는 코미디로 화했다. 웃음 속에 구호는 더욱 힘차지고 열렬해졌다. 다른 반 아이들도 귀를 기울이고는 전부 다 따라 하기 시작했다. 

"민족말살 획책하는 수공음모 말도 안 돼 말도 안돼 말도 안 돼"

다음날 부산일보 한 귀퉁이에 조막만 한 기사로 우리 학교 등 몇몇 학교에서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있었다는 내용이 실린 옆에는 대문짝만하게 국방부장관 통일원장관 등의 명의로 대국민 호소문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날 뉴스에도 허문도의 세모꼴 얼굴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나의 청소년기였던 80년대 초중반 내내 그는 그렇게 내 곁에 있었다. 그는 5공 정권의 충실한 이데올로그였다. 1988년 5공 청문회 당시 거의 유일하게 청문회 의원들 상대로 '소신'을 펼치면서도 별로 밀리지 않는 면모를 보여 주었고 전두환에 대한 평가를 요구받자 "난세(亂世)를 치세(治世)로 바꾼 영웅"이라고 답하여 사람들의 허파를 뒤집어 놓았었다.

그에게는 치세(治世)였는지 모르나 대한민국의 '민주'와 '정의'에게는 실로 부끄러운 치세(恥世)였고 권력의 무소불위가 하늘에 닿고 땅을 갈랐던, 보안사 준위가 언론의 지형도를 바꾸고 이렇다 할 경력도 없는 언론인 하나가 대한민국 언론판을 두고 장기를 두었던 아둔한 치세(痴世)이기도 했다. 그 시대를 떠올리게 한 인물 하나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기억을 더듬어 봤다. 잘 가시오 허문도씨. 명복은 빌어 드리겠습니다. 저세상에서는 그런 짓 마시기 바랍니다.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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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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