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살 동분, 태어나 처음으로 은행에 가다
매끄러운 이야기 진행을 위해 개인택시 관련 몇 가지 오해와 진실부터 얘기해야겠다. 회사택시 무사고 7년으로 개인택시 받았다고 하면, 보통은 택시회사에서 포상금 명목으로 개인택시 한 대를 ‘턱’ 하고 주는 거라고 오해한다. 전~혀 아니다. 무사고 운전 경력 7년 충족하면 개인택시 몰 수 있는 ‘운송사업면허증’을, 택시회사가 아닌 해당 지자체에서 주는 거다. 고로, 송일영은 대전직할시장(1991년 당시엔 대전광역시가 아닌 대전직할시) 직인이 박힌 면허증을 받은 거다.
그럼 자동차는? 매우 당연하게도 면허증 취득한 본인이 사야 한다. 하여, 1991년 6월 송일영은 3년 할부로 1,200만 원짜리 로열프린스를 샀다.
그러면 왜 그렇게들 개인택시에 목매느냐. 벌이가 다르다. 기사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회사택시보다 개인택시가 통상 1.5~2배 정도 번다. 회사택시는 말하자면 ‘기본금+인센티브’ 받는 영업직이다. 송일영이 회사택시 열심히 몰던 1989년, 월급이 약 40만 원이었다. 매일 사납금(회사택시 기사가 회사에 납부하는 당일 소득의 일부. 당시엔 3~4만 원이었다.) 채우고 집에 가져오는 초과금이라고 해봐야 5천 원~1만 원이었다. 그러니 한 달에 20일 이상 일해야 겨우 50~60만 원 정도 벌었다.
그럼 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아무리 회사택시라지만 사납금 포함 하루에 약 4만 원(시대 물가 감안하더라도) 밖에 못 번다고? 구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회사택시는 기본적으로 2인 1조다. 택시 한 대로 1명은 새벽부터 오후까지, 다른 1명은 오후부터 밤까지 맞교대하는 거다. 그러니 동분 표현이 딱 맞다. 회사택시 기사는 “매일매일 푼돈 찔떡찔떡 갖다주는” 직업인 거다.

청주에서 신혼살림 시작하기 전 연애하던 시절
이즈음 데이트 몇 번을 끝으로 두 사람은 10년 넘게 고생만 했다
두 사람 뒤로 보이는 차가 전설의 ‘포니’
그에 반면, 송일영이 개인택시 몰기 시작하고부터는 한 달 평균 110~120만 원, 많을 땐 130만 원까지 벌어왔다. 여기서 동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 당시에 회사택시 한창 굴리다가 개인택시 받은 기사들이 과로사로 많이들 죽었어. 왜 그런가 하니 개인택시는 버는 족족 내 돈이잖어. 버는 재미가 쏠쏠하거든? 더군다나 회사택시 굴릴 땐 오전 반, 오후 반으로 나눠서 반나절씩만 일하잖어. 그랬던 기사들이 개인택시 받고 나서는 돈 버는 재미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택시를 굴리는 거여. 그러다 쓰러지는 거지. 아휴~ 왜 아니여. 니네 아빠도 새벽 6시면 택시 몰고 나갔어. 나가서 출근하는 사람들 한 바퀴 태워주고, 9시쯤 집 와서 아침 먹는 겨. 그러고 바로 또 나가서 오후 2시쯤 들어와서 점심 먹고 1~2시간 자. 피곤하겄지. 새벽부터 나가는데. 그렇게 한숨 자고 또 나가. 그러고 저녁 7~8시쯤 들어와. 와서 저녁 먹고 또 나가. 엄마가 그때는 니네 아빠 삼시세끼를 다 차려줬다는 거 아니냐. 호호호. 근데 진짜, 그때는 니네 아빠가 열~심히 했어. 안쓰럽기도 하고, 대단해 보이기도 했지. 그래가지고 엄마도 끼니마다 신경 써서 밥 차려 주고, 보약 챙겨 먹이고 그랬지.”
송일영은 늘 자정이 다 돼서야 귀가하곤 했다. 그때마다 만 원짜리 몇 장과 천 원짜리를 수북하게 내놓았다. 그 돈 받아서 한 장 한 장 세보는 게 당시 동분의 일과 마무리였다. 보통 6~7만 원, 장거리 뛰고 온 날은 10만 원도 넘게 가져왔다. 그렇게 한 달 20일을 꼬박 채웠다. 개인택시는 공급 과잉을 제한하기 위해 통상적으로 ‘3부제’를 실시했다. 이틀 일하면 하루는 강제로 쉬어야 한다. 형편은 금세 좋아졌다. 돈 모이는 게 눈이 보였다. 물론, 개인택시 굴린다고 금방 부자 되는 건 아니었다.(참고로 2023년 기준, 개인택시 기사 하루 평균 수입은 15만 2천 원, 월 평균 근무일은 18.7일, 월 평균 수입은 약 280만 원이라고 한다.) 회사택시 굴릴 때와 비교해 좋아졌단 얘기다.
“시골 촌년이 무슨 돈이 있어서 은행에 가봤겄어. 그때 엄마가 31살이었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은행 가서 적금이라는 걸 만들었다는 거 아니냐. 20만 원짜리 적금 통장이랑 5만 원짜리 청약통장 만들어 나오는데, 진짜루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더라고. 그 통장 두 개를 가슴팍에 소중히 안고 집에 오는데 괜히 눈물이 왈칵 쏟아지데? 왜 아니겄어. 1982년에 부랄 두 짝 밖에 없는 니네 아빠랑 결혼해가지고 시댁 들어가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겨우 분가했더니만, 개인택시 받는다고 또 형편 어려워져가지고 친정에 반찬 얻으러 다니고, 여기저기 돈 빌리러 다니고. 아휴, 그렇게 꼬박 10년 고생하는 바람에 100원 한 푼을 못 모은 거 아녀. 남들은 부모한테 재산 물려받아가지고 전셋집부터 시작해서 금방 내 집 마련하는데, 우리는 그때까지도 네 식구가 단칸방(공주슈퍼 집)에 살고 있었으니… 겨우 10년 세월을 보상받는 느낌이 들더라고.”
동분의 봄날
동분 가족은 그때서야 신탄진의 공주슈퍼 집도 탈출할 수 있었다. 동분 가족이 이사한 곳은 신탄진에서 대청댐 방향으로 좀 더 들어가면 나오는 미호동. 마찬가지로 단칸방이었지만, 공주슈퍼 집보다는 좀 더 넓고 화장실도 실내에 있었다. 집 환경도 물론 좋아졌지만, 결정적으로 이사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리 가족이 시댁에서 분가하고, 니네 큰아빠랑 큰엄마가 할머니 모시면서 1년이나 살았나? 그 집 식구도 못 버티고 나가버린 겨. 왜긴? 니네 할머니랑 큰엄마가 상극 아니냐. 니네 할머니도 대단한 성깔이지만, 큰엄마도 보통이 아니거든? 아무튼 그렇게 큰아빠 가족이 나가는 바람에 그 넓은 시골집에 할머니랑 삼촌만 남은 거 아녀. 집 관리도 안 되고 하니까 니네 할머니가 1989년에 시골집 팔고 신탄진 시내로 이사를 온 거여. 하필이면 우리 집 근처로. 그때부터 또 수시로 우리 집 찾아와서 나를 들들 볶더라고. 왜 찾아왔겄어. 니네 삼촌이 맨날 술 먹고 사고만 치고 다니니까 돈이 없어서 찾아오는 거지. 돈 달라고. 근데 뭐, 우리 집은 퍽이나 돈이 있었냐? 그때 나도 친정에서 반찬 얻어다 먹고 돈 빌리러 다니던 시절인데. 그래가지고 개인택시 받자마자 미호동으로 이사한 겨. 좀 멀어지면 덜 찾아올까 싶어서. 신탄진 시내에서 미호동까지 들어오려면 버스 타고 한 20분은 와야 했거든. 반대로 우리 집은 이제 차가 한 대 생겼으니까 신탄진에 볼일 있어도 금방 왔다 갔다 할 수 있잖어. 호호호. 내가 머리를 쓴 거지.”
동분은 미호동 살면서부터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송일영이 쉬는 날이면 근교로 드라이브도 갔다. 주성과 주홍이 각각 학교와 유치원에 간 사이, 맛있는 점심 한 끼 사 먹고 오는 거다. 돌이켜보면 실로 오랜만이었다. 아니, 오랜만도 아니다. 결혼하고 나서 데이트다운 데이트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결혼하기 전, 그러니까 송일영이 대한생명 충북지사장 수행비서로 일하며 포니 끌고 다니던 시절 몇 번 했던 데이트가 전부였다. 결혼한 다음부터 데이트는커녕 단둘이 마음 편하게 외식 한 번을 못 했다. 그렇게나 무뚝뚝하던 송일영이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돈가스를 썰어서 입에 넣어줄 때, 동분은 이게 행복이구나 싶었다.

개인택시 뽑았던 1991년 여름 강원도 강릉 옥계해수욕장에서. 동분 가족은 처음으로 멀리 바캉스를 다녀왔다. 왼쪽부터 작은아들 주홍(5살), 동분(31살), 큰아들 주성(9살). 두 아들의 ‘베트맨 난닝구’와 동분의 꽃무늬 셔츠가 인상적이다. 인물 뒤로 저 멀리 한라시멘트 항만공장이 보인다.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공장이 가동 중이다.
그렇게 통장에 돈이 쌓이고, 생활이 안정되면서 동분은 진작부터 마음먹었던 일을 추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결혼식 말이다.
결혼식과 청약 당첨
동분 말마따나 결혼할 당시 송일영은 “부랄 두 짝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1982년 청주에 신혼집 차릴 때 세간 살림 마련한 것도 동분이었다. 그렇게 형편 좀 나아지면 바로 결혼식 올리자고 했던 세월이 벌써 10년이나 흐른 거다.
“우리가 혼인신고만 하고 바로 살림 합쳤잖어. 당장 먹고살기 급급한데 결혼식을 어떻게 올리냐. 차일피일 미뤄왔던 거지. 근데 엄마도 여자 아녀. 웨딩드레스 한 번은 입어봐야 할 거 아녀~! 니네 형이랑 너는 하루가 다르게 크지, 엄마랑 아빠는 점점 나이 먹어 가는데 더 미루면 안 되겠더라고. 통장에 돈도 좀 모였겠다, 1992년에 니네 아빠한테 얘기했지. 우리 이제는 결혼식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랬더니, 니네 아빠가 진작 올렸어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하더라고.”

1993년, 대전 대덕구 신탄진동 행복예식장에서
동분과 송일영은 1992년 11월, 살림 합친 지 꼭 10년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동분 32살, 송일영 38살이었다. 양가 모두 무언가 해줄 형편은 아니었다. 송일영이 비상금 털어 순금 10돈으로 금반지와 금목걸이를 맞춰 동분에게 선물했다. 동분은 차곡차곡 모았던 적금을 깨 결혼식 비용을 충당했다. 어르신들 말씀 따라 주성과 주홍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결혼식이라는 게 꼭 웨딩드레스를 입어서라기보다도 친척 어른들이랑 주변 지인한테 ‘우리 결혼합니다’ 하고 알리는 거잖어. 그때 벌써 니네 형이 10살이었는데 결혼식도 안 올리고 쭉 살아왔으니, 명절 같은 때 어른들 보기가 민망했었지. 결혼식은 당연히 신탄진에서 했지~!! 니네 아빠나 엄마나 다 신탄진 사람인데 대전에서 할 수 있냐? 아휴 근데, 시골 예식장이라 그런가 신부 화장을 아주 촌스럽게 해준 거여. 엄마는 원래 화장을 진하게 하면 안 어울리는데 화장도 새빨갛게 하고, 머리도 이상 요란하게 해놔가지고, 얼마나 속상했나 몰라. 그래도 집에다가 결혼식 사진 크게 걸어놓으니까 이제 좀 정식 부부 같고 좋더라고. 호호호.”
신혼여행은 부산 태종대로 다녀왔다. 예식 끝나고, 동분과 송일영 친구들이 다 함께 모여 뒤풀이 자리를 가졌다. 예상보다 자리가 길어졌다. 겨우 출발한 건 저녁 8시. 스마트폰은커녕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이었다. 송일영은 오직 도로 안내판에 의지해 부산까지 갔다. 송일영의 유일한 자랑, 로열프린스를 끌고 말이다. 도착하고 보니 벌써 밤 12시였다. 부산까지 어떻게 오긴 왔는데, 이때부터 또 문제였다. 풍문으로만 듣던 태종대가 도대체 어딘지 알 수 없었던 것.
“니네 아빠가 갑자기 택시 한 대를 불러 세우는 겨. 그러더니 대전에서 신혼여행 왔는데 태종대 가는 길을 모른다, 택시비 줄 테니까 태종대까지 앞장서 달라, 쫓아가겠다, 하더라고 호호호. 그래가지고 대전 택시가 부산 택시 뒤를 졸졸 따라서 태종대까지 간 겨. 그 기사 아저씨가 숙소도 직접 잡아주더라고. 숙소 들어갔더니 벌써 새벽 1시여. 둘 다 피곤해서 바로 곯아떨어졌지. 그게 엄마, 아빠의 신혼 첫날밤이었다는 거 아니냐. 호호호.”

두 사람은 그 당시 신혼여행지로 가장 핫했던
부산 태종대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그래도 동분은 마냥 행복했다. 대단할 거 없는 2박 3일 신혼여행이었지만, 사진도 많이 찍고 그만큼 추억도 많이 남겼다. 신혼여행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분은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개인택시 받기 전, 쪼들릴 때마다 동분은 오직 하나만 생각했다. ‘개인택시 받으면 좀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불안했다. 개인택시 받는다고 형편이 금방 나아질까, 우리 네 식구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지난 10년의 고생이 딱지처럼 굳어, 만성 같은 불안이 있었던 거다.
근데, 개인택시 받고 나니까 정말이지 모든 일이 거짓말처럼 풀리기 시작했다. 적금도 들고, 이따금 드라이브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시어머니 구박에서도 벗어나고, 이렇게 결혼식도 올리고 신혼여행까지 다녀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마침내는 청약까지 당첨됐다.
“송 씨 집안사람 중에 대한주택공사(한국토지주택공사의 전신, 2009년 한국토지공사와 대한주택공사가 통합해 한국토지주택공사로 출범) 다니는 아저씨가 하나 있었어. 그 아저씨가 일단 무조건 청약통장 하나 만들어서 꼬박꼬박 돈을 넣으라는 겨. 무슨 일 있어도 청약통장은 건들지 말고. 때 되면 자기가 정보 알려주고 서류 작성하는 거 도와주겠다고. 그래가지고 개인택시 받자마자 청약통장 만든 거 아녀. 그러고 1년이나 지났나? 월평동에 주공아파트(국민임대아파트)가 하나 나왔는데, 어차피 집 살 형편은 안 되니까 그게 딱 적당하다고 청약 신청 해보라고 하더라? 바로 신청했지. 그때는 그거라도 안 될까 봐 얼마나 노심초사하면서 기다렸다고. 그러고 얼마 있다가 전화 왔는데 청약에 당첨이 됐다는 거여. 아휴~!! 니네 아빠랑 둘이 부둥켜안고 울고불고 한바탕 난리를 떨었다는 거 아니냐. 호호호.”
동분과 송일영은 그때부터 쉬는 날이면 한 번씩 월평동에 갔다. 공사 현장 맞은편에 로열프린스 세워두고, 한참을 서서 구경했다. 겨우 11평밖에 안 되는 국민임대아파트였지만, 동분에겐 그 어느 대궐집 부럽지 않았다.
“그때 우리 집이 10층이었잖어. 공사 현장에 한 번씩 갈 때마다 아파트 올라가는 게 보인단 말여. 그럼 니네 아빠랑 1층부터 한 층, 한 층 세는 겨. 호호호. 그럼 엄마가 ‘주성 아빠, 벌써 7층까지 올라갔네. 조금 있으면 우리 집 공사 시작하겄다.’ 하면서 구경하는 거지. 월평동으로 이사할 때는 진짜 결혼식 할 때보다도 좋더라고. 좁아터진 집이었어도 일단 아파트 아녀. 그때가 1993년이었으니까 신탄진엔 아파트가 아예 없었고, 대전에도 아파트가 흔치 않을 때였거든. 아파트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지. 웃긴 게 뭔 줄 아냐? 호호호. 이사하고 얼마 있다가, 그 좁은 집에서 집들이하겄다고 니네 아빠 계모임하는 아저씨들을 잔뜩 초대했다는 거 아니냐. 엄마가 작정하고 한 상 푸짐하게 대접을 해줬지. 아휴 참~ 옛날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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