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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은행을 대상으로 시작된 실험이 있다. 일명 스트레스 테스트. 극단적인 금융 위기 상황을 상정해 은행 및 금융기관 등의 손실액을 추정하고 금융시스템이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를 시뮬레이팅 해보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2017년~2022년)에 나온 책 중에 박태웅 한빛미디어 의장의 눈 떠보니 선진국(2021)과 조국 대표의 가불선진국(2022)이 있다. 둘 다 선진국 초입에 들어선 우리나라의 상황을 다룬 책이었다. ‘가불선진국’이라는 말처럼 문재인 정부에서 한국이 선진국 대우를 받았지만 그것은 가불이었다. 이젠 외상값을 갚을 때가 되었으며, ‘눈 떠보니 선진국’이었지만 2024년 대한민국의 국가경쟁력은 갑자기 돈을 번 졸부의 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윤석열 당선 이후 우리나라의 모든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어쩌겠나. 다 우리가 선택한 일이다. 우리 손으로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뽑지 않았다고 손바닥을 내저어도 소용없다. 독일 국민들도 전부 히틀러를 뽑지는 않았다. 선거는 거대한 연대 책임이다. 뽑은 사람은 물론 뽑지 않도록 만들지 못한 사람에게도 영수증은 날아온다. 모두가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다.

 

윤석열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대한민국 국민 스스로 스트레스 테스트를 해보겠다는 결심을 한 셈이다. 대한민국은 국가적 스트레스 테스트를 하고 있는 중이다. 과연 어디까지 이 나라가 견딜 수 있을지, 정치, 경제, 외교, 문화, 언론, 심지어는 청력에 이르기까지 전부 테스트 중이다. 윤석열이 하는 거의 모든 일이 대한민국이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일이다.

 

스트레스 테스트를 하는 상황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거나 앞으로 나가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견디는 일 그리고 더 망가뜨리지 못하게 막는 데 있다.

 

21대 국회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4년 전 시작을 떠올려보자. 민주당은 지역구에서 163석, 비례대표 17석을 얻으며 총 180석을 차지했다. 의석 전체의 60%를 차지하는 역대급 대승이었다.

 

한 선거에서 18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민심이 민주당을 선택했다는 거다. 그런데, 언론은 이 의미를 보도하지 않았다. 미래통합당과 미래한국당이 왜 외면당했는지 그들이 무엇을 반성하고 성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석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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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기사링크>

 

언제나 그렇듯 기사의 주어는 민주당이다. 공룡여당, 슈퍼여당, 180석의 저주 등등 민주당의 총선 승리를 폄훼하고 깎아내리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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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기사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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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기사링크>

 

당시 야당이었던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역시 이러한 보도에 기름을 부으며 앞장섰고 심지어 정의당도 편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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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기사링크>

 

180석이 앞으로 민주당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21대 국회 내내 말했다. 마치 인디언 기우제 지내듯. 오죽했으면 ‘180명의 악마’라는 말이 보수 커뮤니티에 돌며, 민주당 180명의 국회의원들이 독재를 할 것이라는 말도 서슴없이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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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기사링크>

 

21대 국회 내내 민주당은 180석으로 뭘 했냐는 비판이 따라다녔다. 여의도 바닥에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민주당은 180석으로 아무것도 못 했다”

 

는 말을 입버릇처럼 떠들었다.

 

정말 민주당은 180석으로 아무것도 못 했을까?

 

민주당이 180석으로 한 일

 

조자룡이 헌 칼을 쓰듯 윤석열이 거부권을 날린다. 언론에선 이를 거부권이 아니라 ‘재의요구권’이라고 포장까지 해준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이 할 수 있는 일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극악의 윤석열 스트레스 테스트 기간. 민주당이 180석을 가지고 한 일은 과연 무엇인가.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에서 통과된 법안에 무려 9번이나 거부권을 행사를 했다. 가장 최근에 본 회의를 통과한 채수근 상병 특검법마저 거부한다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법안은 10개가 된다. 하도 날려대니까 요즘은 대통령 거부권이 무슨 반주하고 들어온 부장이 기분 내키는 대로 반려시킨 결재 사안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런 거 절대 아니다. 원래 대통령 거부권은 단 한 번만 사용해도 정부 입장에서 엄청난 부담을 안게 되는 사안이다. 입법부가 통과시킨 법안을 행정부에서 거부하려면 그만큼 빈틈없는 명분과 강력한 대의가 필요하다. 그렇게 정말 어쩔 수 없이 대통령 거부권이 사용되면 그 자체로 이슈의 한중간에 올라 여야 대립이 극한으로 치달아 정국을 극도로 경색하게 만드는, 노골적인 대통령의 정치 행위다.

 

위험한 무기일수록 신중하게 다루는 법. 실제로 지난 대통령들은 거부권을 무척 신중하게 사용했다. 노태우 정부 7번, 노무현 정부 6번, 박근혜 정부 2번, 이명박 정부 1번, 김영삼, 김대중, 문재인 정부에선 거부권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해당 통계는 대통령 임기 5년 전체에 해당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임기 2년 만에 9번의 거부권을 사용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쓸지 모른다. 역대급이다. 압도적 거부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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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끝내 거부한

 

양곡관리법, 간호법, 노란봉투법, 방송3법, 김건희여사특별법, 이태원참사특별법

 

등은 모두 국민의힘에서 동의하지 않아 민주당에서 신속처리안건으로 통과시켰다.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하기 위해서는 재적의원의 5분의 3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 그러니 앞으로 누군가 민주당이 180석으로 뭘 했냐고 비아냥댄다면, 이렇게 말씀드리면 좋겠다. 민주당 180석이 아니었다면, 저런 법안들은 국회 문턱조차 넘지 못했을 거라고. 그거라도 없었다면, 세상에 아무런 제어 장치가 없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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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사IN>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다고 끝이 아니다. 이 법안들은 22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하면 된다. 임기가 다른 국회가 새롭게 개원하기 때문에 ‘일사부재의의 원칙’에 반하지 않아 법률적 제약이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한 법안들은 야당 다수인 22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돼 본 회의를 통과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2번이나 국회를 통과한 법안들을 대통령은 과연 또 거부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역대급 거부권을 남발한 대통령으로 낙인이 찍혔고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도 높지 않아 거부할 명분이 크지 않다. 또한, 22대 국회는 21대 국회보다 더 매운맛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어떻게 더 매울 것인지는 다음 편에).

 

윤석열 대통령이 21대 국회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던 법안들 중 단 한 건만이라도 국무회의를 통과한다면 결과적으로 '21대 국회가 하고자 했으나 대통령이 거부해 좌절된 법안 하나'는 통과되는 것이다. 겨우 단 하나. 물론 더 많은 법안이 통과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야당 의원들은 대통령이 거부권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압박해야 한다.

 

21대 국회가 남긴 것

 

21대 국회는 양적으로도 가장 많은 법안을 발의했다. 올해 5월 기준 접수된 의안은 26,672건으로 20대 국회 21,594건, 19대 국회 15,444건, 18대 국회 11,191건 17대 국회 5,728건, 16대 국회 1,651건으로 가장 많은 의원 입법이 있었다.

 

질적으로 봐도 좋은 법안들이었다. 21대 국회에 통과된 주요 법안들만 나열하자면

 

임대차 3법, 스포츠인 인권을 보장하는 최숙현법, 아파트 경비원 갑질 근절법,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 구하라법, (고위공직자의 보유주식 규정을 강화하는) 공무원 윤리법 개정.

 

뿐만 아니다.

 

대북전단살포금지법, 국정원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는 법, 정인이법, 소상공인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 군에서 발생한 범죄는 법원에서 관할하도록 하는 법, 수술실CCTV 설치법, 구글갑질방지법, 국회 세종시 이전법, 강제게임셧다운제 폐지법, 피선거권을 18세로 연령 하향하는 법, 검수완박 법, 전세사기특별법, 스토킹범죄처벌법, 교권보호 4법, 김건희 특검법.

 

등 생활에 밀접한 법안들이 많다. 물론 실제 적용이 법안의 선한 취지를 얼마나 반영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문제이나 원래 국회가 하는 일이 이런 거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좀 더 선하고 정의로웠으면 하는 어른들의 바람을 법을 구현하는 것. 언론이 패싱하고 외면했지만, 21대 국회가 남긴 이런 법안들은 멀지 않은 미래에 꽃을 피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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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연합>

 

그럼 앞으로는

 

21대 국회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장면은 민주당 출신 국회의장들이 개혁 입법을 막아선 거다. 대표적으로 언론중재법 개정안. 언론에서 허위, 조작 보도를 하면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하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해당 법안은 ‘중앙일보 출신’ 박병석 국회의장이 마지막까지 여야 합의를 종용하는 탓에 결국 국회 본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민주당은 180석으로 뭐했나’라는 말을 보수정당과 언론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한다. 그런 비판이 정당하려면 지난 국회에서 민주당에게 주어진 환경을 고려해야 마땅하다. 전대미문의 스트레스 테스트 기간, 역대급 거부왕의 집권, 힘을 빼는 내부 팀워크 등등 말이다.

 

물론 아쉬운 점, 있다. 많다. 아무튼 기대할 만한 부분은, 유권자들이 21대 국회에서 대한 불만족을 22대 국회의 민주 진영을 더 매운맛으로 만들어놓는 결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22대 국회는 개원도 안 했는데, 22대 국회 당선인들이 벌써부터 윤석열 정부를 향한 각종 특검법, 국정조사들을 줄줄이 예고하고 있다. 벼르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