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23년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했을 때, 영화의 배경이 오키나와라는 것이 화제였다. 특히, 일본에서는 2022년이 오키나와 일본반환 50주년이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cave.jpg

영화 속 비밀동굴은 미군과 관련한 오키나와의 아픈 역사를 부각하는 역할을 했다

출처 - <더 퍼스트 슬램덩크>

 

일본의 유명 블로거 照沼健太(테루누마 켄타)는 오키나와 주둔 미군뿐만 아니라 송태섭이 카나가와현으로 이사한 후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의 터가 과거 미 해군 연습장이었다는 사실을 엮어서 이렇게 평가한다.

 

"일본 농구가 가진 '전쟁과 점령의 상처로서의 측면'과 '평화 우호와 다양성 수용으로서의 측면' 모두를 시사하는 뛰어난 스토리텔링"

 

또한 송태섭과 가족들에게 '바다(海)'가 가지는 의미와 그 의미를 상기시키는 여러 장면을 3.11 동일본 대지진과 연결하기도 했다.

 

오키나와 농구의 특징

 

영화 개봉 몇 주 후, 영화 제작 과정을 담은 책 <The First Slam Dunk re:SOURCE>가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이노우에는 왜 오키나와가 영화의 배경이 되었는지 시원하게 밝혔다.

 

miyagi_bg_ko.jpg

출처 - <슬램덩크 리소스>

 

"다소 독특한 오키나와 농구는 원래부터 주목하고 있었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지만, 작은 체구의 선수가 엄청난 운동량으로 재빠르게 움직인다. 평균 신장이 169cm인 오키나와 헨토나 고등학교가 전국대회에서 3위를 한 적이 있다. 정말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오키나와에 뿌리를 둔 키 작은 가드란 캐릭터 이미지는 초기 단계부터 있었다. 그래서 성씨도 오키나와에 많은 '미야기(宮城, 송태섭의 일본어 이름)'로 정했다."

 

만화 연재 시절부터 송태섭 오키나와 출신 설은 지속해서 있었다. 이노우에가 드디어 그 설이 맞다고 쐐기를 박은 것이다.

 

일본 본토의 농구는 움직임과 멈춤(静と動)이 구분되고 팀 전체가 조직적인 세트플레이를 한다. 이에 비해 오키나와의 농구는 재빠른 속공, 풍부한 운동량, 뛰어난 민첩성을 바탕으로 1:1로 돌파하는 것이 특징이다.

 

dfdfd.JPG

 

작중에 안 선생님의 대학 지도자 시절 특징이 언급된다. 안 선생님의 스타일이 사실은 그 시대 일본 본토의 전형적인 스타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잘 짜여진 조직적인 농구'의 일본어 원문은 ガチガチのシステマチックなバスケット로, 직역하면 '융통성 없이 체계적인 농구' 정도가 된다.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팀워크를 중시하는 분업 농구를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원문에서 安西(안자이) 뒤에 붙은 流(류)는 그런 농구 스타일이 안 선생님뿐만이 아니며 하나의 흐름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농구는 키가 커야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팽배하던 시기. 이노우에는 오키나와 농구가 상당히 흥미로웠을 것이다.

 

04f9d26750c149de907c558df1c0f39a.jpg

우리나라 농구의 전성기도 이 팀의 분업농구가 이끌었다

출처 - (링크)

 

오키나와 농구의 역사

 

오키나와의 농구는 왜 이런 특징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 시작은 역시 미군정기. 오키나와는 태평양 전쟁이 끝난 1945년부터 일본에 반환되는 1972년까지 27년간 미군 통치하에 있었다. 미군 주류의 영향으로 오키나와에서 농구의 저변이 확대되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내가 조사한 요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미군과 군무원의 거주지는 캠프 내에만 있지 않았다

 

archive21_1-1024x768.jpg

1960년대, 오우(奥武) 공민관 앞

출처 - (링크)

 

미군 및 군무원과 그 가족들은 오키나와의 주택가에서 현지 주민들과 어울려 살았다. 일본의 주택가에서 이들이 가장 손쉽게 즐길 수 있는 거리 스포츠가 농구였다. 슈팅하고 있으면, 금세 동네 아이들이 주위에 모여들어 2:2가 되고 3:3이 되었다. 그렇게 오키나와의 아이들은 농구에 친숙해졌다.

 

2. 농구는 장소의 제약이 없고, 별다른 도구가 필요하지 않다

 

FKoiGhoVEAA60TB.jpg

출처 - (링크)

 

60년대에 유년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마을 입구 키 큰 나무에 양동이(일명 빠께쓰)만 걸어놓으면 바로 농구 골대가 되었다. 공 하나만 들고 와서 온 동네 아이들이 어울려 놀았다. 나무나 전봇대에 폐 철재 등 무엇이든 링이 될 만한 것을 걸어서, 길거리 농구를 즐겼다.

 

또한 농구는 야구나 축구처럼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 집 앞마당, 산어귀의 공터, 마을회관 앞 등 조금이라도 공간이 있으면 그곳은 농구 코트로 변신했다.

 

3. NBA 중계를 볼 수 있었다

 

오키나와 시 일부 지역에서는 기지를 향하는 미국 TV 전파가 잡혔다. 덕분에, 이 지역 주민들은 본토보다 빠르고 생생하게 NBA 중계를 볼 수 있었다. 당시 이 동네에 살던 주민은 이렇게 증언했다.

 

"모두들 어제 본 NBA의 플레이를 흉내 내곤 했다."

 

한국에서는 90년대 SBS 개국 이후에나 볼법한 장면이, 오키나와의 일부 지역에서는 60~70년대부터 등장한 것이다.

 

4. 지속적 교류와 친선경기를 통해 오키나와 농구의 독특한 스타일이 형성됐다

 

42d6df84e92a95.jpg

1957년에 치러진 류베이 친선 경기 모습

출처 - (링크)

 

오키나와 학생과 미군 또는 그 자녀들 간의 ‘琉米親善(류베이 친선)’ 교류가 있었다. ‘류베이(琉米)’란, 오키나와의 옛 이름인 류큐(琉球)와 미군(米軍)의 머리글자를 각각 딴 말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에서는 미국에 쌀미자(米)를 쓴다. 일명 쌀국.

 

쌀국과의 친선 교류는, 1954년 코자고교가 카데나 공군기지 내에 초청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당시 초청되었던 인사들에 따르면, 당시엔 드물었던 체육관 시설, 화려한 치어리더, 학부모들의 열렬한 응원 등 미국 스포츠 문화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190cm를 넘는 덩치에, 뛰어난 볼 핸들링을 구사하는 미군 측 팀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짜낼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재빠른 속공을 특징으로 하는 오키나와 스타일 농구가 발전하게 된다.

 

특히, 오키나와 본섬 중부 코자(コザ) 지역을 중심으로 농구의 토양이 갖춰져 갔다.

 

staticmap.png

A : 코자 교차로  Koza Crossroad

B : 카데나 공군기지 Kadena Air Base

 

코자(コザ)는 카데나 공군기지 인근의, 현재의 오키나와 시 일부 지역을 일컫는 별칭이다. 이 지역에는 많은 미 군무원이 거주했고, 이들을 통해 기지 외부로 농구공이 보급되었다. 미군 기지로 향하는 미국 방송(6채널)의 전파가 유일하게 잡히던 지역도 이곳이었다. 농구를 통한 친선 교류도 이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이를 선무공작(宣撫工作)이라 보는 시각도 있지만, 어쨌든 개성 있는 오키나와 농구의 뿌리에 미군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헨토나 선풍

 

SE-25cf6a9c-0369-4174-a16d-f2a7acee4053.jpg

“헨토나, 4강에 일본 농구계에 새로운 바람 발군의 슛컷(Shoot-cut) 꼬마에 관계자 주목"

당시 오키나와 타임즈 기사 스크랩

출처 - <安里幸男バスケットボールミュージアム>

 

이런 오키나와의 농구가 일본 전국으로 알려진 계기가 있다. 1978년, 평균 신장 169cm의 헨토나고교가 1978년 야마가타 인터하이(전국고교종합체육대회)에서 전국 3위(4강)를 한 것이다.

 

헨토나 선풍(辺士名旋風)이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오키나와 농구는 단번에 전국적 주목을 받게 된다. 평균 신장 169cm는 당시 인터하이 출장한 모든 농구팀(여자 농구팀도 포함)을 신장으로 줄 세웠을 때, 아래에서 세 번째였기 때문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d356cc2fda0232bd0f0.jpg

이때 준결승 상대는 슬램덩크 속 대진표에도 나오는 그 유명한 후쿠오카현의 오오호리고교였다

출처 - (링크)

 

심지어 이때, 팀(헨토나 고교)의 에이스였던 두 선수는 모든 경기에서 30점 이상 득점하여, 시합 당 개인 득점 순위 20위 명단에 이름을 여러 번 올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afsdf.JPG

당시 헨토나고교 농구부의 주장이며 에이스였던 킨죠 바니(金城バーニー) 선수

류큐 골든킹스의 간판스타 키시모토 류이치 선수의 고교시절 은사이기도 하다

 

이노우에 역시, 헨토나 선풍에서 깊은 인상을 받아 오키나와 출신의 포인트가드인 송태섭(미야기 료타)이라는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체구는 작지만, 재빠른 속공과 가공할 순발력, 절묘한 패스 센스와 화려한 개인기 등 오키나와 농구의 강점을 집대성한 역량을 보여준다.

 

v1076840031.2.jpg

초등학교 6학년 송태섭

 

1967년생인 이노우에는 헨토나 선풍(1978년)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본격적으로 농구를 한 것은 1982년 고등학생이 된 이후이므로, 헨토나 선풍을 실시간으로 보지는 못했을 터. 그러나 워낙 화제가 된 사건이었던 만큼 지속해서 회자했기 때문에 이노우에도 여러 풍문으로 들었을 것이다.

 

중학생도 전국대회가 있다. 작중 정대만이 카나가와현을 MVP로 우승하고 나갔던 바로 그 대회다. 여기서도 오키나와의 코자 중학교가 1980년에 우승하는 등 상당히 선전하고 있었다.

 

전국 규모 대회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지역별 대회가 있다. 이노우에의 출신지인 카고시마현은 오키나와와 함께 큐슈 지역으로 묶일 때가 많다. 고등학생이 된 이노우에는 크고 작은 경기를 통해 오키나와의 농구를 봤거나, 또는 상대 팀으로 출전하여 직접 경험했을 가능성도 있다.

 

010.jpg

쇼호쿠의 포인트 가드 송태섭

 

이런 경험을 통해 이노우에는 어린 시절부터 오키나와의 농구에 좋은 인상을 받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렇게 캐릭터 창조까지 이르게 된 것이 틀림없다. 오키나와 농구 전문지 Outnumber의 카나야 코헤이(金谷康平) 편집장은 "송태섭은 오키나와 농구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평가한다.

 

헨토나 선풍을 이끈 당시 감독이며 능남고교 유명호 감독의 모델이기도 한 아사토 유키오(安里幸男) 전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헨토나 선풍이 없었다면 송태섭도 없었다." 

 

이 말을 들은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을 느꼈다. 아사토 감독의 업적과 자부심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송태섭이라는 캐릭터의 뿌리와 탄생 배경이 짧지만 강렬한 이 한마디에 다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21세기 송태섭

 

이런 뿌리를 가지고 탄생한 송태섭이지만, 이노우에는 송태섭을 통해 전통적인 포인트가드(PG)의 틀을 넘어서는 비전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오키나와의 농구가 뜨겁고 열렬한 이유: 키시모토 류이치 선수와 이노우에의 대담

출처 - (링크)

 

키시모토 류이치 선수와의 대담 영상에서 이노우에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어쩌면 키시모토 선수가 그런 이노우에의 비전에 맞는 선수일지도 모르겠다).

 

전통적으로 PG는 본인이 득점하기보다 주위를 살리는(周りをいかす) 역할에 갇힌 경우가 많았다. 키시모토 선수는 비교적 단신(176cm)이고 PG지만 득점에도 관심이 많았다. PG의 역할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득점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쯤 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IMG_4172 (1) (1).jpg

sfdsfsdfs.JPG

윤대협을 1:1로 따돌리고 레이업슛!

 

키시모토 선수도 이 장면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누가 봐도 통쾌한 명장면.

 

사실 송태섭뿐만 아니라 <슬램덩크>에 나오는 모든 PG가 그렇다. 이정환, 김수겸, 이명헌 등 PG가 팀의 에이스로서 볼 핸들링뿐만 아니라 득점과 수비에서도 발군이다. 학창 시절 가드였다는 이노우에의 개인적 야심(!?)도 어느 정도 투영된 것 아닌가 싶다.

 

7527.jpg

키시모토 류이치(岸本隆一) 선수

 

키시모토 류이치(岸本隆一) 선수는 2023년, 일본 프로농구 B-league를 제패한 류큐 골든킹스의 간판스타. 포지션은 PG/SG라고 병행 표기한다.

 

PG이다 보니 팀의 공격이 대부분 이 선수로부터 시작된다. 본인이 직접 파고들거나 슛하는 등 공격에도 매우 적극적이다. 키시모토 선수가 슛하면, 1만 석에 육박하는 경기장 전체가 들끓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오키나와 토박이이기도 하고, "송태섭이 프로농구선수로 성장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선수다.

 

30년 전에 21세기형 PG를 제안하다니, 이노우에의 선구안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다시 돌아와서… 이런 맥락에서 키시모토 선수는 오키나와 스타일 농구가 일본 농구 전체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이에 이노우에도 동의한다. 체구가 작은 아시아 선수에겐 오키나와 스타일이 일찍부터 이정표를 제시해 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20230828_kawamura.jpg

카와무라 유키(河村勇輝) 선수

 

현재 일본 농구의 최고 스타인 카와무라 유키(河村勇輝) 선수도, 어쩌면 그런 맥락에서 오키나와 스타일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계속>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