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번의 이사와 반 보 전진
동분은 현재 대전의 21평 아파트에서 남편 송일영과 둘이 산다. 2021년 1억 6,800만 원에 매입했다. 매입 당시, 30년 만기로 1억 원을 대출받았다. 이자 포함 매달 43만 원씩 갚는다. 큰아들 주성과 작은아들 주홍이 조금씩 보탠다.
해당 아파트는 완공한 지 20년도 넘은 옛날 아파트다. 동분이 매입하고 3년 지났지만, 집값이 크게 오르거나 내리지 않는다. 지금도 1억 6,000만 원 안팎으로 거래된다. 하여 집값이 폭등해 대출금 전부 갚고 남은 차액으로 이사 가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동분은 지금처럼 대출금 갚을 수 있을 때까지 갚아가며, 이 집에서 마지막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다 여력이 안 되면 두 아들에게 기대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서 한편으론 마음이 무겁다(동분의 우려와 달리, 두 아들은 이미 뜻을 모은 상태다. 동분과 송일영의 노후를 책임지기로).
대한민국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내 집 마련’을 꿈꾼다. 동분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분과 송일영은 1982년, 보증금 없는 월세 2만 원짜리 단칸방에서 시작했다. 양가 부모의 지원은 없었다. 그야말로 밑바닥에서 시작한 신혼생활이었다.
그때부터 동분 가족은 무려 14번 이사 다녔다. 내 집 마련을 위한 고군분투였다. 한 번 이사할 때마다 딱 ‘반 보’씩 전진했다. 그렇게 40년이 흘러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부터 펼쳐낼 동분의 ‘내 집 마련 분투기’는 그 자체로 베이비부머가 겪은 보편적인 삶의 주기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1955~1963년 사이, 줄줄이 딸린 자식 가운데 하나로 태어난다. 보통 5남매, 많게는 9~10남매도 있다. 가난한 집안과 짧은 학업, 일찌감치 산업전선에 뛰어든다. 대한민국 산업화와 함께 20~30대를 보낸다. 40살 안팎, 그러니까 밀레니엄 전후로 처음 내 집을 마련한다. 그러다 1~2명밖에 안 되는 자식이 결혼할 때마다 집 평수 줄여 결혼 자금을 마련해준다. 그렇게 좁은 집에서 노년을 보내는 삶의 주기 말이다.
동분의 삶을 조명하는데 있어, 이 주제는 마지막까지 망설였다. 대체로 그러했듯, 동분 삶에도 두 번의 집값 상승이 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부동산 갭 투자는 아니었다. 차차 말하겠지만 동분과 송일영 두 사람 공히 그럴만한 기민함도, 재산도 없는 사람들이다. 살다 보니 집값이 올랐을 뿐이다. 그럼에도 두 번의 집값 상승은, 분명 동분 삶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걸 부정할 순 없다. 그래서 망설였다. 자칫 동분의 삶이 왜곡될까 봐.
그래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집값 상승과 하락 또한, 적어도 대한민국 현대사에선 보편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과정마다 마음 졸이고 대출금 갚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동분의 노력까지도.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었다. 서울 평균 집값이 13억 원에 육박했다는 기사를 봤다. 그런 마당에, 대출금 1억 원 깔린 지방의 1억 6,800만 원짜리 21평 아파트에 사는 동분 인생이 뭐 그리 특별할까 싶은 생각. 하여 모든 과정을, 심지어는 구체적인 금액까지도 가감 없이 기록하기로 했다. 거두절미하고, 동분의 ‘내 집 마련 분투기’ 시작한다.
분양권 프리미엄도 몰랐던 순진한 부부
시점은 1996년이다. 개인택시 받아 5년쯤 몰던 송일영이 5중 추돌 대형 교통사고로 로열프린스를 폐차했다(기사링크 : 61년생 정동분 13 : 개인택시 면허를 3,950에 팔고 이불 장사꾼이 되다). 석 달 만에 병원에서 퇴원한 송일영은 개인택시운송사업 면허(이른바 개인택시 번호판)를 3,950만 원에 팔아넘겼다.
대한운수면허협회 홈페이지 및 관련 기사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개인택시 면허의 평균 매매가는 9,150만 원이다. 다만, 지역마다 격차가 좀 크다. 시세가 가장 높은 곳은 세종특별시로 평균 2억 원이며, 시세가 가장 낮은 곳은 부산으로 평균 8,100만 원에 매매한다.
“얘기했던 것처럼 니네 큰아빠가 먼저 이불세일매장을 하고 있었잖어. 근데 니네 큰아빠 한다는 말이 3,950만 원을 전부 투자해서 커다란 창고 같은 걸 하나 얻어가지고 이불을 잔뜩 쌓아놓고 팔라는 겨. 창고 한쪽에 방 하나 만들어서 숙식 해결하고. 아휴, 그게 말이나 되냐? 내가 절대 안 된다고 펄쩍 뛰었지. 그때 니네 형이 14살, 너도 10살이었는데, 무슨 방 하나에서 다 같이 잠을 자고, 창고에서 밥은 또 어떻게 해서 먹고, 씻는 건 어뜩하냐고. 주방 살림 생각은 하나도 안 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겨.”
똑똑하고 잘난 형 송갑영 의견에 송일영은 흔들렸다. 어릴 때부터 형 말이라면 ‘꿈뻑’ 죽는 송일영이었다. 동분은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다행히도 며칠 고민하던 송일영이 동분 손을 들어줬다. 결국, 3,950만 원 가운데 2,500만 원은 동분이 따로 보관했다. 나머지 돈으로 1톤 탑차와 이불 사서 신탄진에 세일매장을 차렸다. 그때 2,500만 원 지키지 않았으면 여태 월세 살이 했을 거라며, 동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니들은 자꾸 크는데 11평 월평동 아파트에 살려니까 좁잖어. 말이 좋아 아파트지, 요즘은 어지간한 원룸도 10평은 넘는데 그런 집에서 네 식구가 살았으니. 그래가지고 엄마 생각에 일부는 이불가게 차리는 데 쓰고, 나머지 돈은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는 데 쓸려고 마음먹었던 겨. 그때 그 돈 이불 사는데 다 쓰고 창고에서 지냈어 봐라. 남는 거 아무것도 없지. 그나마 그 2,500만 원을 종잣돈 삼아서 우리가 여기까지 온 거여. 그 돈이라도 엄마가 안 지켰으면 완전 개털이었을 겨. 호호호.”
1997년, 정림동 16평 아파트 살던 시절
이불세일매장에서 37살의 동분
그렇게 신탄진을 시작으로 대전 이곳저곳 다니며 이불세일매장을 차렸다. 보통 한 달, 길면 두어 달에 한 번 가게를 옮겼다. 그러다 새로 입주 시작한 아파트(이하 정림동 아파트) 상가에 가게가 하나 있다고 해 둘러보러 갔다. 동분은 그때 상상이나 했을까. 그 정림동 아파트에서 이후 23년이나 살게 될 거라고 말이다.
“가게 자리가 괜찮아서 계약하고 장사를 시작했지. 그때가 신탄진에서 두 번인가 세 번째로 가게 옮겼을 때거든. 그러니까 2,500만 원이 계속 엄마 통장에 있었던 겨. 호호호. 목돈을 언제까지 가지고 있을 순 없으니까 엄마도 꾸준하게 이사할 집을 알아보던 참이었지. 근데 또 목돈이라는 게 그렇잖어. 갖고 있다 보면 조금씩 쓰게 되고, 그렇게 찔떡 찔떡 쓰다 보면 푼돈 되고. 니네 큰아빠는 틈만 나면 와가지고 지금이라도 큰 창고 얻어서 장사하라고 아빠 옆구리 쿡쿡 찌르지, 목돈 갖고 있기가 영 불안하더라고. 그러던 차에 그 상가에 있는 부동산 아줌마랑 얘기를 하게 된 거지.”
집을 알아보고 있다는 동분 말에, 부동산 중개업자가 분양권 ‘프리미엄’ 얘길 꺼냈다. 당시 정림동 아파트는 5년 임대 후 분양하는 민간임대아파트였다. 중개업자 말이, ‘프리미엄’을 주고 분양권 사서 5년 살다가 분양받으라는 거였다. 36살이었던 동분은 그때 처음 ‘프리미엄’이라는 걸 알았다.
“엄마나 아빠나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신탄진 촌년, 촌놈이었잖어. 프리미엄이 뭔지, 5년 임대 후 분양이 뭔지 알았겄냐? 월평동 주공아파트 청약됐던 것도 대한주택공사 다녔던 니네 아빠 집안사람 도움으로 된 거지, 우리가 뭘 알아서 됐던 게 아니잖어. 호호호. 부동산 아줌마가 그러더라. 엄마랑 아빠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으니까, 어떻게 이런 것도 모르냐고, 자기가 부동산 하면서 이렇게 순진한 부부는 처음 봤다는 겨. 호호호.”
1995년, 월평동 주공아파트 살던 시절
제주도 부부동반 여행
우여곡절 끝에 동분은 16평 정림동 아파트 분양권을 프리미엄 300만 원에 샀다. 보증금은 1,800만 원이었다. 11평에서 16평으로, 겨우 5평 넓은 집으로 이사한 것뿐인데도 동분은 날아갈 듯 기뻤다.
“월평동은 주공아파트였잖어. 요즘이야 안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주공아파트’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거든. 사실이기도 했고. 그런 주공아파트를 탈출했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남다른 기분이 있었지. 그리고 월평동은 솔직한 말로다가 1.5룸 아녀. 코딱지만 한 방 하나에 거실 겸 안방이 하나 더 있었던 거니까. 벌써 느낌이 다르더라고. 거기서 한 2년 살았지.”
텅 빈 집에 혼자 벌러덩 누워
그러던 어느 날, 오가며 인사하던 옆집 새댁(당시 동분은 1407호, 새댁은 1408호였다.)이 이사 가게 되었다고 얘기하더라는 것. 참고로 해당 아파트는 4세대가 1층에 있는데, 양 끝 집(1405호, 1408호)은 21평, 가운데 두 집(1406호, 1407호)은 16평이었다. 아쉽게 되었다며, 작별 인사 나누고 집에 온 동분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옆집으로 이사 가자.
“부동산 아줌마랑 처음 얘기할 때 원래는 21평으로 이사하려고 했거든. 당시에 21평은 프리미엄 500만 원에 보증금 2,500만 원이었어. 엄마 가진 돈이 2,500만 원이고, 월평동 아파트 보증금이 350만 원이었으니까, 이렇게 저렇게 좀 무리하면 될 것도 같더라고. 근데 하필 그때 21평이 없어가지고 아쉬운 대로 16평으로 이사했던 거거든. 3년만 더 살면 이제 1순위로 싸게 집을 사는 건데, 이왕이면 21평이 좋잖어. 니네 아빠한테 얘길 했지. 그랬더니 알아서 하라고 하더라고. 엄마도 이쪽으론 어둡지만, 니네 아빠는 완전 꽝이거든. 돈 관리를 아예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여. 그래가지고 새댁한테 프리미엄 300만 원을 더 얹혀주고 옆집으로 이사를 했다는 거 아니냐. 호호호. 그래도 그때 마침 모아둔 돈이 쬐금 있었거든. 그러니까 모든 게 딱딱 맞아떨어진 겨.”
새댁이 먼저 이사 나가고, 보름 있다가 동분 가족이 짐을 옮기기로 했다. 그 보름간, 동분은 퇴근하면 곧바로 옆집부터 갔다. 가구 하나 없는 21평이 얼마나 넓은지, 동분 눈에 운동장 같았다. 그 집을 보름 내내 윤이 나도록 닦고 또 닦았다. 앞으로 3년만 있으면 ‘내 집’이라는 생각에, 동분은 힘든 줄도 몰랐다.
“거기가 21평 치고는 진짜 넓게 빠진 집이거든. 5평 차이인데도 16평이랑은 차원이 다르더라고. 제대로 된 방이 두 개나 딱 있고, 거실이랑 주방도 꽤 넓고. 너 기억 안 나냐? 그 집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식탁이라는 걸 샀다는 거 아니냐. 호호호. 그 정도로 21평 치고는 주방이 굉장히 넓었어. 주부 입장에서 살림하는 맛이 나는 집이었지. 아무튼 간에 퇴근만 하면 걸레 하나 들고 옆집부터 가는 겨. 이미 몇 번이나 닦아서 윤이 반들반들 나는데도 또 닦아. 창문도 다시 닦고, 화장실 바닥도 또 닦고. 호호호. 그렇게 매일매일 1시간씩 쓸고 닦았지. 다 닦고, 텅 빈 집에 혼자 벌러덩 눕는 겨. 그렇게 누워서 천장 올려다보고 있다가, 몇 번이나 울었다는 거 아니냐. 모르겄어~! 그냥 막, 말도 못 할 만큼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눈물이 나더라고.”
옆집으로 이사하는 거니까, 이삿짐센터를 부를 필요는 없었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큰아들 주성과 주성 친구 몇몇이 와서 짐 나르는 걸 도와줬다. 동분은 미안하고 또 고마워 짜장면에 탕수육, 깐풍기까지 시켜 주성의 친구들을 먹였다. 그러고도 용돈을 3만 원씩 줬다. 앞으로 자주 놀러 오라는 말과 함께. 1998년, 동분 나이 38살이었다.
지난해 10월, 대전MBC 방영한 다큐멘터리 <인생내컷>
동분의 관저동 21평 아파트에서 일부를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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