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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모으기 운동

 

겨우내 어머니는 보험 교육을 받으시며 신중하게 고민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가정부나 아파트 현장 일용직 등은 해봤겠지만 정식으로 회사에 출근하는 직업은 처음이기도 하였기에 무턱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주저하셨던 것 같다.

 

해가 바뀌고 98년이 되며 금 모으기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IMF가 터지기 전이나 터진 후에나 별달라진 것 없는, 풀이 대부분인 반찬으로 식구들은 TV를 보며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뉴스에선 국가적 위기인 금융위기 사태를 헤쳐 나가기 위해 국민들이 십시일반 집안 구석에 잠들고 있던 금붙이들을 가지고 나와 파는 금 모으기 운동을 보도하고 있었다. 소주를 드시며 식사하시던 아버지는 TV를 물끄러미 보시며 신기하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다들 먹고살기 힘들다드만 집에 금붙이는 하나씩 다 있었는가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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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반지는 물론이며 나와 동생의 돌 반지까지 일찌감치 팔아버린 아버지로서는 오랜 시간 동안 묵혀둔 금을 나라를 위해서 파는 국민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으셨던 것 같다. 한편으로 지금 내 생각으로는 애국심으로 월남전을 참전했다가 정신적으로 너덜너덜해져 돌아온 파병 군인들에 대한 처우 때문에 불만이 있으셨고, 국가는 필요할 때만 국민을 찾는다는 생각으로 금 모으기 운동을 보며 비꼬는 말씀을 하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중이 있건 말건 어머니로서는 집에 있는 금붙이를 다 팔아버리고 체내 알코올을 충전하신 아버지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저 사람들은 다 근면 성실하게 살아서 내놓을 금이라도 있지 우리는 내놓을 거라고는 빚밖에 없다."

 

어머니의 뼈 때리는 말에 순간적으로 아버지는 눈에 불을 켰다가 쯧 하고 혀를 차며 말씀하셨다.

 

"임진왜란 때도 그렇고 일제시대 때도 생각해 봐라. 맨날 돈 있고 빽 있는 놈들만 대대손손 잘 묵고 잘 살다가 삐끗해서 똥 싸면 백성들이 치운다고 쎄가 빠지게 고생하지. 저거 금 모으기도 결국은 나라가 똥 싼 거 국민이 치우는 거 아이가? 저거 다~ 소용없다 함 두고 봐라."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셨던 건지 아니면 그냥 심술을 부리는 것으로 생각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된장에 청양고추를 찍어 우적우적 씹어 드셨다. 술이 오른 아버지가 얼굴이 벌게져 금 모으기 운동과 나라와 대기업에 대해 이러저러한 말씀을 계속하고 계셨지만 이미 어머니는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금붙이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려운 형편에도 금붙이를 팔면서도 여유로운 표정으로 인터뷰를 하는 사람들…. 온 가족이 나와서 나라를 위해 금을 팔러 왔다고 화목하게 말하고 있는 저 가족처럼 우리 가족도 중산층 정도라도 되어 화목하게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셨던 것 같다. 그러한 어머니의 바람은 직장을 다녀야겠다는 결정으로 이어졌다.

 

나아가는 사람

 

시작이란 단어는 기대, 생동감과 설렘 등 대부분 긍정적인 느낌을 준다.

 

결혼 전이나, 후에도 이력서를 채워 넣을만한 변변찮은 경력이 없었고 쭉 가정주부로서 살아온 어머니에게 매일 아침 출퇴근하는 직장을 가진다는 것은 설레기도 하셨겠지만, 한편으론 두려움이 생길만한 큰 도전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가족들의 생활비 보다 자신의 유흥비가 우선순위인 아버지와 실랑이하는 것이 지치셨을 것이다. 90년대에 100만 원 안팎의 금액이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이걸로 4인 가족의 식비, 교통비, 공과금, 자녀들 교육비, 거기에 저금이라는 것을 모르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아버지 때문에 그 없는 돈을 쪼개 조금씩 적금까지 넣으셨던 어머니는

 

'그래! 더러운 돈 내가 벌어보겠다.'

 

하고 자기 삶에 변화를 주신 것이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기본급 20만 원에 보험설계사 일을 시작하셨다.

 

사실 영업이란 인싸중의 인싸들이 해야 적성에도 맞거니와 효율이 좋은 직업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평생을 한 집단의 구성원으로 조직 생활한 적도 없었고, 아버지의 정신적 육체적 괴롭힘 아래 살다 보니 원래부터 없던 눈치나 공감 능력이 더 소실된 상태였고 우울한 집안 사정에 내심 많이 힘드셨다. 그런데도 보험 일을 시작하신 이유는 골반이 뒤틀려 있어 힘을 쓰는 노동을 할 수도 없었고 평발이라 오래 서 있을 수도 없는 신체조건을 가진 어머니가 그나마 시간 쓰는 것이 자유롭고 육체적으로도 부담이 적어 자신의 조건 대비 최적의 직업이라 생각하신 데 있다. 어머니가 비가 오는 주말에도 일하러 나가실 때 아버지는 비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돈버는기 어디 쉬운 줄 아나? 어디 함 해바라"

 

콧방귀를 뀌시며 비웃던 아버지의 기대? 와는 다르게 어머니는 비가 오는 날에 홀딱 젖어 가면서도, 더운 날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겨울에 얼굴이 새빨갛게 얼어가면서도 차도 없이 그 작은 평발로 매일매일 온종일 걸어 다니며 영업을 하셨고 거의 6년을 보험회사에서 버티셨다.

 

보통 영업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가족이나 지인들의 지원사격 아래 자신만의 노하우를 쌓아가는 시간을 버는 것이 정석이지만 가족의 비꼼과 가정주부의 역할을 충실히 하며 형성된 좁디좁은 인간관계 때문에 어머니의 영업활동은 그야말로 고생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시작해버린 일을 멈출 생각이 추호도 없으셨다. 처음에는 실적으로 무시당하고 오래 공들였던 고객과 맺을 계약을 동료가 몰래 빼앗아 가는 굴욕을 당하는 등 힘든 회사 생활을 하셨지만, 고생과 치욕으로 쌓인 경험이 실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하던 때부터는 그럭저럭 괜찮은 액수를 매달 인센티브로 받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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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설계사가 추레하게 입으면 고객들이 볼 때는 실력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으니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몇 가지 사는 것 외에는 어머니는 자신의 월급을 오롯이 가정에 다 쓰셨고, 식사도 도시락을 싸 다니시며 해결하셨다. 아버지 혼자 외벌이할 때보다 우리 집의 형편은 그나마 나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나를 불러 은행 봉투를 내미셨다.

 

"이기 머고?"

 

"용돈이다 아끼써라"

 

봉투에는 만 원짜리로 5장. 오만 원이 들어있었다. 나는 그렇게 고등학교 들어가서야 용돈 다운 용돈을 받아보게 되었다. 큰 액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로서는 큰돈이었다. 돈을 안 쓰는 버릇 하던 사람은 돈이 생겨도 쓸 줄을 모른다. 자식들에게 돈을 많이 주면 버릇이 나빠진다는 평소 부모님의 말씀과는 다르게 (넉넉할 만큼 돈을 준 적도 없으셨으면서!) 용돈을 받아도 나의 씀씀이는 제한속도를 걸어둔 듯이 헤퍼지지 않았다. 그런 점의 장점이라면 근검절약이 몸에 배긴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단점이라면 돈이 있어도, 써야 할 때도 강박적으로 돈 쓰기를 주저하게 되는 심리를 가진 것을 들 수가 있다.

 

한편 어머니가 얼마 안 가서 때려치우거라 생각하고 계셨던 아버지는 의외로 어머니가 선전하시자 아예 그때부터는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주는 것을 멈추셨다.

 

"니 돈 많이 번다 아이가? 인자 니가 다~ 알아서 해라"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설명도 의논도 없이 자신이 버는 돈은 자신만을 위해서 쓰시기 시작하셨다. 가족에 대한 배려나 사랑이 없는 거의 동거인이라고 할만한 행동이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생활비를 타서 쓸데보다 집안 형편이 나아졌고 똑같이 살림에 드는 고정 비용이 나가고 적금을 몇 개 더 쪼개서 넣어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기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도발에도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널어둔 빨래처럼 어딘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고 위태로웠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하셨으며 바위같이 굳세고 단단했다.

 

정체된 사람들

 

TV를 보며 혼자서 식사하시던 아버지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흘끔 보시더니 딱 한 마디만 하셨다.

 

"밥무라"

 

"예…."

 

어머니가 일을 시작하시고 생긴 사소한 변화는 하나는 원래도 손이 크신 어머니였지만 많은 시간을 밖에서 보내야 하는 영업사원의 특성상 가족들이 식사를 제대로 하게끔 어떤 음식을 하시건 더 많이 해두시고 가시는 것이었다. 엄청나게 큰 솥에 가득 끓여진 카레라든지, 마찬가지로 그 솥에 가득 끓여진 곰탕이라든지…. 아는 사람은 알 테지만 이런 큰솥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진 음식들은 음식 고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질리게 되고 고통을 주게 된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동생은 어머니가 급하게 대충, 그리고 대량으로 만들어 놓고 간 음식들을 해치워야 했다. 어머니가 없는 식사 자리에 아버지와 같이 앉아 어떤 트집이 잡힐지 몰라 불안한 마음으로 밥을 먹는 것은 언제나 고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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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화 친구>

 

아버지와 나는 원래도 대화가 없었지만, 아버지가 퇴근하시고 내가 방과 후 집으로 돌아와 마주칠 때면 "밥무라" 정도밖에 대화하지 않았다. 시선은 밥그릇과 지독한 적막을 그나마 지워주기 위해 켜져 있는 TV를 번갈아 응시할 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었고, 서로에 대해 그 어떤 것도 궁금하지도 않았고 그런 관심을 가지는 노력조차 힘들었다. 가족, 그리고 부자지간이라기에는 너무나 삭막하고 어색한 관계였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아버지가 식사하시고 난 뒤에야 내가 밥을 먹는 것이 우리 가족의 식사 패턴이 되었다.

 

그러한 변화 외에 이 시기는 아버지와 나에게는 큰 변화 없고 의미도 없이 정체되어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서로 정말 안 맞는다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나와 아버지의 인생 흐름은 이상하리만치 비슷하게 흘러갔던 것 같다. 어쩌면 아버지의 삶의 방식을 나도 모르게 은연중 따라 했던 건지도 모른다.

 

괴롭히고 싶을 때 괴롭힐 수 있고 항상 집에 오면 하나하나 다 수발을 들던 어머니가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 계속되자 아버지는 직접적으로 우리를 괴롭힐 수는 없으니 점점 더 어머니보다 늦게 집에 들어오셨다. 예전보다 더 흥건하게 취하고 예전보다 더 고함을 치는 일이 잦아졌다. 아버지에게 드라마틱 하고 자기 파괴적이지 않은 도전은 월남으로 향하는 배의 계단을 오를 때가 마지막이었고, 이제 아버지에게 남은 희망은 독한 술의 기운으로 지난 기억을 잊고 험한 꿈을 꾸는 일도 없이 깊게 곯아떨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버지는 변화를 꿈꿀 의지도 없고, 의욕도 없는 그저 생명의 끈을 비틀대며 잡은 정도의 어지럽고 지루한 삶을 매일 어쩔 수 없이 반복하고 계셨다. 그리고 나 또한 별반 다를 것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겨울 담임선생님의 진로 상담에서 선생님은 나에게 이 성적으로는 인문계는 갈 수가 없다고 선고하듯이 말씀하셨다. 애초에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이 숨 막히는 집구석 성인이 되자마자 나가고 만다!'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나로서는 공고에 입학해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을 따고 취업을 나가는 것이 나의 인생에 더 영양가 있는 앞길을 제시해 줄 거로 생각했다. 기분이 나쁘지도, 좌절하지도 않고 오히려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그 이야기를 하자 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진 표정으로 침울해하시더니 다음날 당장 선생님을 뵈러 학교로 오셨다. 성적이 안 되는 걸 어찌할 것인가? 어머니가 학교로 오셔도 답이 없는 것은 답이 없는 것이다. 그날 어머니는 상담을 마치고 가파른 학교의 비탈길을 울면서 내려오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가장 큰 열등감은 가정환경 때문에 국민학교에서 그친 학력 사항이었는데, 자기 아들만은 그런 엄마의 한을 풀어주었음 하셨겠지만, 나 또한 가정환경 때문에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방황했던 것을 어머니는 애써 모른 척을 하고 사셨다. 그저 내 새끼는 똑똑한데 노력을 안 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실 뿐….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지망 학교를 쓰는 날. 등교하기 전에 나는 어머니에게 어느 학교로 지원할지 여쭈어보았다.

 

"엄마 오늘 고등학교 지망 학교 쓰는데 1지망, 2지만 두 군데 쓸 거 생각해서 오라더라 어디로 쓸꼬?"

 

어머니는 나의 물음의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셨다.

 

"1지망은 지산고 쓰고 2지망은 남산고등학교 써라"

 

선생님의 상담을 잊으신 건지, 아니면 무시를 하셨던 건지 어머니는 두 학교 다 인문계 고등학교의 이름을 말씀하셨다.

 

"어? 두 개 다 인문계인데? 선생님이 나는 공고밖에 못 간다고 말씀하셨는데?"

 

"시끄럽다 공고 가면 다~ 담배 피우고 술 묵고 머리 바보 된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 두 개 학교 써라"

 

요즘 부모들은 자녀들을 양육할 때 많은 대화를 통해 교감하고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녀를 키우는 방식은 유행이 있는 것처럼 시대 흐름에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내가 어릴 때는 고압적이고 명령과 복종의 양육방식이 대부분일 때였다. 불만이 생겨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어머니에게 나의 의견을 말해보았자 언제나 그랬듯이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라고 무시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가 자식의 앞날은 생각하지 않고 중학교 보내달라고 울던 어머니의 교과서를 불태우셨던 것처럼 어머니 또한 나의 앞날에 대해 나의 의견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 똑같이 나에게 자신의 바람을 투영시키며 강요했다. 사람은 보고 배웠던 대로 대를 이어 실수를 반복한다. 어머니에게 선택권이 없었던 것처럼 나도 내 인생을 선택할 기회나 권리가 없었다.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 건지 공고를 가야 할 수준의 지식수준으로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인 부산의 지산고에 합격(?)하게 되었다. 당시의 진학 시스템이 이른바 "뺑뺑이"라 불리는 랜덤으로 학교를 뽑는 시스템이었던 것도 있었지만 애당초 인문계 고등학교를 우선순위로 써 냈던 것의 영향이 컸다. 나는 여기서 독립이라는 목적이 처음부터 어그러지는 것을 느꼈고 좌절하였다. 

 

(잠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당시 부산 지산고는 신생이었지만 인문계 중에서도 공부를 잘하기로 꽤 유명해서 제대로 공부하려는 학생들이 많이 왔다. 실제 내가 다닐 때는 부산의 어디 구석에 박혀있는 신생학교 주제에(?) 서울대를 10명 넘게 보냈는데 -우리 때는 학교급의 상징이 서울대를 보내는 거였다- 과학고와 비슷한 수준으로 서울대를 보내는 인문계였던 셈이다.

 

헌데 아이러니하게 내가 입학할 당시엔 인문계 미달이 나는 바람에 공고, 상고에도 떨어진 아이들이 대거 왔던 기억이 난다 - 그러니까 내가 갔지! - . 공부 천재과도 싸움 천재과도 함께 다닌, 그러니까 82년생 부산 지산고 학생들은 모범생과 스즈란(?)이 공존하는 특이한 인문계였다. 후에 알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아들도 나와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물론 서로 알지는 못하지만 지산고 역사상 유일하게 모든 계층이 골고루 모인(?) 연도에 같이 학교를 다녔다고 생각하니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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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화 바람>

 

중학교 때 중심을 잡지 못하던 공부가 고등학교에 들어간다고 기적처럼 잘 해질 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자식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고 친척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수가 있었고, 속으로도 자식을 잘 키워냈다고 뿌듯해하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고등학교에서도 나는 성적이 처참할 수준이었음에 성적이 곧 나 자신의 가치인 양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지고 학교생활을 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며 의미 없이 또 3년이라는 시간을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힘든 기억을 잊기 위해 술을 그리 드시고 술집을 떠도셨던 그것처럼 나 또한 성적 하위권이라는 스스로 혐오하는 나 자신을 잊기 위해 오락실과 만화방을 떠돌았다. 어머니가 매주 월요일 월간 실적 현황판을 보며 회의하실 때 지점장에게 굴욕을 당하신 것처럼 나는 시험을 칠 때마다 교실 뒤 게시판에 붙은 등수 표를 확인하며 굴욕을 당했다. 심지어 자신의 등수 밑에서 깔아주고 있는 나에게 "고맙다 폭폭아"라고 말을 하는 녀석까지 있었으니 공부에 대한 염증은 나를 더 피폐해지게 만들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어머니는 그런 굴욕을 밟고 성장하셨다면 나는 아버지처럼 비틀대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을 뿐이다.

 

그토록 굴욕을 겪었으면 이를 악물고 공부를 파볼 법도 한데 여러 요인이 나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거의 매일 집에서 벌어지는 아버지의 행동 때문에 도무지 공부에 집중할 만큼 심리적 여유가 없었다. 간혹 극악의 확률로 술의 힘으로 기분이 좋아진 아버지가 용돈을 주시는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혼란이 이어지던 나날이라 그런 집에서 겪는 경험으로 마음을 졸이고 상처받으며 소모된 감정 때문에 잠도 못 이루다 학교에 와서는 엎드려 잠을 자는 일이 반복되었다.

 

두 번째는 어렸을 때부터 쪼들리며 살았기에 돈에 대한 한 때문에 어서 빨리 돈을 벌고 싶다는 인생의 목표를 돈으로 설정해놓은 것이 문제였고, 인문계로 진학한 것이 이것을 방해하는 요소라 생각해서였기 때문이다. 공부를 잘하면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업을 가지며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이 당시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할 만큼 시야가 넓지 못했다. 그냥 빨리 졸업해서 집을 떠나 아무 곳이나 취직해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을 뿐.

 

살아가는 방법을 모르는 것은 비효율적으로 살아가게 하며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하고, 간단한 걸림돌에도 흔들려 인생을 막막하게 만든다. 누군가 조언해 주고 가르쳐 줄 사람이 있었다면 내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고 배울 수 있었던 사람은 항상 화가 나 있던 어머니와 나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길을 찾지 못하고 막막하게 멈추어 서 있었던 아버지밖에 없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

 

내 주변 누군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렴풋이 예상하였다고 해도 갑작스럽다는 생각에 '왜?'라고 되물으며 당황하기 마련이다. 야간자율학습을 밤 10시까지 하고 피곤한 마음으로 돌아온 나에게 어머니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폭폭아 큰아버지 돌아가셨다. 내일 학교에 가서 선생님한테 말씀드리고 조퇴 해온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