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치원생 아이 둘을 키운다. 내 주말은 완전히 아이들 스케줄 위주로 돌아간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정은, 유치원 같은 반 아이들의 생일파티나 플레이데이트(그냥 친한 애들끼리 놀이터나 집에 모여서 노는 것이다)에 참석하는 일이다. 이런데 자주 얼굴을 들이밀어야, 애들의 교우관계도 원만 해지고, 다른 학부모들과도 친해질 수 있다.
참고로, 내 딸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는 한 반에 24명이 있다. 그 말인즉, 보통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생일 파티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녀가 둘이라면, 거의 주말마다 생일파티나 플레이데이트가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운동이나 악기 같은 걸 배우기라도 하면, 주말 일정은 아이들 스케줄로 빼곡하게 채워진다. 이 스케줄을 차질 없이 소화하기 위해선, 부부가 끊임없이 아이들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실어 날라야 한다. 회사에서 일하는 평일보다, 아이들을 모셔야 하는 주말이 훨씬 정신없고 바쁘다.
다들 이렇게 사는 건가 싶은 의문이 들기도 했는데, 최근 어떤 계기로 깨달음을 얻었다.
치밀하게 설계된 커뮤니티
나는 여느 주말처럼, 딸아이의 같은 반 친구 생일 파티에 참석했다. 반 아이들 전체와 학부모가 영화관에서 디즈니 영화를 단체로 관람하기로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극장에 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별생각 없이 다른 학부모들에게 물었다.
"영화관 진짜 오랜만이네요ㅎㅎ. 마지막으로 영화관 오신 게 언제였나요?"
놀랍게도 일행 중에는 아이가 생긴 이후 단 한 번도 영화관에 와본 사람이 없었다. 당시 내 딸이 6살이었으니까, 그날 생일 파티에 모인 열 명이 넘는 성인들은 최소 6년 넘도록 영화관에 간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엔드게임>도 극장에서 못 보고, 오펜하이머가 개봉했다는 걸 뉴스로만 본 것이다.
이 사람들은 원래 영화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들일까? 아니면 애들 봐줄 사람이 없어서 영화관에 못 가는 걸까?
아니다. 나처럼 애들을 대신 돌봐줄 조부모님이 계신 건 예외라고 해도, 대부분은 이미 베이비시터나 보모를 고용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영화관에 가지 않은 것은, 이 사람들이 그만큼 자녀 교육에 몰두해 있기 때문이었다. 본인을 위해 두 시간조차 쓸 생각 자체를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내가 얼마나 특이한 집단에 속해 있는지 눈에 들어왔다. 순간 공포 영화처럼 소름이 쫙 돋았다. 유치원 같은 반 학부모 중에는
1. 흑인이나 라티노 가정이 한 명도 없었고,
2. 모두 대졸 이상이며, 가구당 최소 3억 이상을 번다.
3. 이혼 가정이나 한부모 자녀가 없다.
4. 모두가 단독주택 / 타운하우스에 거주한다.
과연 이게 일반적인 미국 가정의 모습일까? 그럴 리가. 미국인의 최소 40%는 흑인 또는 라티노이며, 가구당 소득 중간값은 7만 5천 불이다. 이혼 또한 매우 흔하게 찾아볼 수 있으며 (당장 내 친구 중에도 이혼한 친구가 5명이 넘는다), 자가 주택을 그것도 자녀가 어린 나이에 이미 소유한 사람은 흔치 않다.
그때 나는 사립학교가 만든 교육용 모델하우스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아이 입학원서에 부모의 이름과 주소를 적게 했던 것이 기억난다. 직업과 출신 학교도 물었다. 어째 당사자인 아이보다, 부모인 나의 인적 사항을 더 많이 물어보는 게 이상했다. 우리는 면접도 봤는데, 부부가 평일에 직접 학교를 방문해야 했다.
면접에서는 생각보다 수준 높은 질문이 오갔다. 어떤 학교에서는 나의 교육관을 묻거나 (Liberal Arts의 의미를 물었다), 아이에게 최근 읽어준 책을 묻는 식이었다. 세 살짜리 애는 가만히 있고, 부모인 내가 주로 대화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제야 알겠다. 그때 면접을 봤던 건, 내 애가 아니라 우리 부부였다. 부부 사이는 괜찮은지, 사회 / 경제적 능력은 어떤지, 그리고 교양은 갖춘 사람들인지를 평가받았다. 사립학교는 면접과 인적사항을 기재한 서류를 통해 학생들을 선발한다. 그 과정에서, 위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부모들은 자연스럽게 걸러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오해할까 봐 첨언하자면, 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가 동네에서 가장 좋은 학교는 아니다. 학비는 연 2만 불 남짓. 북 버지니아 기준으로 평범한 수준이다. 소위 말하는 귀족 학교의 학비는 4만 불로, 여기에 비하면 절반 정도 수준이다.
그런데도 같은 반 학부모 중에는 상원의원이나 아랍 왕족(국왕의 첫째 왕자는 국내에 남아서 국무총리를 하고, 둘째 왕자는 미국에서 주미대사를 역임하고 있는데, 바로 그 둘째 왕자의 아들이 같은 학교에 다닌다)이 있다. 그래서 유치원 현장학습을 국회에서 했고, 아랍 대사관 관저에서 열린 생일파티에 참여하기도 했다.
농담처럼 말한 거지만, 미국에서 십 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한 나보다 유치원생인 내 딸의 인맥이 더 좋다. 밖이라면 도저히 마주치기도 힘든 사람을, 유치원 네트워크를 통해서 만나보았다.
나는 그동안 이런 상류층과 내 딸이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했다(대부분은 그냥 집과 가깝다는 이유로 유치원에 보낼 뿐, 아마 초등학교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귀족 학교로 애들을 보내리라). 그런데 딸이 졸업할 때쯤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이런 소수의 사람뿐만 아니라, 평범하다고 여겼던 나머지 학부모들도 사실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이 유치원은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불행을 비껴간, 그러면서도 자식 교육에 진심인 사람들이 모인 학교다.
나는 아이가 미취학 연령이라 사립학교를 보냈을 뿐, 내 아이를 계속 이런 환경에서 키울 생각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 내 아이는 올해부터 공립 초등학교에 다닌다. 다만 무리를 해서라도, 계속 사립학교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은 다른 부모들의 심정도 이해가 됐다.
교육과 부동산 혈맹
말이 나온 김에, 내 딸아이가 다니게 될 공립학교에 대해서도 얘길 조금 해보겠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학군은 집값에 큰 영향을 미친다. 미국 공립학교 예산의 대부분은 재산세로부터 충당된다. 집값이 비싸고 단독주택이 많은 지자체일수록, 재산세가 잘 걷힌다. 재산세는 집값과 비례하지만, 임대주택은 거의 재산세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잘 사는 동네는 이렇게 거둬들인 지자체를 다시 지역 내 공립학교에 재투자하여, 지역주민들의 집값을 방어해 준다. 교육과 부동산의 혈맹이 형성되는 것이다.
출처 - (링크)
부동산 매물 조회 같은 걸 보면, 학군 스코어(Great School Score)가 거의 빠짐없이 기재 되어있다. 보통 이 스코어가 7을 넘어가면 좋은 학교, 3 미만이면 학군이 나쁘다고 말한다. 미국 영화를 보면, 학교 내에서 마약을 거래한다거나, 교권이 완전히 붕괴된 모습이 그려진다. 보통 대부분은 돈 문제다. 학교에 돈이 없으니까 충분한 교사를 뽑지 못하고, 정원을 초과하다 보니 과밀화가 이뤄진다. 학군이 좋다는 건 학생 대 교사 비가 잘 맞춰져 있고, 지자체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다양한 교외 활동 / AP 등을 제공하는 학교를 의미한다.
참고로 내가 사는 동네는 맥클린이라는 동네이다. 맥클린은 평균 집값이 백만 불이 넘는 부자 동네다. 이 맥클린은 페어팩스라는 카운티에 속해있다. 페어팩스도 물론 집값이 높지만, 맥클린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맥클린은 페어팩스로부터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어떤 느낌이냐면, 분당 사는 사람들이 성남 사냐고 물어보면 발작하는 것과 비슷하다.
근데 어차피 지방세는 페어팩스 카운티 단위에서 걷은 뒤, 학생 수에 맞게 밑으로 내려보낸다. 맥클린 지역에 속한 학교나 다른 페어팩스 학교나, 학생당 지원금은 동일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페어팍스 카운티 지역 학교들의 재정 상황이 괜찮은 편인 건 맞지만, 비교되는 다른 지역(집값이 더 저렴한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재정이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페어팩스는 학군이 좋은 동네라고 하고, 맥클린 주민들은 페어팩스보다도 학군이 좋다고 우긴다.
그런데도, 카운티 내에서나 카운티 간의 격차가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격차가 발생하는 이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쁜 학군이 되지 않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충분한 교사 인력을 고용하고, 외국어라든지 음악이라든지 돈이 많이 드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려면 반드시 돈이 있어야 한다. 연방정부에서 재정이 부족한 학교로 지원금을 내려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학교가 운영되기 위한 최소치에 맞춰져 있다 보니 턱없이 부족하다. 부족한 금액은 재산세로 채워야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집값이 중요한 것이다.
좋은 학군이 되려면, 학교뿐만 아니라 학부모들도 여유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여유란, 자식 교육에 신경을 쓸 수 있을 정도에 시간적 그리고 경제적인 여유를 말한다. 예를 들어, 학부모들의 참여가 요구되는 경우가 있다. 학예회처럼 참석하기만 하면 되는 이벤트뿐만 아니라, 현장 학습에 가는데 동행할 인솔자를 모집한다거나, 학급 바자회를 개최하는 데 필요한 물건이나 진행을 도와줄 자원봉사자 등. 학교에서 열리는 여러 행사는 학부모의 참여를 전제로 열린다.
어떤 직장인이 이런데 참석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와중에, 지원자 모집이 마감된다. 좋은 학교일수록 빨리 마감된다. 그만큼 학부모들의 참여도가 높기 때문이다.
순간 반차를 써야 하나 잠시라도 망설였던 자신이 왠지 나쁜 부모가 된 것 같았다. 부모들이 이렇게 목숨 걸고 행사에 참여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내 자식의 학교생활 모습이 그냥 보고 싶은 걸 수도 있고, 선생에게 잘 보여서 내 애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학교를 편하게 다녔으면 하는 마음이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내 아이들의 원만한 교우관계를 위해, 즐거운 학교생활을 위해 부모들은 휴가를 쓴다.
TV나 드라마에서는 자기 자식에게 소홀한 부자, 전문직 부모의 모습이 자주 그려진다. 현실을 말하자면 정반대다. 돈 있고 여유 있는 사람일수록 자기 자식에게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쏟아주려고 한다. 적어도 내가 주변에서 보기엔 그렇다.
동네 초등학교 야구팀 코치는 대기업 임원이다. 평일 오전에 시간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가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자기가 다니는 회사로부터 빵빵하게 비품을 타온다. 그 코치 아들은 그 학교 야구팀에서 선발투수를 한다.
나는 이글에서 아웃풋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더 행복한지, 더 좋은 대학에 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거기에 속한 학부모로서, 내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죄책감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다수가 왜 아이 낳는 걸 주저하는지도 이해가 된다. 씁쓸하지만, 요즘 세상엔 남들만큼 애를 키운다는 것이 이렇게나 힘들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남들’은 보통 나보다 나은, 내가 선망하는 ‘남들’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잠시, 책광고 들어갑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재무제표가 만만해지는 회계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전에 쓴 딴지 연재물을 확장하여, 이때다 싶어 열쒸미 공부, 정리하여 낸 책입니다. 아마, 현직 회계사 중, 저만큼 회계공부를 싫어했던 회계사는 거의 없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저만큼도 공부를 안 했다면 못 붙으셨을 테니까요). 회계 공부를 싫어했던 사람이 저와 비슷한 독자분들을 위해서 쓴 책이다 보니 재밌습니다(아마도...). 그동안 회계 공부가 하기 싫었다거나, 회계에 관심이 없었던 독자분들(사실상 전원)에게 추천합니다.
[재무제표가 만만해지는 회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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