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하면서도 상극인 두 인물 : 전두환과 장태완
출처-<영화 ‘서울의 봄’>
영화 <서울의 봄>은 시종일관 전두광(실제 인물 : 전두환)과 이태신(실제 인물 : 장태완)의 대결 구도로 진행된다. 역사가 재미난 게, 전두환과 장태완 두 인물은 같으면서도 정말 상극인 존재였다.
12.12 쿠데타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장태완은 전두환과 고향이 비슷했다. 경북 칠곡 출신으로 출생 연도도 똑같은 1931년이었으니, 고등학교도 같은 대구에서 나왔다(장태완은 대구상원고 출신이다).
그러나 군인으로서 행보는 정반대였다. 6.25 한국 전쟁 당시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를 했었지만, 장태완은 갑종 출신으로(육군종합학교에 들어갔는데, 전쟁 중 이곳은 단기장교를 양성해 전선에 총알받이로 보내는 곳이었다) 야전에서 굴렀다.
한국전쟁 당시 육군종합학교를 나온 소위들의 최후는 다 거기서 거기였다. 총알받이 아니면, 포로가 되는 거였다. 장태완은 한국전쟁 당시 소대장으로 향로봉 전투에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웠고, 베트남 전쟁 때는 맹호부대 1진으로 파병을 갔다.
즉, 장태완은 실전을 경험한 ‘야전 군인’이었다.
장태완(좌)과 전두환(우)
반면, 전두환은 전형적인 '정치 군인'이었다. 전두환도 연대장으로 월남 파병을 갔었으나, 거기서 전투보다는 허구한 날 파티 즐기는 것에만 집중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그래서 직속상관인 9사단장 조천성과 주월사령관 이세호는 전두환에게 충무무공훈장을 주지 않으려 했다(나중에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고 이세호의 재산을 탈탈 털어버리는 등 복수를 한 건 안 비밀!).
사람 취급 못 받을 만 했을 거다. 실제로 육사 11기가 임관해 야전으로 나왔을 때, 이들을 바라보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육사 11기 위에 앉아 있던 수많은 선배 장교, 상관 대부분은 6.25 참전용사였다. 장태완과 같이 ‘총알받이’로 고지전에 내몰렸지만, 그 죽음의 고개를 넘어 귀환한 게 그들이었다. 자신들이 생사를 오가는 싸움을 하던 시기, 진해에 있던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안전하게 시험공부만 하던 11기가,
“우리는 정규 육사 1기다! 우리는 4년제를 나왔다. 우리는 제대로 된 군사학을 배웠다!”
(11기부터 육사는 4년제가 되었다)
라며, 설레발치는데 이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까? 좋게 보일 리가 없었을 거다. 엘리트 군인 취급 이전에,
“저 새끼들 뭘 잘못 처먹었나 봐.”
라는 취급을 받았던 거다. 이게 당연한 게, 군인은 ‘전쟁’을 위해 준비된 존재다. 군사학이나 전사 연구는 ‘실전’을 치르지 못하기에 그 대체재로서 전쟁을 준비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실전’을 치른 이들 앞에서 ‘실전의 대체재’로서 군사학을 배운 11기가 고개 쳐들고 의기양양 해대니 당연히 이런 눈초리로 볼 수밖에 없던 거다.
육사 11기가 다른 출신 장교들과 위 기수들에게는 지금 육사 출신들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한 이유다.
서울 태릉 화랑대에서 열린
육사 11기 졸업식 겸 임관식 모습
(1955년 10월 4일)
12.12쿠데타의 경우는 여러 의미로 한국 현대사를 압축해 놓았다고 할 수 있는 게, 한쪽은 땀 흘리며 정당하게 자기 실력으로 그 자리에 올라와 원칙과 상식을 말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선민의식에 찌들어 자신들만의 카르텔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정치질과 협작질로 올라와 반칙과 특권을 말한 거였다.
이 둘이 서로 부딪혔고, 결과는 반칙과 특권이 이겼던 거다.
하나회가 싸워야 했던 것들
육사 11기는 51년에 입교해 55년에 임관을 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1995년에 육사 11기 임관 4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육사 11기가 모두 모이는 자리였다.
출처-<KBS>
이 행사에 참석했던 이들의 이력을 보면, 엄청나게 화려했다. 대한민국 헌정사 통틀어 역대급으로 화려한 이력을 가진 동기생 모임이었다.
육사 11기는 육사 2기와 맞먹을... 아니, 육사 2기보다 더 화려한 전적을 보여준 기수였다. 육사 2기는 박정희의 기수이며 대장을 가장 많이 배출한 기수이다. 대통령 기간만 따지면, 육사 2기를 쫓아갈 수 없지만, 숫자로 따지면 육사 11기를 이길 수가 없었다.
11기는 대통령만 2명, 대장 5명, 중장과 소장은 20명을 배출했고 장관급과 국회의원은 발에 채일 만큼 뽑아냈다. 이게 그들의 실력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일까.
민주화가 된 이후 육군사관학교 한 기수를 250명으로 잡았을 때 한 기수에서 장군 진급자는 많아 봐야 35명 수준이다. 한 기수에 대장이 2명 나오면 성공한 기수라고 칭찬을 받는데, 불과 156명이 임관한 11기에서 이런 ‘비정상적인’ 성공이 있었던 이유가 뭘까?
그렇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로 그 12.12쿠데타 때문이다.
1979년 12·12일 쿠데타
출처-<국가기록원>
그들이 육사를 졸업하고 야전으로 나올 당시,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봐보자.
그들은 같은 나이 또래 친구들이 전장에서 피 흘리며 싸울 때 ‘나라의 미래’란 수식어를 방패 삼아 진해에 숨어 있었다. 그들에게 부채 의식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남들에게 당당하기 위해선 자신들을 합리화할 뭔가가 필요했다.
한국 전쟁 시기는 시인과 화가까지 전선을 돌며, 전선 스케치를 하고 종군 취재를 하던 시절이었다. 각종 민간인도 뭐가 됐든 전쟁에 한발을 걸쳐야 했던 그 시기에 그들은 공부를 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을 당당하게 만들어 줄 뭔가의 장치가 필요했다. 그 결과로 찾아낸 게 ‘엘리트’라는 선민의식이다. 그것이 없다면, 전쟁에서 수없이 사선을 넘나든 선배 동료들 앞에서 자신들을 정당화할 수 없었다.
또한 임관을 하자 동갑내기, 자기보다 몇 살 많지도 않은 이들이 층층이 자기 위 상관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정규 육사 1기’라고 온갖 꼬장을 다 부려 보고, 억지를 써 봤지만, 야전에서는 ‘애송이’ 취급을 받았다.
“니들 전쟁을 치러봤냐?”
“어디서 펜대만 굴리다 온 놈들이...”
“야, 우리가 중공군들 춘계 대공세 막아 낼 때 니들 뭐했냐?”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이들, 심지어 동갑이나 자신들보다 어린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전쟁을 치렀던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 앞에 ‘엘리트’를 말하고, ‘군사학’을 말해도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왜?
군인에게 ‘실전’만 한 교재는 없기 때문이다.
엘리트로서 만들어졌던 이들이지만, 임관해서 본 현실은 달랐다. 기수부터가 사기당한 거 같았는데, 소위 계급을 달고 나간 야전은 이보다 더 춥고 엄혹했다. 더 암담한 건, 끝이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그들 앞에 창창한 젊은 선배들이 줄지어 서 있었단 거다. 이들이 물러나야 자리가 나올 텐데 도통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 저것들을 어떻게 한담....
하나회 눈에 들어온 방법
이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게 육사 8기였다.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이 난관을 타파했다. 바로 ‘쿠데타’였다. 판이 마음에 안 들면, 그 판을 엎어버리면 된다는 걸 배웠던 거다.
5.16쿠데타
육사 11기는 육사 8기의 그것처럼 우선 덩치를 키웠다. 육사 8기가 육군본부에 모여 정군운동을 준비했던 것처럼 육사 11기도 차근차근 덩치 키울 준비를 했다. 다행히도 이들에게는 ‘육군사관학교’라는 풀이 있었다. 계속해서 인력을 충원하고, 군 전체에 뿌릴 수 있는 씨앗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자신들의 후견인도 확보했다. 군인이 실력으로 우열을 가린다면, 실전을 겪고 전쟁을 치른 군인이 그렇지 않은 군인보다 낫겠지만, 평시에 관리형 군대에서는 '정치 군인'이 설 자리가 있었다. 더구나 당시 대통령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이가 아닌가?
권력을 잡은 대통령에게도 야전형 군인보다는 자기에게 충성만 말하는 이들이 훨씬 더 부리기 편했을 거다.
출처-<대통령기록관>
이 모든 게 맞아떨어져 하나회는 성장했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하는 게 1973년 윤필용 사건 이후 하나회는 전혀 다른 형태로 커나갔다는 거다.
윤필용 사건 이후의 하나회
윤필용 사건 이전에는 윤필용이라는 후원자 겸 우두머리가 하나회를 배경으로 ‘영남 군맥’의 한 축을 담당했었다. 그러나 윤필용이 낙마하고, 육사 11기의 에이스 손영길이 하나회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하나회는 전두환을 구심점으로 한 ‘사조직’으로 재탄생했다. (개인적으로 윤필용 사건은 하나회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발전됐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은 기회를 잡았다. 육사 8기가 4.19혁명 전후의 혼란기를 맞았다면, 이들은 10.26 이후 벌어진 권력의 공백을 배경으로 들고 일어난 거였다.
한국 역사에서 5.16쿠데타를 일으켰던 세력(육사 8기 주축)을 ‘구(舊)군부’라 부르고, 12.12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육사 11기 주축)을 신(新)군부라 부른다. 원래는 5.16쿠데타를 일으킨 세력만 존재했지만, 12.12쿠데타가 발생하면서 군부 세력을 구분 짓기 위해 나눈 거였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들은 한 몸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육사 8기의 5.16쿠데타가 육사 11기의 12.12쿠데타를 잉태했다는 건 지난 기사를 통해 설명했다.
출처-<영화 ‘서울의 봄’>
영화 <서울의 봄>은 9시간 동안의 이야기지만, 그 배경은 1979년 아니라 1951년(한국전쟁 및 육사 11기 입학년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끝>
첨언
한국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을 방문한
밴 플리트 장군
육사 11기와 하나회 이야기를 할 때마다 밴 플리트 장군에게 약간은 미안한 감정이 든다. 한국에 대한 애정과(밴 플리트의 한국사랑은 유별났다. 아들을 한국전쟁에서 잃었음에도 그 각별함은 유명하다) 한국군의 정예화를 위한 노력의 발로로 육군사관학교 개교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는데, 그렇게 나온 이들이 육사 11기와 하나회였다. 참으로 역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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