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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쓸까 말까 고민하고, 썼다 지웠다를 수없이 반복했다. ‘욕에 대한 고찰’이라는 주제 아래 지난 번 <빌어먹을>이라는 글을 싸지르고 난 후 2부에 대한 압박감과 부담감이 있었다. 욕과 사회 문제를 함께 다룬다는 주제 특성상 민감한 부분이 있기에 이 글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반문하기도 했다. 그래도 무언가 쓰는 사람은 그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것들을 써야 한다고, 비록 짧고 못 배운 글쓰기이지만, 말하고 싶고, 말해야 할 것 같기에 이번 편을 쓰기로 했다.


주의사항: 주제가 많이 민감하여 의도와는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따끔한 비판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보기 많이 불편하실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심신미약자는 ‘뒤로가기’ 버튼을 클릭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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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씹팔년’의 후예(後裔)


여성을 성기를 얕잡아 부를 때 ‘씹’이라고 한다. 따라서 남성들에게 ‘씹했다’는 것은 한 여성과의 잠자리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변에서 몇 십 혹은 몇 백번의 씹질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니는 남성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래, 그거까지야 개인의 사생활이고 엄연한 성생활이니 우리가 관여할 바는 아니다.


다만, 남성을 성기를 함부로 쓰는 자는 위대한 용자고, 여성의 성기를 함부로 쓰는 자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언제나 지탄을 받아 왔다. ‘씹팔년’이라는 욕도 거기에서 비롯된 욕으로 말 그대로 씹을 판 여자, 즉, 창기나 창녀 혹은 갈보라는 표현을 우리말로 표현한 거라 할 수 있겠다(따라서 씹팔년을 여성들에게만 쓸 수 있는 욕이다. 남성에게 하는 욕인 ‘씨팔놈’이랑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이 부분은 기회가 된다면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저번의 ‘빌어먹을’과 달리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이게 진지한 글이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작금의 대한민국은 우리가 ‘씹팔년’이라고 불렀던 수많은 여성들,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들의 희생으로 세워진 역사다. 우리 모두는 ‘씹팔년’들의 후예들이지만 그것을 잊어버린 채 산다. 반성과 후회, 자조가 조금 필요할 것 같다.


자, 조금 지루하더라도 역사 이야기를 해보자. 물론 역사에 대해서야 나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잘 알지만, 짧게나마 고등학교 때 배운 지식과 어디서 주워들은 지식으로 아는 만큼만 서술해보려 한다. 삼국시대는 너무 먼나라 이웃나라 이야기니까 건너뛰고 고려 시대부터 이야기해보자.


‘지정학적으로 굉장한 요충지’라는 말은 개소리고, 한반도는 단지 나라가 힘이 없어서 졸라게 외침을 당했다. 외침을 당하면 건물이 부서지고 사람만 죽어나느냐하면, 아니다. 군대에 갔다 온 남자들은 공감할 것이다. 군인에게 있어 전투에서 승리 빼면 뭐가 남을까. 돈? 명예? 그건 알량한 과시욕에 사로잡힌 장교들의 이야기고 사병들에게 있어 남는 것은 눈앞의 전리품이다. 특히 이 전리품 중에서도 타국의 여성들과의 잠자리는 그 무엇보다 자랑할만 한 전리품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한반도에는 수많은 외인들의 씨앗이 뿌려졌다.


여전히 국사책에선 단일민족, 단일국가란 환상을 홍보하고 있지만, 사실 전 세계에 우리나라만큼 외세의 침략을 받은 나라는 폴란드밖에 없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섞일 대로 섞인 우리 모두 개잡종놈이며, 씹팔년의 후예다.



고려가 팔아먹은 ‘씹팔년’ 공녀(貢女)


1) 거란의 침략과 고려의 극복


1차침략
거란의 침략: 993년 손소녕이 이끄는 거란의 군대가 쳐들어옴.
고려의 극복: 서희장군이 소손녕을 찾아가 외교담판으로 물러나게 함. (강동6주 획득)


2차침략
거란의 침략: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끊지 않자, 1010년에 다시 쳐들어옴.
고려의 극복: 고려의 백성들과 군사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물러남. (양규장군의 활약)


3차침략
거란의 침략: 1018년에 거란의 장수 소배압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옴.
고려의 극복: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거의 전멸시킴. (귀주대접)


결과
북방 민족의 침략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다.
오랜 전쟁을 끝내고 고려와 거란은 강화를 맺었다.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면에서 더욱 발전하기 시작했다.



2) 여진족의 침략과 고려의 극복


여진족의 침략: 여진족은 안주에서 일어난 민족으로, 일찍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부르며 섬겼지만 세력이 커지자 고려의 국경을 위협하였고, 무력 충돌을 함.


고려의 극복: 윤관의 활약. ‘별무반’이라는 특수부대를 편성하여 여진족을 물리침. 여진족이 다시 침략하지 못하게 하고 함경도 지역이 고려의 영토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 동북9성을 쌓음



3) 몽고의 침입과 고려의 항쟁


1차침략
고려의 국대와 백성들이 힘을 합쳐 몽고군을 물리쳤다. 몽고족이 바다에서 약하다는 점을 이용해 도읍을 강화도로 옮겼다.


2차침략
몽고가 처인성에서 크게 패하고 물러갔다.


3차침략
몽고가 죽주성에서 패하고 물러갔다.


결과
고려는 약 40년의 항쟁을 끝으로 몽고와 강화를 하고 간섭을 받았다. 고려는 자주국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항쟁을 계속했고, 공민왕 때 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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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로 가는 고려의 공녀


여기까지가 고려시대의 외침의 역사지만 여기엔 없는 것들이 있다. 그래, 이 기록 어디에도 ‘씹팔년’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공녀(貢女)’라는 이름하에 수많은 여인들의 자신이 나고 자란 이 땅을 떠나 먼 타국으로 보내졌다. 공녀의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타국에서 처첩으로 생을 마감했거나 견디다 못해 자결을 하기도 했다. 개중에는 비빈에 봉해져 권세 가도를 걷기도 했던 기황후와 같은 경우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일부분이며 타국으로 떠난 공녀는, 국가가 공식적으로 타국에 보낸 ‘씹팔년’들은, 그렇게 기억 속에서, 우리 역사 속에서 지워졌다.



환향녀(還鄕女) 혹은 화냥년


치욕의 ‘씹팔년’의 역사는 국호가 바뀌고, 국가의 지도자가 바뀌어도 계속됐다. ‘조선’이라는 이름의 나라가 개국했지만 이 나라 또한 외세의 침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위선의 극치로는 ‘환향녀’를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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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에 강제로 끌려가는 조선의 민초들
(영화 <최종병기 활> 중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인조가 45일 만에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군신의 의를 맺는 치욕을 당했다. 이는 ‘삼전도의 굴욕’이란 이름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 기록된다.


이 짧은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결국 힘없는 백성들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50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청나라에 끌려갔다. 국가나 왕이 해결해 줄 수 없던 상황에서 이들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비용을 지불한 건 조선의 백성들이 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재산을 털거나 빚을 내어 청나라에 끌려간 누이나 아내들을 데려왔는데, 이렇게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라 불렀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기쁨도 잠시, 대부분 임신한 상태였던 그들은 곧 ‘화냥년’이라는 이름하에 멸시의 대상이 됐고, 그들이 낳은 자식들은 ‘호로자식’이라는 낙인이 새겨진 채 살아가야 했다. 이런 흉흉한 분위기 속에 인조는 “국가에서 정숙치 못한 여인들을 관리할 수 없기에 각 가정에서 엄숙히 단속하라”는 어명을 내린다. 지켜줘야 했고, 지켜야만 했던 백성들에게 이 나라가 해주는 것이라고는 조롱과 멸시, 그리고 기억 속에서 지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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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향녀가 될 뻔 한 <최종병기 활>에서의 문채원

(영화 <최종병기 활> 중에서)



곱게 자란 자식의 귀향


환향녀에서 그쳤으면 좋았을 대한민국 ‘씹팔년’의 역사는 잔혹하리만큼 반복된다. 그 이후의 역사는 다들 알다시피 ‘위안부’다(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한국 내 정식 명칭은 일본군 ‘위안부’다. ‘위안’이라는 단어가 일본군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기 때문에 작은따옴표를 이용하여 일본군 ‘위안부’로 표기하는 것이 정확하다. 일부에서 ‘근로정신대’인 ‘여자정신대’와 혼용해서 사용하지만, 여자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르다. 여자정신대는 일본 정부에 징용되고, 일반적인  노동을 강요당한 여성들을 일컫는 반면 위안부는 성적인 행위를 강요당한 여성들을 일컫는다. 대한민국 관계 법령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사용하고 있다. ‘위안부’라는 용어는 이 제도를 통해 ‘성적 위안’을 받은 가해자 일본군 중심의 용어라는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공식 문서에서 사용되고 있었고, 일본군 또는 정부의 개입 사실을 보여주는 용어로써 의미가 있다. 피해 여성 입장에서 본다면 이를 '성노예'로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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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대중 매체로는 다음 웹툰 <곱게 자란 자식>과 영화 <귀향>이 있다. <곱게 자란 자식>은 불과 몇 개월 전까지 보았지만, 중간에 클릭하기가 너무 무섭고 두렵고 어려워 보기를 잠시 멈춰두고 있다. <귀향>의 경우는 약소하게나마 후원금을 보냈다. 작년 한 해 내가 한 일 중 가장 뿌듯했지만, <귀향>이 개봉된 날 영화를 보러 가는 발걸음은 정말 무거웠다.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보기 싫었던 영화는 처음이었다. 오프닝 때는 뛰어나갈까 생각까지 했지만, 참담하고 가슴 아프지만 꼭 봐야만 한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잡고 영화를 봤다. 생각했던 대로 영화는 참담했고, 먹먹했다. 그리고 마지막 엔딩 크레딧에서 수많은 후원자들의 이름을 보며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대한민국에 아직은 희망이 있음을 새삼 느꼈다.


할 말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지만, 쓰고 나면 황폐해질 것만 같아 글을 마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 지긋지긋하고 지랄맞은 역사를 고작 돈 얼마에 팔아먹은 ‘씨팔놈’과 그 씨팔놈의 딸 진정한 ‘씹팔년’, 그리고 한반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수없이 희생당한 우리네 어머니들이 다시는 이 이기적이고 힘없는 땅에 태어나지 않기를 기도한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이 글을 쓰고 나서 한동안 비애에 잠겼다. 지켜주지 못했고, 돌봐주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시간을 내어 소녀상 앞을 지키고 있는 어린 영혼들과 함께하고, 소녀상 앞에서 진작 찾아가지 않음과 지켜주지 못함을 사죄하고 싶지만, 겁이 나고 미안하고 부끄럽고 안타까워서 가지 못하고 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가지 못할 지 모르겠다. 글을 쓰면서 평생 기억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도, 아마 내일이면, 아니, 한 시간 후면 잊어버린 채 동료들과 담배를 피우면서 희희낙락거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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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렇게 글을 씀으로서 지켜주지 못했음을, 내가 보잘 것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싶다. 어쩌면 이 글은 미약한 내 자신에 대한 변명이자 이 미약하고 힘없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희생된 ‘씹팔년’님들에 대한 사죄문이다.


정말로, 지켜주지 못해서 아무것도 힘이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또 미안합니다. 이 나라는 당신들의 그 수많은 희생으로 이루어진 나라임을, 그리고 당신들의 희생은 그 어느 역사교과서에도 상세히 기록되지 않음을 알기에 더욱 미안합니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미안한 마음을 그리고 먹먹한 마음을 안고 당신들의 희생을 기억하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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