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으로 배달된 우편물
“선거하세요!”
집집마다 배달된 전단지는 우리네 투표장 안내 종이와 비슷하게 흑백으로 전달된다.
영국의 투표 방식은 이렇다. 사전 투표는 거동이 불편하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미리 신청한 이들이 우편으로 투표할 수 있다. 하지만 본 투표는 당일 하루다. 오전 7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시간은 넉넉하게 주어진다. 투표일이 쉬는 날이 아니기 때문에 직장인들을 나름 배려한 일정이다.
투표 장소는 동네 마을회관. 흔히 커뮤니티 센터(Community Centre)라고 부르는 곳이다. 참고로 영국은 주택을 조성하기 위해 건축 업체가 허가받을 때, 반드시 마을회관과 어린이 도서관, 학교, 병원(GP) 등을 함께 건립해야 한다. 이는 1960년대 공공임대주택 단지가 대거 조성되면서 발의된 법안에 따라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규칙이다. 어찌 됐든, 마을 중심에 위치한 회관에서 투표가 이뤄진다.
투표일이 하루라 혼잡하지 않을까? 염려되지만, 영국은 런던을 벗어나면 대부분 단독주택 형식의 주거 형태를 갖춘다. 높게 쌓아 올린 건물에 수십, 수백 가구가 모여 살지 않기 때문에 마을회관이라고 해 봤자 숫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7월 4일. 동네 마다 있는 마을회관에서 총선이 실시된다.
조기총선
2019년 영국 총선 선거구별 선거 결과
2019년 12월, 보수당의 승리로 끝난 지난 총선. 영국은 국회의원의 임기가 5년으로, 5년마다 총선이 열린다. 기한으로 치면 올 12월이 만기다. 아직 5개월 정도가 남았다. 하지만, 현 영국 총리 리시 수낙은 기한을 앞당겨 총선 일을 결정, 발표했다.
정해진 날짜에 선거를 치르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다. 총리가 뭔데 선거 날짜까지 정하나? 싶을 거다. 하지만, 영국은 총선 시기를 총리가 결정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만기를 채워 선거를 하기도 하지만, 레임덕이 나타났다 싶으면 미리 선거일을 앞당기는 승부수를 던져 리더십에 대한 재평가를 받기를 원한다. 이번에도 그런 케이스다.
전 세계적으로 모두 어려운 상황이다. 코로나 이후, 시장에 풀린 돈이 가파른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면서 어렵지 않은 나라가 없는 상황이다. 영국도 여기서 피해 가지 못했다.
일부 슈퍼마켓이나 기업의 가격 안정화 정책으로 어느 정도의 물가 상승은 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 10%가 넘는 물가상승률은 국민들의 삶을 어렵게 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원망과 비난의 화살은 현 집권당과 총리에게 향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참고로 현재 집권당인 보수당의 지지율은 20%로 역대 최저다. 총리의 말이 씨알도 안 먹히는 상황인 만큼 그도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죽도 밥도 안되고 시간만 버리게 되어, 오히려 향후 선거에 더 부정적인 영향만 미칠 것이 뻔하다. 그래서 꺼내든 칼이 조기 총선이다.
뒤집기 어려운 승부
출처 - (링크)
영국의 선거구는 총 650개다. 총 650명의 국회의원이 탄생하는 총선. 이 중 326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당이 다수당이 되고, 다수당의 대표가 총리가 된다.
현재 보수당이 364석, 노동당이 200석, SNP라 불리는 스코틀랜드 국민당이 47석, 자유민주당이 11석, 기타 20석이다. 토니 블레어 정부 시절에는 SNP의 숫자가 노동당에 있었는데 브렉시트 이후 분리되어, 노동당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노동당과 SNP가 힘을 합쳐도 보수당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1997년 노동당이 보수당에 대승을 거둔 이후, 최고치를 경신할 수도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보수당의 지지율은 18%. 46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1970년대 오일 쇼크로 국가 경제가 바닥을 쳤을 때 이후 기록적인 지지율이다. 각 언론사 및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노동당과의 격차를 줄이기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Election Map은 노동당 467 vs 보수당 101로 내다봤고, 파이낸셜 타임즈도 451 vs 134 정도로 점쳤다. 스코틀랜드를 대표했던 SNP의 수장 니콜라 스터전이 비리 혐의로 물러나면서 당의 색채도 지지도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그 결과, 다수의 SNP 자리가 노동당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아마도 이러한 예상이 적중한다면, 노동당은 전례 없는 승기를 잡고 의회에 안착하게 될 것이다.
예견된 결과
“난 저 사람을 총리로 뽑은 적 없어!”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리시 수낙이 총리도 결정되었을 때, 여론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가 재무장관으로 팬데믹 때 운영한 펀드가 국민들에게 잘 전달되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인지도가 높지 않았던 인도 출신의 각료가 단숨에 총리 후보로까지 거론될 수 있었던 이유다.
2020년, 연간 재정지출 계획안을 공개하는 리시 수낙 영국 재무장관
출처 - (링크)
실제로 리시 수낙은 각종 복지제도를 하나로 어우르는 Universal Credit이라는 제도를 통해 오랜 락다운으로 실업과 폐업 위기에 내몰린 이들에게 구제 금융 형식의 재정적 지원을 국가 차원에서 이뤄냈다. 하지만, 이러한 임기응변은 시장에 막대한 자본이 유출되게 했고, 장기적으로 국가의 안녕을 위태롭게 했다는 평가다. 10년, 20년 후를 내다보고 보다 높이, 멀리 봐야 하는 리더의 위치에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하나 더. 사실… 보수정권의 끝물이었다. 국민들이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브렉시트 이후, 이전의 대영제국과 같은, 유럽연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강력한 국제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영국이 재탄생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었다.
1970년대 유럽연합에 가입한 후, 영국의 국가 시스템의 대부분이 유럽연합 체제에 맞게 운영이 되어 왔다. 이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든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서유럽 서쪽 끝에 외로이 떨어진 섬나라에서 홀로 무슨 일을 얼마나 할 수 있었겠나.
데이비드 카메룬, 테레사 메이, 그리고 보리스 존스까지. 사람들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를 때였다. 그리고 리즈 트러스는 마가렛 대처의 환생을 연상시키는 듯한 활동으로 비난을 받다가 40일 만에 총리 자리에서 내려왔다. 다음은 누가 되었든, 반드시 교체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보수당 내에서도 이미 알았다. 마지막 욕받이 무녀가 필요했던 시기라는 걸. 아무도 나서지 않으려 했고, 이런 때가 아니면 인종/출신의 한계를 딛고 총리 자리까지 올라갈 수 없다는걸, 리시 수낙도 알고 있었을 거라 짐작한다. 현 영국 총리의 운명은 예견되어 있었다.
최악의 총리라는 오명, 그리고 새로운 리더십
사실상 게임은 끝났다고 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지난 우리나라의 총선과 비슷한 양상이다. 차이를 얼마나 내는지가 관건이다. 물론, 예상한 만큼 차이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노동당의 승리라는 것.
아마도 이번 총선을 기점으로 새로운 리더가 탄생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 참고로 영국은 총선 날짜가 결정되면 30일 전에 의회가 해산된다. 따라서 지난 5월 24일 영국 의회는 문을 닫았고, 의원직을 내려놓은 전 국회의원들은 지역구로 돌아가 선거 운동 중이다.

아침 도시락 박스를 받는 영국 아동
출처 - <스쿨푸드매터스>
물론, 총리와 내각은 국가의 운영을 위해 여전히 직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총리와 내각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리고 전례없이, 전쟁 상황이 아님에도 굶주린 아이들이 UN으로부터 급식을 받는 일까지 만들어낸 현 영국의 총리는, 역대 최악의 총리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최고급 사립학교, 세계 최고 대학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억만장자 정치인. 실패를 모르고 승승장구하며 달려왔던 삶의 여정으로 어려움과 곤경에 처한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의 정치 행보도 이제 끝이 보인다.
한편, 태어나면서부터 노동당을 지지하던 부모님 곁에서 자란, 노동당 대표 키어 스타머의 행보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인권변호사이자 검사로 활동했던 그는 토니블레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전 뉴질랜드 총리였던 제신다 아던과 함께 블레어 키즈라 불리는 이들 중 하나다. 그래서 보수언론에서는 블레어의 카피캣이 아니냐는 질타를 하기도 한다.
사실, 이라크 파병 결정 이후 토니 블레어의 인지도는 급속도로 하락했다. 대중들도 ‘블레어’ 하면 좋은 그림을 연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저임금제를 비롯해, 상원의원제도 상속 금지, NHS 개혁, 아일랜드와의 화합,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북아일랜드의 독립 의회 구성까지. 지금 보면 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정책운영으로 현재의 영국을 든든히 세우는 데 있어 혁혁한 공을 세운 블레어에 대해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기에, 그리 부정적인 영향만은 아닌 듯하다.
총선까지 남은 시간 20일 남짓. 얼마 남지 않았다. 유럽 대다수의 국가가보수를 지지하며 극우 정당들이 힘을 얻고 있는 가운데, 영국은 얼마나 다른 선택을 하게 될지 이번에도 지켜보는 재미가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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