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감독님의 히로시마 시내 산책
두 사람이 오코노미야키를 먹은 뒤 걷는 히로시마 시내 산책코스를 따라가 보았다.

아이오이거리(相生通り)의 원폭돔 전차 정류장
오코노미야키 집에서 거리가 있는 걸 보니, 전차를 타고 이동한 듯하다. 이 장면에서 왼쪽으로 가면 원폭돔, 오른쪽으로 가면 개막식이 열린 히로시마 현립체육관이 있다.
사진에서는 티가 잘 나지 않지만, 다리로 이어지는 도로라 오른편으로 다리 난간이 살짝 보인다. 아이오이바시(相生橋)로 불리는 다리로,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에놀라게이가 리틀보이를 조준 투하한 지점이다. 실제로는 이 다리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지점(상공)에서 폭발했다.
구글맵(링크)
원폭돔 정류장에서 북쪽으로 한 블록 가면 히로시마 성이 나온다. 히로시마 성과 히로시마 시민병원 사이의 죠난 거리(城南通り)를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산책하는 중.
뒤로 보이는 하얀 건물이 히로시마 시민병원으로, 복도 난간 끝부분의 디테일로 알아볼 수 있었다.
구글맵(링크)
히로시마 시민병원이 보이는 곳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히로시마 중앙주차장 북쪽 출입구가 있다. 안 선생님의 어깨 뒤로 살짝 보이는 부스 같은 것이 그것이다. 곡선으로 된 화단 경계석, 가로수, 노 선생님 뒤로 겹쳐 보이는 공중전화 부스로 이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구글맵에는 해당 출입구가 검색되지 않으므로 바로 옆에 있는 흡연 부스를 찍었다.
구글맵(링크)
이곳을 발견한 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십덕스러운 것 같아 뿌듯하면서 동시에 조금 부끄럽다(오덕이 발전하면 십덕이 된다). 걸어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가능했다.
오른편 전면에 보이는 건물은 주유소다. 1952년부터 이 자리는 줄곧 Shell 석유회사의 주유소였다. 작중에도 조개 모양의 로고가 그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2019년에 Shell 석유회사(昭和シェル石油)와 이데미츠(出光興産)라는 정유회사가 합병하여 Apollo Station이라는 통합 브랜드를 출범했다. 현재의 로고(얼굴 옆모습)는 통합 브랜드의 로고이다.
주유소 뒤쪽으로 보이는 건물에는 KONOIKE라는 간판이 붙었다. 현재 코노이케(鴻池)라는 건설회사의 히로시마 영업소로 쓰이고 있다. 이 회사가 히로시마에 지사를 설립한 것은 2003년이므로, 그전에는 만화 컷에 나온 대로 타카하시(TAKAHASHI)라는 회사가 사용했던 것 같다.
작중에 그림이 나온 순서대로 선생님들의 동선을 나열하면 이렇다.
아폴로스테이션 핫초보리 주유소 → 오코노미무라 → 원폭돔앞 전차 정류장 → 죠난 거리 주차장 출입구 → 히로시마 시민병원
그런데 이 순서로 이동했다고 보기엔 동선이 부자연스럽다. 걷는 방향이나 시선 등 그림의 디테일과도 모순된다. 아마, 이노우에는 캐릭터의 동선까지 설계해서 그리지는 않았고 해당 지역의 배경을 단편적으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시다 기념체육관

구글맵(링크)
히로시마에서 <슬램덩크> 성지순례의 핵심은 이곳. 산왕전이 치러진, 히로시마 경제대학의 이시다 기념 체육관이다.
상호나 명칭을 항상 교묘하게 한 글자씩 바꾸는 이노우에답게, 작중에는 石田(이시다)의 머리글자를 右로 바꿔서 右田(미기타)로 나왔다.
이시다 체육관으로 가는 방법은, JR카베(可部)선을 타고 시모기온(下祇園) 역에서 하차하여 택시나 학교 셔틀버스를 타면 된다. 셔틀버스는 히로시마 경제대학을 방문하는 누구나 무료로 탈 수 있다. 나는 이 정보를 미처 몰랐던 터라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 등산하다시피 걸어갔다.

산왕전의 그날과 똑같은 날씨였다

변덕규와 김판석이 마주쳐 지나간 1층 출입구
내가 갔을 때는 방학 기간이라 출입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뒷문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건물을 돌아 뒤쪽으로 가봤더니 예상대로였다. 그곳을 지키던 관리인은 대번에 슬램덩크 방문객임을 알아보았다. 슬램덩크 견학자 전용 방명록에 이름과 연락처를 적고 나니, 놀랍게도 관리인은 체육관 안내와 설명을 해주었다.

내가 이곳에 오다니..! 감격스럽다

작중 묘사와 실제 체육관의 다른 점은, 스탠드 좌석 수. 좌석 수가 생각보다 적었다. 작중에선 골대 뒤쪽으로도 스탠드가 있었고, 관중석이 4면으로 그려졌다. 아마 큰 경기가 있을 때만 코트 가장자리에 간이 스탠드를 사방에 둘러 배치하는 것 같다.

네 모서리에는 관중석 출입구로 사용되는 발코니가 있다. 원작에서는 해남대 부속고가 이 발코니에 후반전 내내 서서 관람한다. 영화<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는 송태섭의 엄마(카오루상)가 경기 내내 저 기둥을 붙잡고 서서 관전하다가, 후반 수세에 몰리자 "뚫어(いけ)!!"라고 절박하게 외친다.

김판석은 졸다가 반대쪽 발코니로 퇴장한다. 이쪽으로 나가면 엘리베이터가 있기 때문인 듯.

산왕이 울면서 퇴장하는 복도.

선수들이 사용하는 로커도 구경할 수 있었다.
원작에는 나오지 않지만,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첫 장면에서 송태섭이 "다녀올게(行ってくる)"라고 말할 때 등장한다. 다만, 영화에서는 파란색 문짝이 아니라 칙칙한 회색이다. 그리고 체육관 전체 규모에 비하면 로커가 조금 작은 느낌이다.
히로시마 경제대학의 규모나 위상은 정확히 모르겠다. 그런데 체육관 시설만큼은 꽤 잘 갖추고 있었다. 여기서 또 한 번 생활체육 강국으로서 일본의 면모를 느꼈다. 농구 코트가 있는 메인 아레나 외에, 아래층엔 무도장이 있고 각종 체육부실이 종류별로 있었다. 심지어 축구부는 다른 곳에서 연습하니까, 체육시설이 이 체육관 외에 또 있다는 뜻이다.
단풍의 고장 히로시마
이노우에는 왜 인터하이 개최지를 히로시마로 설정했을까?
별 이유 없이 ‘그냥’ 일 수도 있지만, 모든 디테일에 의미가 있는 이노우에 스타일을 생각하면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히로시마를 며칠 돌아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의문이 해소되었다.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 1994년 개최된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의 영향.
<슬램덩크> 연재가 한창이던 90년대 초반,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 대한 일본 국민의 관심은 매우 뜨거웠다. 최초로 수도가 아닌 도시에서 개최된다는 점, 80년대 호황기를 거치며 국제 스포츠대회에 대한 인지도가 매우 올라간 점 등이 그 요인으로 꼽힌다.
히로시마시는 이 대회에 맞춰 도시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확충한다. <슬램덩크> 속 인터하이 개막식이 열린 히로시마현립 종합체육관은 아시안게임 일정에 맞춰 새로 지어졌다.

내가 방문한 인터하이 경기장들 모두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의 경기장이기도 하다.
이노우에가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 주목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노우에는 <슬램덩크>의 인지도를 이용해 아시안게임에 긍정적 영향력을 미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반대로 히로시마에 대한 관심과 인기에 편승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냥 핫하고 멋진 도시니까 그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행사에 맞춰 모든 체육관이 새 단장을 했기 때문에 방문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건, 그 이유가 뭐든 간에 아시안게임 개최지로써 히로시마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풍이다.
히로시마현의 대표 관광지인 미야지마(宮島)는 가을철 단풍으로 이름난 곳이다. 일본 3대 절경(일본 3경)으로도 꼽히는 이 섬에는 모미지다니 공원(紅葉谷公園, 단풍 계곡 공원)이 있고, 단풍잎 모양의 화과자인 모미지 만쥬도 기념품으로 유명하다.
‘모미지(もみじ)’라는 말은 단풍을 뜻하는 일본 고유어로, ‘가을철 나뭇잎이 알록달록 물드는 자연현상’이라는 뜻과 ‘단풍나무의 약어’로서의 단풍이라는 말 둘 다에 해당한다. 우리말 ‘단풍’과 의미와 쓰임이 모두 같다.

히로시마현의 상징목(木)이 ‘모미지’, 즉 단풍나무이다. 맨홀 뚜껑에까지 단풍을 그려 넣을 정도로 단풍에 진심인 지역이다.
그래서 단풍과 <슬램덩크>는 대체 무슨 관계일까?
<슬램덩크>의 두 주인공 중 한 명인 서태웅. 서태웅의 일본어 본명은 루카와 카에데(流川 楓)로, ‘카에데’는 단풍나무 또는 단풍잎을 뜻한다. 앞서 언급한 모미지라는 단어의 두 번째 뜻과 같다.
작품 전반부인 카나가와현 예선까지는 내용의 중심이 강백호였다. 강백호의 성장에 따라 북산고교의 역량도 비약적으로 향상되었고, 카나가와현 준우승으로 전국대회(인터하이)에 진출하게 되었다.
후반부인 히로시마 인터하이에서의 이야기는 서태웅이 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슈퍼루키라 불리기는 했으나 더 이상 성장의 여지는 그다지 없어 보였다. 입학할 때부터 완성형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로시마로 온 이후 자타공인 팀의 에이스로 등극한다. 풍전전에서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분투하는 집념을 보여주었고, 산왕전에서는 슈퍼에이스 정우성과의 1on1(원온원)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한 층 성장한다. 이노우에가 강조하고자 한 작품 전체의 주제 의식(팀플레이)도 종국에는 상당 부분 서태웅에 의해 구현된다.
<슬램덩크>의 줄거리를 ‘농구를 통한 성장 스토리’라고 요약할 때, 인터하이에 와서 가장 크게 성장한 캐릭터는 단연 서태웅(카에데)이다. 인터하이의 개최 지역을, 단풍을 상징으로 하는 히로시마로 정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히로시마 도심을 산책하다 이런 것을 발견했다.

나가레카와 거리(流川通り)
나가레카와는 서태웅의 성인 ‘루카와(흐를 류 流, 강 천 川)’와 한자가 같다. 번역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풍전고 녀석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태웅을 루카와라고 부르지 않고 나가레카와라고 부른다.
틀림없다. 아시안게임이고 단풍이고 뭐고 간에, 히로시마에 ‘서태웅 거리’가 있는데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하겠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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