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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마음의 짐이었던 대출금 3,000만 원

 

2001년, 5년의 임대 기간이 끝났다. 분양 1순위로 내 집 마련을 하게 된 거다. 당시 21평 정림동 아파트 매입가는 5,800만 원. 5년 임대 후 분양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주변 시세보다 저렴했다. 그럼에도 모아둔 돈이 없었던 동분과 송일영은 3,000만 원을 대출받았다. 그런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마침내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 1982년 보증금 없는 월세 2만 원짜리 단칸방에서 시작한 지 꼭 20년 만이었고, 시댁에서 분가한 1988년부터 따져도 13년 만이었다. 동분 나이 41살이었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의 ‘유형별 주택매매가격지수’에 근거해 2001년 매입가 5,800만 원인 대전 아파트를 2023년 6월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9,800만 원의 값어치다. 말하자면 결혼한 지 20년 만에 채 1억 원이 안 되는 21평 아파트를 겨우 매입한 셈인 거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1988년에 서당에서 나올 때 니네 큰아빠가 그동안 고생했다고 쌀 반 가마니(40kg) 사줬거든. 내가 시댁에서 받은 거라고는 진짜로 그게 전부였어. 그렇게 6살이었던 니네 형 안고, 이제 돌 지난 너 업고 보증금도 없는 월세 3만 원짜리 단칸방에서 시작한 겨. 그전에도 물론 고생 많이 했지만, 분가하고 나와서부터 또 얼마나 고생했게. 집 살 때도 사실 형편은 말이 아니었지. IMF에 홈쇼핑 타격으로 이불 가게 접고, 한창 길바닥에서 이불 팔 때였으니까. 그러니까 그 돈 3,000만 원이 없어서 대출받은 거 아녀. 여하간, 계약서에 도장 찍고 서류 받아 나오는데, 정말로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더라고. 그 과정을 견뎌낸 내 스스로가 너~무 대견스러운 거 있지.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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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의 임대가 끝나고 마침내 내 집 마련했던 2001년

부부동반으로 울릉도 여행가서 찍은 사진

 

문제는 대출금이었다. 동분이나 송일영이나 그전까지 그렇게 큰돈을 어디서 빌려본 적이 없었다. 내 집이 생겨서 좋긴 한데, 한편으론 앞으로 3,000만 원을 어떻게 갚아야 하나 걱정되더라는 것.

 

“지금은 대출 1억이나 낀 집에 살면서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거든? 그때는 그 3,000만 원이라는 돈이 진짜 엄~청 크게 느껴졌어. 그 집에서 사는 10년 내내 엄마한테는 그 돈이 항상 마음의 짐이었어. 왜, 그런 기분 있잖어. 방학 때 재밌게 놀다가도 잔뜩 밀린 방학 숙제 생각하면 갑자기 우울해지는 기분. 엄마가 맨날 그랬다니까? 자려고 누워 있다가, 아휴 3,000만 원 언제 갚나 하면서 한숨 쉬고, 오랜만에 배부르게 외식하고 와서도 3,000만 원 생각하면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고. 호호호. 그만큼 아직은 어렸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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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에 찍은 첫 번째 가족사진과

2003년 정림동 21평 아파트에 살 때 찍은 두 번째 가족사진.

14년 사이, 동분과 송일영은 이렇게 늙고,

주성과 주홍은 이렇게 컸다.

 

이렇듯, 동분과 송일영은 그 모진 세월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순수한 면이 있었다. 그런 순수함(?)을 보여주는 일화가 몇 개 더 있다. 그 대표적인 게 겁도 없이 일숫돈 50만 원 빌려, 덜컥 포장마차 차렸던 일화다.(기사링크 :61년생 정동분 19 : 포장마차 지키는 25살 여인과 3살 아이)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이른바 ‘흑염소’ 사건이다. 내가 고등학생 때였다. 공부하느라 고생하는 우리 막둥이 몸보신 시켜준다고, 아빠가 날 데려간 곳은 흑염소탕 집. 평소, 당신 얘기를 거의 안 하는 아빠가 그날따라 옛날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아빠가 옛날에 할머니 모시고 살 때 흑염소도 키웠었는데…….”

 

때는 바야흐로 1983년이었다. 대한생명 충북 지사장 수행비서로 일했던 송일영은 경비 절감을 이유로 1년 만에 해고당했다. 그러는 바람에 더 이상 버틸 명분도, 방법도 없어 신혼집 정리하고 시댁으로 들어갔던 건데. 여하간, 그때 송일영은 퇴직금으로 60만 원을 받았다.

 

「공무원보수규정」 제2장 봉급 제5조(공무원의 봉급) [별표 3] 일반직공무원과 일반직에 준하는 특정직 및 별정직 공무원 등의 봉급표에 따르면 1983년 6급 1호봉(신규) 월급이 17만4,000원이었다. 2023년 9급 1호봉(신규) 월급은 177만800원이다. 1983년 대비 약 10배 올랐다. 이를 기준으로 단순 계산하면 당시 송일영이 받은 퇴직금은 600만 원의 값어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분과 송일영은 퇴직금 60만 원을 어떻게 할지 몇 날 며칠 고민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흑염소였다. 이왕 시골집으로 들어가는 거 흑염소를 키워보기로 결심한 것. 하여 60만 원 전부 털어 흑염소를 10마리나 샀다. 시골집 마당에 풀어놓고 키우기 시작했다. 결과는? 흑염소는커녕 강아지 한 마리 키워본 적 없던 동분과 송일영. 관리를 제대로 못 했다.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죽어 나가더란다. 그렇게 한 번씩 마을 잔치(?)가 열렸다. 끝내는 10마리 모두 잡아먹어 버렸단다. 그렇게나 순수한 부부였다.

 

“그때 아빠가 흑염소 참 잘 잡았지. 허허허……. 국물 식겄다, 주홍아. 흑염소가 몸에 좋은 겨. 많이 먹어.”

 

2011년 부동산 폭등

 

다시 동분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2001년, 마침내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 동분은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집이 마지막이라는 생각 말이다. 겨우 방 2칸에 거실 딸린 21평짜리 아파트지만, 단칸방 살던 때 생각하면 감지덕지했다. 그것보다도 3,000만 원을 어떻게 갚을지가 더 큰 고민이었다. 그 정도로 길바닥 이불장사가 녹록지 않던 시기였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다. 그 사이 큰아들 주성이 직업군인으로 4년간 군대 갔다. 전역하고 얼마 안 있어, 작은아들 주홍이 독립했다. 그러니 방은 2칸이었어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그렇게 2011년이 됐다. 그렇다. 지방 부동산이 요동치던 바로 그해였다.

 

2011년 대한민국 부동산은 매우 특수한 한 해였다. 수도권 아파트 시장은 글로벌 금융위기와 금융규제 강화 등 영향으로 수요심리가 크게 위축됐다. 이에 따라 2010년 매매가 대비 서울(-1.73%), 수도권(-0.5%), 인천(-3%) 등이 하락했다. 반면, 지방 아파트 시장은 수도권과 상반된 모습이었다. 공급물량 감소로 2010년부터 회복세(2009년 매매가 대비 경남(9.85%), 부산(9.22%), 전북(9.07%), 대전(5.7%), 전남(4.28%) 등이 상승했다.)를 보였던 지방 시장은 기업도시, 혁신도시, 여주엑스포, 광주유니버시아드,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등 지역별 개발 호재까지 겹치며 아파트값이 대폭 상승했다. 이 가운데 충청권도 과학벨트 선정, 세종시 개발 등의 호재에 힘입어 매매시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2010년 매매가 대비 전북(15.57%), 부산(14.08%), 광주(13.42%), 경남(13.41%), 대전(12.92%) 등이 크게 상승했다.(<아시아경제> ‘2010 부동산 시장 결산 ① 호재마저 삼켜버린 침체’, <부동산 114> ‘2011년 결산-아파트 전세값 강세 속 소형과 지방 아파트값 상승’ 등 참조.)

 

“그때 우리가 104동 살았잖어. 그 104동 반장하던 아줌마가 있어. 엄마랑 동갑이라 오며 가며 친하게 지냈었거든. 그 아줌마가 엄마한테는 아주 은인이여. 어느 날 갑자기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한다는 겨. 축하한다고, 부럽다고 했더니, 엄마한테도 빨리 집 알아보라고 하더라? 그래가지고 ‘아휴~ 내가 그럴 돈이 어딨어, 맨날 쪼들려서 이 집 대출금도 이자만 겨우 갚고 있는데.’ 그랬더니, 아줌마가 펄쩍 뛰면서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한다고, 지금 집값이 얼마나 올랐는데 그러냐고. 호호호. 엄마나 아빠나 바보 같아가지고 먹고산다고, 집값이 오르는지 어쩌는지도 모르고 지냈던 겨.”

 

뒤늦게 알아보니 5,800만 원에 매입한 21평 정림동 아파트가 1억 500만 원까지 올라가 있었다. 물론 그사이 10년의 세월이 있었지만, 동분은 놀라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대출금 3,000만 원을 빼도 무려 7,500만 원이었다.

 

단돈 만 원이 아까워, 집어 들었던 과일을 도로 내려놓고 슈퍼에서 나온 게 도대체 몇 번인지, 부사관으로 군대 가 있던 큰아들 주성에게 전화해 돈 빌려달라고 했던 건 또 몇 번인지, 작은아들 주홍이 갖고 싶다던 나이키 신발 사주기로 해놓고 미룬 건 또 몇 번인지, 전국 팔도로 이불 장사 다니며 컵라면으로 끼니 때웠던 날들, 야채 장사 아르바이트하며 견뎌야 했던 갖은 수모까지. 지난 10년의 기억이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떠올랐다.

 

“결국, 반장 아줌마는 32평짜리 다른 동네 아파트로 이사 갔지. 가면서 엄마한테 같이 가자고 하더라고. 아휴 근데, 그 집으로 이사 가려면 또 1억이나 대출받아야 하는데 무섭더라고. 내 수준에 1억 대출받아서 언제 또 갚어. 3,000만 원 대출받은 것도 내내 마음의 짐이었는데. 그래가지고 104동 21평 집 팔고, 대출 7,000만 원 더 받아가지고 101동 24평짜리를 산 겨. 1억 4,700만 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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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방 2칸이던 정림동 21평 아파트 살 때 찍은 사진.

주성이 고등학교 졸업 후 줄곧 타지 생활하다가

곧바로 4년간 군대에 갔고, 전역한 직후엔 반대로

작은아들 주홍이 독립했다.

주성과 주홍이 교대로 작은방을 썼던 셈이다.

 

누구처럼 부모님 도움받아 전셋집부터 시작한 것도 아니었고, 또 누구처럼 벌이가 좋아 단숨에 24평까지 온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딱 ‘반 보’씩 전진했다. 단칸방에서 시작해 11평으로, 다시 16평으로, 또 21평으로, 마침내 24평까지 왔다. 꼭 30년이 걸렸다. 동분 나이 51살이었다.

 

“꼴랑 3평 차이였지만, 결정적으로다가 24평은 방이 세 칸이었잖어. 21평에 살 때 말이여. 이 집이 마지막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나중에 주성이, 주홍이 결혼해가지고 명절에 며느리랑 손주들까지 다 오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방은 두 칸밖에 없는데 다 어디서 자냔 말이여. 그러다 방 세 칸짜리로 이사를 했으니 한시름 놨던 거지. 호호호. 엄마는 다른 것보다도 그 아파트 단지 안에서 누가 어디 사냐고 물어볼 때, ‘어~! 나 101동 살어~!!’ 그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기분이 좋았어. 호호호. 아 왜, 그 아파트 안에서는 101동이 젤 넓었잖어. 그러니까 다른 말 필요 없이 101동 산다는 말만 해도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는 거지.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