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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스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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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알에이치코리아>

 

 

당신이 죽기 직전에 경험하는 것들

 

...... 통증이 갑작스레 다급하게 몰려오는 바람에 아무 준비도 하지 못한 그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우선 통증이 찾아온다. 이 마지막 통증은 그간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장 강력한 것이다. 인생은 곧 생로병사의 과정이라고 했다. 사고사가 아니라면 대부분 질병으로 죽게 된다는 것은 거의 필연이다. 아마도 의사는 당신에게 강력한 진통제를 처방해 주었을 것이다. 그것이 의사가 건네는 마지막 선물이다.

 

진통제의 힘으로 통증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숨소리를 확인하게 된다. 건강했을 때와는 다르게 들이마시는 한숨 한숨이 폐에 쌓인다는 것이 느껴진다. 숨소리는 무언가에 긁히는 듯하며 이명처럼 귓속에서 메아리친다. 통념과는 다르게 죽기 직전에 혼자임이 오히려 편안함을 준다.

 

죽음은 이기적이야. 그는 생각했다. 죽어가는 사람은 혼자만의 순간을 원하지. 아이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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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벨베데레미술관>

 

자신을 둘러싼 공간들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낀다. 팔다리에 나른함이 밀려든다. 의식을 부여잡으려고 애쓰며 힘을 모으게 된다. 뼈 위에 가죽만이 남아 있을 손가락을 움직여보기도 하고, 관절이 움직이는지 확인하고 싶은 욕망도 든다. 움직이려는 시도를 해보기도 한다. 

 

이후 마지막 파도가 밀려온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리고 눈을 감는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에게 셰익스피어가 건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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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링크>

 

‘윌리엄 스토너’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집안일을 거들어야 했다. 여섯 살 때부터 암소들의 젖을 짜야 했고, 닭들이 낳은 달걀을 가져와야 했다. 그가 8마일 떨어진 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그의 하루는 새벽부터 밤까지 이런 일들로 채워져 있었다. 저녁마다 보는 아버지의 손은 갈라진 살갗 속에 흙이 박혀서 씻어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늙어가는 아버지를 대신해 밭일을 맡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컬럼비아의 미주리 농과대학에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달걀을 팔아 번 돈으로 사준 양복과 아버지가 입던 낡은 외투 및 작업복. 그리고 가을에 밀을 수확하면 갚기로 하고 이웃에 빌린 돈 25달러. 이것들을 들고 스토너는 컬럼비아에 사는 사촌 ‘푸트’의 농장으로 향했다. 

 

푸트 네가 창고로 쓰는 다락방을 쓰며 9개월간 숙식을 해결하는 조건으로, 푸트 농장의 가축들 돌보기, 장작 패기, 밭일 등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 공부도 농장 일을 도울 때처럼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이 철저하게 양심적으로 했다.

 

2학년 1학기 때 그는 교양 강의 두 개를 들었다. 하나는 토양화학 강의였고, 다른 하나는 필수 과목인 영문학 개론이었다. 강의를 맡은 ‘아처 슬론’ 교수는 50대 초반의 중년 남자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얕보고 경멸하는 듯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가르치는 것 사이의 간격이 너무 넓어 그것을 좁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학생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하고 싫어했다.

 

스토너는 농장 일을 할 때나 창문 하나 없는 다락방의 흐릿한 램프 밑에서 있을 때나 항상 슬론 교수를 떠올리며 책을 읽고 외우고 또 외웠다. 그러나 첫 시험에서 스토너의 점수는 거의 낙제에 가까웠다. 두 번째 시험 역시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소네트 수업 시간이었다. 슬론 교수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 분노는 스토너를 향한 것이었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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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링크>

 

그해 2학기, 스토너는 농과대 커리큘럼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철학과 고대 역사의 기초강의 한 개씩과 영문학 강의 두 개를 들었다. 스토너는 계속 푸트네 농장에서 일을 했지만, 예전처럼 늦게까지 일하지는 않았다. 최대한 자기만의 시간을 만들었으며, 가급적 학교 도서관에서 그 시간을 썼다. 수면 부족과 과로로 눈은 충혈되고 따끔거렸지만,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익혔으며 가끔씩 환상을 만나기도 했다. 그 환상 속에서는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파올로’와 ‘프란체스카’가, 그리고 ‘헬레네’와 ‘파리스’가 그의 앞을 거닐었다.

 

“모르겠나, 스토너 군?” 슬론이 물었다. “아직도 자신을 모르겠어?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이네.”

 

스토너가 4학년 중반일 때, 그를 연구실로 부른 슬론 교수의 말에 스토너는 비로소 자신이 이 대학에 온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스토너는 부모님께 졸업 후 학교에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분노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스토너는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슬론 교수는 스토너가 박사과정을 시작할 때, 신입생 대상의 기초영어 두 강좌를 맡도록 손을 썼다. 강사료는 1년에 400달러였다. 

 

 

스토너의 첫사랑과 결혼

  

1914년 7월 유럽에서 전쟁이 터졌다. 그리고 1년 뒤인 1915년 5월 7일, 독일 잠수함이 미국인 승객 114명을 태운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를 침몰시켰다. 미국이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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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타니아호 침몰

 

스토너를 포함한 많은 미국 젊은이는 혼란을 느끼기도 했고, 열정과 강렬한 용기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기도 했다. 스토너의 유일한 친구이자 박사과정 동료인 ‘매스터스’와 ‘핀치’도 입대를 결심했다. 그러나 스토너는 곧 혼란 속에서도 학교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는 자신 안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강의를 할 때와 들을 때 모두 경이와 놀라움을 경험하고 있었다. 밀턴의 시나 베이컨의 에세이, 벤 존슨의 희곡 모두가 그랬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그녀의 눈이었다. 몹시 커다란 그 눈은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연한 파란색이었다. 그 눈을 보면 그의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세계로 끌려가는 것 같았다.

 

또 시간이 흘렀다. 스토너는 박사과정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임강사가 된 스토너는 전쟁에서 돌아온 핀치와 함께 문리대 학장인 ‘조시아 클레몬트’의 리셉션에 참가했다. 핀치와 함께 입대했던 매스터스는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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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링크>

 

클레몬트 학장의 리셉션에서 스토너는 ‘이디스 엘레인 보스트윅’을 만났다. 그녀를 본 순간 그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확신했다. 이것이 그의 첫사랑이었다. 스토너는 그녀가 자신의 집이 있는 세인트루이스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그녀를 만났다. 그리고 고백했고 청혼했다.

 

스토너는 속에서부터 역겨움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분노도 솟았다. 그는 잠시 마음을 다스린 후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최대한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유지했다.

 

이디스의 집은 스토너가 처음 보는 크고 우아한 집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스토너의 수입에 대해 묻고는 곧 생활 수준의 차이에 대해 말하며 당혹해했다. 스토너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자신이 이디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둘이 행복할 것임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디스도 단호하게 빨리 결혼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혼식은 콜럼비아(미국)에서 올렸다. 이디스는 스토너의 부모에 대해 과민하게 반응했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불안해했다. 결혼식 후,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과 이디스를 남겨둔 채, 볼품없고 가무잡잡하고 자그마한 아내와 떠났다. 

 

스토너는 자신에게 아내가 생겼음을 실감했다. 둘은 세인트루이스 엠배서더 호텔 10층 스위트룸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이디스의 부모가 결혼 선물로 예약해 준 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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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모두 성 경험이 없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들의 신혼여행도 실패로 끝났다. 첫 경험을 마치고, 이디스는 욕실로 달려가 토한 후 스토너에게 등을 돌리고 잤다.

 

 

실패한 결혼과 ‘그레이스’의 출생 

 

한 달도 안 돼서 그는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1년도 안 돼서 결혼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다.

 

이디스를 기쁘게 하기 위한 그의 모든 노력은 허사였다. 그가 애정을 담아 말을 걸거나 몸을 만지면, 그녀는 그를 외면하고 방으로 숨어들어 갔다. 스토너는 그녀의 기분을 위해 가끔 젊은 강사들과 조교들을 집으로 초청해 소규모 디너 파티를 열기도 했다. 그러면 이디스는 모임의 여주인 역할을 훌륭히 했으나 손님들이 가고 나면 그녀의 겉치레는 즉시 무너졌다. 그녀는 가끔 결혼 때문에 가지 못한 유럽 여행과 낡고 좁은 집, 그리고 사지 못할 자동차에 울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레이스는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예쁜 아이였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금발은 아직 솜털 같았다. 빨갛던 피부도 며칠 만에 반짝이는 황금핵이 깃든 분홍색으로 변했다.

 

딸, 그레이스가 태어났다. 임신과 동시에 이디스는 스토너의 손이 닿는 것조차 거부했다. 심지어 바라보는 것도 싫어했다. 그레이스가 태어난 후에는 마치 병자처럼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모든 살림은 스토너가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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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마

 

그는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학생들의 과제를 채점하고 강의를 준비했으며, 그레이스에게 아침을 먹였다. 그리고 이디스가 먹을 식사와 자신의 점심 도시락을 쌌다. 수업이 끝나면 즉시 집으로 와 청소하고 이디스를 돌봤다.

 

그래서 그레이스 스토너가 태어난 뒤 처음 1년 동안 접한 것은 오로지 아버지의 손길, 아버지의 목소리,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아처 슬론 교수가 사망했다. 슬론은 자신의 연구실 책상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마도 그는 주말 내내 책상에 앉아 허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죽었을 것이다. 분명 자연사였겠지만,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검시관은 심장마비라고 했지만, 스토너는 슬론이 분노와 절망의 순간에 자기 의지로 스스로 심장을 멈추게 했으리란 상상을 했다. 현재까지 그를 이끌어 준 사람이었다. 가족이 없는 그를 위해 스토너가 운구를 맡았다.

 

관이 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 울어준 사람은 바로 스토너였다. 이제 완전히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망자의 고독이 그 울음으로 조금 덜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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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링크>

 

그레이스의 육아는 계속 스토너의 차지였다. 그는 퇴근하면 그레이스를 자신이 일하는 책상 앞에서 놀게 했다. 아이는 바닥에서 조용히 잘 놀았다. 가끔 그가 말을 걸면 아이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서히 기쁨을 드러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스토너는 그럭저럭 자신이 삶에 만족했다. 이 정도면 행복한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스토너의 순수한 분노 

 

로맥스는 문을 닫은 뒤 몇 걸음 안으로 들어와 키는 5피트(약 150센티미터)를 간신히 넘긴 수준이고, 몸은 기괴할 정도로 흉측했다. 왼쪽 어깨에서 목을 향해 작은 혹이 솟아 있고, 왼팔은 옆구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아처 슬론 교수의 후임으로 ‘홀리스 로맥스’ 교수가 부임했다. 그는 19세기 영문학 전문가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기형이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묵직하고 성량이 풍부했고, 이목구비는 감정이 풍부해 보였으며 강렬했다. 강의도 잘했다. 그의 강의는 활기찼고 가끔 괴짜 짓도 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대단히 인기 있는 교수였다. 스토너는 그와 좀 더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몰랐다.

 

그리고 ‘찰스 워커’가 나타났다. 그 역시 왼팔이 옆구리에 뻣뻣하게 늘어져 있고, 걸을 때마다 왼발을 바닥에 질질 끄는 불구였다. 그는 스토너에게 자신이 로맥스 교수의 지도를 받는 박사과정 2년 차 학생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스토너가 진행하는 라틴 전통문학과 르네상스 문학에 관한 세미나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스토너는 거절했다. 이미 정원이 다 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집요했다. 그리고 주장의 끝에는 언제나 로맥스 교수의 이름을 말했다. 그의 추천이며 그가 보내서 왔다고.

 

접신이라도 한 것처럼 눈동자가 살짝 위로 말려 올라갔다. 그의 말과 행동이 왠지 기괴할 정도로 친숙하게 느껴졌다. 스토너는 그 이유를 문득 깨달았다. 이것은 홀리스 로맥스, 그의 대략적인 캐리커처였다. 경멸이나 반감이 아니라 존경과 사랑의 몸짓이 그 캐리커처에서 흘러나왔다.

 

스토너는 결국 워커를 세미나에 참여시켰다. 그러나 워커는 수업의 방해자였다. 그것도 아주 기괴한. 그리고 불구인 자신의 몸을 핑계로 계속 발표를 미뤄왔다. 더 이상 미룬다면 학점을 줄 수 없다는 스토너의 마지막 경고로 워커의 발표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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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 학생 나와서 발표하세요

출처-<링크>

 

그의 발표는 즉흥적인 공연에 불과했다. 그의 말솜씨는 현란했지만, 내용은 부정확했고, 창의력과 기괴한 존재감은 진짜였지만 결국은 대단한 허장성세일 뿐이었다. 발표의 내용은 앞서 진행된 젊은 강사 ‘캐서린 드리스콜’ 양의 발표 내용을 부당하게 비튼 것이었다. 스토너는 캐서린의 발표를 극찬했었다.

 

순수하고 둔탁한 분노가 스토너의 가슴속에 치밀어 올라 처음 발표가 시작되었을 때 그가 느꼈던 복합적인 감정을 압도해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일어서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저 소극(笑劇)을 중단시키고 싶었다.

 

스토너는 고개를 살짝 돌려 캐서린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이 기괴한 발표를 들으면서도 차분했다. 다만 검은 눈이 지루함과 비슷한 무관심을 나타낼 뿐이었다. 스토너의 머뭇거림이 결국은 워커가 끝까지 발표할 수 있게 했다. 스토너는 아무 코멘트 없이 수업을 종료했다.

 

 

스토너를 찾아온 중년의 사랑

 

캐서린 드리스콜이 문을 열었을 때 윌리엄 스토너는 하마터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논문을 봐주기로 한 약속을 어긴 스토너가 사과를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스토너는 놀랐다. 강의실이나 학교에서 보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렇게나 쓸어올린 머리카락 덕분에 작은 분홍색 귀가 드러나 있었고, 남자 같은 셔츠와 검은 바지는 그녀를 평소보다 더 우아하고 날씬하게 보이게 했다. 둘은 커피를 마시며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그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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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는 거의 매일 수업이 끝나면 캐서린의 집으로 갔다. 둘은 놀아도 지치지 않는 아이들처럼 사랑을 나누고 또 나눴다. 그렇게 봄날이 흘러갔다. 그레이스도 그의 삶에 행복감을 주었다. 아이는 서툴지만, 매력적인 그림을 그려 아버지에게 보여주었고, 스토너는 초등학교 1학년 독본을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그는 사실상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자라나는 아이의 모습을 놀라움과 사랑의 눈길로 지켜보았다. 아이의 얼굴에는 내면에서 움직이는 지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그간의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존 관념’에 따르면, 이른바 그의 ‘불륜’이 진행되면서 가족과의 관계가 꾸준히 악화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꾸준히 나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스토너는 책을 썼다. 아직 출판되지 않은 그 책 덕분에 그는 조교수로 승진하며 종신교수가 되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이디스는 은행장인 자신의 아버지 ‘보스트윅’으로부터 6,000달러를 대출해 왔다. 그녀는 스토너와 그레이스를 위해서 넓은 집으로 옮기겠다고 말했다. 그 빚을 갚으려면 스토너는 자신이 받는 월급의 절반을 매달 내놓아야 했지만, 받아들였다. 그리고 책 집필을 위해 하지 않기로 했던 여름 강의를 몇 년은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로맥스의 보복과 떠나는 캐서린

 

“나도 유감이야. 나로 인해 저 친구는 학위를 받을 수 없을 것이고, 대학의 강단에 설 수도 없을 테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일세. 저 친구가 교육자가 되는 것은...... 재앙이야.”

 

로맥스 교수는 스토너에게 찰스 워커의 합격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스토너의 태도는 단호했다. 스토너에게 F학점을 받은 워커는 로맥스 교수의 도움으로 다시 한번 구두시험의 기회를 받았으나 그의 알맹이 없는 현란한 말재주와 기괴한 공연은 변한 것이 없었다. 그는 스토너의 기본적인 질문에도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스토너에게 있어서 워커 같은 사람을 강의실에 풀어 놓는 것은 재앙이었으며,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맥스는 집요했다. 영문과의 차기 학과장으로 내정된 것을 은연중 내비치며 말도 안 되는 구실로 스토너를 공격했다. 워커를 합격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는 기형적인 혹이 나 있는 자신의 왼쪽 어깨를 들썩이며 스토너가 장애인 학생을 부당하게 대우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세미나에 참여한 다른 학생들이 워커를 조롱하고 비웃도록 허락했다는 억지를 부렸다. 스토너는 자신이 진흙탕 속에 빠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열흘 뒤 로맥스 교수가 영문과 학과장으로 임명되었다. 로맥스는 스토너에게는 1학년 작문 수업과 2학년 개론 수업 하나를 배정했다. 이것은 초보 강사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었으며 강의와 강의 사이의 간격도 길게 벌어져 있었다. 그러나 스토너는 항의하지 않았다. 한 해 동안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강의를 해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세상에 알려졌다. 그것도 가을학기가 시작되자마자 급속히. 십중팔구 사람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잘 발휘하는 특별한 천리안의 능력 덕분에 밝혀진 것 같았다.

 

스토너는 캐서린과 이별해야 했다. 로맥스의 솜씨였다. 로맥스는 스토너와 캐서린의 열애 소문을 듣자마자 캐서린을 십자가에 못 박을 준비에 착수했다. 그가 내세운 것은 ‘개신교 윤리’였고 ‘학교와 학과의 평판’이었다. 캐서린이 스스로 떠나지 않는다면, 그녀는 해고될 것이고 다시 강단에 선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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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끌어안았고, 말을 하지 않으려고 사랑을 나눴다. 서로를 잘 아는 오랜 연인들의 부드러운 관능과 상실을 앞두고 새로이 솟아난 강렬한 열정으로 사랑을 나눴다.

 

스토너는 캐서린과 마지막 밤 이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스토너와 헤어진 뒤 날이 밝기 전 떠나버렸다. 아마도 캐서린은 전부터 떠날 계획을 짠 것임에 틀림없었다. 스토너는 자신이 캐서린의 계획을 미리 알지 못했다는 것에 감사했으며, 이후 20여 년 동안 로맥스와 다시는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레이스의 임신과 육체의 마모

 

이디스는 둘 중 한명이나 두 사람 모두에게 벌컥 화를 냈다. 스토너는 그녀의 모든 행동, 즉 분노, 고뇌, 고한, 증오에 찬 침묵 등을 모두 남의 일처럼 바라보았다.

 

이디스는 스토너의 불륜을 비웃더니 돌연 그레이스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그레이스에게 풍선처럼 부푼 치마를 입혔고, 피아노를 배우게 했고, 파티에 참여하게 했다. 그녀는 딸의 숙제와 독서를 엄격히 감독했고, 결과적으로 그레이스와 스토너를 분리했다. 교육자가 될 만한 지혜로운 아이 그레이스는 야위어갔다. 아빠에게 빛나는 눈동자로 질문을 던지던 아이는 이제 침묵으로 스토너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레이스는 열세 살이 되면서 갑자기 살이 찌기 시작했다. 체중이 20킬로그램 가까이 증가했다. 늘 사탕과 같은 단 것들을 항상 물고 있었다. 아이의 내면에 있던 어떤 것이 느슨하고 말랑말랑하고 절망적으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열일곱 살, 고등학교 3학년이 된 그레이스에게 또 한 번 변화가 찾아왔다. 급속도로 살이 찔 때와 마찬가지로 마법처럼 살이 빠졌다. 그리고 남자들에게 인기 있는 아이가 되었다. 이디스는 기뻐했고 자신의 교육이 옳았다며 의기양양했다. 

 

그는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다. 아이가 스스럼없이 말했다. 

 

“저 임신했어요, 아버지.”

 

그러자 다시 비명이 울렸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분노에 차고 찌르는 듯한 소리였다.

 

그레이스의 임신에 대한 이디스의 히스테리는 하루 만에 사라졌다. 그녀는 상대 청년과 결혼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며 들떠 있었다. 그녀의 극성에 걸맞게 그녀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그레이스는 상대 청년의 집이 있는 세인트루이스에서 치안판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곧 남편과 헤어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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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닷새 전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했고, 결혼식 두 달 뒤 그레이스의 남편이 자원입대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의 남편은 그로부터 6개월 뒤 태평양의 작은 섬 바닷가에서 전사했다. 

 

마치 자신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터무니없는 변장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하얗게 세어버린 그 텁수룩한 눈썹, 헝클어진 백발, 앙상한 뼈 주위로 늘어진 살, 나이 든 척하는 깊은 주름살들을 모두 벗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월이 휙휙 흘러갔다. 스토너는 예순 살이 되었다. 그 세월 속에서 스토너의 육체는 빠른 속도로 마모되어 갔다. 청각 장애가 찾아왔고, 알 수도 없고 회복되지도 않는 피로가 계속 쌓여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는 서류철과 X선 사진과 메모들을 들여다보며 스토너에게 배 속에 종양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도 상당히 큰 것이라고. 스토너는 수술을 받았으나 암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다. 발견이 늦어서 암이 너무 많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토너의 평범한 죽음  

 

“넌 아주 예쁜 아이였다.” 

 

그의 귀에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그는 이것이 누구에게 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레이스가 왔다. 스토너의 눈앞에서 빛이 어지럽게 빙빙 돌더니 딸의 얼굴로 변했다. 주름이 지고, 우울하고, 걱정 때문에 초췌해진 얼굴이었다. 이제는 술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 된 그레이스였다. 그레이스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고 눈은 붉게 충혈되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 만남이 스토너와 딸의 마지막 만남이었고, ‘좀 쉬세요’가 그레이스의 마지막 인사였다.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떠난 뒤 조급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들이 가끔 있었다. 별로 여행을 하고 싶지도 않으면서 여행을 떠나는 순간을 기대하는 사람처럼.

 

스토너는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통증에 힘들게 알약을 꺼내 여러 알을 입에 털어 넣고 물을 삼켰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는 냉정하게 남들 눈에는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회상했다. 캐서린, 사랑을 했지만 포기해야 했던 그녀,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실제로 되었지만, 평생 무심한 교사였고, 지혜를 원했지만 끝내는 무지였던 자신에 대해서.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눈을 뜨니 사방이 어두웠다. 그는 창밖의 하늘을 보았다. 구름 속에서 가느다란 달빛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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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는 숨을 쉬려고 애썼다. 숨을 쉴 때마다 기운이 더 많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 들숨과 함께 자신의 안쪽 깊숙한 곳 어딘가가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으나 이내 그 느낌이 사라졌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스토너는 다시 생각했다. 스토너는 협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위에는 오랫동안 손도 대지 않은 책들이 있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겼다.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책장이 살아 있는 것 같았고 그 느낌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그의 살과 뼈를 훑었다.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인생에 무엇을 기대하는가

 

‘고타마 싯다르타’는 오늘날 인도와 네팔 사이쯤에 있는 작은 왕국의 태자로 태어났습니다. 소위 말하는 금수저였던 셈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왕궁 밖 현실을 보게 됩니다. 동문 밖에서는 늙어서 이빨은 빠지고 등이 굽은 노인을 만났고, 남문 밖에서는 몸 아홉 구멍에서 썩은 물이 나오는 병자를 만납니다. 서문으로 나가서는 상여 행렬을 만납니다. 상여의 주인은 사고로 죽은 잘생긴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세상은 쓴맛이 났다. 인생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극심한 고통이었다.’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中 -

 

왕자 싯다르타가 깨달은 인생이란 결국,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늙음과 질병 끝에 찾아오는 죽음, 즉 ‘생로병사’였습니다. 싯다르타는 스물아홉의 나이에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혜택을 버리고 출가합니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고통과 근심에서 벗어날 해탈의 길을 찾기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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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결국 이런 것이라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며 오늘 하루도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싯다르타와 같은 특별한 사람이 아닌 평범한 우리들, 즉 ‘스토너’ 같은 우리들 말입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스토너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에 던졌던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부여잡고 해답을 구해보려고 몸부림치며 애를 썼습니다. 이 글을 쓰며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이 될 때까지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기에 힘든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것일까요.

 

스토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살면서 마주친 몇 번의 중요한 순간들, 진로 선택, 결혼, 사랑, 직업 수행에서 오는 문제들, 상사의 부당한 박해, 자식에 대한 사랑과 좌절 등은 우리가 인생에서 한 번쯤은 경험해 봤거나 경험하게 될 낯익은 것들입니다. 

 

이때마다 스토너의 선택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었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었으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는 그의 삶에서 애잔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그를 실패자로 규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참고 견디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가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스토너의 삶을 슬프고 불행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삶은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작가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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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스토너’의 작가 존 윌리엄스

 

스토너는 끝내 암에 걸려 죽습니다. 그가 죽음 직전에 자신에게 던진 질문, ‘나는 무엇을 기대했는가?’는 해답을 찾고자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나온 세월에 대한 성찰이며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는가에 대한 마지막 확인 과정인 것입니다. 이 질문은 바뀌어야 합니다. ‘나는 자신에게 기대한 만큼 살았는가’로 말입니다.

 

인생은 곧 생로병사의 과정이며 이것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라면 우리의 마지막도 스토너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모든 죽음은 슬픈 것이며, 살아온 세월에 아쉬움과 후회가 남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나의 죽음 앞에서 ‘그는 실패했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인생은 나의 것입니다. 세상의 평가와 관계없이 단 한 가지의 질문에 답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것은 ‘내가 기대한 인생을 살았는가, 나 자신의 인생을 살았는가’입니다. 

 

예순여섯 번째 소개해 드린 인생은 힘들게 열심히 살다가 암에 걸려 죽게 되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의 평범한 인생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평범함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꿋꿋하게 걸어간 성실함이었고, 그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하기 위한 것, 즉 자신의 인생에 대한 애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생로병사라는 이름의 같은 열차를 탄 승객들입니다. 그러나 승객들의 사연은 모두 다를 것입니다. 싯다르타(석가모니)의 말로 오늘의 인생탐구를 마칩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마라. 태양과 달을 비교할 수 없듯이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빛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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