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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해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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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위기와 법무부 장관
19장. 법무부 장관 1
존 N. 미첼
출처-<AP>
1988년 11월 9일 미국의 前 법무부 장관 존 N. 미첼(John N. Mitchell)이 사망했다. 전직 법무부 장관의 죽음에 대해 많은 이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내놓았지만, 과히 좋은 평가는 아니었다. 그의 이름 뒤에는 늘 꼬리표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워터게이트”
미첼 법무부 장관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더러운 손』이라고 할 수 있다. 닉슨 대통령의 1968년, 1972년 대선 캠프의 사령탑이 바로 그였다.
존 미첼(좌)과 닉슨(우)
출처-<워싱턴포스트>
1968년 닉슨 캠프의 핵심 전략은 “남부 전략(Southern strategy)”이었다. 남부 전략이란, 미국 남부의 백인들에게 ‘인종적 보수주의’를 자극해 표를 받아내는 전략이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지역주의를 부추겨서 표를 얻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캠프의 전략 담당은 케빈 필립스(Kevin Price Phillips)였지만, 이를 실행한 건 미첼이었다.

케빈 필립스
출처-<뉴욕타임스>
이건 공화당의 색깔 자체를 뒤바꾼 획기적인(?!), 아니 자기 부정적 선거 전략이다. 왜냐. 흑인노예해방을 한 건 링컨 대통령이다. 그는 공화당이었다. 이 말은 즉, 과거 흑인 노예해방을 주장했던 정당이 이제는 백인들에게 ‘인종적 보수주의’를 자극해 인종 갈등을 유발한다는 것이었다. 굉장히 자기 모순적인 전략인 거다.
그렇다면 이 전략이 왜 등장했냐. 이유는 대략 이랬다.
1861~1865년 미국은 내전을 겪었다. 이 내전이 그 유명한 ‘남북 전쟁’이다. 남북 전쟁은 노예 해방을 주장하던 북부의 승리로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하여 전쟁 직후, 노예제는 당시 대통령이던 링컨에 의해 폐지됐다.
그리고 남부에는 북군이 주둔하며 통치하게 되었다. 북군에 의한 군정이 시작된 거였다. 군정은 1877년까지 실시됐다. 군정이 실시된 이유는 간단하다.
“남부가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
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이 십수 년의 군정이 지금의 ‘남부 정서(남부 백인들에 의해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존재하는)’가 자리 잡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남부인들에게는 이런 인식이 강해졌다.
“공화당은 북부정당이다!”
이때, 남부인들의 마음속을 비집고 들어온 게 민주당이었다. 민주당은 남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흑인들의 참정권을 박탈한다거나, 각종 인종차별적인 정책들을 내놓았다. 남부 사람들은 열렬히 민주당을 지지하게 되었다(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일 거다).
그리고 약 9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1964년이 되었다. 그해에는 미국에 아주 큰 이벤트가 있었다. 바로, 대통령 선거. 이 선거에서 민주당의 린든 B. 존슨은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를 압도적인 표차로 꺾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4년 11월 4일 대통령에 당선된 후,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군중에게 인사하는 린든 B. 존슨
출처-<AP>
골드워터가 대패하고, 그 이후 공화당의 당권을 잡은 건 닉슨이었다. 또 시간이 흘러 다음 대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공화당의 다음 대통령 후보로는 닉슨이 준비하고 있었다. 닉슨은 다가오는 대선에 이기기 위해서는 공화당의 텃밭을 교체한다는 과감한 생각을 했다. 이때 나온 전략이 ‘남부 전략’이다.
이 전략은 닉슨 캠프의 전략가인 케빈 필립스가 제안한 것인데, 이 전략이 성공한 데에는 삼박자가 모두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남부 전략’ 자체가 전략적 측면에서 설득력이 있었고(옳고 그름을 떠나서 선거 공학적으로만 판단했을 때),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요시하던 닉슨의 스타일상 이 전략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미첼이 이 전략을 잘 실행했다.
공화당이 노예를 해방했는데, 이제 공화당이 흑인을 차별하기 시작한 거다. 남부의 백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알아준 공화당에 몰표를 줬다. 그 힘으로 닉슨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정치인들이 국가의 통합을 말해야 하는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가를 분열시키는 건 미국이나 한국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대통령에 당선된 닉슨
출처-<CNN>
4년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 닉슨의 재선을 위한 다음 선거가 다가왔다. 문제의 ‘1972년 대선’이 다가온 것이다.
이때 존 미첼이 했던 게 바로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 스캔들’이었다. 워낙 유명한 스캔들이라 간단하게만 짚고 넘어가겠다(혹시 모르는 분들을 위해).
‘닉슨의 재선을 앞두고 닉슨 재선 위원회가 민주당 본부를 불법 침입하여 도청한 사건. 그리고 이 사건이 알려지자 이를 부정하고 은폐하려는 미국 행정부의 조직적 움직임 등 권력 남용을 저지른 사건을 포함한 일련의 '정치 스캔들'.
지금 이 스캔들에서 주목하려 하는 건, 바로 닉슨의 법무부 장관이던 존 미첼의 아내 ‘마사 미첼’(Martha Elizabeth Beall Mitchell)에 관한 내용이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자, 닉슨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이거였다.
‘미첼의 부인 마사가 과연 그 입을 닫고 있을까...’
닉슨이 이런 걱정을 한 데에는 타당한 이유 있었다. 그녀는 ‘수다쟁이’였다. 단순히 입이 싼 ‘수다쟁이’ 정도가 아니었다.
1971년 마사(좌)와 존 미첼(우)의 모습
출처-<워싱턴포스트>
그녀는 남편의 서류를 몰래 뒤지거나, 남편의 대화를 도청해서 이걸 기자들에게 전달하는 걸로 유명했다. 이렇게 얻은 유명세를 가지고 각종 토크쇼에도 나가고, 사교계에서도 유명해진 인물이었다. 오죽하면 그녀를 ‘남부의 입’이라고 말했을까.
1970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당시 미국인 76%가 그녀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했다. 그녀는 이러한 유명세를 굉장히 즐겼다. 지금으로 치면 관심종자라고 해야 할까. 이런 그녀가 만약 ‘워터게이트 스캔들’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문제는, 그녀가 이 사실을 알았다는 거다.
미첼은 전직 FBI 요원을 고용해 아내를 ‘감시’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마사는 자기와 친한 기자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이때 통화하던 기자가 그 유명한 ‘헬렌 토마스’(Helen Thomas)였다.
(헬렌 토마스는 케네디 대통령부터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10명의 대통령을 취재했던 걸로 유명하다. 60년간 백악관을 출입했으며, 언제나 맨 앞자리에서 대통령을 곤혹스럽게 하는 질문을 던진 걸로 유명하다)
2009년 헬렌 토마스와 오바마 대통령
오바마가 그녀의 89번째 생일을 축하해주는 모습
출처-<AP>
전직 FBI 요원은 당장 전화선을 뜯어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닉슨은 마사를 정신병원에 집어넣으려는 시도까지 했다. 그게 잘 안 되자, 그녀를 알콜 중독자로 몰아갔다(호텔에 감금당하기도 했고, 진정제를 놓기도 했다. 이때 그녀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한다). 그녀는 계속해서 자기들과 친한 기자들에게 워터게이트와 관계된 정보를 말했다(이 중에는 밥 우드워드도 있었다).
마사 미첼
출처-<게티 이미지>
훗날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닉슨이 프로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마사 미첼이 없었다면 워터게이트도 없었다.”
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당시 마사 미첼이 이렇게 나댔던(?) 이유는, 남편 미첼이 닉슨에게 버림받아 꼬리 자르기 당할 거 같아서였다. 처음에는 남편을 옹호하기 위함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대로 가다간 다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남편을 부추겨 닉슨을 배신하자는 쪽으로 몰고 갔다.
뭔가 기시감이 느껴진다.
20장. 법무부 장관 2

출처-<뉴스1>
“제가 당대표가 되면 국민의힘에서 진실 규명을 할 수 있는 채 상병 특검법을 발의하겠다.”
前 법무부 장관 한동훈이 지난 6월 23일 발언한 내용이다(아이러니한 건, 채수근 상병을 참배해 달라는 요청을 그가 거부한 한 게 불과 다섯 달 전 일이라는 거다).

국립대전현충원을 방문한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을 향해
채 해병의 묘역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며
참배를 요청하는
정원철 해병대전역전국연대 집행위원장의 모습
4월 10일 총선 패배 책임을 지고 비상대책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난 지 73일 만에 다시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나서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당정 관계를 수평적으로 재정립하겠다.”
라고 말했다.
이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당정 관계가 수평적이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지만, 이제 국민의힘이 용산에 끌려다니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란 거다. 그렇기에 수평적인 관계가 가능한 거다.
보수 진영에서는 연일 한동훈을 띄우기 위해 노력 중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포기하고, 차기를 노리겠다는 거다. 이런 분위기를 알고 있는 용산에서는 한동훈을 눌러야 했고, 결국 이번 전당대회에 다시 한번 원희룡이 차출되게 됐다.

당 대표 출마 선언하는 원희룡
대통령과 한동훈의 인연은 오래됐다. 둘 다 서울대 법대 선후배이고, 2002년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차떼기 사건) 사건을 같이 수사했다. 이때부터 이들은 특수통 선후배가 됐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건 2016년 국정농단 사건 때부터였다. 박영수 특검에서 대통령은 수석검사를 맡았고, 한동훈은 수사 4팀 검사로 활약했다.

특검팀에 있을 당시,
윤석열과 한동훈
출처-<연합뉴스>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특검 때의 활약 덕분이었을까?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이들은 ‘보은(報恩)’을 받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바로 서울중앙지검 검사장이 됐고, 한동훈은 3차장 검사가 됐다. 초고속 승진이었다. 박근혜 탄핵의 1등 공신이었기에 인사로서 대우를 해준 거였다. 그러나 보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년 뒤 대통령은 검찰총장이, 한동훈은 대검 반부패강력부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출처-<뉴스1>
문재인 정부의 신데렐라였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들은 문재인 정부의 최고 검찰 실세였다. 그러나 대통령이 검찰총장일 당시, 일명 '조국 사태'를 시작으로 문재인 정권과 갈등이 심화된 이후, 한동훈은 대통령의 사람으로 분류되어 좌천되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2022년 대선에서 대통령이 지금의 자리에 올라선 이후, 한동훈은 명실상부한 2인자가 됐다(비공식적으로는 좀 더 아래 순위지만, 공식 직책이 있는 이들 중엔 그렇다는 거다).

이 둘이 갈라지게 된 건, 한동훈이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으로 오면서부터였다. 한동훈이 영입한 김경율 비상대책위원이 그 시작이었다.
“디올백 (영상을) 차마 못 봤다. 적절치 않은 것이다. 이걸 어떻게 보호할 수 있겠나.”
“김 여사가 주가조작으로 인해 어떤 금전적 편익을 얻은 것도 분명한 것 같다. 저도 그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출처-<JTBC 유튜브 ‘장르만 여의도’>
마리 앙투아네트 논란의 시작이었다. 이때까지 디올백 영상에 대한 용산의 입장은 간단했다.
“정치 공작이다.”
그런데, 김경율 비대위원이 이를 정면으로 부정한 거였다. 한동훈은 이런 김경율 위원이 정청래 의원의 지역구인 마포을에 출마할 수 있도록 밀어주었다. 이런 움직임을 용산 대통령실은 물론 탐탁지 않아 했다. 동시에 한동훈은 용산 대통령실이 총선 출마하게 하려던 다른 인사들을 거절했다.
총선 국면에서 여러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지며 대통령과 한동훈의 불화설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약속 대련이라 보기도 했지만, 대통령실은 한동훈의 사퇴를 요구했고, 한동훈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서천시장 화재 현장에서 대통령과 한동훈이 만나며 봉합 수순으로 갔지만, 현안이 계속 등장하며 이 둘의 갈등은 계속됐다. 이종섭 前 장관이 호주로 날아가고, 의대 정원 문제가 발목을 잡는 동안, 한동훈은 계속해서 자기 목소리를 냈다. 동시에, 이에 대한 대통령과 용산이 느끼는 불편함은 커져갔다.
그러나 한동훈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 이제는 채 해병 특검법을 발의하겠다고 나섰다. 대통령으로서는 배신감이 들 수밖에 없었을 거다. 마리 앙투아네트 발언까지는 어쨌든 참았지만, 채 해병 특검법까지 발의하겠다는 건 대통령의 심장에 칼을 꽂는 행위이다. 대통령이 원희룡을 다시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2024년 7월 1일 뉴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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