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된 '우주'의 모습
의뢰인은 한창 집을 짓는 중에 집 이름을 지었다. 우주(宇宙).
“오, 좋네요 우주. 우주의 섭리로 집을 지었다는 뜻인가요?”
부인의 암 판정부터 완치까지 우여곡절을 겪는 과정에서 우주의 기운을 느꼈다는 말일까?
“한자로 우주가 둘 다 집을 뜻하는 한자어더라구요. 집우 집자를 써서 우주로 정했습니다.”
의뢰인은 한마디 덧붙였다.
“집의 명판을 만들면 이런 말을 쓰면 좋겠어요.”
서로에게 기둥이 되고 서로에게 지붕이 되다.
하우스(house)와 홈(home)의 차이
무한한 시간과 만물을 포함하는 끝없는 공간의 총체, 우주. ‘우주’라는 말이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니, 옛날부터 사람들은 온 세상을 하나의 큰 집으로 해석하는 건축가적 상상력이 있었나 보다.
건축가들은 보통 건축물을 ‘집’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집’은 건축법에서 정하는 ‘주거’의 용도로만 한정하지 않고, 건축의 모든 용도를 부르는 대명사이다. 병원도 집이고, 학교도 집이고, 커피숍이나 태권도장이 있는 근린생활시설도 건축가에게는 ‘집’이다. 왜냐면 건축물이라는 물리적인 덩어리 안에 사람을 위한 가치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또한 ‘병원’이라는 집은 사람을 치유하고 건강을 주는 집이고, ‘학교’라는 집은 인간을 성장시키는 교육의 가치를 실현하는 집이다. 가정집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키우는 집이다.
물론, 교도소(큰집)를 뜻하는 집도 있긴 하지만...
나는 이 개념을 대학 시절에 알게 되었다. 건축 설계가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그만둘까 방황하던 시기였다. 해답을 얻고자 나는 무작정 해비타트 대학생 봉사 단원으로 필리핀의 작은 마을, 비콜을 찾았다.

필리핀 비콜에서 해비타트 집을 짓던 당시 현장
이곳에서 건축물은 비싸고 소수의 부자만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런 부자를 위해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내적 갈등이 시작됐다. 해비타트 봉사 활동도 지미 카터같이 돈 많은 사람이 자기 마음 편하자고 베푸는 행위 같았다. 집을 사서 살라고 주면 되지 대체 왜 만들어줄까? 다소 삐뚤게 생각했다.
그러던 중, 봉사 대장 레오가 봉사 전 숙지 사항을 교육하는 시간이었다. 해비타트 운동의 의미를 설명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가정이 파괴되는 것이라고 했다. 가장이 실업을 겪으면 알코올이나 도박 같은 일시적인 현실 도피에 중독되고, 그것은 가정 폭력으로 이어진다. 아이들은 학교를 가지 못하게 되고 거리를 떠돌며 범죄에 노출이 되는 이 악순환이 반복된다. 집도 차압이 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면 몰락의 길로 빠진다. 이런 경우엔 지원금도 일시적인 효과밖에 내지 못한다. 바로 휘발된다.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이 가정의 회복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가정을 회복할 수 있는 가족의 울타리, 집이 필요하다. 가족들이 그 과정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해비타트 운동의 핵심이라고 했다. 벽돌을 쌓으며 가족 구성원들은 재활에 대한 의지가 생기고, 그들의 노력이 물리적으로 드러나면서 마음가짐도 서서히 달라지도록 한다. 집이 생기면서 가족이라는 가치를 지킬 수 있게 된다는 점이 중요했다.
해비타트 봉사는 집이 완성되면 살게 될 집 주인과 함께 작업한다. 당시 기술이 없는 대학생들은 단순하게 자르고 나르고 다지는 반복 작업을 도와주었고 전문가 몇몇이 가이드 해주었지만, 가장 열심히 자재를 나르고 움직이던 사람은 바로, 그 집에 들어가서 살 사람들이었다.
영어에서 ‘home’과 ‘house’는 다른 의미다. 가족이 있는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서 쉬겠다는 의미로 말할 때는 ‘home’을 사용하고, 팔고 사는 부동산 개념의 집을 말할 땐 ‘house’를 사용한다. ‘집에 간다’는 말은 ‘go to house’ 대신 ‘go home’이라고 말한다. 특히, 여기서 ‘~에 가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go to’의 ‘to’도 생략. 심리적 거리감이 없는 것도 특징이다.
타지를 떠돌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go home home(나의 진짜 진짜 집으로 간다)’고 말한다. 이처럼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두고 home을 겹쳐 쓰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주는 집과 집을 겹쳐 쓴 우(home)주(home)이 맞는 것이다. 말 그대로 宇宙.
집의 이름은 어떻게 지을까?
사전에 나온 '우주(宇宙)'의 의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의 한 구절이다. 애정이 담긴 이름은 특별한 관계를 만든다. 집에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그저 하나의 물리적 구조체의 콘크리트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몇 번지 몇 호만 붙은 부동산일 뿐이다. 하지만, 집에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이 집의 운명이 되기도 한다. 또 집의 이름을 언제 어떻게 붙이는지에 따라 집의 숙명이 결정되기도 한다.

율곡이이가 태어난 신사임당의 친정집 '오죽헌'
보통 이름이 없는 집들이 많지만, 멋진 이름을 가진 집도 꽤 많다.
집의 이름에는 주로 이런 한자들이 쓰인다. ‘집 당(堂)’ ‘집 헌(軒)’ ‘집 재(齋)’ ‘다락 루(樓)’ ‘방 방(房)’ ‘정자 정(亭)’ ‘집 실(室)’ ‘집 각(閣)’ 등. 집을 나타내는 한자는 다양한데 한자어마다 붙이는 뜻이 조금씩 다르다. 흥미로운 것은 ‘매월당 김시습’, ‘신 사임당’처럼 사람의 이름에 붙이는 아호를 집의 이름인 당호로 지은 조상들 있었다는 점이다. 집을 인격이 있는 사물로 대했고, 자신의 인격과 동일시 했다는 뜻이다. ‘사는 곳을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집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건축가로서 일을 의뢰받을 때, 집 주인이 처음부터 집 이름을 지어오면 마음이 편하다. 집의 콘셉트를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평담재 전경
몇 년 전에 ‘평담재’라는 집을 설계한 적이 있는데, 이 집은 건축주가 처음 의뢰할 때부터 평평 담담하다는 중국어에서 따 온 말이라고 했다. ‘아무 일도 없이 산다’는 뜻인데 평온하고 담담하다는 의미의 한자로 만들어졌다.
하나 눈에 띈 부분은, 집을 나타내는 수많은 한자어 중에 ‘재’를 사용했다는 것. 책을 읽는 집에 붙이는 ‘집 재(齋)’ 는, 은퇴하는 학자의 말년을 책을 보고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는 건축주의 성품을 알 수 있는 당호였다. 또한 집이 추구하는 방향도 알 수 있었다. ‘재계하다’는 스스로를 갈고 닦는다는 의미이기에, 화려하거나 자랑하는 모양이기보다 수수하되 기품을 잃지 않는 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완성된 평담재는 옅은 회색, 짙은 회색 벽돌과 하얀 처마 선으로 선이 살아있는 두루마기 느낌의 집이 되었다. 이는 자연스러운 결과물이었다.
건축주가 집을 짓지 않을 때는 건축가가 이름을 짓기도 한다. 가장 어렵고 책임감이 필요한 순간이다. 물론, 가볍게 멋진 이름을 지을 수도 있겠지만, 언어에는 힘이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집을 지을 때부터 생각한 컨셉부터 조형적 특색, 앞으로 집에 살 주인들이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떠올리면서 이름을 고민한다. 부모가 자녀의 이름을 짓는 것과 비슷하다.
지붕을 하나로 덮고, 사선으로 지붕을 잘라내는 것이 김밥과 비슷하다
‘우주’라는 이름을 건축주가 지어 오기 전까지, 집의 형상과 특징을 두고 나는 농담조로 ‘김밥집’이라고 부르곤 했다.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모듬김밥’, 집 안에 피아노방, 요가방, 노천탕 등 다양한 특색 있는 공간들(다양한 재료)을 검은색 지붕 하나(김 한 장)로 덮어서, 다양한 재료가 김으로 둘둘 말려 조화로운 맛을 끌어낸 김밥 같았기 때문. 직원들과 시공사에도 우주의 집을 표현할 때, ‘모듬김밥’이라고 설명하면 모두 이해도가 가장 높았다.
말하고 나니, 흰색 동서면의 입면이 유난히 김밥의 흰 밥처럼 보였고, 대지의 지형선에 맞춰 잘려 나간 서쪽 처마 면도 김밥 한 덩이를 썰어낸 모양처럼 보였다.
지붕과 벽면 틈으로 새어나오는 요소는 김밥 옆구리가 터진 것처럼 보인다
오른쪽 그림은 김밥 속 안에 있는 공간들의 모습
다락의 테라스는 김밥 옆구리가 튀어나온 것 같고… 하지만, 농담처럼 이어진 이야기를 진지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태명이 꼬물이나 개똥이였어도 주민등록상에 그렇게 올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안도했다. 우주의 의뢰인이 ‘우주(宇宙)’라는 이름을 지어 왔을 때, 건축사의 고민은 한 방에 해결되었다. 집의 컨셉과 조형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빨간색은 부부의 항로, 파란색은 외부인의 항로
‘우주(宇宙)’ 내부에는 진짜 우주처럼 다양한 행성의 항로 같은 순환 동선들이 존재한다. 갤러리의 순환 동선은 목성의 항로, 안방과 서재의 작은 순환 동선은 지구를 공전하는 달의 항로처럼 느껴진다.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또한 '宇'와 '宙'. 두 한자의 갓머리변 '宀'은 우주(宇宙)를 만들어주는 큰 지붕과 똑 닮아 있었다. 집주(宙)라는 글자의 생김을 보면 갓머리로 밭전처럼 생긴 순환 동선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이름을 뜯어 볼수록 신기한 우연이 겹쳤다.
‘우주’의 집이라는 이름이 결정되자마자, 내 머릿속에선 우주를 완공하기까지의 과정이 빠르게 스쳤다. 수많은 건축가 가운데 의뢰인이 나를 찾아와 인연을 맺고, 어떤 건축설계 과정을 거쳐 우주를 만들게 되었는지. 우주의 삼라만상이 연결되어, 의뢰인과 내가 다시 연결되었다는 거시적인 해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우주’는 ‘모듬김밥’보다는 확실히 멋진 이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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