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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출구조사 결과 화면 캡처

 

2024 영국 총선. 예상대로다. 노동당의 승리. 유럽에 극우의 바람이 분다지만, 영국은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애초부터 승부가 결정된 선거였기에 볼거리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나름 관전 포인트가 있어 몇 가지 짚어보려 한다.

 

1. 노동당 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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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노동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1997년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이 기록한 최다 의석수 (418석) 기록에는 약간 못 미쳤지만, 근접했다. 하지만 나름의 성과가 있다면, 97년에는 노동당의 의석수가 273석이었고 여기에 145석을 더해 418석이 되었다면, 이번 선거에 노동당은 200석이 넘는 자리를 추가로 확보하며 원내 1당 자리를 꿰찼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지난 1997년보다 총의석수는 모자라지만, 새롭게 확보하게 된 의석수는 훌쩍 넘어선 수치다. 영국 언론은 이를 두고 일제히 ‘Landslide’, 산사태가 일어났다고 묘사한다.

 

2. 보수당의 현실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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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포인트. 인지부조화는 어디서든 인정받지 못한다는 걸 확인해 준 선거였다. 이제 전 총리가 된 리시 수낵은 마지막까지 보수당이 다시 전세를 역전시켰다며 보수 집결을 위한 투표를 독려했다. 사실 보수당은 100석에도 못 미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130석을 웃도는 결과를 얻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효과를 본 것이 아니냐는 예측도 있다. 하지만, 전체의 1/3 수준인 240석 가까이 잃었다.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이겼다” 캠페인을 주도했는지 의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동안 잘못했다.”, “너무 큰 격차로 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달라!” 등의 메시지를 전달 했다면 되려 보수를 집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PMQ(Prime Minister Questions)에서 보인 수낵 총리의 모습은, 현실 부정이 습관인 듯했다. 모든 지표가 바닥을 치고 있는데 노동당의 모든 지적을 부인하고, 지표들이 살아나고 있다는 얘기만 반복했다. 경제성장 하향 곡선에, 경제수지적자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며 연일 신기록을 경신 중임에도, 수출량은 늘었다는 수치를 들어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어느 정부와 닮아 있었다.

 

3. 영국도 피하지 못한 극우 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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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결과를 확인하고 웃는 나이젤 파라지 영국개혁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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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포인트는, 극우 정당의 약진이다. 영국에도 극단적인 우파 정당(영국개혁당)이 있다. 마치 과거 식민주의를 이끌었던 대영제국에 대한 향수에 빠져 있는, 브렉시트를 적극 지지하고 선동했던 이들이다.

 

과거 유킵(UK Independent Party)의 대표였던 나이젤 파라지(Nigel Farage)가 새롭게 세운 정당(Reform UK)인데, 이번 총선에 처음으로 12석을 얻었다. 해당 12석은 대부분 과거 보수당의 지지를 받았던 지역으로, 이번엔 보수당이 못 미더웠는지, 아무리 그래도 노동당은 아니라고 여겼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보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참고로 Reform UK의 대표인 나이젤 파라지는 1992년 네덜란드 마흐스트리트 조약을 체결하는 존 메이어 전 총리를 향해 반대한다며 저항한 인물로, 오래전부터 영국의 유럽연합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쳤던 인물이다. 좌든 우든, 한 우물만 파고 버티면 성공(?)한다는 사례를 극적으로 보여줬다. 좋든 싫든 나름대로 인지도도 있고, 언론에도 자주 노출되어 유명세를 얻었지만, 그간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번에 ‘드디어’ 의회에 진출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준석 의원과 비슷한 케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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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기간에 술파티를 벌여 논란이 된 보리스 존슨 전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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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보수당의 패배 원인, 파티 게이트

 

부정부패에는 용서가 없다는 걸 보여준 선거다. 보수당이 무너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보리스 존슨의 이른바 ‘파티 게이트’(Party Gate)라 불리는 사건 때문이었다. 팬데믹으로 전 국민이 고생하는 와중에 본인만 규칙을 어기고 편하게 직원들과 술 파티를 벌인 사건이다. 사건 조사 과정에서 한 번이 아닌 여러 차례 시도한 사실이 확인됐고, 이로 인해 국민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이번 보수당 패배에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다.

 

5. 스코틀랜드당의 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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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당 대표 존 스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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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스코틀랜드당(SNP, Scotland National Party)의 완패다. 2000년 후반부터 약진해 온 정당이다. 과거 스코틀랜드 지역 역시 노동당이 우세했는데,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이 시작되면서 스코틀랜드당이 급부상했다. 그 결과, 얼마 전까지 노동당은 이 지역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 니콜라 스터젼 전 SNP 대표의 배우자가 정당 행사비와 관련 공금을 사용한 정황이 드러나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후 SNP도 신뢰를 잃었다. 이번 선거에서 70% 이상의 의석을 노동당에 헌납하는 계기가 되었다.

 

거짓말이나 위선에 대해서는 반드시 투표로 결과를 보여준다는 걸 다시 한 번 일깨워 준 사례다.

 

6. 유동적인 영국 민심

 

영국 총선 노동당 압승·보수당 참패..._14년 만에 정권 교체_ _ YTN 1-21 screenshot.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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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어렵고 민생 안정이 우선이라면 지역감정 따윈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노동당이 큰 승리를 거둔 이유는 이전에 보수당 우세 지역이었던 곳들의 다수가 노동당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도 노동당은 안돼!”라며 50석에 가까운 의석이 중도우파인 자유민주당(Liberal Democratic)에 넘어갔지만, 100석 이상을 보수당에서 가져오면서 노동당이 의회 내 제1당, 그것도 거대 여당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그동안 영국 국민의 삶을 어렵게 했던 건, 물가 상승과 주택 대출금리 상승이었다. 팬데믹 상황에서 구제금융 형식으로 국고를 털어 보너스 지급하듯 국민들에게 지원금을 준 건 다름 아닌, 당시 재경부 장관이었던 리시 수낵이었다.

 

사실, 비판의 목소리도 거셌다. 일시적으로 현금을 유동화시키면 후폭풍이 크게 다가올 것으로 예측하는 경제전문가들이 많았다. 하지만, 당시 보수당도 집권 10년 차가 넘어 지지율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고 여러 악재들이 겹쳐 이를 뚫고 나갈 방법도 필요했다. 리시 수낵의 결정은 약간의 포퓰리즘이 섞인 구제금융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더 큰 문제는, 다수의 국민들이 숨 쉴 구멍을 하나 마련했다면, 기업들은 어마어마한 수준의 자금을 보상금으로 지급 받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팬데믹이 종료된 직후, 시장에 풀린 현금은 결국 물가 상승을 일으켰고, 국민들은 어려움에 처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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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연간 재정지출 계획안을 공개하는 리시 수낙 영국 재무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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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주택문제. 영국은 매매가의 10%만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으면 나머지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주택을 구입할 수 있다. 가령 10억 원 가치의 주택이 있다면 현금 1억만 있으면 된다. 나머지 9억은 은행에서 빌려 쓸 수 있다. 그런데, 201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2%대였던 주택 금리가 현재는 5%를 넘어섰다. 월 150만 원 정도의 이자만 내면 되었는데, 이제는 2배가 넘는 370만 원을 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전에는 여행도 가고 외식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입이 있었다면, 이제는 아무런 여가 활동 없이 오롯이 먹고 자는 것만 할 수 있는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1년에 휴가를 30일씩 가는 이들에게 여행도 하지 말고 집에만 잠자코 있어야 할 상황을 만들었으니 등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 나라가 어렵고 민생이 힘들면 정치적 성향이고 뭐고 없이 현실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 선진 투표 문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

 

7. 선거 방송은 대한민국

 

UK general election_ Labour set for landslide victory, according to exit poll _ BBC News 2-26 screenshot.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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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방송하면 대한민국이다. 우리나라 총선은 밤새도록 투표 결과를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만큼 각 언론에서 미디어를 통해 볼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영국은 그런 거 없다. 밤새도록 인터뷰만 하기도 하고, 논평만 줄줄이 늘어놓기에 지루하고 따분하기 그지없다(다만, 오랜 기간 선거만을 독파해 온 각 기관 대표들과 대학 교수들이 내놓은 논평은 신선하다. 국민들보다 못한 논평, 누구나 다 알 법한 이야기를 마치 새로운 것인 양 떠드는 우리네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랄까).

 

#보너스 관전 포인트

 

번외로 짤막하게 몇 가지만 더 짚어보자.

 

1. 이번 선거 투표율은 역대 최저치라고 볼 만큼 낮은 61%에 그쳤다. 보수가 투표를 포기했다. 그래도 양심은 있다(?)

 

2. 보수당에서 나름 선이 굵은 의원들이 낙선했다. 40일 천하로 이름을 알렸던 전 영국 총리 리즈 트러스가 의원직을 상실했다. 2010년 카메룬 정부 때부터 보수당을 지켜왔던 4선 의원이자 전 산업부 장관 제이코 모그(Jacob Rees-Mogg)와 영국의 첫 여성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페니 모돈트 (Penny Mordaunt)도 모두 선거에서 패했다.

 

3. 공천 못 받았다고 당적을 바꿔, 그것도 결도 색도 완전 다른 당에 등록, 출마하는 경우는 다행히도 없었다.

 

4. 출구조사가 딱 맞아 떨어지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나 보다.

 

5. 리시 수낵이 총리로 임명된 뒤 있었던 디왈리(Dewali) 축제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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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왈리 축제 당시, 총리 관저에서 춤 추는 리시 수낵

 

디왈리는 우리나라의 설과 같은 인도의 명절이다. 당시 리시 수낵은 가족들과 친지들을 총리 관저로 초대해 축하 파티를 열었다. 인도계 영국인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현 총리 관저인 10 Downing Street는 올리버 크롬웰과 찰스 1세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영국과 런던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현재 총리 관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습격으로 파손되어 새롭게 디자인되었다고는 하나, 매우 역사적인 건물이다. 게다가 총리 관저는 총리가 거주하기도 하지만, 영국 총리의 사무공관이기도 하다. 아주 공적인 공간이다. 그런데 인도계 총리가 그곳에 인도 전통 향을 피우고, 인도식 테코레이션으로 꾸며 잔치를 열고, 인도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이, 형식적이기는 하나 여전히 전통을 중시하고 입헌군주제로서 성공회의 수장을 국왕으로 여기는 보수적인 영국인들에게는 눈살을 찌푸릴 만했다는 평가다.

 

실제로 리시 수낵이 춤추는 모습이 방영된 뒤, 만난 사람마다, 한마디씩 했던 걸 보면, 이번 총선 결과 패배는 단순히 보수당에 대한 실망 때문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몇몇 틱톡커들은 과거 그가 디왈리 때 춤추던 모습을 재공개하며 “다시 그의 춤은 보고 싶지 않다”는 뉘앙스의 영상을 올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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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주 특이한 점 하나 더.

 

득표를 가장 많이 한 노동당은 966만 표로 411석(한국 시각 7월5일 18시 40분 기준, 노동당 412석 확보)을 얻는 데 반해, 그의 절반에 가까운 400만 표를 얻은 Reform UK는 1/100인 4석을 얻는 데 그쳤다. 사실 자민당은 Reform UK보다 약 50만표나 적은 349만 표로 71석을 얻었는데, 적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의석수는 20배에 가까운 차이가 난다. 아주 운 좋게 지지율은 4위인데 원내 3당이 된 자민당. 지지율은 10% 차이 나지만 의석수는 트리플 차이를 보인 노동당과 보수당. 어쩌면 선거도 전략을 잘 세워야 한다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은 아니라는 걸 영국 선거를 보면서 새삼 느낀다.

 

유럽 연합과 새로운 연대를 계획하고 있는 노동당이 "변화!"를 외치고 있으니, 앞으로의 활동을 눈여겨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