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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개표 방송에서 그의 표정은 왜 안 좋았을까

 

‘대한민국은 내구력 테스트 중이다.’

 

2023년 7월, 유튜브 프로그램 <압도적 재미 매불쇼>에 출연한 유시민 작가는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1년 남짓 지난 당시의 대한민국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쌓인 게 많은 유시민! 더욱 강력해져서 돌아왔다! (파장 클 듯)  _ 1편 49-59 screenshot.png

 

“저는 지금 정부를 지지하지 않지만 ‘대한민국이 망해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 바람직한 사회와는 아주 다르게 가고 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는 2023년 6월 KBS <더 라이브>에 출연해 '누가 대통령이 돼도 나라 안 망한다'고 했던 말이 여전히 유효하냐는 MC의 질문에 '그럼요'라고 답했다.

 

더 라이브 유시민.jpg

 

그랬던 그가, 1년 뒤 출간한 자신의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다르게 말할 것 같다. 

 

“정말 망할지도 모르겠네요.”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 中

 

2024년 4월 11일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 22대 총선 MBC 개표 방송에 패널로 출연한 유시민 작가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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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자 윤곽이 거의 모두 드러난 상황에서 민주당의 압승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그의 표정. 그 이유가 단지 상대 패널이 보여준 저열한 인식 수준과 발언 때문 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총선을 앞두고 출연한 여러 프로그램에서 이번 선거에서 여당 의석 수가 100석 미만으로 떨어지거나 여당이 150석 이상을 얻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경우, 현재의 정치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로 윤석열 대통령의 남은 임기 3년이 지속될 것이라 전망한 바 있다. 

 

22대 총선에서 여당인 국민의힘이 가져간 의석은 비례위성정당 포함 108석. 굳어진 그의 얼굴은 현실이 되어 다가온 자신의 전망을 마주하게 된 소감으로 보였다.

 

유시민 사진2.png

 

이대로 3년 더 간다. 그렇게 된다면? 앞서 소개한 글에서 유시민은 이렇게 말한다. 정말 망할지도 모르겠다고.

 

불과 지난해까지만 해도 유시민 작가는 윤석열 대통령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이 내구력 테스트를 겪겠지만 그렇다고 나라가 망하지는 않을 거라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 시스템을 믿기 때문이었다. 

 

거대 야당이 입법권을 지키고 있는 한, 대통령 때문에 멍이 들고 상처가 날 수는 있어도 어디가 크게 부러지거나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그의 말대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대단히 훌륭한 정치지도자를 가려 뽑는 데 최적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사악하고 무능한 대통령이 집권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 하는 데에 효과적이다. 

 

그럼 어째서 판단이 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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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윤석열의 대한민국 시스템 무력화 시도가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전 지구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기후 재앙과 윤석열은 유사한 점이 있다. 기상 관측 이래 경험했던 최대치의 강수를 대비해 치수, 방재 시설을 만들어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폭우가 쏟아지면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처럼 대통령 윤석열은 미증유(未曾有, 일찍이 있지 않았던)의 존재다. 총칼로 국회를 해산하거나 제압한다면 그때부터는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므로 논외다. 

 

시행령 통치와 거부권 남발, 검찰 사유화 등의 수단으로 민주주의 시스템의 허울은 유지한 채 사실상 유사 독재 체제로 만들고 있는데 심지어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의 주요 공직자들이 무능하기 짝이 없어서 그들이 마음먹은 대로 휩쓸고 지나간 자리마다 피해가 속출하는 중이다. 

 

정리해보자. 

 

총선을 앞둔 어느 시점에서 유시민 작가는 윤석열 대통령이 이대로 임기를 다 채우면 정말로 나라를 망하게 할 수도 있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총선 결과에 따라 대한민국과 윤석열 대통령 앞에 펼쳐질 길은 세 가지로 예상해 볼 수 있었는데, 여당이 150석 이상을 얻어 대통령이 입법권마저 손에 쥐면 대한민국은 이전 보다 더한 극한의 내구력 테스트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다만, 여론조사 결과의 추이를 봤을 때 여당의 과반 의석 달성은 실현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갈래의 길, 여당이 100석도 얻지 못해 대통령의 거부권이 무력화되고 탄핵을 저지할 수 없게 되든지 100석을 사수하여 현상을 유지하는 길이 남았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은 여당이 선거에 패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2년 동안 하던대로 남은 3년 임기를 채우는 것. 최선은 여당 의석수를 두 자릿 수로 만들어 더 이상 대통령이 대한민국 시스템을 망가뜨릴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총선 전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선거 결과에 따른 세 가지 시나리오를 이야기한 의도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나의 생각은 이렇다. 

 

여당이 100석 확보에 실패하는 최선의 시나리오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이는 곧 윤석열 대통령이 이대로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는 최악의 결과를 의미한다는 위기감, 거기에 야당의 200석 확보가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판세 분석이 더해져 그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여보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총선이 가까워질 수록 여당의 패색이 짙어지는 가운데 '우리 200석 할 수 있어!’는 원치 않는 역풍 공세를 부를 테지만 ‘200석 못하면 어차피 지금하고 똑같아’는 승기를 잡아 자칫 느슨해질 수 있는 지지층의 결집을 최대치로 이끌어 낼 수 있다. 

 

지난달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출연한 유시민 작가는 총선 당시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그외 진보 정당들이 197~198석을 얻고 개혁신당이 너댓 개 의석을 가져가서 탄핵 캐스팅 보트를 쥐는 그림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밝혔다.

 

[김어준의 다스뵈이다] 314회 유시민 특집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 52-7 screenshot.png

 

실제 결과는 그렇지 않았고 개표 방송 화면 속 그의 얼굴은 굳었다.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역시 나의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다.

 

 

도자기 박물관의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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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머리말 제목이자 유시민 작가가 윤석열 대통령을 비유한 표현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도자기 박물관의 코끼리’. 결국 코끼리는 어떤 운명을 맞이할까. 우리는 어떻게 코끼리를 박물관 밖으로 끌어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유시민 작가는 바로 그 코끼리에 대해 생각한다. 코끼리가 박물관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왔던, 지금은 도자기를 깨부수고 돌아다니는 코끼리를 방치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코끼리를 꺼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들여다본다. 무엇보다, 왜 그가 도자기 박물관의 코끼리인지 확인한다.

 

그리고나서, 그의 운명을 예측해본다. 

 

도자기 박물관의 코끼리가 스스로 걸어나올 가능성(자진 사퇴)? 

 

거의 없다. 

 

그 안에서 도자기를 부수지 않고 얌전히 말 잘 듣고 돌아다닐 가능성(협치)?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코끼리는 여전히 도자기를 부수며 박물관을 누빌 것이다(대결).

 

이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강제로 끌어내는 것 뿐이다. 여기서 유시민 작가는 문제적 제안을 내놓는다. 

 

강제로 끌어내지 않고 미끼로 유인하는 것은 어떨까? 

 

이미 그가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와 <압도적 재미 매불쇼>에 출연해 책을 소개하며 밝혀서 논쟁을 불러일으킨 한국판 ‘놀리 프로시콰이’, 항구적 특별 사면이다.

 

[김어준의 다스뵈이다] 314회 유시민 특집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 46-39 screenshot.png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

 

유시민 작가 스스로 머리말에서 밝혔듯,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여러 부분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 이후부터 총선 전까지 유시민 작가가 썼던 글이나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했던 말이 ‘재활용(저자의 표현이다)’되어 있다. 

 

유시민 작가가 쓴 정치비평서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그가 출연한 정치 시사 유튜브 방송을 빠짐없이 애청했을 확률이 매우 높을 것이므로 나쁘게 말하면 이들에게 내용상 새로울 게 없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책 한 권으로 요소요소에 잘 정리되어 있어 복기하기 좋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유시민 어록집 2023~2024년’ 같은 것은 아니기에 이미 보고 들은 내용이 있다한들 거기서 끝은 아니다. 

 

말과 글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미덕은 듣거나 읽는 사람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아는 한 유시민이란 인물은 이 방면에서 가장 탁월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말과 글 중 어느 한 쪽의 수준이 다른 쪽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심지어 이 부분에 있어서도 그는 특출하다. 하여 이 책 또한 쉽게, 술술 읽힌다. 평상시 책 읽는 것을 취미로 ‘독서근’을 단련하지 않았더라도 어려움 없이 책장을 넘길 수 있다. 어려움을 겪을 만한 대상이라면 국내 정치에 일절 관심이 없는 사람일텐데 그런 사람이 이 책을 집어들 리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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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머리말

 

이 책은 왜 쓰여졌는가. 

 

도자기 박물관에서 코끼리를 꺼내기 위해서, 윤석열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기 전에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하기 위해서다. 

 

위에서 하다 만 ‘놀리 프로시콰이’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다. 미국의 닉슨 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기 직전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자 당시 부통령이었던 포드는 공석이 된 대통령 자리를 자동 승계했다. 대통령이 된 포드가 닉슨에게 행사한 놀리 프로시콰이, 항구적 특별 사면으로 닉슨은 어떠한 법적 책임도 지지 않을 수 있었다. (당시의 정황이 궁금한 분은 이 기사(링크)를 참고하시라)

 

우리나라에 없는 이 제도를 국회에서 논의하고 법안을 통과시켜 윤석열 대통령에게 제안하자는 이 방안. 아무런 득도 없이 윤석열이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리 없으니 ‘아무 죄도 묻지 않을 테니 내려만 와다오’라는 동기 정도는 마련해주는 편이 탄핵으로 인한 국가적 에너지 소비와 부작용을 감수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냐는 유 작가의 제안은 매우 논쟁적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부터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제안의 의도에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대통령을 겨냥한 이 특별 사면 법안이 과연 여당의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지 미지수다. 대통령의 거부권을 돌파하려면 여당 일부의 동의가 필수적인 상황에서 이 법안에 찬성한다는 건 대통령이 더 이상 자리를 지켜서는 안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는 의미다. 탄핵안 통과를 위해 여당 의원을 설득하는 것과 차이가 없다. 

 

우여곡절 끝에 여당 의원 일부의 참여로 법안이 통과되었다 치자. 이걸 윤석열 대통령이 받아들이는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만약 이 제안을 대통령이 거부할 경우, 그 때부터 탄핵 절차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지연된 시간 만큼 깨져나갈 도자기의 값어치도 문제다.

 

여기까지 갈 것도 없이,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원하는 국민과 이를 추진하는 정치인 중 다수로부터 이 방안이 동의를 얻는 것부터 몹시 난관이다. 자신 사임을 전제로 한 항구적 특별 사면 방안과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은 양쪽 모두 일리가 있다. 좀처럼 합의되기 어렵다. 

 

내부를 향한 설득, 외부와의 합의, 제안 대상(대통령)의 수락 여부까지 과정 상의 험난함과 결과의 가능성 면에서 극한의 난이도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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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지극히 논쟁적인 화두로 던져진 놀리 프로시콰이에 대한 동의 여부가 이 책의 존재 의미와 목적은 아니다. 논쟁 자체에 의미가 있다. 더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도자기 박물관의 코끼리를 꺼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더 이상 코끼리를 그대로 놔 두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더 많은 사람이 더 쉽게 꺼낼 수 있게 되는 것에 더 큰 의의가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진보 진영 정치인들에게 탄핵은 먼저 입에 올리기 부담스러운 단어였다. 툭하면 탄핵이냐는 상대 진영의 공세와 그로 인한 중도 유권자들의 외면 가능성을 무시하기 어려운 탓이다. 

 

탄핵안 통과는 국회의원의 몫이고 탄핵 심판은 헌법재판소가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국민에게 달렸다는 것을 우리는 박근혜 탄핵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 일정 부분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기대한다. 유 작가의 주된 의도 또한 그러했으리라 짐작한다.

 

공교롭게도 이 책의 출간과 비슷한 시기에 윤석열 대통령 탄핵 청원이 등장하면서 대통령 탄핵이 정치인들의 입과 언론 보도에, 그리고 사람들 입에 쉴 새 없이 오르내리고 있다. 채 해병 수사 외압과 관련한 언론사 단독 보도가 연일 터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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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서

채 해병 특검법 거부권을 행사한

윤석열 대통령

 

그럼에도 코끼리는 멈칫하는 기색조차 없고, 코끼리가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도왔던 이들은 아직도 코끼리 등에 서로 올라타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쯤 되면 유 작가의 의도에 가장 격렬하고 충실하게 부합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는 코끼리가 아닌가싶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여러 기회를 아낌없이 내다 차버리고 있다. 이 책 또한 그러한 낭비의 결과물이다. 나는 유시민이라는 작가가 할 수 있는 한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학습하고 소화한 다음 자신의 특기를 살려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결과물을 책으로 내놓기를 기대하는 사람이다. 쉴 새 없이 마구 그를 공부시켜서 그 덕에 나는 좀 편하게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싶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운명 따위에 대한 유시민의 아주 개인적인 생각을 책으로 봐야한다는 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다시는 이런 책을 쓰지 않게 되기를, 지금과 같은 상황이 다시는 닥치지 않기를 희망한다.

 

이 책에 그렇게 쓰여 있던데, ‘희망은 힘이 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