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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산고교 농구부의 매니저로 활약하는 2학년 이한나. 한나가 없다면 북산고교 농구부의 운영이 될까 싶을 정도로 오만가지 역할을 한다.

 

한나의 본명은 아야코(彩子)인데, 원작(만화)에서 성(姓)은 나오지 않는다. 강백호 및 후배들은 한나를 아야코 상(さん)이라고 부르고, 선배인 채치수도 성 없이 아야코라고 칭한다. 감독도 아야코 군(君)이라고 한다. 일본의 언어 문화에서 성 없이 이름만 부르는 것은 웬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서는 매우 어색한 일이라, 개연성 논란이 있기도 했다.

 

작가 이노우에가 1998년에 발표한 외전 격의 단편 <피어스(ピアス)>를 근거로, 한나의 성이 사사키(佐々木)일 거라는 추측도 있다. 그 작품에서 한나 어머니의 남자 친구의 이름이 사사키이다. 그러나 엄마가 사사키 씨와 재혼했다는 언급은 없기 때문에, 그저 한가지 가능성에 불과하다.

 

한나 선배의 역할은 간단히만 정리해도 수십 가지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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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중엔 보통 감독님 옆에 앉아서 시간 측정, 점수 기록을 하고, 부상자 발생 시 간단한 응급처치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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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에는 데이터 정리, 일정 관리를 하고, 유니폼을 챙겨서 지급하는 일도 한다. 경기와 관련된 업무 외에, 부원들의 사기 진작에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연습마다 옆에서 분위기를 돋워주고, 경기장에서는 목청 높여 응원하고, 벤치 요원들도 독려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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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통 삶아 먹은 활력 담당일진이며 북산의 명물 자랑, 미인 담당이기도 하다. 독자들을 위해 경기마다 친절하게 해설도 해준다. 스모에 빗댄 해설이 특기로, 스모 얘기를 할 때는 모자의 S 로고가 SUMO로 바뀐다.

 

매니저로서의 크고 작은 역할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개개인의 성장과 각성을 돕는 조력자 역할도 많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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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풋내기 강백호의 농구 입문 스승님.

 

드리블, 패스, 볼 핸들링 등 기초를 전부 한나에게 배운다. 어느 정도 농구부에서 한사람 몫을 해내게 된 후에도, 매일 단체연습 후 나머지 공부하듯 기초 연습을 꾸준히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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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 기술을 가르쳐 줄뿐 아니라 큰누나처럼 격려도 많이 해주는, 강백호 우쭈쭈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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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업적은 송태섭을 영입한 일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더욱 돋보였던 송태섭 오퍼레이터.

 

이게 끝이 아니다. 가장 험한 일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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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문제아 군단을 컨트롤 하는 일. 고릴라 혼자서는 못 할 일을, 한나 선배는 능숙하게 해낸다. 덩치 큰 남학생들도 한나의 말 한마디에 꼼짝을 못 하는, 농구부의 실세이자 카리스마 여걸.

 

이때 등장하는 것이 하리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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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센(張り扇, ハリセン)이란 위 그림의 쥘부채를 일컫는다. 큰 종이를 주름지게 접은 후 끝부분을 붙여서 간단히 만들 수 있다. 형태와 이름은 부채이지만 피서 기능은 전혀 없다. 일본의 만담 예능 공연인 만자이(漫才)에서 사용하는 소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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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희극 장르인 만자이는 1930년대 오사카 지역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하여 종전 이후 전국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한다. 당시에는 주로 보케와 츳코미, 두 명이 콤비를 이루어 대화하는 형식이었다. 바보 캐릭터인 보케가 허튼소리 할 때마다 츳코미가 옆에서 쯧쯧쯧 혀를 차며 머리에 딱밤을 때려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 주요 흐름이다.

 

딱밤 대신 손바닥, 손등, 각종 소도구로 때리거나 심지어 발로 차는 경우도 있었다. 60년대 찬바라 트리오(チャンバラトリオ)라는 예능그룹이 종이로 만든 하리센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이후, 종이 하리센이 보급된다. 소리는 요란하지만 아프지는 않은 소품으로 일본 예능과 방송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만화/애니메이션에도 심심찮게 등장하게 되었다.

 

현재는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희극이라 해도, 아프지 않다고 해도, 타인의 머리를 때리는 건 상당히 불쾌한 일로 여기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2022년 방송 윤리 향상 기구가 "타인의 심신의 고통을 웃음의 대상으로 하는 방송 연출은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라고 공표하여 각 방송사가 이후 하리센을 이용한 개그를 지양하고 있다고 한다.

 

<슬램덩크>가 연재되던 90년대는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던 시기라 그런지, 한나 선배가 문제아 군단을 컨트롤하기 위한 필수 소도구로 하리센이 자주 등장한다.

 

한나 선배에게 하리센으로 가장 많이 맞는 사람은 역시 강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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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연습 중에는 훈련 지휘봉처럼 하리센을 휘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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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 중 뻘생각을 하거나, 감독에게 망나니짓할 때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런 상황이 하리센의 본래 역할에 가장 충실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만자이에서의 역할로 빗대면, 강백호가 보케, 한나 선배가 츳코미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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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백호만큼은 아니지만, 송태섭도 하리센으로 자주 얻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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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웅은 혼자 있을 때는 혼날 일이 없지만 백호 녀석과 어울리기만 하면 도매금으로 얻어맞는다.

 

이런 식으로 여러 차례 등장하는 하리센인데, 앞뒤 맥락을 보면 이게 과연 작중에 실재하는 물건인지 의심스럽다. 너무 깜짝 등장했다가 깜짝 사라진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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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선배의 첫 등장, 부채 비슷한 건 들고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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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 부원들과 인사할 때도 양손은 비어있고, 본격 연습이 시작될 때도 빈손, 고릴라가 백호를 떠넘길 때도 왼손이 안보이긴 하지만 오른손에는 확실히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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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 교관으로 변신한 한나는 스톱워치만 챙겼을 뿐, 하리센같은 흉한 물건은 들지 않았다. 혹시 주위 바닥에 둔 건가? 화면에 잡히지 않은 반대편 구석에 하리센을 따로 두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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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화면(첫 컷)으로 봐도 부채는 손에 없을뿐더러 근처에도 없는데, 바로 다음 컷에서는 스톱워치 대신 하리센을 들고 휘두른다. 갑자기 어디서 하리센을 구해오신 거예요?

 

하리센은 등장도 그렇지만, 퇴장도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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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가와현 예선 결승리그, 해남전 패배 다음 날. 다들 풀이 죽어있으나 활력 담당 일진은 자비가 없다. 작정하고 하리센을 들고 와서 사정없이 휘두르는 한나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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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장면이 바뀌고 채치수가 등장하자 하리센은 마법처럼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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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백호와 서태웅을 콤보로 때릴 때는 양손에 하나씩 두 개의 하리센이 등장하지만, 바로 다음 컷에서는 한 개로 줄어들었다.

 

작중 하리센은 이런 식으로 필요할 때만 짠하고 등장해서 보통은 한 컷, 길게는 두세 컷 정도만 출연하고는 뿅 하고 사라지는 패턴이다. 작중에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심히 의심스럽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종이에 분절적으로 그려진 만화인 이상, 독자가 모든 장면과 모든 움직임을 다 봤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나도 농구부원이니, 본인이 자주 사용하는 물건을 (독자의 눈을 피해) 농구코트 어느 구석에 잠깐 보관해 놓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주는 장면이 있다.

 

때는 클라이맥스로 치닫기 직전인 산왕전 전날 밤. 송태섭은 산왕의 경기 비디오를 보고 잔뜩 쫄아서 밤바람을 쐬러 나간다. 이를 눈여겨 본 한나는 송태섭을 따라 나간다.

 

한나는 자신을 향한 송태섭의 마음을 확실히 알고 있지만, 당장 교제할 마음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다른 부원들보다 훨씬 친밀하게 지내고, 마음을 쓰고 있다는 점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희망 고문하는 나쁜 언니 호칭만 하더라도, 서로 성을 떼고 료타(リョータ)와 아야짱(アヤちゃん)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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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의 뒷모습을 보면 빈손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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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섭이 못난 소리를 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하리센이 등장한다. 격려해 주는 방식이 상당히 과격하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는 이 밤 산책 장면이 원작보다 풍성하게 각색되었다. 깊은 숲속으로 조깅하러 들어가는 것은 훼방꾼 강백호를 피하기 위해서일까? 송태섭이 느끼는 부담감이 더욱 부각되고, 한나의 진심 어린 위로의 말은 풀벌레 소리와 어울려 로맨틱한 분위기마저 느끼게 한다. 원작의 코믹 요소를 최대한 제거하여, 하리센은 한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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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을 다한 하리센은 바로 사라지고, 한나 선배는 다시 빈손이 된다.

 

이곳은 평소 연습하거나 생활하는 학교 체육관이 아닌, 머나먼 원정지이다. 코트나 실내 연습장이 아닌 길 한복판이며, 한곳에 머물러 있는 상황도 아니고 이동(산책) 중이다. 하리센을 숨기거나 잠깐 어딘가에 놔둘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라는 뜻이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이 작품에서 하리센은 실재하는 물건이 아니며, 그저 만화적 표현의 하나인 것이다.

 

만화적 표현이란,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사용되는 상징적인 표현 기법들을 일컫는다. 과장되거나 비현실적인 표현들이 많다. 작중 상황이나 캐릭터의 감정에 쉽게 공감하도록 하는, 만화가와 독자 사이의 약속이자 만화가 사이의 암묵의 룰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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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백호가 여자한테 차일 때마다 등장하는 축포(송태섭이 차일 때도 동일하게 등장), 버둥거릴 때의 다리 모양, 강백호의 볼 핸들링의 가공할 속도, 자전거 졸음운전 사고를 내고 날아가는 서태웅, 농구장 소음 속에서 소연이의 목소리만 증폭해서 듣는 백호의 귀 모양, 강백호 박치기 공격의 강려크함을 보여주는 신오일의 표정, 철벽수비란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는 훅훅 디펜스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작품에서의 하리센은 강백호의 막장스러움과 그것을 다스리는 매니저 한나의 다급함을 보여주고, 독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만화적 표현이다. 하리센의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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