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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2. 인류는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

 

인류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을 가장 먼저 꼽겠다. 농업혁명 이전까지 인류는 채집과 수렵에 의존하여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어야 했다. 문제는, 야생에서 채집과 수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식량에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야생동물과 식물이 자연적으로 부양할 수 있는 인구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너무 많은 동물을 사냥해 버렸다간, 동물이 멸종되어 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고기를 얻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초기 인류는 식량을 찾아 계속해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획득한 식량을 비축할 수도 없었다. 이런 자연적 한계로 인해 현생 인류의 수와 문화는 수십만 연간 비교적 더디게 발전해 왔다.

 

인간이 자연적 한계를 뛰어넘게 해준 것이 바로 농업혁명이다. 식물은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받아, 물과 이산화탄소를 탄수화물과 산소로 전환하는 바이오 기계이다. 인간은 효율이 좋은 식물 (밀, 벼, 보리, 호밀 등)을 대량 재배하여,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 방법을 터득했다. 농업은 같은 면적대비 채집이나 수렵 대비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생산해 낸다. 덕분에 인류는 채집이나 수렵을 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인구수를 부양하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생산물이 늘어난 덕분에 인류 역사상 최초로 잉여생산물이 등장했다. 잉여생산물의 존재 덕분에 도시에는 사람들이 모여 살며 분업화 (대장장이, 사제, 왕, 관료, 군대 등등)가 이뤄졌고, 인류의 문화와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전근대적 농업 생산량에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했다. 대부분의 식물을 성장시키는 데는 물과 탄수화물뿐만 아니라 질소 등의 영양소가 반드시 필요한데, 땅이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질소의 양은 한정되어 있었다. 땅이 갖고 있는 질소 (를 포함한 필수영양소)가 부족해져서 식물이 잘 자라지 않는 것을, 과거에는 지력이 쇠한다고 했다. 질소는 자연적으로 얻기 힘든 원소이기 때문에, 벼농사를 쉬면서 대신 콩을 길러 (콩과 식물은 뿌리에 공생하는 미생물을 통해 질소 고정한다) 지력을 회복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맬서스의 인구론이 등장한 것은, 이처럼 인구 증가 속도를 식량 생산 증가 속도가 따라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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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공장. 1868년, 리처드 하트먼

출처 - <링크>

 

식량 생산 증가 한계를 해제한 것이 산업혁명이다. 농업혁명이 현재 지구로 향하는 태양 에너지를 활용하는 혁명이었다면, 산업혁명은 과거로부터 아주 오랫동안 축적된 태양 에너지 (석탄, 석유등의 화석연료)를 활용함으로써 에너지를 얻는 혁명이었다 (물에 비유하자면, 농업은 빗물처럼 그때그때 지구로 오는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고, 산업혁명은 호수와 바다처럼 쌓여있는 에너지를 직접 끌어다 쓰는 셈이다). 덕분에 인류가 활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동 수단의 발명(증기선, 기차, 자동차 등), 기계설비의 등장, 전기 생산 등. 화석연료의 활용이 불러온 엄청난 변화들 속에서, 한 가지 사례가 바로 화학적인 비료 생산이다. 화학적인 방식으로 비료를 생산하려면 높은 열과 압력이 필요한데, 화석연료를 사용함으로써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 화학적 비료의 사용으로 인해 농업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상승하였기 때문에, 지난 백 년간 동안 인구수는 급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6.25 직후부터 비료 공장 건설에 사활을 걸었던 데엔 이런 이유가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 (전자기기, 난방, 버스, 자동차, 옷)의 거의 전부다 화석연료의 사용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이러한 화석연료가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인구와 경제가 급격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화석연료의 사용이 인류 역사와 가치관에 미친 영향에 대해선 이안 모리스가 쓴 가치관의 탄생이란 책을 추천한다)

 

Q13. 최근의 기술혁신 (생성형 AI 등)이 세계 경제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인구수(양)에 의한 경제성장이 어렵다면, 유일한 해답은 기술 발전 (질)에 의한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이다.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기술혁신이 일어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20세기 후반부터 반도체, 인터넷 등을 비롯 수많은 기술혁신이 이뤄졌고, 가장 최근에는 LLM에 기반한 AI가 각광을 받고 있다. AI의 기술의 발전은, 다른 분야의 연구개발에도 응용될 수 있어 기술 발전의 속도를 더욱 앞당길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최근 수십 년 내 인류는 어떤 결정적인 기술혁신을 경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의 경제 성장 패턴을 분석해 보면, 아직 최근의 기술 발전이 생산성 향상 (경제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만한 증거는 없다. 신기술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이러한 기술을 개발하는데도 막대한 비용이 계속해서 소모되고 있다. 아직 신기술의 개발로 생산성이 극적으로 개선되었다거나, 우리의 일상이 윤택해지진 사례는 우리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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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AI 기술에 대해서 많은 희망을 걸고 있다. 인류가 석탄이나 천연가스를 사용한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중국에서는 중세부터 화석연료를 난방이나 요리에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본격적으로 화석연료 사용이 경제성장에 기여하기 시작한 건, 동력 기관이 발명되고 나서부터이다. 나는 과거 정보통신의 발전 (인터넷망 보급 등)이 화석연료 사용 자체라면, 최근 개발된 AI 의 기술이 경제성장을 위한 동력기관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희망 섞인 바램과 달리, 최근의 기술 발전이 경제성장을 이뤄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전기, 비료, 비행기, 자동차 같은 산업혁명기 발명품들은 대량생산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많은 일자리가 만들어졌고, 일반 소비자들도 발전된 기술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AI 기술혁신이 산업혁명처럼 모두를 위한 기술인지 아니면 엘리트 자본가나 과학자들만을 위한 것인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할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전 세계적으로 인구 성장이 둔화되고 있기 때문에 (과거처럼 폭발적으로 늘어난다면, 그 자체로도 문제이다), 거의 확정적으로 경제성장률은 앞으로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Q14. 왜 부의 불평등은 해소되어야 하는가?

 

여기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정치와 사상의 영역이다. 본인의 신념에 따라 얼마든지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 생각은 이렇다.

 

우리는 민주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시장주의와 개인의 사적 재산권을 존중하지만, 정치적으로는 구성원들이 동일한 권리를 갖는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회사에서는 사장님한테 굽신거려야 되지만, 투표할 때는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하는 시민이라는 얘기다. 부자라고 하더라도, 똑같이 군대 가야 되고, 세금 내야 되고, 법을 지켜야 된다는 합의가 존재하기 때문에 민주주의 사회는 유지될 수 있다. 비록 백 있는 놈들은 법도 잘 안 지키고 군대도 안 간다고 욕은 좀 하지만 말이다.

 

부의 불평등이 더욱 극심해지면 어떻게 될까? 평등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가 흔들릴 것이다. 사회는 (대를 걸쳐 세습된) 자본을 가진 소수와 갖지 못한 다수로 완전히 나누어지게 될 것이다. 지금도 이미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점점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요즘은 돈 많은 집 애들이 공부도 더 잘하고, 취업도 더 잘한다. 노력만으로는 삶의 기반을 얻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경제적 부조리 (아무리 노력해도 남들만큼 살 수 없음)가 계속해서 심각해질 경우, 정치적 극단주의도 힘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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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서는 국가가 부의 불평등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해서, 부를 강제로 재분배해 버리자는 주장이 다시 생명을 얻을 것이고, 반대쪽에서는 가난의 원인을 외국인, 무역, 복지시스템 등으로 탓으로 돌리려는 포퓰리즘이 더욱 힘을 얻을 것이다. 원래 문명은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법이다. 반면 야만과 폭력은, 통쾌하고도 가깝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그 자신이 내재하고 있는 부조리를 개선하지 못한다면, 21세기에는 다시금 야만의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위해서라도, 부의 불평등 문제를 어떻게 개선할지를 고민해 봐야 한다.

 

Q15. 능력주의는 부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부의 불평등이 지금보다 심해지지 않으려면 경제성장률이 자본 수익률보다 높게 유지되어야 하는데, 인구감소 등으로 인해 앞으로는 경제성장률이 점점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부의 불평등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질 수밖에 없고, 이를 방치했다간 20세기 초반과 같은 극단주의가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첫 번째 대안은, 교육이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 주고,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전제하는 것은 더 열심히 노력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더 나은 대우를 받게 한다는 능력주의이다. 능력에 의한 차별은, 여러 불평등 중 가장 사회가 감정적으로 가장 잘 용인하는 형태의 불평등이다. 따라서, 능력주의를 확대하여 부의 불평등을 해결한다는 것은 가장 우리가 바라는 형태의 대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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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불평등은 부의 불평등 문제이다. 부의 불평등 문제는 오랜 기간 동안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왔던 소득이 누적됨으로써 만들어진 문제이다. 반면, 능력주의는 소득, 그중에서도 일부만을 차지하는 노동 소득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만을 다룬다. 소득의 불평등보다 부의 불평등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하기 때문에 (소득 상위 10%는 전체 소득의 30%를 가져가지만, 자본 상위 10%는 전체 자본의 60% 이상을 갖고 있다), 능력주의만 강조해서는 결코 과거로부터 축적된 부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게다가 앞으로는 자본 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앞지를게 확실해짐에 따라, 자본가들은 자본을 갖지 못한 이들과의 격차를 본격적으로 벌릴 모양새이다.

 

유일한 능력주의적 해결책은, 능력을 입증한 사람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이는 미국 등에서 지향하고 있는 방식인데, 크게는 성공적인 기업의 경영진들, 창업자에게 천문학적인 보수를 지불하고 있고, 작게는 IT, 법률 그리고 자산운용사들이 직원들에게 수억 /수십억에 달하는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을 가리킨다. 가장 큰 문제점은, 이러한 능력주의에 기반한 보수 체계가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는 데는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소수의 엘리트 (그 엘리트 중 이미 다수가 부유층 출신이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에게 막대한 보수를 주게 되면, 성공한 그 소수만이 새로운 부유층이 될 뿐이다. 이들이 많은 보수를 받아 가는 만큼, 나머지 노동자들이 가져갈 몫은 줄어들어 소득 불균형은 더욱 심화된다. 그리고 성공한 이들은 새로운 부유층으로 편입되고 난 뒤에는 번 돈을 여러 금융자산에 나누어 투자하는 등 기존 부유층과 완벽하게 동일하게 행동하게 된다.

 

능력주의가 부의 불균형 문제를 개선하는 경우는, 능력주의로 인해 창업, 양질의 일자리, 이익이 증가하는 경우뿐이다. 다시 말해,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방법론에 하나로써 능력주의를 생각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능력주의 그 자체로는 부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Q16. 한국의 능력주의란?

 

한국의 능력주의에 대해서는 두 가지 비판이 가능할 것 같다. 하나는 능력주의 = 학벌주의라고 할 만큼, 개인의 능력을 평가할 때 과도할 정도로 학벌을 많이 본다는 점이다. 수능시험 한번 잘 보면, 평생 머리 좋다는 얘길 들으면서 살 수 있다. 반면, 수능을 망친 경우 그 사실이 평생을 따라다니며 괴롭히게 된다. 수능이 과연 개인의 능력을 측정하는데 가장 적합한 지표냐 하는 문제냐 하는 차치하고서라도, 개인의 능력에 대한 평가 대부분이 사회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끝난다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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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노동의 생산성과 소득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언급한 대로, 능력주의가 쓸모 있는 것은, 그로 인해 생산성이 늘어나는 경우뿐이다. 그런데 한국 기업들은 공채 지원자의 능력 (학벌, 스펙이나 인적성검사)을 평가하는 데만 너무 매몰되어 있고, 기존 직원들의 생산성을 측정하거나 그에 비례한 소득을 지급하는 데는 뒤처져있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보다 정규직이, 중소기업보다 대기업 근로자들이 훨씬 더 많은 소득을 얻는다. 그리고 가장 높은 급여를 가져가는 것은 대부분 오너 일가 출신이거나 이와 관련이 있는 경영진이다.

 

나는 지금 대기업 정규직 직원들이 너무 과도한 급여를 가져가고 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문제 제기를 하려는 부분은, 비정규직이 성과에 따라 정규직으로 전환되고, 중소기업에서 좋은 성과를 내면 대기업으로 스카우트되는 게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경직된 구조 안에서는, 좋은 성과를 내는 것보다 좋은 타이틀을 거머쥐는 것이 더 좋은 전략이 된다.

 

우리나라의 노동생산성이 낮다는 말에서 생략된 것은, 이미 우리나라 저 숙련 서비스 노동자들의 노동생산성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점이다 (이는 고객센터에 전화 한 번만 해봐도 알 수 있다). 노동생산성이 낮은 근본적인 원인은, 높은 급여를 받아 가는 관리직과 임원들이 그에 비례하는 생산성을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미국에서는 승진을 할수록 워라벨이 망가진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책임과 실적에 대한 압박감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미국 임원에 삶이란 가까이서 보면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빡세다. 반면, 멀리서 본 한국 기업의 임원들과 관리직은 오너 눈치만 살피는 것 같다. 모든 의사결정의 권한과 책임이 오너에게로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좋은 실적을 내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이처럼 노동자의 생산성과 급여 수준이 비례하지 않는 상황에서, 능력주의는 그저 시스템이 가진 모순을 감추고, 학벌과 출신에 따른 불공평을 정당화하는 도구로써만 기능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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