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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이 놓친 최근 유럽 뉴스 포인트

 

“유럽과 논의하려면 누구에게 전화해야 하나?”

 

1970년대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가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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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세계 외교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 2023년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출처-<로이터>

 

그는 20세기 가장 유명한 외교관 중 하나다. 이런 그가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국제 정치의 공간 혹은 외교 현장에서 유럽(지금은 유럽연합)이라고 하는 상대가 얼마나 독특한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

 

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대통령 또는 국무장관이 한국과 주요 사안에 대해 긴밀하게 논의해야 할 경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상대는 한국 대통령일 것이다. 그러나 1970-80년 당시에는 미국 국무장관 입장에서 유럽과 관련된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서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하는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사안에 대해 유럽 국가들과 논의해야 하는데, 프랑스 대통령이나 독일 총리같이 주요 국가의 수장에게 연락해야 하나? 아니면 유럽공동체 기구의 고위 관료에게 연락해야 하나?”

 

특히, 정치·군사와 같은 복잡하고 어려운 사안일수록 더욱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키신저가 지금 미국 국무장관이라면, 유럽과 논의하기 위해 전화할 상대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적어도 앞으로 5년간 ‘폰 데어 라이엔(Ursula von der Leyen)’에게 전화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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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그녀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위치한 유럽의회에서 유럽연합 집행위원장(European Commission President) 연임에 성공했다. 무기명 방식(secret ballot)으로 진행된 투표에서 그녀는 총 719명의 유럽의회 의원 가운데 401명에게 선택받았다. 이번 투표에서 가결 요건은 과반인 360표였는데, 41명의 선택을 더 받은 셈이다. 

 

지난 2019년 당시 9표 차이로 가까스로 집행위원장에 선출된 것을 감안하면, 그녀의 정치력이 어느 정도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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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회에서 진행된 표결에서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연임에 성공한 뒤 기뻐하고 있다. 

출처-<뉴시스>

 

워낙 이슈가 많은 요즘이라 이 사실을 모르는 독자가 많겠지만, 국내 다수 언론이 이 사실을 보도했다. 다만, 기사에서 아쉬웠던 점은, 그녀가 ‘여성’이라는 다소 비본질적인 부분에 집중하여 보도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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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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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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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뉴시스>

 

예를 들어, 그녀가 의사 출신이자 7남매를 둔 ‘만능 워킹맘’이라거나, 2013년 독일의 첫 ‘여성 국방장관’으로 지명되었다거나, 또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66년 역사에서 연임에 성공한 첫 여성이라는 점 등이다. 

 

물론 이 같은 부분이 시사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포인트는 다음의 것들이다.

 

‘본질적으로 유럽연합은 무엇인가’

 

‘유럽 정치의 구조는 어떠한가’

 

‘그 구조에서 그녀의 연임은 향후 유럽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EU, 상상력의 산물

 

유럽연합(EU)은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계속 변해왔다. 지금도 변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정치학이 낳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요즘 사람들은 언론을 통해 유럽연합을 쉽게 접하기 때문에 유럽연합이 익숙하기도 하고 마치 예전부터 있었던 국가(state)처럼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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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럽기도 원래 있던 듯

자연스럽게 느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유럽연합은 불과 30년 전인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통해 시작되었다. 우리가 유럽 여행을 위해 시중은행에서 환전하는 유로화는 불과 20년 전인 2002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 속도를 고려한다면, 향후 10년 후 유럽연합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지 예측하기 쉽지 않다.

 

유럽연합이 얼마나 큰 정치적 상상물인지 이해하기 위해 발칙한 상상력을 동원해 보자. 우리를 포함하여 예시를 들어보겠다. 

 

2000년대 초반, 서로 전쟁을 경험했던 동아시아 6개 국가(한국, 북한, 일본, 중국, 대만, 필리핀)가 평화와 협력을 위해 아시아연합(Asian Union)을 만들었다. 6개국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여 아시아연합을 출범시키기로 합의한 거다. 

 

이 과정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장쩌민 중국 주석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을 어렵게 설득하여 이 합의를 성사시켰다. 한국, 중국, 일본이 뭉치자,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안보 이슈를 공유하고 있는 북한, 대만, 필리핀이 이 연합에 동참했다. 

 

(실제 1950년대 초반 유럽통합의 시초는 프랑스 정치인 ‘장 모네’의 계획에서 출발했다. 이후 프랑스 외무장관이었던 슈만이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설립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이 공동체의 초기 회원국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베네룩스 3국인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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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모네

출처-<touteleur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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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외무장관이었던 슈만(뿔테안경)

 

이렇게 출범한 아시아연합은 여러 위기도 있었지만, 와해보다는 지속적인 확대 및 심화의 길로 나아갔다. 아시아연합은 점차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한 김대중 같은 정치지도자 개인보다 연합 내부에서 다양한 제도를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발전을 거듭했다. 

 

특히, 중요 현안에 대해 아시아연합 누구와 외교적 논의를 해야 할지 모호하다는 비판을 수용하여 대안을 마련했다. 아시아연합 집행위원회의 권한을 점차 강화하여 집행위원회가 그 역할을 맡게 한 것이다. 집행위원회는 연합 내 개별 국가의 이익보다는 연합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여 판단을 내려야 한다. 집행위원회를 이끌어갈 리더인 ‘집행위원장’은 다수결로 선출하기로 했다.

 

이런 시스템을 국제사회도 인정했다. 그래서 집행위원장은 G7, G20 정상회의 같은 중요 외교무대에 아시아연합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간략하게 서술한 정도이지만, 이 정도만 해도 지나치게 터무니없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상상이 유럽 통합,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실제 역사다. 

 

또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27개 개별 회원국의 이익과 별개로 유럽연합 전체를 대변하는 독립된 조직이다. 이를 위해 집행위원회는 정책 이행, 예산 관리·집행 등과 같은 일반 국가의 행정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때문에 몇몇 언론들은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인 폰 데어 라이엔을 ‘유럽 대통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우도 국가 정상급으로 받는다. 그리하여 G7, G20 정상회의는 물론 NATO 정상회의에도 유럽을 대표해 참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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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3년 5월,

일본에서 열린 G7 정상회담에

폰 데어 라이엔(왼쪽에서 두 번째)이

참석하고 있다. 

출처-<Merkur>

 

유럽 외에는 없는 정치 구조를 가진 유럽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유럽 정치는 어떻게 봐야 할 까? 

 

 

유럽정치, 어떻게 볼 것인가

 

중요한 건,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유럽연합)를 ‘있는 그대로’ 볼 필요가 있다. 국제정치학에서 유럽연합은 국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에게 익숙한 유엔(UN)과 같은 국제기구도 아니다. 

 

유럽연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새로운 정치적 실험’이며, 냉전 시대의 국가중심적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탈냉전적 정치체(polity)이다. 

 

영국의 정치학자 이안 매너스(Ian Manners)는 이런 유럽연합만의 독특한 역사적 맥락과 하이브리드 정치적 구조(hybrid political system)를 강조하며, 유럽연합을 국제사회에서 이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행위자’(a novel kind of actor)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지금도 남과 북이 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있으며, 여전히 상당수의 사람들이 세상을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라는 이분법으로만 인식하는 한국에선 제대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정치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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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유럽 정치는 어떻게 작동할까? 

 

두 가지 관점이 있다. 

 

1. 모라브칙(Moravcsik)의 ‘정부간주의’ 관점

 

유럽통합은 물론, 유럽연합 내에서의 정치는 프랑스, 독일과 같은 개별 회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협상의 결과물이라는 주장이다. 즉, 유럽 정치는 국가들의 협상장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정부간주의’가 중요하게 여기는 유럽연합 기구는 개별 회원국 정상들이 모이는 ‘유럽이사회(European Council)’다.

 

2. 하스(Haas)의 ‘초국가주의’ 관점

 

신기능주의 이론이라고도 불리는 이 관점은, 초기 통합의 동기가 개별 국가의 이익일 수는 있지만, 실제 통합의 과정은 합의하기 쉬운 분야의 협력이 타 분야의 협력으로 전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유럽 정치는 통합이 가속화되며 국가가 가지고 있던 권한들이 국가 상위의 초국가기구로 이양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초국가주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럽연합 기구는 기술 관료로 구성된 ‘유럽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다. 이번에 연임된 ‘폰 데어 라이엔’이 바로 이 집행위원회의 수장인 ‘유럽 집행위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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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앞으로 유럽은?

 

이러한 유럽에서 ‘폰 데어 라이엔’이 연임에 성공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유럽은 어떻게 될까?

 

크게 2가지를 예상할 수 있다. 

 

1. 극우적 성향의 개별 회원국 수장과 유럽연합 기구 수장 사이 갈등이 심화될 것이다. 

 

즉, 개별 회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국가와 유럽 통합을 가속화하려는 유럽연합(초국가) 사이의 줄다리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정부간주의와 초국가주의의 대결로도 볼 수 있는데, 최근 유럽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극우 정당의 영향력으로 인해 오히려 이 같은 대결 양상은 과거보다 더 극단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지난 5일 헝가리의 빅터 오르반 총리가 러시아 푸틴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러시아를 공식 방문하면서 갈등이 수면 위로 급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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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러시아를 공식 방문한

헝가리 빅터 오르반 총리(왼쪽)가

러시아 푸틴 대통령(오른쪽)과

회담하고 있다. 

출처-<연합뉴스>

 

최근 오르반 총리는 ‘평화 임무’라며 중국과 러시아를 잇달아 방문했다. 이로 인해,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와 마찰을 빚고 있다. 오르반 총리는 유럽연합 회원국 수반이기도 하지만, 7월 1일부터 12월까지 6개월간 유럽이사회(Council of the EU) 의장도 맡고 있기 때문에 이 사안은 더 중요한 이슈로 대두되고 있다. 

 

(유럽이사회는 회원국들의 각료 1명씩으로 구성된 집단체로서, 회원 각국의 국익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대변하는 정부 간 기구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 의회가 하원 역할을 한다면, 유럽이사회는 유럽 입법부의 상원 역할을 한다)

 

이에 유럽 집행위원회는 물론 유럽 의회는 오르반 총리의 행보에 대해 전혀 협의된 바 없다고 밝혔으며,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오르반 총리가 의장직을 맡는 동안에는 주요 회의에 불참하는 보이콧을 선언하기까지 했다. 

 

2. 연임에 성공한 폰 데어 라이엔은 유럽통합주의자들이 강조했던 ‘정치와 안보’ 분야 통합을 위한 제도적 발전에 관심을 둘 것으로 보인다. 

 

앞서 기술했던 유럽 통합을 강조하는 초국가주의자들은 비교적 합의가 쉬운 경제적 분야의 협력을 시작으로 정치·안보 분야의 통합까지 추구했다. 이런 관점에서 유럽통합주의자인 폰 데어 라이엔은 첫 번째 임기(2019-2024) 때 미비했던 정치와 안보 분야 통합을 위한 제도 개선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BBC 보도를 봐도 그 흐름을 알 수 있다. 폰 데어 라이엔은 미국에서 트럼프 재선의 가능성이 높아지자, 유럽이 점차 군사·안보적으로 미국 의존성(dependencies)을 줄여야 한다고 했다.

 

BBC  폰 데어 라이엔.png

출처-<BBC> 링크

 

이번 연임 과정에서 극우 세력으로 분류되는 이탈리아 조지 멜로니와 확실하게 선을 그은 것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지난 6월 유럽 의회 선거에서 극우 정당들이 약진하는 쾌거를 냈다. 하여, 많은 전문가들은 폰 데어 라이엔이 연임을 위해 불가피하게 멜로니와 손을 잡을 것으로 보았다. 

 

이탈리아 조지 멜로니가 소속된 유럽보수와개혁(ECR) 정당이 지난 6월 선거로 인해 유럽 의회에서 4번째로 많은 의석수를 보유한 정당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폰 데어 라이엔은 이후 조지 멜로니 측과 지속적인 대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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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1일 자 기사

조지 멜로니(좌)와 폰 데어 라이엔(우)

전술했듯, 이 기사 역시 본질적이지 않은

‘여성’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출처-<한국경제> 링크

 

그러나 결국, 자신의 연임 여부가 결정되는 순간을 앞두고 조지 멜로니 측과의 연대를 끊었다. 폰 데어 라이엔이 연대하는 정당에서 조지 멜로니가 소속된 유럽보수와개혁(ECR)이 제외된 거다. 그 반작용으로 조지 멜로니 역시 폰 데어 라이엔 지명 투표에 기권을 했다.

 

이후, 폰 데어 라이엔은 BBC와의 인터뷰(링크)에서 앞으로 ‘민주주의 세력과 연대’하겠다며 우회적으로 조지 멜로니와의 동행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이러한 기류를 통해 볼 때, 당분간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원장은 극우 정당과의 협상보다 친유럽주의를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폰 데어 라이엔 유럽 집행위원장 연임에 대해 ‘여성’만을 주로 이야기하는 여러 국내 언론 보도를 보며, 본질적인 것을 짚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에 이 글을 썼다. 유럽 연합이란 무엇인가, 유럽 연합 집행위원장이 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폰 데어 라이엔이 연임되었다는 건 향후 유럽이 어떤 방향으로 간다는 것인가 등을 살펴봐야지 폰 데어 라이엔 연임에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정보를 알 수 있다.   

 

적어도 이 글을 읽은 독자들만큼은 그녀의 연임 사실에서 정말 본질적이고 중요한 사실을 취해가시길 빈다. 

 
Profile
이름은 박민중입니다.
생일은 3.1절입니다.
정치학을 전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