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얘기다. 야간자율학습까지 마치고 집에 오면 밤 11시였다. 현관문을 열면 언제나 엄마가 날 반겼다.

 

“고생했어, 우리 아들.”

 

“어.”

 

직장인이 회사에 나가듯 공부하는 게 당연한 학생이었건만, 대단한 일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항상 입이 ‘대빨’ 나와 있었다. 또 뭐가 그렇게 늘 짜증이 났었는지, 작은 일에도 불같이 화를 냈다.

 

“엄마!!! 내 방 청소는 하지 말라니까!!”

 

“…….”

 

그러고는 또 당연하다는 듯, 식탁에 앉아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았다’. 밤 11시에 말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당시 엄마는 나보다 1시간이나 일찍 일어났다. 한 숟갈이나 두 숟갈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말 아침밥, 그 한 숟갈이나마 먹여 보내기 위해서였다. 속이 든든해야 공부도 잘되는 거라면서. 그렇게 철부지를 학교에 보내고 엄마는 종일 식당에서 음식 서빙하고 김밥을 말았다. 집에 돌아와 저녁 준비하고, 아빠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까지 하고 나면 밤 10시. 겨우 앉아 30분쯤 쉬었다가 또다시 작은아들 식사를 준비했을 거다. 찌개가 보글보글 끓어오를 즈음 나는 또 입을 ‘대빨’ 내밀면서 들어왔을 테고, 엄마는 늘 그랬듯 내 어깨를 토닥이며 이렇게 말했다.

 

“고생했어, 우리 아들.”

 

수험생이었어 봐야 열심히 한 것도 아니건만, 배는 또 왜 그렇게 늘 고팠는지 모르겠다. 우걱우걱 잘도 먹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맞은편에 앉아, 밥숟갈 위에 반찬도 올려주고, 생선 가시도 발라줬다. 내가 밥 다 먹고 씻으러 가면 엄마는 또다시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그제야 화장을 지웠다. 우리 집에서 마지막으로 씻는 사람은 엄마였다. 밤 12시였다.

 

그렇다. 이기심과 암묵적 동의와 강요된 희생으로 빚어낸 역사, 동분의 ‘가사노동사(家事勞動史)’를 다뤄보려는 참이다.

 

허연 오뎅국과 뻘건 오뎅국

 

술과 노름으로 인생 허비한 아버지 대신 밥벌이해야 했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 대신 살림 책임졌던 언니. 그랬던 언니가 결혼한 건 동분 12살 때다. 그때 동분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뒀다. 이제 4살밖에 안 된 막내 여동생 돌보고 살림할 사람이 없었다. 동분 말고는.

 

그게 시작이었다. 도무지 끝이 안 보이는 가사 노동의 역사 말이다.

 

“그때 겨우 국민학교 5학년이었는데 요리를 했겄어, 뭘 했겄어. 엄니가 일하러 나가기 전에 항상 커다란 양은 냄비에다가 무 넣고, 파 넣고, 멀겋게 된장찌개 끓여놓고 갔단 말여. 그럼, 낮에 그거 다시 끓여가지고 니네 작은이모랑 밥 해먹고 설거지 해놓는 정도였지. 청소랑 빨래나 좀 하고. 그나마도 2년 정도였어. 14살 때 동아책방 사장 댁으로 들어갔으니까.”

 

그때부터 섬유, 통조림, 제화 공장 등을 전전하며 기숙사에서 지냈다. 살림은커녕 요리할 일도 많지 않았다. 그러다 22살에 송일영과 청주에서 신혼집 차렸다. 동분이 할 수 있는 요리는 딱 두 가지였다. ‘허연 오뎅국’과 ‘뻘건 오뎅국’. 청주에서 지낸 1년간, 동분은 주야장천 오뎅국만 끓였다.

 

1 (15).jpg

‘허연 오뎅국과 뻘건 오뎅국’ 밖에 못 끓이던 시절의 동분

1982년 3월, 청주에서 신혼살림 시작하기 직전의

동분(당시 22살)과 송일영(28살)

 

“오뎅국이 뭐 별거냐. 우선 무 납작하게 썰고, 오뎅도 무 크기만큼 적당하게 썰어서 준비해. 무랑 오뎅 비율은 1 대 1이여. 그다음에 맹물에다가 무 넣고 끓이는 거지. 그때는 육수 뽑을 줄도 몰라서 그냥 맹물로 했어. 호호호. 그렇게 팔팔 끓으면 오뎅 넣고, 다진 마늘이랑 파 넣고, 한 번은 고춧가루 넣었다가 한 번은 안 넣었다가 하는 겨. 마지막에 소금이랑 미원 조금 넣어서 간 맞추고. 그때는 무조건 미원이었어. 미원만 넣어도 어지간하면 맛이 나니까 많이들 썼지.”

 

오뎅국이 쉽고 간단한 요리여서 자주 끓인 것도 있지만, 형편도 형편이었다. 없는 형편에 매번 고깃국이나 생선조림을 할 순 없었다. 그러자니 만만한 게 오뎅이었다. 송일영이 오뎅 싫어한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그래가지고 니네 아빠가 지금도 얘기하잖어. 호호호. 자기는 오뎅을 그렇게나 싫어하는 사람인데, 맨날 오뎅국만 얻어먹었다고. 그러니까 엄마가 우스워죽겠는 겨. 니네 아빠 입맛이 좀 까다롭냐? 지금도 반찬 투정을 얼마나 하는데! 그런 양반이 그때는 1년 내내 오뎅국 끓여줬어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잘 먹었다니까? 호호호. 말하자면 사랑의 힘이었던 거지.”

 

그랬던 동분이 가사 늪에 빠지기 시작한 건 신혼 1년 만에 시댁으로 들어가면서다. 첫날부터 동분은 시어머니에게 된통 깨졌다. 수저를 제대로 놓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엄마는 요리할 줄 몰랐잖어. 그래가지고 니네 할머니가 요리하는 동안 행주로 밥상 훔치고, 밑반찬 꺼내놓고, 수저 놓고 그랬지. 엄마 딴엔 첫날이라고 수저도 가지런하게 놓는다고 신경 써서 놓고 있는데, 니네 할머니가 와가지고는 ‘너는 수저 하나를 제대로 못 놓냐? 도대체 뭘 배워왔냐?’ 하면서 대뜸 소리를 빽빽 지르는 겨. 그러고는 내 손에 든 수저를 ‘홱’ 빼앗아 가더니 숟가락을 왼쪽에, 젓가락을 오른쪽에 ‘탁탁’ 소리 나게 내려놓는 거 있지. 엄마가 얼마나 놀랬다고. 니네 할머니 성질이야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 비로소 실감한 거지. 아, 시작이구나.”

 

동분의 시어머니는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기어이 쫓아와 빗자루든 걸레든 뺏어 들고, 소리를 지르고, 친정 들먹이며 면박을 주고 나서야 물러갔다.

 

자급자족해야 했던 산골 살림

 

대전광역시 대덕구 상서당1길 OO. 그러니까 동분이 줄곧 “서당 살 때”라고 표현하는 시댁(이하=서당)은, 철길 건너 산길을 10분쯤 걸어 올라가야 나오는 산골 마을이었다. 시댁 포함 다섯 가구 정도가 오붓이 모여 지냈다. 편의시설이랄 게 전혀 없었다. 시장 한 번 다녀오는 게 일이었다. 그러니 거의 모든 걸 자급자족해야만 했다.

 

“니네 할머니가 소, 돼지, 닭을 아예 안 드셨잖어. 냄새난다고. 생선 중에서도 갈치나 동태, 양미리 같은 거, 비린내 안 나는 것만 조금씩 드셨지. 그러니까 시장 갈 일이 거의 없었지. 그런 데다가 밭에서 메주콩, 배추, 열무, 옥수수, 대파, 상추, 감자, 호박, 가지, 풋고추까지. 아무튼 간에 어지간한 야채는 다 길러 먹었으니까. 마당에 자두나무도 큰 거 하나 있었고, 앵두랑 대추나무도 있었고, 마당 수돗가 한쪽에 미나리깡도 있었거든. 그러니 쌀이랑 소금, 양파랑 마늘 같은 거, 가끔 생선만 시장에서 사다 먹었지, 뭐.”

 

2 (14).jpg

1983년 5월, 1년의 신혼생활을 정리하고

시댁 들어가자마자 백일 된 주성과 함께

동분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가사 늪에 빠지기 시작했다

 

서당의 1년 살림은 3월부터 시작이었다. 앞마당 텃밭에 감자, 대파, 옥수수, 가지, 시금치, 아욱 등을 시작으로 4월이면 고추, 호박, 상추, 5월엔 뒷마당 산자락에 메주콩을 심었다. 철마다 동분의 시어머니가 앞장서고, 동분이 뒤따랐다. 동분은 그전까지 줄곧 공장만 다녔다. 농사는커녕 호미 한 번 잡아보지 않았다. 모든 게 서툴렀다. 그때마다 시어머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러면서 꼭 한마디를 붙였다.

 

“너는 도대체 집에서 뭘 배워왔냐?”

 

“…….”

 

그렇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잔소리 들어가며 농사일 배우고 살림을 익혔다. 봄부터 초여름까진 미나리깡에서 키운 돌미나리와 텃밭 상추, 아욱, 시금치 등이 주된 찬거리였다.

 

“미나리깡에서 미나리가 얼마나 잘 자랐다고. 한 움큼씩 베어다가 줄기는 김칫국물 담가 먹고, 여린 이파리는 훑어서 식초랑 고춧가루 넣고 새콤하게 무쳐 먹었지. 아무튼 간에 여름까지는 미나리가 밥상에서 안 빠졌어. 그렇게 베어 먹어도 금방금방 줄기가 올라왔으니까. 그러고 아욱, 시금치 같은 건 물에 살짝 데쳐서 된장이랑 들기름 넣어서 무쳐 먹거나 된장국에 넣어서 끓여 먹고. 상추 이파리 올라오면 따다가 쌈 싸 먹고. 시골 밥상이 뭐 있냐? 맨날 김치에 된장국 아니면 된장찌개지. 그냥 척척 하긴? 니네 할머니한테 다~ 혼나면서 배운 겨. 얘기했잖어. 청주에서 신혼 살림할 때 오뎅국밖에 못 끓였다고. 그러니 얼마나 깨졌겄냐. 아휴~ 말도 말어. 아무튼 뭐 하나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어. 너도 알잖어, 니네 할머니 성깔. 얼마나 까다롭고 깔꼼 떠는 양반이었냐.”

 

초여름이면 감자를 수확했다. 수확한 감자는 뒷광 흙바닥에 풀어놓고, 1년 내내 골라 먹었다. 채 썰어서 소금이랑 후추 뿌려 볶아도 먹고, 간장 넣어서 졸여도 먹고, 납작 썰어서 감잣국도 해 먹었다.

 

감자를 시작으로 여름부턴 먹거리가 풍성했다. 옥수수, 호박, 가지, 풋고추, 자두, 앵두 등이 저마다 달렸다. 가지는 식용유에 달달 볶아먹거나 물에 데쳐서 고춧가루 뿌려 무쳐 먹었다. 호박은 감자와 함께 된장찌개에 숭덩숭덩 썰어 넣었다. 새우젓 넣고 자박자박 졸여 먹기도 했다. 호박 이파리도 손질해 쪄서 밥에 싸 먹거나 절구로 으깨 된장국에 넣어 먹었다. 끼니마다 풋고추와 상추도 빠지지 않았다.

 

긴긴 여름밤이면 자두나 앵두 따다 씻어 먹고, 옥수수 따다 ‘뉴슈가’ 한 숟갈씩 퍼 넣어 쪄 먹었다. 옥수수 껍질 벗길 때 수염은 따로 말려 차로 우려먹었다. 무엇 하나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그런 모든 순간마다 시어머니가 앞장서고, 동분이 뒤따랐다. 동분의 시어머니는 뭐든 자신이 직접 해야 직성 풀리는 타입이었다. 어떤 일이든, 그러니까 농사든 요리든 살림이든 동분에게 전적으로 맡기지 않았다. 설령 맡겨도 끝내는 본인이 와서 다시 해야 비로소 일이 마무리되곤 했다.

 

3 (1) (6).jpg

3 (2) (6).jpg

시댁에 살던 시절 1984년 8월, 마당 수돗가에서

아들 주성과 조카 철수를 씻기고 있는 동분

 

그러니까 서로 피곤한 겨. 차라리 모든 살림을 맡기고 신경을 안 써주면 엄마가 마음이라도 좀 편할 거 아녀. 아니면 아예 당신 혼자서 다 하시던가. 그것도 아니면 딱 나눠서 역할 분담을 하던가. 이건 뭐, 시켜놓고 사사건건 쫓아다니면서 잔소리를 해대니 니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피곤한 거고, 엄마는 엄마대로 몸고생, 마음고생을 다 한 겨. 근데 또 지금 와서 가만가만 생각해 보면 니네 할머니가 뭐 대단하게 잘못했나 싶어. 성깔이 좀, 아니 대~단~하게 까다로웠다 뿐이지. 호호호. 그냥, 그 시대가 그랬던 거지, 뭐. 아무튼 니네 할머니도 스스로를 가만 못 두는 양반이라, 평생 고생만 하다가 갔어. 세월이 오래 지나서 그런가? 가끔 니네 할머니 생각하면 짠한 마음이 든다?”

 

그렇게 예순 넘은 노파와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새댁은 새벽부터 일어나 마당을 쓸고, 아이들을 씻기고, 아침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수돗가에서 손빨래하고 청소를 하고, 밭일하고 점심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밭일하고 저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야식을 챙겼다. 당시 서당엔 동분의 시아버지부터 시어머니, 시동생, 동분과 남편 송일영, 큰아들 주성과 조카 영희와 철수까지. 대식구 여덟 명이 살았다. 감자를 수확하고 노는 텃밭에 7월이면 배추와 무 씨를 사다 뿌렸다.

 

4 (1) (3).jpg

4 (2) (3).jpg

 

2023년 12월, 현지답사 차원에서 동분 씨와 남편 송일영 씨를 모시고 대전광역시 대덕구 상서당1길 OO, 그러니까 동분 씨가 줄곧 “서당살 때”라고 표현하는 곳에 다녀왔다. ‘서당 집’은 1989년 동분의 시어머니 故 김동춘 여사가 이사 나간 뒤로 줄곧 비어 있다가 자연스레 허물어졌다고, 여전히 마을을 지키는 옆집 어르신이 전해줬다. 현재는 집터와 담벼락 일부만 남아있는 상태다. 사진 속 덤불 쌓여있는 터가 예전 마당 수돗가 자리인데, 위의 사진과 비교해 보면 담벼락이 똑같다는 걸 알 수 있다.

 

 

5 (5).jpg

여전히 마을을 지키는 옆집 어르신은, 거의 30년 만에 만난 동분과 송일영을 단박에 알아봤다. 어르신은 “그때 주성 엄마가 참 고생 많이 했었는데……. 그렇게나 고왔던 새댁이 언제 이렇게 늙어버렸어? 허허허.”라며 동분 손을 꼭 잡았다.

 

6 (4).jpg

그 시절, 동분이 하루에도 수십수백 번

왔다 갔다 하던 ‘서당 집’ 앞 골목길에서

작은아들 주홍(본인)과 한 컷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