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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화<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아버지는 자신과 큰아버지의 관계처럼 내가 장남으로서 무게를 가지고 동생을 대하길 바랐다. 그래서 나와 동생이 장난을 치고 크게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면 불같이 화를 냈다. 하지만, 내가 별것도 아닌 이유(예를 들어, 동생이 편식한다든지, 티비 드라마에 나온 인물의 욕을 따라 하는 것)로 동생을 혼내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이런 스탠스는, 아버지에 대한 나의 반감을 더욱 키웠다. 웃기지 않은가? 정상적인 가정이라면 화목하게 웃으며 어울리는 형제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반대로 동생을 혼내고 울리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형을 말렸을 텐데 말이다. 처음에는 동생을 지도한다는 착각 속에 어린 동생을 많이 혼내기도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제대로 된 형의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타인을 꾸짖는 데서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건 조금 문제가 있는 상태일 테니까.

 

애초에 나와 동생은 나이 차이가 크게 났기 때문에, 나는 동생이 너무나 귀여웠다. 누군가는 동생이 태어나면 부모의 사랑을 빼앗긴다는 느낌에 동생을 미워하기도 한다지만, 국민학교 때까지 반쯤 외동으로 큰 나로서는 갓 태어나 꼬물거리며 커가는 동생이 예뻤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부모님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집 안에서도 항상 불안하고 두렵고 외로웠다. 그때 동생이라는 존재는 나에게 큰 치유가 되었다. 성격이 무뚝뚝해 크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마음만큼은 그랬다(물론, 동생은 나이 차 많이 나는 형이 무섭고 어려웠을 것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트라우마를 형제 관계로 치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었다. 나 역시 내 마음의 상처를 동생과의 관계에서 치유하고 있다는 걸.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생존 방식을 따라가고 있었다. 어떨 때는 그게 두렵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보고 자란 것만으로 그 행동들이 자연스레 내 것이 될 때 말이다. 

 

디아블로 잡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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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화<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우리 오늘은 성당에 가지 말까?"

 

내 질문에 동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어머니가 억지로 미용실에 데려가 볶은 브로콜리 같은 동생의 갈색 파마머리가 바람에 흔들린다. 

 

"그럼 우리 어디 가노?"

 

어렵게만 생각되던 형이 갑자기 예상치 못한 제안을 하니 동생은 매우 혼란스러운 듯했다.

 

아이들 주머니 사정을 고려할 때, 갈 곳이라고 해 봤자 몇 군데 되지 않는다. 피씨방, 오락실, 만화방 정도다.

 

"피시방 갈까?"

 

집에 컴퓨터가 없던 시절. 장난감 몇 개도 없던 동생에게 피시방은 에버랜드와 동급으로 가슴 설레는 단어였다.

 

"응 좋다!"

 

우리는 성당으로 진입하는 길에서 옆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날을 계기로, 어쩌다 보니 일요일만 되면 우리는 피시방으로 향하는 일탈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피시방 수요가 높아 1시간에 1,500원, 심하게는 2,000원을 받는 곳도 있었다. 주머니 사정이 궁핍한 나와 동생은 800원을 받는 피시방을 가기 위해 집에서 한 시간 떨어진 곳까지 걸어 다녀야 했다. 들이는 노력에 비해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짧았지만, 나와 동생 모두 집에 있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편했다.

 

우리가 즐겨하던 게임은 그때 한창 유행했던 디아블로2. 악마들을 혼내고, 서로 주운 아이템을 나눠 갖고, 어떻게 어려운 보스를 때려잡을지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우리 형제에겐 지금까지도 꺼내는 평생의 추억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문방구 옆 분식집에서 파는 떡볶이를 동생에게 사주었다. 커서는 입에도 대지 않는 떡볶이를 그때의 동생은 왜 그리도 좋아했는지, 헤헤 웃으면서 떡볶이를 먹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행님은 떡볶이 안 묵나?"

 

당연히 두 사람이 먹을 돈이 없었다.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지오디 노래 가사에 나오는 진부하고 뻔한 스토리가 바로 우리 가족의 역사였다.

 

"나는 떡볶이 안 좋아한다."

 

일요일마다 피씨방을 오가며 떡볶이를 사 먹고, 때로는 텅 빈 운동장에 누군가 버려 놓은 축구공을 주고받으면서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그제야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형성하는 법을 배우고, 그 관계에서 오는 정서적 치유가 뭔지 깨닫기 시작했다. 부모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을 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이겨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습득했다.

 

우리 형제의 일탈 행위는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적발되었다. 아니, 몇 달이면 사실 꽤 오래 버틴 것이기도 하다(그동안 우리는 열심히 장비를 맞추고 레벨을 올렸지만, 아직 보스인 디아블로를 잡기엔 역부족이었던 때였다).

 

그래도 재밌었다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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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화<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예비 신자 교육이 끝나면 다음 절차는 세례받기다. 성당을 보낸 지 몇 달이 지나도 우리가 세례 이야기를 꺼내지 않자 이상하다고 여긴 어머니는 옆집 아줌마를 찾아간다.

 

"우리 애들은 세례 언제 받는답니까?"

 

"이번에 세례받는 명단에 애들 이름은 없던데요?"

 

옆집 아주머니로부터 제보받은 어머니는 그날 저녁에 나를 부르셨다. 걸렸다는 생각에 얼마나 혼이 날지도 걱정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사실, 누군가를 속이며 산다는 건 참으로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껏 긴장해 어머니 앞에 앉았다.

 

"니들은 내를 기만했다."

 

엄청나게 혼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어머니는 차분했다. 살아오면서 어머니가 그런 고급스러운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아마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성당에 왜 안 갔노?"

 

"성당은 우리한테 도움이 안 되니까."

 

진실한 신앙심으로 성당을 가지 않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는 것이 우리의 명분이었지만, 속으론 악마를 때려잡는 게임을 하며 세계 평화를 수호한 것도 하느님이 어느 정도 정상참작 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머니는 어이가 없으셨는지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다 느그 마음대로 해라."

 

어머니는 한마디 하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은 저렇게 해도 평생 이 일을 끄집어내어 말씀하실 거란 걸 나는 그때 알았다. 실제로 마흔이 넘은 내게, 지금도 가끔 이 이야기를 꺼내곤 하신다. 그때 너희들이 성당만 갔어도! 하시면서.

 

하여튼, 어머니는 아직도 모르신다. 성당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인맥을 쌓을 시간에, 우리는 형제간의 우애를 쌓았다는 걸. 그리고 그 시간이 우리 인생에 더 큰 힘을 주었다는 걸.

 

의외로 쉽게 상황이 종료되자 나는 약간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방으로 들어갔다. 동생은 하도 오래되어 고장이 나서 작동하지도 않는 미니카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나를 올려다본다. 어머니에게 혼이 나고 기분이 안 좋아져서 들어올 형을 살피는 듯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동생이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재밌었다아이가, 그쟈?"

 

그 말에 동생이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응!!"

 

그렇게 나와 동생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사실은 내가 동생에게 기대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동생과 나는 그 긴 시간 동안, 가족끼리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당일치기로 놀이공원 한 번 가 본 기억 역시 없다.

 

그것은 부자의 세상도, 화목한 가정의 뭣도 아닌,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떤 신세계의 풍경이다. 언젠가 가족 구성원의 누군가가 아버지에게 맞고, 울부짖으며, 고성이 오가는 무수한 가정폭력의 나날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가슴 졸이는 기억만이 선명할 뿐이다.  

 

말그대로 진짜 피가 터지는 가정폭력을 당하거나 지켜봐야 했고, 그 모습에 혹시나 내 자식이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부모님도 없었다. 누구도 위로해 주지 않았고 관심받지 못했다. 그건 슬픈 것도 뭣도 아닌, 내게는 당연한 세상이었다.

 

그런 나에게 동생이 생겼고, 동생으로부터 치유 받았다. 그리고 동생은 놀아주는 형이라도 있어, 그때의 나보다는 덜 외롭지 않았을까 한다. 

 

동생 의견도 한번 들어 봐야겠지만 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