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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미일 안보협력 프레임워크를 체결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한미일 안보협력이 제도화된 것입니다.”
- 7월 28일 신원식 국방부 장관의 발언 中
지난 28일, 한미일 국방장관 회의가 도쿄에서 개최됐다. 여기서 한미일 3국 국방장관들은 안보협력 프레임워크를 체결했다. 프레임워크라는 건 방향과 지침을 정리한 문서라는 의미이고, 법적인 구속력은 없는 문서이다. 이게 발전한다면, 한미일 군사동맹의 기본 토대가 될 수 있기에 역사적으로 ‘꽤’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국방부에서도,
“한미일 안보협력을 제도화한 첫 문서”
라며 그 의미를 설명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을 들으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윤석열 정부의 선택은 옳은가?”
라는 의문까지 들었다. 어쩌면 윤석열 정부는 아니, 우리나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일 수도 있다.
한미일 동맹의 역사
‘윤석열 시대의 한미일 군사동맹(기사 링크)’ 기사와 ‘호주가 프랑스의 뒤통수를 친 속사정(기사링크)’이라는 기사를 보면, 한미일 군사동맹과 최근 돌아가는 국제정세에 대해서 대충은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붙여 놓기 위해 별별 노력을 다해왔다. 미국의 속내를 확인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지난 2023년 3월 6일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윤석열 정부가 제3자 변제 방식을 내놓자, 미국 국무부가 바로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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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국과 일본 둘 사이의 관계를 진전시켜 나가는 걸 권장한다. 한국과 일본은 인도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에 가장 중요한 2개의 동맹이며, 한일 관계 강화는 우리의 공동 목표를 향한 진전으로 이어진다.”
- 3월 6일 미 국무부 대변인 네드 프라이스의 발언 중 발췌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붙여 놓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역대 정권들도 일본과의 직접적인 군사동맹에 대해서는 신중했다. 엄혹했던 냉전 시절, 이승만은 유럽의 나토 같은 집단안보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며 태평양 조약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을 비롯해 아시아 각국을 다 묶어서 집단안보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결성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이승만의 전제조건 때문이다.
“일본은 빼야 한다.”
물주가 될 미국은 물론,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본을 빼면, 미국이 가만히 있겠어? 나토 물주가 미국인 것처럼 태평양조약을 만들면 미국이 물주가 될 건데...일본이 저래 보여도 아시아에서는 탑 먹었던 애들이고, 지금도 슬슬 다시 올라서려고 하는데... 일본 빼고 얘기가 되겠냐고.”
대충 이런 분위기였다. 이게 박정희 시절로 넘어가면, 일본과 타이완을 포함한 가칭 ‘아시아태평양 조약 기구(Asia Pacific Treaty Organization : APATO)’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당시 박정희는 나토처럼 공동사령부를 만들고, 그 예하에 실질적인 행동 부대도 창설해서 제대로 된 지역 안보 조약을 만들어보자고 나선 것이다(이 배경에는 1968년 북한의 도발이 있었다).
1961년, 일본 총리 관저 만찬회에서 이케다 하야토 총리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문제는 이때 일본 정부가 상당히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 5.16쿠데타 직후인 1961년 6월, 일본의 이케다 하야토 수상은 케네디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이런 발언을 한다.
“한국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일본의 생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다. 부산이 적화될 경우 일본의 안보에 큰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중략) 한반도의 안정화를 위해서라도 일본은 이번에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사정권을 적극적으로 원조할 것이다.”
5.16쿠데타 전후로 일본 정치인들이 한국을 방문해 한국의 상황과 문제점을 확인 한 건 덤이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한일 간의 안보동맹은 뒷전에 있었다. 당장은 양국 모두 경제발전이 우선이었다.
그러다 1968년, 북한의 ‘도발’이 연이어 터진다.
1968년 1월, 생포되어 홍제동 파출소로 끌려온 김신조
청와대를 공격한 1.21 사태,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 울진 삼척 무장공비 사건까지 폭풍 같은 1년이 지나면서 박정희 정권은 한국군 단독 보복이 가능한 작전통제권의 독자적 행사와 무력 사태 발발 시 미국의 즉각 개입을 보장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개정을 요구했지만, 여기까지는 가지 못했다(그래도 얻어낼 건 많이 얻어냈다. 한미연합훈련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이때 미국은 일본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야, 너희 계속 꿀만 빨래? 부산이 떨어지면 일본도 위험하다고 말한 게 너희잖아! 한국 저렇게 맞다가 넘어가면 일본도 위험해! 한국 좀 도와줘라 응?”
68년의 엄혹한 상황 속에서 미국은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에,
“너희 둘 서로 손 잡아 얼른!”
이라고 말했고, 이 덕분에 실제로 한국과 일본은 정부 당국자들이 나서서 직접 협상했다. 1968년 4월 26일이 되면 당시 일본 수상이었던 사토 에이사쿠와 주일대사였던 엄민영이 ‘군사원조’에 대한 논의를 한다. 이 당시 일본은 무기 수출금지 3원칙 때문에 한국에 군사 장비를 넘길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참고로, 무기 수출금지 3원칙은
1. 공산권 국가에 무기를 수출하지 않는다.
2. UN 결의에 의하여 무기 등의 수출이 금지된 국가에 무기를 수출하지 않는다.
3. 국제분쟁의 당사국이나 분쟁이 발생할 우려가 있는 국가에 무기를 수출하지 않는다.
라는 내용으로, 일본 정부가 무기 수출에 관한 원칙을 정리한 것이다. 법률로 명문화되진 않았지만, 아베 총리 시절까지 이어져 나갔다.
다시 돌아와서… 일본은 한국이 월남전에 참전 중인 것을 이유로 삼아, 전쟁을 치르는 나라에는 무기를 수출하지 않는다는 것이 원칙이라 주장한다.
이때 편법으로 나온 방안이 경찰력 강화를 위한 쾌속정 지원이었다. 일본 정부 내에서도 말이 많았는데, 통산성 입장으로 쾌속정은 해군용으로 전용할 수 있기 때문에 지원이 불가하다는 입장이었고, 외무성은 북한 게릴라에 대응하기 위한 장비이기에 국제적 분쟁 성격과는 거리가 있다고 지원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당시 총리였던 사토 에이사쿠가 안보 지원 결정을 내렸고, 미국은 이 결정을 받아
“한국의 안보가 곧 일본의 안보다! 전쟁이 나면 일본기지를 활용해 북한을 박살 낼 거다. 그리고 북한 놈들이 계속 게릴라전을 펼치면, 일본에서 경찰 장비 지원한다!”
고 발표한다. 그리고 말 많고 탈 많은... 앞서 언급한 ‘아시아태평양 조약 기구’가 등장한다.
1971년, 방한한 일본 사토 수상과 박정희 대통령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일본을 끌어들이려 했는데, 일본은 전수 방위에 묶여 있어서 난색을 표했다. 이때 박정희는 급박한 한국 정세 속에서 먼저 손을 내민다.
“한국의 안전이라는 것은 일본의 안전과 직결된다. 이것은 나아가서는 아시아 전체의 안전과 직결된다는 것을 일본의 지도자들이나 국민들이 빨리 인식해야만 한다.”
- 1969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발언
박정희의 발언이 있고 한 달 뒤인 1969년 2월, 사토 총리는 한국이 제창한 아시아태평양 조약 기구 참가 요청에 대해 거절 의사를 밝힌다.
당시 일본은 미국과의 양자동맹이면 충분히 일본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평화헌법이라는 틀 아래, 경제발전을 우선하는 일본에 지역 안보 기구는 부담스러웠다. 더구나 한국 주도의 기구라면 말이다. 결국, 일본의 불참으로 박정희의 아시아 태평양조약기구는 무산된다.
1969년, 경기도 여주 남한강 근처에서 열린 포커스 레티나 훈련 현장을 둘러보는 박정희 대통령
이후 한국은 독자적인(?) 對 북한 견제 옵션들을 내놓기 시작한다. 이미 1968년 4월에 M-16 생산공장 건립 합의가 나왔고, 1969년 3월에는 팀 스피릿 훈련의 모태가 되는 포커스 레티나(Focus Retina) 훈련이 시작됐다.
1968년 한, 미, 일 모두에게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 줬는데, 이들 모두
“한, 미, 일 동맹... 아니, 한일 안보협력 체계를 구축해야 하는 거 아냐?”
라고 생각한다. 1968년 12월, 미 국무성 정책기획 회의는 <아시아에 있어 일본의 안보 역할(Japan’s security role in Asia)>이라는 문서를 통해, 주일미군은 일본만 지키는 부대가 아닌, 전쟁이 발발하면 한국도 지키고 아시아도 지킬 것이라는 개념을 정리했다. 이렇게 미국의 제안(제안이라 쓰고 압력이라 읽는)에 의해 한국과 일본의 안보협력이 시작된다.
1968년 전후를 통해 한일 의원간담회가 만들어지고(이때 차지절이 방한한 일본 의원들과 회동을 가졌다), 한일협력위원회가 생기고, 실질적인 ‘군사 교류’까지 이어진다. 일본 육상자위대 막료장(육군참모총장급) 야마다 마사오가 한국을 찾아와 박정희를 만나고, 한국의 문형태 합참의장이 일본으로 날아가 사토 총리를 만나는 등 첫 교류를 시작했지만, 실질적으로 조약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1968년의 한국은 절실했지만, 그때의 일본은 한국보다 덜 절실했고, 결정적으로 한일 양국 간의 ‘민족 감정’이란 게 있었기 때문에 어떤 구체적인 조약으로 나아가긴 힘들었다. 물론, 이를 두고 가장 아쉬워하는 건 미국이었지만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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