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지의 160km 길이 테이프
동독 슈타지 심볼
1990년 10월 3일, 동독과 서독이 통일한다. 통일 직전, 동독의 비밀정보기관이었던 슈타지(STASI)는 서독에서 공작을 펼쳤던 비밀문서들을 파기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문서를 파기했지만, 지난 냉전 시절의 기록을 단숨에 모두 없앨 수는 없었다.
마침내 통일되었고, 독일 정부는 냉전 시절 슈타지의 ‘對 서독 관련 첩보활동’ 정보를 확보한다. 슈타지가 파기하지 못하고 남긴 문서는 1,700여만 개의 파일, 9만 여개의 도청 테이프와 지도, 동영상 및 각종 오디오 파일 등이었다. 암호화된 마그네틱테이프 160킬로미터는 덤이었다.
통독 정부는(말이 좋아 통일독일이지, 서독 정부라고 보는 게 맞다) 사태의 심각성을 확인하고는 즉시 슈타지 관련 문서를 처리할 기구를 만든다. 『연방 슈타지 문서 관리처』. 이름은 무미건조하지만, 하는 일은 절대 무미건조하지 않았다. 이들은 냉전 시절 서독에서 암약했던 스파이들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통일 직전까지 동독이 서독에서 운용했던 비밀정보원의 숫자는 2만 명이 넘었고(3만 명이 넘을 거란 추산치가 나오기도 한다), 이들 중에는 서독의 총리 보좌관, 여당 원내총무, 내독성 장관(한국으로 치면 통일부 장관)도 포섭했다. 통일되기 직전에 서독 연방의회 의원 중 25명을 포섭했고, 학생운동권의 숫자는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통일운동가, 인권 운동가들도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었다. 이들은 반미투쟁, 평화투쟁, 민족운동 등의 이름으로 동독의 지령을 수행했다).
결국 160킬로미터나 되는 마그네틱테이프를 모두 해독한 독일은 즉각적으로 조사위원회를 설치하는데, 바로 그 유명한 ‘가우크 위원회’이다. 이들은 슈타지가 남긴 문서를 기반으로 3천여 건에 대한 간첩 혐의를 수사했고, 1999년까지 253건의 유죄판결을 받아냈다.
독일 베를린 슈타지문서고에 쌓인 문서들
슈타지가 주민들을 감시해 만든 자료들이다
출처 - (링크)
KGB가 놓고 간 '2만 4천 정보원' 명단
1991년, 모스크바 거리에 놓인 소련의 낫과 망치 조형물
1991년 12월 26일, 소련이 붕괴했다. 소련이 붕괴하면서 가장 문제가 됐던 것 중 하나가, 공산주의 체제 수호에 앞장섰던 KGB였다. 발트 3국 중 한 곳이고,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속해있던 라트비아 역시 KGB의 관리 대상이었다.
본국이 무너진 상황에서 KGB도 얼른 라트비아에서 철수해야 했다. 소련이 무너지기 직전, 라트비아 수도인 리가(Rīga)의 KGB 사무실에 2개의 서류 가방과 2개의 포대가 남겨졌다. 급박하게 움직이는 상황에서 미처 챙기지 못한 서류였다.
이 서류 가방과 포대는 말 그대로 ‘판도라의 상자’였다. 이 안에는 냉전 시절 KGB가 라트비아에서 운용했던 2만 4천 여명의 정보원 명단(그것도 실명!)과 이들의 코드네임, 각종 인적 사항들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전 세계 첩보조직이 주목하는 대한민국
출처 - (링크)
대한민국의 정보 분야, 그러니까 첩보 업무를 다루는 부서는 크게 국정원과 국방정보본부가 있다. 국방정보본부 산하에 국군정보사령부와 777사령부가 있다.
정보사령부는 휴민트(HUMINT : 인적정보)를 수집하고, 777사령부는 시긴트(SIGINT : 신호정보)를 수집한다. 정보사와 777사령부, 국정원은 같은 첩보기관이기에 서로 업무를 조율하거나 견제하면서 첩보활동을 계속해 왔다.
이번에 문제가 된 부분은 정보사 블랙 요원의 신상이 유출됐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서독과 라트비아 건을 먼저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요원들의 신상이 유출됐다는 건 거의 ‘망국’의 수준에 가서야 나오는 문제라는 걸 말하고 싶어서다.
일반인들이 체감하지 못하지만, 서울은 전 세계 첩보 전쟁의 한가운데 있는 동네 중 하나이다. 당장 우리 위에 북한이 있고, 서울을 둘러싸고 4강 체제가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 한국의 반도체 기술과 수많은 방산기술이 넘쳐난다. 한다하는 첩보 조직들이 서울을 노려보고 있는 게 사실이며, 실제로 당했다. 당장 70년대 미국의 CIA가 청와대를 도청했다는 게 폭로되었고, 2013년에는 NSA가 한국을 도청했던 것이 들통났다. 최근에는 용산으로 이전한 대통령실을 미국이 도청했던 것도 폭로됐다.
출처 - <대통령실제공>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은 우리가 집토끼는 물론, 산토끼도 지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건의 내막은 간단하다. 정보사의 한 군무원이 대북 첩보 활동을 하는 군 정보작전 요원들의 신상과 위장기업 정보 등을 중국 동포(중국 동포라고 쓰고, 북한과 연계한 스파이라고 읽는)에게 유출했다.
군무원의 입장은,
“나 해킹당했어!”
인데, 자기 개인 노트북에 명단을 저장한 것만으로도 군사기밀 보호법 위반이다. 여기에 파일로 복사할 수 없는 내용은 직접 손으로 써서 저장했다는 걸 보면,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군사기밀 보호법 위반이다. 게다가 이걸 직접 중국동포에게 전달한 걸 보면...
여기서 이 군무원이 어떻게 발각됐는지는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중요한 건 대한민국의 인적 정보망이 말 그대로 ‘궤멸’했다는 점이다.
노출된 요원들과 남겨진 현지 정보원
출처 - (링크)
앞에서 서독과 라트비아의 예를 들었다. 동독의 슈타지와 KGB가 수만 명의 첩보 조직을 운영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하는 건 첩보(諜報)라는 말의 뜻이다. 이 뜻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첩보는 정보 분석을 거치지 않은 ‘수집된 정보’이다. 첩보가 정보가 되기 위해서는 분석해야 하고, 이때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첩보’다. 많은 데이터가 있다면, 분석하기가 더 수월해지지 않겠는가? 양 자체로 하나의 ‘정보분석’이 된다. 그렇기에 우리 정보요원들은 현지의 정보원들을 포섭해서 정보망을 구축한다. 이건 어떤 첩보 조직이든 기본적으로 하는 행동이다. 거창한 거 없다.
국내 한정으로 경찰의 ‘정보’가 최고의 정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찰 정보과 형사들은 관내의 다양한 정보원과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정보를 수집한다. 한때 경찰 I.O(정보관) 숫자는 3천여 명을 훌쩍 넘어갔다(윤석열 정부 들어서 경찰 정보과는 축소하고 있다). 이들은 언제나 경찰들이 가장 원하는 보직 1위를 차지했고, 정보국장 자리는 치안정감 승진 1순위로 꼽혔다. 역대 경찰청장 이력을 확인해 보면, 정보국장 출신들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권력 입맛에 맞는 정보를 생산한다거나,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한다거나 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이다. 핵심은 일선 경찰 정보관들이 접촉하는 수많은 정보원이다. 이 정보원들을 통해 생산해 내는 정보의 양은 얼마나 될까?
괜히 경찰이 국내 정보 한정으로 한국 내 최고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 아무리 최첨단 첩보 기술이 나왔다 하지만, 정보의 양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보사 정보원들이 해외에서 첩보망을 구축하는 게 바로 이런 원리다. 현지 정보원들을 포섭하고, 이들을 통해 얻은 첩보를 취합해 정보를 만들어 내는 것. 이게 바로 정보사 요원들의 일이다.
경찰과 차이가 있다면, 경찰은 안전한 국내에서, 정보사 요원들은 안전하지 못한 외국에서 수행한다.
출처 - (링크)
이런 상황에서 이들의 신상이 공개되었다. 언론에서는 이 요원들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고 말한다. 뉴스를 보면, 일부 요원들이 급거 국내로 귀국했고, 북한 측 요원이나 정보원 중 일부가 체포돼 처형됐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이렇게 노출된 요원들은 다시 현장에 투입될 수 없기에 정보사로서는 큰 타격이 될 수밖에 없다. 언제 요원들을 양성해서 해당 국가로 다시 보내겠나.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으니... 우리 요원들의 경우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선택지가 있지만, 현지 정보원들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경찰 정보관들이 수많은 정보원을 만나 첩보를 수집하는 건 큰 문제가 없다. 어차피 대한민국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해외의 경우는 다르다. 우리 요원 한 명이 현지 정보원들을 얼마나 만나고 다녔을까? 지금 넘어간 요원들의 명단이 의미하는 건 그 요원들이 관리하던 수십, 수백 명의 정보원들까지 모두 노출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앞서 언급한 KGB와 슈타지 명단이 비현실적인 몇만 명 단위가 됐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어둔 요원의 숫자는 수십 또는 수백 명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현지 정보원들을 포섭하고 활용하면서 그 숫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리고 윗선인 요원들의 신상이 노출되면서, 이들이 관리하던 현지 정보 라인이 통째로 노출된다. 여기에 덤으로 그 위장 신분을 만들기 위해 만든 사업체나 기관에 들어간 비용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노출됐기 때문에 다시 활용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이미 상대국에서 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한 나라의 정보를 담당하는 기관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나온 걸 보면서,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와중에 간첩법 개정이 되지 않은 게 문제라는 한동훈 대표의 발언을 들으며, 이 나라가 진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불안해 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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