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하고 싶은 숙제
2년 전, 월남전 한국군 양민 학살 문제를 다루는 다큐의 제작진으로부터 협력을 요청받았다. 그러나 나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양민 학살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참전자 사회에서 왕따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참전군인 사회에서도 이해할 방법으로 작품이 된다면 협조할 수 있다고 역제안했지만, 그 후 연락이 없었다. 사실을 밝히는 것 자체만 해도 힘든 일이기 때문에 내 의견까지 반영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마실 뻔한 쓴 잔은 일단 피해 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직접 민간인 희생 현장에 가게 되었다. 한베평화재단에서 뜻있는 분의 후원으로 월남 파병 60년을 기억하는 평화 기행을 기획해서 베트남에 가게 된 것이다. 6월 말, 재단으로부터 한국군 피해 마을로 들어가기 위한 방문 허가에 필요하니 여권 사본을 보내 달라는 연락이 왔다. 여권 사진을 보낸 뒤 잠시 후 전화가 왔다. 나의 여권 시효가 지났다고 했다. 알려주지 않았으면 멋모르고 공항에 갔다가 그대로 돌아올 뻔했다. 그 덕에 나는 급히 시청으로 달려가 새로운 여권을 신청했다.
참전 당시, 주민 이동 현장
7월 24일, 53년 전에는 참전을 위해 베트남에 갔지만 이번에는 평화를 위해서 갔다. 그때는 수송선으로 5일이 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김없이 지각 출발하는) 베트남 항공을 이용해 5시간 만에 도착했다.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심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일정이었다. 출발할 때부터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복잡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전쟁으로 미증유의 고통을 겪었으나, 나는 국가유공자로서 임대아파트에 살고 상이군경 보상금도 받고 현충원 사전 안장 예약까지 받아 놓았기 때문이다.
호치민에 도착했다. 내가 파병되어 근무할 때는 민간인을 거의 보지 못했다. 이번엔 민간인의 일상생활을 보면서 전쟁 때 이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덤덤했던 마음이 시골로 이동하면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사방이 정글이던 53년 전의 감각이 살아났다. 오싹한 공포가 밀려오더니 점차 사라졌지만, 으스스한 기분은 오래 지속되었다.
월남의 자연은 나에게 전혀 친근하지 않다. 베트콩은 항상 자연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베트콩이 어디서 공격할지 몰라 항상 불안해하던 감각이 기억하는 것 같았다.
세상 모든 일에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은 정상적인 현상이다. 또 모든 전쟁의 이야기는 일방적이다. 전쟁의 성격이 게릴라전인 전쟁에서는 게릴라군 보다 정규군의 피해가 높은 것이 보편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은 전사 5천여 명에 적군 사살 약 4만 7천 명이라는 무려 10배 가까운 전과를 올렸다. 이렇게 한국군의 월남전 활약상으로 전해진 이야기의 대부분이 거짓이듯 상대국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80여 차례나 있었다고 하는)학살 사건을 현지 답사하는 일은 사건의 성격상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일이었지만, 나는 시종일관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피해자 측과 베트콩 측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역시 전쟁 상식에 맞지 않거나 과장된 면들이 보였다. 개인적인 판단을 넘어, 같은 시기는 아니지만 현지에서 군대 생활을 했기 때문에 보일 수 있는 것들이었다.
60년 전 베트남으로 갈 때 우리는 어떤 전쟁인지 모르고 갔다. 아니, 사실 속았다. 월남의 공산화를 저지하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싸운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다른 국가의 민족해방전쟁이고 통일전쟁을 방해하러 간 것이었다. 베트남이 월남전이 아닌 ‘항미 전쟁’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군수품 수송 작전 당시
민간인 희생
전쟁 중 파월군 통계(두번째가 한국군)
지금까지 월남전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80여 차례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상황은 부대와 작전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한국인 작전 지역에서 민간인이 들어가서 살 수도 없거니와 영농 지역이 있으면 주간에 농사일을 하기 위해 한국군의 검문검색을 받는다. 물론, 그런 지역 민간인 대부분이 베트콩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군에 의해 통제되는 전술 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의 희생은 비난받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베트콩과 양민을 구별할 수 없었던 전쟁의 성격 때문이다.
1968년 7월 15일, 비둘기 부대 소속 소대장 김종수 소위는 소대원들을 이끌고 야간에 예정된 매복지점이 아닌(국방부 보고서) 곳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자정이 넘은 새벽 1시경, 그곳을 통과하는 베트남인 7명을 검거, 체포했다. 이런 와중에 갑자기 한 명이 도주했다. 김 소위는 즉각 소대원을 시켜 추격, 사살하게 했다. 나머지 6명을 끌고 이동하는 중에 이번에는 두 명이 도망치고 4명도 거세게 반항하며 도망치려 하자 다급한 나머지 부하들에게 사살할 것을 명령했다.
그다음 날 도주한 두 명은 지역 군수에게 사건 내용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보고했다. 그들의 선동에 따른 베트남 주민들이 한국군 부대 앞에 몰려와 대대적으로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다. 낭패가 된 사령부 지휘부는 부랴부랴 사건 수습책 마련에 애썼다. 김종수 소위는 혼자 죄를 뒤집어쓰고 15년 형을 살았으니, 그는 주월한국군 참전 역사 가운데 최악의 희생양이었다.
1970년 11월 27일, 백마 29연대 2중대 3소대장이 매복을 나갔다가 민간인 5명을 베트콩으로 오인하여 오인사격을 하고 귀를 잘라서 전과 보고를 했다. 이때 마침 갓 부임한 전두환 연대장은 사단장에게 보고하고 이세호 사령관은 고민 끝에 대통령께 사죄 편지를 쓴다. 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은 친필로 쓴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이세호 장군
12월 21일 자 귀하의 편지는 오늘 23일 접수하여 내용을 자세히 읽었습니다. 요즘 월남 국내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한국군에 의한 양민 살해 사건에 관하여서는 합참의 한무협 장군에게도 상세한 보고를 이미 받고 있습니다. 소녀 살해 사건은 불행한 일이기는 하나 작전상 만부득이한 사건이 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백마부대 29연대에서 발생한 양민 살해 사건에 관하여서는 각급 지휘관은 물론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 같은 불상사가 재발하지 않도록 각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전과를 조작 보고하기 위하여 양민을 살해하고 하물며 죽은 자의 귀를 절단하는 비인도적 행위는 국군의 명예와 지금까지 수많은 전우들의 피의 대가로서 쌓아 올린 국군의 공적을 하루아침에 완전히 무너뜨리는(무효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통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국군이 월남에 간 기본 목적과 정신을 다시 한번 전 장병이 상기하고 재인식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의미 있는 공방은 채명신 사령관이 직접 해명한 빈딘성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65년 11월과 12월, 맹호사단이 빈딘성에서 작전을 수행하면서 '용감성'을 증명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은 한국군이 베트남 전장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아래는 베트남 측 주장이다.
1965년 10월 25일, 한국군 전투병으로 구성된 맹호부대가 베트남 중부 빈딘성 뀌년시에 있는 항구에 상륙했다. 빈딘성 낌따이촌에서 베트콩이 쏜 총에 한국군 1명이 사망한다. 이에 한국군이 마을에 들어와 주민들을 공터에 모이게 했다. 그리고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그리고 불을 질렀다. 여기서 43명이 죽었고 이 중 37명이 낌따이촌 사람이다. 주민들이 학살된 곳에 1976년경 한국군에 대한 분노를 고스란히 담은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졌다.
다음은 채명신 장군의 자서전 내용이다.
내가 맹호사단장을 겸직하고 있을 때인 1965년 12월 22일에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 ‘빈딘성 퀴논시에 있는 몇 개 마을’이라고 했는데, 퀴논시는 우리 전술 책임 지역 밖에 있는 월남군 제22사단 관할이다. 그 내용은 당시 한국군과 월남인간의 이간책을 쓰고 있던 월맹군 측과 베트콩들의 악선전 내용과 같다. 그 이간책은 당시 북한에서 파견된 심리전 요원에 의해 기획되었다는 것도 확인했던 사실이다.
다음은 당시 대대장이었던 박경석 장군의 군사 연구지 발표 내용이다.
당시 사단장은 채명신 소장이고 제1연대장은 김정운 대령이다. 1965년 12월 22일, 제1연대가 퀴논지역에서 작전한 부대는 배정도 중령이 지휘하는 1대대와 이필조 중령이 지휘하는 2대대였다. 이 중대한 사건에 접해 당사자 격인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이 모여 대책을 강구했다. 필자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군사평론가협회 주관, 동아일보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필자가 기조연설하고 양측 발표자인 이선호, 지만원, 강정구, 한홍구 4 주제 발표자가 발언했다. 그날 학술회의에서 강정구, 한홍구는 구수정이 만들었다는 문제의 이상한 글을 낭독 주장한 외에 단 하나의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이로써 한국군의 양민 학살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일단락이 되는 듯했다.
그런가 하면 다음과 같은 주장도 있다. 월남전은 외교전과 전쟁이 동시에 수행되었던 전장이었다. 즉 파리에서 끊임없이 외교전이 벌어졌고 월남에서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만약 주월 한국군이 잔혹하게 양민 학살을 했다면 그렇게 좋은 호재를 월맹 당국이 파리회담에서 왜 제기하지 않고 넘어갔겠는가?
그런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면 당시에 이미 국제적인 문제로 제기되었을 것이다. 당시는 기자들이 아무런 제한 없이 전선에 접근할 수 있었는데, 그런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면 당시에 이미 공식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었을 것이다.
부수적 피해
한국 측 반대로 학살 기록을 연꽃으로 덮은 위령비
이와 같이 위 사건은 사실관계에 이견이 있다. 피해를 당했다는 사건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면 실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당사자의 입장이다.
‘부수적 피해’라고 번역이 될 수 있는 ‘Collateral Damage’라는 군사용어가 있다. 전쟁 당사자들은 전쟁 중에 일어나는 민간인의 죽음과 사회기반시설 파괴를 ‘부수적’이라고 표현하지만, 당한 사람들에게는 천추의 한이 맺힐 일이다. 그러나 생사가 한순간에 달린 전투에 참전한 병사들은 월남인의 안전은 생각할 여유가 없다. 밥을 먹다가 길을 가다가 아니면 휴식 중에 앉아 있는 돌멩이에도 부비트랩이 매설되어 있으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안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극단적인 예로, 어떤 전우들의 회상에 의하면 부대가 이동할 때 야간에는 야영해야 하는데 운이 좋으면 부락을 만나 그곳에서 하룻밤 야영하는 때가 있었다고 한다. 한 부락에서 야영을 하는데 주민이 음식을 먹으라며 바구니를 갖다주었다. 그 바구니를 받아 들고 음식을 나눠 먹기 위해 빙 둘러서는 중에 바구니 속에 숨겨져 있던 폭탄이 터졌다. 만화 같은 이야기이지만 월남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이다.
학살이란 무고한 사람을 악의적으로 살해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희생이란 불가피하게 일어난 사고다. 그러므로 민간인 피해를 조직적인 민간인 학살로 단정하거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가 전혀 없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전쟁의 실체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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