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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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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콩 게릴라 수색 대원과 미 육군 헬리콥터

 

베트남에서 철수한 뒤, 근무 중에 항명성 근무 이탈로 2주간 영창에 갔다. 영창의 목적은 병신이 되지 않는 선에서 수감자에게 단기간에 최대의 고통을 주는 것이다. 영창을 나간 다음 영창에 대한 좋은(?) 소문이 많이 나면, 다른 병사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그 방법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지내야 했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도 빽이 통했다. 군대 나이로는 경로당에 갈 나이에 군대를 갔던 나는 고참 헌병인 후배 덕분에 틈틈이 영창에서 나와 창고에서 월남전 당시에 기록했던 헌병대 문서를 정리하는 사역을 했다.

 

문서를 정리하던 중, 한국군이 월남에 있는 동안 민간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범죄 기록을 보게 되었다. 충격이었다. 물론 내 임무는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소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대부분이 강간 사건이었고 살인 피해 배상은 물소 두 마리에서 세 마리 값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월남에서는 물소가 우리나라 시골의 황소만큼 값이 나가기는 했지만, 사람 목숨값이 물소로 대체될 만큼 저렴했다. 병력이 이동하다 잠깐 휴식하는 국도변에는 공중변소처럼 담요로 칸막이를 쳐놓은 곳이 있었다. 남편이 손님을 부르고 아내는 손님을 받는 매춘 업소였다. 그러면 병사들이 군화를 신은 채 바지만 내리고 일을 보는 것이다. 전쟁터란 인간이 보통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국방부 기록에 의하면 베트남에 참전한 주월 한국군 가운데 561명의 장사병(將士兵)이 범죄에 연루되어 전범(戰犯)으로 구속, 처벌되었다. 범죄 내용은 항명(抗命), 명령 위반, 상관 구타 및 살해, 무단이탈, 탈영 등으로 주로 하극상이 많았다. 베트남인과 연계된 사건 가운데 소위 민간인, 즉, 양민 학살 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받은 숫자는 우리 군(軍) 내부의 기강 해이로 발생한 사건에 비하면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참전자 측에서는 양민과 베트콩을 구별할 수 없는 게릴라전의 특수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이나 중공군에게는 북한군과 민간인, 남한군과 민간인이 인종적으로 구분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공군의 양민 학살은 한 번도 제기된 적이 없고, 미군이 한국 양민을 살상한 행위에 대해 상황 논리라고 면죄부를 줄 수 없다.

 

그러니까 노근리 학살 등에 우리 자신은 그토록 분노하면서, 우리가 저지른 비슷한 행위에 대해서는 면죄부를 주자는 이중 잣대를 댈 수 없다는 말이다. 민간인 대열에 적군이 잠입해 있을 가능성은 어느 전쟁에서나 있는 일이지, 베트남 전쟁에만 해당하는 특수 상황이 아니다.

 

또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인민전선 의용군들은 수십 종의 인종이 섞여 있었지만, 양민 학살은 없었다. 이들은 자기가 참전한 전쟁의 성격에 대한 이해와 참전 명분을 뚜렷하게 가졌기 때문에 학살을 저지를 수 없었던 것이다.

 

베트남 정부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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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2월22일, 베트남 하노이시 영빈관에서 한국과 베트남 수교가 이뤄졌다

출처 - (링크)

 

한국군의 월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는, 사실 월남 정부도 조명하길 꺼리는 측면이 있다. 전쟁의 성격이 내전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6.25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지만, 월남전은 훨씬 복잡하다. 그들도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죽고 죽인 일이 많아 될 수 있으면 과거를 들추고 싶지 않은 것이다.

 

1992년 베트남과 수교 당시, 과거사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서로 동의한 데에는 승전국으로서의 자존심도 있겠지만, 현 베트남 정부의 실세가 한국군과 교전이 거의 없었던 북베트남인 탓도 있다. 한국군과 주로 싸운 세력은 남베트남 공산당 소속 베트콩이었고, 북베트남 정규군은 물자 제공과 훈련 등을 돕기는 했지만 직접 한국군과 맞붙어 싸운 적은 드물었다.

 

더욱이 한국군과 주로 싸운 남베트남 공산당 베트콩의 지도층은 구정 공세 당시 괴멸했다. 북베트남을 폭격한 것도 한국군이 아닌 미군이었기 때문에, 한국과 불필요한 마찰을 빚기를 원하지 않았다. 또한 북베트남 역시 베트콩이 자리 잡던 1960년대 초반, 남부 촌락 지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자기들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던 전력이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공론화되는 것을 피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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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비에 설치된 QR코드

 

참고로, 위령비 참배를 하기 위해서는 베트남 정부에 신고해야 하고, 내가 참배했던 모든 위령비마다 코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정부 차원에서 관리하는 듯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전쟁의 희생을 선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실제로 베트남 전쟁 중에 희생된 300만 명 가운데 민간인이 200만 명이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정리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피해자들에게 물어본 바로는, 정부의 지원도 전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 단위에서는 자체적으로 정기적인 위령 행사가 진행되었다. 내가 참배하는 동안에도 마을 청년들이 위령비를 찾아 간단히 참배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아래에서도 한국이 대외 원조를 가장 많이 해준 나라가 월남이다. 월남과의 국교 정상화 이후, 2위 국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액수 20억 불을 보냈다. 한국보다 훨씬 경제 규모가 큰 일본보다도 많았다. 왜 그럴까? 최소한의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월남 정부는 왜 공식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을까? 역시 돈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월남 방문 당시, 월남전에 대해 공식 사과를 하고자 했으나 베트남 측의 만류로 피해 입은 사람들에게 사과하는 ‘간접 사과’ 형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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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퐁니 마을의 위령비

 

전쟁 박물관과 퐁니 마을

 

호치민에 위치한 전쟁증적(證積) 박물관(War Remnants Museum)에 도착했다. 박물관엔 주로 미군이 저지른 범죄(Crimes)가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의 이름도 ‘Memorial Museum’이라 부르지 않고 ‘Remnants Museum’으로, 증거가 남아있다는 뜻으로 정한 것이 특별했다. 실내에 전시한 첫 사진으로 미국의 독립선언서 전문을, 마지막 사진으로 전쟁 당시 미국의 국방상이었던 맥나마라가 자서전에서 전쟁을 평가한 문구,

 

"Yet we were wrong, terribly wrong. We owe it to future generations to explain why"

 

(우리는 잘못했다. 정말 끔찍하게도 잘못했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이유를 설명해 줘야 할 빚을 지고 있다)

 

를 인용하여 전쟁을 일으킨 주범의 실체를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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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파월군 통계

두번째가 한국군이다

 

박물관을 도는 동안의 심정은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곳에는 나의 숙제를 풀 열쇠가 있었다. 한국군에 대해서는 3층으로 되어 있는 넓은 공간에 파견지, 병력, 전사자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었다. 한국군은 원청인 미국에 하청받은 군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군이 미군과만 계산이 가능하듯, 베트남 정부도 미군과 계산해야 할 일이었다.

 

설령 한국군이 양민을 학살했다는 증거나 기록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베트남은 미국에 배상 청구를 해야 한다. 따라서 베트남 피해자들이 한국 법원에 소장을 접수했을 때, 한국 법원은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하라고 회피해야 했다.

 

민간인 학살 주장에 대한 베트남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도 이렇다.

 

"우리가 이긴 전쟁이므로 사과는 필요 없고, 전쟁으로 인해 문제가 있으면 직접적인 전쟁 당사자인 미국과 협상을 한다."

 

월남(승자)이 미국(패전국)에 전쟁 피해배상 청구를 하는 것은 상식이지만, 미군의 용병에 불과한 한국에 청구권을 사용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이 불가하다. 쉽게 말하자면, 내 집에 침입해서 난동을 부리다 쫓겨난 깡패가 와서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깡패의 부하가 사과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즉, 한국은 월남에 대하여 ‘사과할 권리’가 없다. 정 미안하면 조용히 와서 그 집 문 앞에 쌀자루라도 갖다 놓고 가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으니, 바로 작전 지휘권의 문제가 있었다.

 

미국은 안방에서도 미군의 작전지휘를 받는 한국군이 월남에서 미군의 작전지휘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한국군이 미군에 예속되어 미군과 함께 진흙탕에 빠질 수 없었기에 한국군 피해 최소화를 위해 작전 지휘권만은 독자적으로 행사하기로 마음먹고 이를 관철시켰다.

 

그는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이 미군에 넘어가면, 그렇지 않아도 한국군을 미군의 용병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공산 진영의 선전에 이용될 것이라고 미군을 설득했다. 남베트남이 작전 지휘권을 고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군이 미군에 예속된다면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배경도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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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운전하는 오토바이를 타고 퐁니 마을을 돌기로 했다

 

퐁니 마을에 도착했다. 위령비 참배 행사를 마친 다음, 고교생들이 운전하는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 일대를 둘러보기로 했다. 두 명씩 탄 19대의 오토바이 행렬이 한적한 마을을 달리는 모습도 보기에 쉽지 않은 광경이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달리는 경험을 한 탓에 약간의 긴장감을 느꼈다.

 

관광을 마치고 카페에 들어가 학생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입시 지옥인 우리나라 학생들보다 영어 실력은 떨어져 번역기 앱을 사용해 소통했다. 다행히도 나를 태우고 다녔던 학생 호이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매우 똑똑하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

 

몇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호이가 물었다.

 

"베트남에 또 올 거예요?"

 

나는 나이가 많아서 어려울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자 호이는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친절합니다. 잘 도와드릴 겁니다."

 

"사실은 50여 년 전에 베트남에 왔었어."

 

"한국 군인으로요?"

 

그 질문을 받는 순간,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한국군 학살 현장에서 한국군으로 왔었냐는 질문을 받은 것이다. 대답할 말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데, 호이는 교과서적인, 혹은 어른스러운 답을 달았다.

 

"옛날 일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한국과 새로운 관계를 해야 합니다."

 

메일 주소를 교환하고 앞으로 한국으로 유학을 오면 좋겠다고 말하며 헤어졌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 호이의 세대가 한국과 베트남의 새로운 협력 관계의 튼튼한 가교가 되어주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뱀발.

 

필자는 8년 6개월간 파월되었던 한국군 34만 명의 일병으로 갔다가 일병으로 귀국한 유일한 사람이다. 이를 알게 된 것은 귀국 후, 육군 본부 중앙경리단에 월급을 수령하러 갔더니 담당자가 "뭐? 일병! 일병으로 갔다가 일병으로 돌아오다니 천연기념물이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눈물 없이도 들을 수 있는 사연은 이렇다.

 

월남에서 사병의 진급은 간혹 처벌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날짜만 차면 저절로 되는 법이다. 더욱이 미군이 돈을 주기 때문에 한 명이라도 더 진급시키는 원칙이 불문율이었다. 그래서 월남을 다녀오면 무조건 병장이었다.

 

일병에서 상병으로 진급할 달에, 사단 본부 중대 서무계가 진급하면 봉급에서 오른 부분을 부관부 사병계에 주어야 한다는 정보를 제공(?) 했다. 내가 그렇게 못 하겠다고 했더니 서무계는 "너 그러면 끝까지 진급 못 해." 라고 했다. 설마 그럴까 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우리 부대에서만 있는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백마 사단 본부 중대에서 진급하는 첫 달 치 월급의 증가 부분을 떼어먹는 관행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것은,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돈 때문이다. 월남전은 한국군에게 돈맛을 알게 했다. 군대는 부패했고, 먹을 것이 없었다. 그러다 남의 돈으로 싸우는 전쟁에 참전하면서 먹을 것이 많아졌으니, 먹자판이 안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월급이 오르지 않아 손해를 볼지언정 이런 흐름에 따라 흘러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진급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일이지만, 부패에 협조하지 않음으로 소극적 저항했던 것은 나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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