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권의 독립 역사 지우기가 갈 데까지 갔다. 독립기념관장을 비롯해 각종 역사기관에 친일 매국 논리를 옹호하는 뉴라이트 인사들이 전진 배치되고 있다.
며칠 전에는 국방 정신교육 교재가 새로 개정되었는데, 저번 개정판에서는 독도를 ‘영토 분쟁 지역’으로 표현한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홍범도, 김좌진, 김구 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삭제했다.

이 중에서도 홍범도 장군의 경우,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이후 흉상 철거 문제부터 계속해서 모욕과 수난을 겪고 있다.
3년 전 고생스럽게 그렇게나 원하시던 고국으로 돌아오셨는데, 이런 대우를 받으시게 하니 참으로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그래서 윤석열 정부가 홍범도 장군을 지우는 만큼, 필자는 홍범도 장군을 알리려 한다.
카자흐스탄에서 온 요청
1994년 8월 29일, 카자흐스탄의 한 마을에 사는 고려인 할머니가 보낸 탄원서가 대한민국에 도착했다.
“우리 할아버지의 유해를 대한민국으로 봉환해 주십시오. 우리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 아내와 두 아들을 잃고 이곳 카자흐스탄에서 죽어서,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탄원서에 등장하는 할아버지는 홍범도 장군이었다. 탄원서가 보내진 때는 1994년이었지만, 장군은 기나긴 시간을 더 거쳐 2021년에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홍범도 장군의 묘
출처-<오마이뉴스>
불운했던 어린 시절
홍범도는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기에, 그는 동네 사람들의 젖을 얻어먹고 자랐다.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소년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살아갔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끼니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늘 허기를 달고 살았다. 매일 느끼는 허기였지만, 그럼에도 허기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출처-<tvN>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밥을 준다는 방을 보고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했다. 나이를 속일 수 있었던 것은 190센티에 이르는 큰 키 덕분이었다. 입대 후 구타는 일상이었지만, 그래도 허기는 면할 수 있었다.
군 생활 내내 홍범도를 가장 괴롭힌 것은 살기 위해 난을 일으킨 백성들을 진압하러 나가는 것이었다. 왜 순박한 그들이 곡괭이와 낫을 들어 올렸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악질 간부를 두들겨 패고 탈영했다.

출처-<tvN>
세상을 떠도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탈영병이 자리를 잡는 일은 더욱 요원한 일이었다. 믿을 것은 타고난 힘이고, 내세울 것은 젊음뿐이었던 그는 제지소에서 겨우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제지소의 사장은 그의 처지를 눈치채고 월급을 체납하고 때리기까지 했다. 제지소 사장은 그가 탈영병인 것은 알았으나, 탈영의 이유를 몰랐다. 홍범도는 악덕 사장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고 다시 길을 나섰다.
길의 끝에 금강산의 신계사가 있었다. 지담대사는 청년 홍범도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혈기 넘치는 장정을 붙잡고 그의 정신을 풍요롭게 할 만한 이야기들을 날마다 들려주었다. 홍범도는 특히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일 년 후, 홍범도는 절에서 만난 여인과 마음이 통했다. 이후 아내가 된 그 여인의 고향인 함경도로 향했다. 어차피 그는 돌아가고 싶은 고향도 만나야 할 친척도 없는 처지였다. 그는 가족 없이 자랐지만, 자신이 이룬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농사만으로는 돈이 부족하여 군대에서 배운 총 솜씨로 포수일도 겸하기 시작했다. 홍범도는 유능한 포수였다. 일대에 그의 총 솜씨를 모르는 이가 없었고, 그 덕에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인생 처음으로 행복이란 걸 느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홍범도의 짧은 행복은 1907년 정미의병의 발발과 함께 끝났다. 일본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킨 것에 저항하여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일본은 포수들의 총기마저 회수하기로 결정을 했다. 홍범도는 총을 내어주는 대신 호랑이를 잡던 총으로 일본군을 잡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뜻이 통하는 인근의 포수들을 모아 본격적인 의병 활동에 돌입했다.

항일 운동에 투신하다
홍범도는 일본의 공관이나 금광, 매국노 부자들을 공격하며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산악 지역을 거점으로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을 펼치는 홍범도의 공격에 일본은 속수무책이었다. 60여 차례의 출동에서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산에서 범을 잡으러 다니던 명사수를 산세도 어두운 일본군이 잡는다는 것은 애초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홍범도를 잡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일본군은, 쉽지만 효과적이며 비인도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산 아래 머물고 있던 홍범도의 아내를 연행해 왔다. 그리고 홍범도의 근거지를 비롯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갖은 고문을 행했다.
“네 이년! 언제까지 버틸 것 같으냐? 네 남편이 있는 곳을 끝내 불지 않으면, 네년이 보는 앞에서 네 아들을 죽여 버리겠다.”
홍범도의 부인은 일본군의 고문에 끝내 사망하고 만다.

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홍범도의 아들을 앞세워 산으로 향한다. 아들의 손에는 어머니의 죽음을 비롯해 가족들이 겪고 있는 고초가 담긴 편지가 적혀 있었다. 한 손에 편지를 들고 산에서 애타게 아버지를 부르는 아들을 바라보는 홍범도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빵”
산 위의 홍범도는 산 아래에 있는 아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만약 여기서 홍범도가 백기투항한다면, 일본군은 나머지 의병들의 가족에게도 같은 짓을 저지를 것이었다. 홍범도는 리더로써 결단을 내렸다.
“아들아 미안하다...”
다행스럽게도 반전이 있었다. 명사수 홍범도가 쏜 총알은 아들의 귀를 스쳤고, 이 아들은 훗날 아버지의 뒤를 따라 독립군이 된다. 일본의 작전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게 된다. 조선에서 의병 활동이 어려워진 홍범도는 1908년 아들을 데리고 러시아 땅인 연해주로 떠난다.

1913년 장군의 모습
출처-<일요시사>
고국을 떠난 독립군의 이중생활
일본의 강경한 진압 작전으로 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진 의병들은 국경을 넘어 연해주, 간도 등에 정착했다. 낮에는 군자금 마련을 위해서 농사를 짓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하는 고된 이중생활을 해야 했다. 입을 거 먹을 거 아껴서 돈이 생길 때마다 무기를 구매하며 결사 항전의 의지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무기에 문제가 많았다. 매장에 진열되어 있던 총과 총알을 맞게 사오는 게 아니라 암시장에서 그날 나온 총과 총알을 사다 보니 서로 호환이 안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1919년, 심신이 지친 홍범도와 의병을 일으켜 세우는 소식이 고향 땅에서 들려온다. 백성들이 총칼도 없이 맨손으로 일으킨 삼일운동이 강토를 뒤흔들었다.

출처-<서울특별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
당시 일본은,
“칙쇼! 참 답답하다데스! 그 시장에서 백날 만세 부르면 뭐하냐데스! 독립이 그딴 거 때문에 되겠냐데스?!”
라고 말하며 들불처럼 타오른 삼일운동의 기세를 어떻게든 꺾어 보려 했다. 이런 일본의 반응은 뒷방에 숨어서 수많은 유관순을 바라보기만 하던 비겁한 이들의 변명거리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이때의 변명은 백 년이 넘게 식민사관이란 탈을 쓰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일운동에 힘을 얻은 홍범도는 간도에서 십 년 만에 군사 활동을 재개하며, 대한독립군 대장이 되었다. 대한독립군은 부족한 무기와 더 부족한 군사로 인해 전략상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십여 년 전 호랑이를 잡던 홍범도가 부활한 것이다.
이런 홍범도를 잡기 위해, 일본군은 최정예 부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월강추격대’였다.


출처-<영화 ‘봉오동 전투’>
월강추격대
월강추격대에겐 한 가지 찜찜한 점이 있었다. 홍범도를 잡기 위해 압록강을 넘어간다는 것은 중국의 국경을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일본군은 대한독립군을 얕잡아 보고 섣부른 결정을 내렸다.
“중국 몰래 국경을 넘어 당일치기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궤멸시키고 돌아오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데스.”
이렇게 ‘월강추격대 VS 대한독립군’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결전의 장소가 된 곳이 바로 ‘봉오동’이다. 자신감을 넘어서 우월감에 사로잡힌 월강추격대는 강뿐만 아니라 언덕과 산을 넘어 총공세를 펼쳤다.
“저 조센징 놈들 도망치는 꼴 좀 봐라. 추격해서 섬멸하라!”

하지만, 이는 홍범도 장군의 치밀하게 계획된 작전이었다. 봉오동은 삿갓을 뒤집어 놓은 듯하다 모양의 지형이었다.

죽기 위해 불길로 달려드는 모기떼 같은 일본군이 이 삿갓의 뒤집어진 꼭짓점 부분에 다다랐을 때, 홍범도 장군의 한마디가 떨어졌다.
“전군!! 사격하라!!!”

대한독립군의 기습 공격에 혼비백산이 된 일본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이 선택할 수 있는 작전은 단 하나! 삼십육계 줄행랑이었다.
일본의 정규군 월강추격대는 두 갈래로 나눠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이때 홍범도 장군도 의도치 않은 비와 안개가 봉오동 일대를 뒤덮었다. 안개는 대한독립군과 일본군의 시야를 공평하게 가렸다. 대한독립군이 추격을 잠시 멈추었다고 생각했을 때, 안개 저편에서 한 무리의 군사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군은 일제 사격을 감행했다. 안개 속 군대의 정체는 두 갈래로 도망치던 또 다른 일본군들이었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봉오동 전투의 의의는 최초의 한일 양국의 정규군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데 있다.
봉오동 전투 4개월 뒤, 일본은 무려 2만의 병력을 동원해서. 전투가 아닌 전쟁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홍범도 장군은 백두산으로 이동했다.
대한독립군은 백두산으로 전략적 이동을 하던 중 맞부딪힌 일본군을 물리쳤다. 그 장소는 ‘청산리’였다. 청산리에서 홍범도 장군은 김좌진 장군과 합동작전으로 펼쳤고, 또다시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뒀다.
(청산리 대첩은 단 한 번의 전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인근에서 벌어진 총 10차례의 전투를 통칭해서 일컫는다. 이 대첩에서 홍범도 장군의 지분도 상당하다)

김좌진 장군
일본군의 역습
1905년 을사늑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이 1909년 불법적으로 중국에 간도 땅을 팔았다. 그로 인해 당시 간도는 중국 땅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수탈로 수많은 우리 백성이 한반도에서 간도로 넘어가 간도 인구의 70프로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형 한인 사회가 형성된 지역이었다.
간도는 우리 의병들이 국내진공작전을 펼친 베이스 캠프이기도 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대첩도 간도 주민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간도는 일본군에게 눈엣가시였다. 그러나 중국 영토였기에 함부로 출정을 감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중국 당국에게 요청했다.
“간도를 비롯한 중국 땅에 있는 조센징 테러리스트 무리(독립군들)를 토벌해 주시길 바랍니다데스!”
이러한 일본의 요청에 중국군은 우리 독립군이 떠난 진영만 파괴하는 선에서 그치며 협조하지 않았다.
“칙쇼... 중국놈들! 니들이 이렇게 나오면 우리도 다 작전이 있다데스!”
그리하여 일본은 간도에 거주하는 민간인 학살 작전을 수립하기 이른다. 1920년 8월 소위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이란 이름의 학살 작전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일본이 막 나간다 해도, 국제사회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순 없었다. 내세울 명분이 필요했다.
“명분이 없으면 만들면 되므니다.”
일제의 돈에 매수된 중국 마적이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했다. 이때 13명의 일본인과 한국인 순사가 사망하게 된다. 일제는 조작된 ‘훈춘 사건’을 통해 스스로 명분을 만들어냈다. 일본은 중국에게 자국민 사망에 대해 진상규명을 (형식적으로) 요구했고, 중국 당국의 답변이 돌아오기도 전에 일본군을 간도로 출격시켰다.
간도참변
통계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다르지만, 일본군에 의해 약 3,700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명백한 민간인들이었다. 홍범도 장군의 둘째 아들도 이때 사망했다. 방화와 살인이 동반된 참혹한 전쟁범죄였다.



당시 참변 모습
그 현장을 목격한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은 이렇게 당시를 탄식했다.
「그들의 장교라는 것들이 많은 병사를 지휘하여 각 부락의 민가, 교회, 학교를 비롯하여 수만 석의 양곡을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우리 겨레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나 주먹으로 때려죽였다. 산 채로 땅에 묻기도 하고 불로 태우고 가마솥에 넣어 삶기도 했다. 코를 뚫고 갈빗대를 꿰며 목을 자르고 눈을 도려내고, 껍질을 벗기고 허리를 자르며 사지에 못을 박고 손발을 끊었다. 사람의 눈으로 차마 볼 수 없는 짓을 그들은 무슨 재미나는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동시에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부자가 한자리에서 참혹한 형벌을 당하기도 했다. 남편을 죽여 그의 아내에게 보이기도 하고, 아우를 죽여 형에게 보이기도 했다. 죽은 부모의 혼백상자를 가지고 도망가던 형제가 일시에 화를 당하기도 했으며, 산모가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기를 안은 채 숨지기도 했다.」
장군의 최후
간도참변 이듬해인 1922년 홍범도 장군은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홍범도 장군은 일제의 치졸하고 야만적인 작전에 맞서기 위해서는 독립군보다 더 큰 화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홍범도의 능력을 높이 산 러시아가 자신들의 혁명군에 협조하면 조선 독립투쟁에 군사력을 지원하겠다고 설득했다. 홍범도 장군은 오직 나라의 독립에만 초점을 맞춰 생각했다. 그는 그 제안에 응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

당시 홍범도 장군이 소련에 입국하며 쓴 서류
직업 ‘의병’
목적과 희망 ‘고려독립’
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배신과 독립군의 분열로 인해, 홍범도 장군은 더 안 좋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러시아에 의해 무장을 해제당하고 농부의 삶을 강요받았다. 홍범도 장군이 고려인 1세대가 된 연유이다.
러시아에서의 고단한 삶에 또 다른 불행이 닥쳐왔다. 당시 러시아의 지도자 스탈린은 러시아 땅 곳곳에 흩어져있던 조선인을 강제로 모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시켰다. 일본 첩자의 활동을 방지하겠다는 명목이었다. 외모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일본 첩자를 가려내기 어렵다는 이유로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것이었다.
이때 강제 이주된 조선인 숫자는 무려 17만 명에 달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기차를 타고 40일 넘게 이동하던 중 무려 500명이 사망했다.
한때 독립군 대장이었던 홍범도 장군이 도착한 카자흐스탄 시골 마을은 완전한 황무지 그 자체였다. 홍범도 장군은 이주된 조선인(고려인)들과 땅을 개간하고 농부로 살아갔으며, 말년에는 극장 수위가 되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고국 하늘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려인들이 만든 극장의 사장 부부가 그들의 정신적 지주인 홍범도 장군에게 내어준 의자였다.

장군의 말년 모습
쓸쓸한 말년을 보내던 장군은 조국이 해방되기 2년 전인 1943년, 75세의 나이로 카자흐스탄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남긴 유언은 이랬다고 한다.
“해방이 되면 나를 꼭 조국에 데려가 주오.”
장군의 귀환
홍범도 장군은 사후 78년이 지난 2021년에서야 고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한민국과 카자흐스탄 양국 정상이 이 사안에 합의하며 이뤄진 일이었다. 일련의 모든 절차는 당시 청와대 의전 비서관이던 탁현민에 의해 기획 연출되었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국가 기념 행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하면 아래의 ‘다스뵈이다 175회’를 참고하기 바란다)
2021년 8월 14일, 장군의 유해봉환을 위해 대한민국 공군의 다목적수송기 KC-330 시그너스가 카자흐스탄으로 향했다. 장례 절차에 따라 파묘식, 유해봉환식이 진행되었고, 장군의 이름이 명명된 거리,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고려극장 등을 동포들과 함께 돌았다. 이때 영화배우 조진웅이 국민특사로 가서 장군을 같이 모셔 왔다.

조진웅은 영화 암살에서 신흥무관학교 마지막 졸업생 역할을 맡았고, 한 영화제에서 수상소감으로 당시 촬영 현장의 모습을 회고했다.
“김해숙 선배님이 컷 소리가 떨어지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재연하는 우리도 힘든데 독립운동하신 분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분들 넋이 억울하지 않게끔 지켜온 땅 잘 지키면 좋겠습니다.”
또한 배우 조진웅은 영화 ‘대장 김창수’에서 김구 선생의 역할을 하면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를 자신이 맡은 배역을 통해 배운 특이한 케이스이다.
다음 날인 8월15일, 홍범도 장군의 영정사진을 안은 후손 조진웅이 탑승한 공군 수송기가 대한민국의 상공에 진입했다. 이때 어디선가 나타난 대한민국 전투기 6대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실린 수송기를 호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탑건이 이렇게 말한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홍범도 장군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공군이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필승!”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영상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시간은 과거가 되었고, 과거를 묻어버릴 것인지 미래로 도약할 발판으로 삼을 것인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다. 독립운동을 위해 기꺼이 촛불이 된 분들 덕택에 애석하게도(?) 독립운동할 기회는 놓쳤지만, 그분들의 뜻과 의지를 기억하고 이어받는 것이 최소한 인간이라면 갖춰야 할 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덧붙이는 음악
필자의 허접한 글보다 더 많은 울림을 주는 영상이니, 딱 5초만 시간을 들여서 보기를 강권하는 바이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명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탁현민의 저서 『미스터 프레지던트』에 따르면, 당시 의전 비서관이던 탁현민은 오희옥 애국지사님과 함께 광복절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원래는 국방부 관현악단의 반주에 맞추어 유일하게 생존해 계신 여성지사가 애국가를 부를 계획이었다. 그런데 리허설 전 지사님께 몇 소절만 부탁드렸더니, 여사님은 안익태의 애국가 이전, 독립운동을 하던 때의 애국가를 부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때는 다들 이렇게 불렀어.”
오희옥 애국지사님이 부른 애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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