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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

 

참담한 마음으로 맞이하는 광복절 79주년. 나는 이날 79년 전, 외세와 싸움을 시작한 베트남의 사이공별동대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열까지 받아 비상시가 아니면 틀지 않던 에어컨을 세게 틀었다. 참고로 이 글은, 사이공별동대에 대해 국내에서는 처음 쓰인 글(참고 자료가 전혀 없음)이어서 사실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 주관적인 관찰임을 미리 밝혀둔다.

 

생존자에게 듣는 별동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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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당시 무기 운반에 사용하던 자동차

 

베트남전 기행 중에 ‘사이공별동대’를 만났다. 대부분의 베트콩들이 지방인 농촌이나 산간에서 투쟁하는데, 사이공별동대는 사이공 시내에서 전략적으로 적(?)의 심장부를 타격할 수 있는 도시 게릴라 투쟁을 했던 부대다.

 

당시 남베트남 민족전선 측에는 가난한 사람뿐만 아니라, 베트남 억만장자였던 쩐반라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베트콩은 전략적으로 쩐반라이를 또 다른 부자 여성과 위장결혼을 시켜 가정을 꾸리고 두 사람의 자본력을 동원하여 건설회사를 만들었다. 쩐반라이는 미국의 대외원조기관인 USOM 건설입찰자로 대통령궁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고위인사들과 접촉한다. 남베트남 정부의 주요 청사, 공공 하수도시설 지도와 설계도 등 기밀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이공 시내에 비싼 땅의 건물을 사들여 ‘베트콩’의 근거지와 은신처, 비밀 무기 창고 등을 만들어 유사시에 적을 공격하는 루트로 활용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미군과 한국군 장교들의 숙소 바로 앞에 카페와 식당을 차려 정보를 탐지했다고 한다. 한국군을 상대로 했다는 밥집은 장소를 바꾸어 지금도 운영하고 있고, 소문이 퍼져 지금은 한국인 여행객들이 자주 찾는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집 안을 자세히 살펴보면,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상업용으로는 적당하지 않은 거의 70도 경사로 되어 있고, 마치 옆집 벽처럼 되어가는 창고에 비상식량인 C레이션, 탄약상자에 담긴 문서, 의약품, 돈, 금 등을 숨길 수 있었다. 식당 위층은 옷장으로 위장되어 한 사람이 숨어 들어가서 집 뒤로 탈출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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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계단

 

그러나 별동대는 애초에 미군과 싸우기 위함이 아니라, 프랑스 식민 시절에 외세와 싸우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45년에 건설된 3층짜리 건물에는 놀랍게도 계단이 없다. 4명이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만 있어서 외부 사람이 함부로 건물에 들어올 수가 없고, 불시에 습격을 받으면 2층이나 3층에서 밧줄을 타고 도주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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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동대 건물의 총탄 흔적

 

사이공 별동대는 상대적으로 농촌보다 도시에 많은 젊은이들을 모아서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활약하여 적들에게는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자기들은 비교적 피해입지 않았다는 스토리를 선전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5대 장성(병장)인 내가 듣기에는 김일성이 만주에 항일투쟁을 할 때 사용한 ‘솔방울 수류탄’ 류의 이야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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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모아

 

대표적인 것이 크레모아의 방향을 바꾸어 미군을 공격하는 것으로 이용했다는 이야기였다. 크레모아란 월남전에서 매복 나갈 때 사용하던 대인지뢰다. 크레모아를 설치 하려면 우선 전방에 실 같은 구리줄로 된 인계철선을 깔고 45도 방향으로 크레모아를 설치한다. 인계철선에 조명탄을 매달아 무언가가 인계철선을 건드리면 저절로 조명탄이 터진다. 크레모아 안에 700개의 쇠구슬이 있어서 격발기를 누르면 구슬이 터지는 것이다.

 

주간에는 크레모아를 설치하면 격발기를 앞에 놓고 전방을 주시하게 되어 있고, 야간에는 조명탄이 터져 전방이 밝아지면 격발기를 눌러서 크레모아를 터트리게 되어 있다. 세상에 어떤 멍청한 군대가 전방에 크레모아를 설치해 놓고 적 방향을 거꾸로 해서 도리어 아군이 피해를 당하도록 내버려둔다는 말인가? 당나라 군대가 참전했다면 혹시 모를 일이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사이공별동대는 1945년부터 존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특별히 1968년 구정 대공세 당시 사이공에서 전개된 신출귀몰한 기습공격을 감행한 전사들로 기억된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사이공을 비롯한 남베트남 도시들을 기습했다. 일시적으로 미국 대사관을 점령하고 일부 도시를 함락시켰지만, 이내 미군에 진압되어 작전은 완전히 실패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미국 대사관에 베트콩 깃발이 휘날리는 장면이 생생하게 중계되면서 미국 내 반전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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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 시내 별동대의 거점들 설명

 

이때 모두 88명, 5개 조직으로 구성된 사이공별동대가 대통령궁, 미 대사관, 해군참모부, 라디오방송국, 경찰청 등을 기습 공격해서 전 세계의 이목을 베트남에 집중시키는 역할을 했다. 88명 중 64명이 희생되었는데 단 1명의 유골만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1986년 <사이공별동대>라는 드라마로 제작돼 큰 인기를 끌 정도로 베트남인들에게 별동대원은 별똥별처럼 스러져 간 민중 속의 영웅과 같은 특별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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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한 대원들

 

이번 기행에서 사이공 별동대 박물관의 창립자인 고(故) 쩐반라이의 아들인 쩐부빈과 손자 펜(Pen), 그리고 생존자들을 만나 별동대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쩐부빈은 지난 30년 동안 별동대에 관한 역사를 간직하고 싶어 혁명기지로 사용되었던 집들을 탐문하고 구입해왔다. 그런 다음 원형을 복원하고 방문객을 맞아 역사적인 장소임을 알리고 있다. 그중 한 곳을 방문해, 옆집으로 이어지는 지하로 굴을 파서 위험한 때 대피하는 방법으로 사용했던 무기 창고를 찾았다. 비밀 터널은 깊이 3m, 길이 30m 이상이었는데, 1955년에 시작해 10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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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지하의 땅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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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굴에 들어갔다 나오는 체험

북베트남 지휘부가 구정 대공세 때 비밀 회의장 겸 무기고로 활용한 쌀국숫집은 1988년 역사 유적지로 지정되었다. 쩐반라이의 후손들은 별동대가 사용하던 건물에 민간 박물관을 조성하고 전쟁 당시의 물품들과 인물들을 기념하고 있었다. 전시된 무기나 장비들은 50년 세월이 흘렀으니, 지금은 귀하게 보일지 몰라도, 전쟁 당시엔 바가지로 퍼서 총알을 팔던 전쟁통 시장에서 흔해 빠진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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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된 무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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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반할 때 나무 속에 숨겨진 무기들

 

쩐반라이의 손자인 십 대 소년은, 조부가 했던 일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자기 삶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보여 주었다. 돈이 생기는 대로 별동대가 싸웠던 건물을 매입해서 기념하려고 노력하지만, 땅값이 비싸져 쉽지 않다고 말했다. 비록 가문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십 대 손자까지 선대가 한 일을 기리려고 하는 노력은 감동적이고 대단해 보였다. 베트남 사회에서 이들의 위치가 공고화된 것을 보면서, 한국의 독립운동 후손들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모습이 떠올라 속이 쓰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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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뜻을 잇겠다는 손자에게 기념품 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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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주차 건물은 아직 구입하지 못했다v7-기념 조형을 만들어 자기 건물에 박았다..jpg

자기 건물에 기념 조형물을 설치했다

 

여성 양심수를 보고 만든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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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뚜껌 호찌민시 문화유산협회 대표

출처 - (링크)

 

여성 별동대원이었던 베트남의 대표적인 여성 양심수 레뚜껌 호찌민시 문화유산협회 대표의 이야기이다.

 

“감옥에서의 삶, 감옥에서의 투쟁, 그것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감옥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투쟁이었다."

 

사이공(현재 호찌민) 명문 학교인 지아롱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별동대원 레뚜껌은 1967년에 검거되었다. 사이공에서도 악명 높았던 찌호아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1969년 꼰따오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그녀는 1974년 출옥할 때까지 감옥에서의 삶을 '투쟁'이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이렇게 회고한다.

 

"감옥으로 이송되기 전 첫 번째 투쟁이 시작된다. 고문을 이겨내야 했다. 절대 동료의 이름을 불지 않는 것, 절대 항전기지를 발설하지 않는 것이 우리 같은 정치범의 첫 번째 투쟁이었다.”

 

'꼰다오' 감옥은 베트남을 지배하던 프랑스가 베트남 남동부 꼰다오섬에 지은 감옥이다. 영화 '빠삐용'의 소재로 쓰이기도 했던 이 감옥은 '베트남 독립 투사들의 무덤'으로 불릴 만큼 악명이 높았다. 감방 위는 철망이 뚫려있어, 간수들이 수감자를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다. 수감자들이 잠을 자려고 하면 간수들은 이 철망으로 물을 뿌리거나 오물을 퍼부었다고 한다. 하루에 1회 목욕 규칙이 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서너 명이 작은 우유갑 같은 통의 물을 하루 동안 써야 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에서도 정치범 양심수들에게 종이와 연필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시를 낭송하며 이어갔다. 그리고 감옥을 거쳐 간 300명이 넘는 양심수의 이름을 엮어 시를 짓기도 했다. 그들은 이렇게 증언한다.

 

"한 친구가 시를 지으면 낭송했다. 주위에서 같이 들으면서 이 부분은 이렇게 고치면 좋겠다고 하면 머릿속에서 다시 시를 지어서 또다시 낭송했다. 우리는 시를 입으로 읽었다. 시를 눈으로 읽지 않았다. 입으로 읽고 귀로 읽었다."

 

여성들이 수감된 옥사는 남성들이 수감된 옥사와 마주 보고 있었다. 여성 양심수가 옥중투쟁 벌일 때, 여성들이 감옥 문 흔들면서 간수들과 맞붙었는데,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남성들은 그토록 장엄한 아름다움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때 가슴 벅차 지은 노래를 투쟁가처럼 불렀다. 노래를 만든 남성은 옥중에서 투쟁을 벌이는 여성 양심수들이 마치, 폭포가 쏟아지는데 폭포를 역류해 거슬러 올라가는 꽃잎처럼 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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