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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길을 달리는 90년대 시내버스! _ 고전영상 옛날영상 0-9 screenshot.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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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졸업 직후, 조만간 독립하겠다는 마음을 조금씩 먹기 시작할 무렵이다. 내 마음과 반대로 아버지는 시골에 있던 셋째 삼촌을 집 근처로 데려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같은 동네에서 형제들과 다 같이 살고 싶어 하시던 그 마음을 이제 실현해 보려는 것 같았다. 당연히 그 누구도 반기지 않는 결정이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씩씩대며 집으로 들어오셨다.

 

"밥도."

 

그 시간까지, 식사도, 술도 드시지 않고 들어오신 것에 의아했던 어머니는 아버지께 물었다.

 

"이때까지 밥도 안 묵고 뭐했노?"

 

"시골에 가가 형수랑 이야기하고 왔다."

 

"거기는 와?"

 

"삼봉이 부산 데리와서 살게 할라꼬 했지. 근데 형수가 뭐라 캤는지 아나?"

 

어머니는 넉넉지 않은 형편에 삼촌까지 데려오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괜히 엄한 곳에 불똥이 튈까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머라카데?"

 

아버지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는 듯 숟가락을 밥상에 치며 말씀하셨다.

 

"각서 쓰고 델꼬 가란다! 다시는 촌에 돌려보내지 말고 죽을 때까지 내가 책임지고 델꼬 살란다!!"

 

삼봉이 삼촌은 시골에서 큰집 식구들과 함께 일하며 평생 살았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지급받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큰집은 삼촌을 짐 덩어리 취급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입을 열자, 이때다 싶어 각서까지 써서 혹을 떼어 내겠다는 심산이었다.

 

아버지는 격분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할아버지 유산인 방앗간을 팔 때도 자기 몫을 받지 않으셨고, 젊은 시절에도 큰아버지에게 휘둘려, 땅이나 집을 살 때 돈을 보태준 것에 대해 서운한 말 한마디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자기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동생을 애물단지 취급하는 태도에서는 참지 못하셨다.

 

"그래서 머라캣는데?"

 

"너무 열이 뻗쳐가꼬 형님 묘를 파버리고 싶다고 하고 와뿟다!"

 

옆에서 듣던 나도 “그건 좀…” 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 아버지의 분노도 수긍이 되었다.

 

금전적인 부분을 생각하면, 큰집 식구들의 재산 축적 과정에서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과 삼촌의 노동력이 일조한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큰어머니는 그런 부분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버지는 가문을 한데 모으려 애썼지만, 누구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시작된 실망감, 허탈함, 외로움을 홀로 감당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아버지의 정신은 무너져 갔다. 당신이 지키고자 애썼던 가문은 흩어지고, 전쟁 트라우마를 어느 정도 진정시켜 주던 희망이 사라지면서 아버지는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점점 취약해졌다. 가까이서 아버지를 지켜보던 가족은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큰집과 연락을 끊고 명절 때도 만나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만은 애착이 깊던 '가문'이지만, 말 한마디로 이제는 원수가 되어 버렸다. 만약, 가문을 지키는 데 쏟았던 노력의 절반만이라도 우리 가족에게 시간을 들였다면 아버지의 인생이 그토록 외롭지는 않았을 터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핫바리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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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나는 대학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진학 때와 마찬가지로 또 한 번 어머니의 성화를 이기지 못했고, 생각지도 않았던 대학 진학을 결정하게 되었다. 2001년, 티비에선 연일 물수능이었다는 뉴스가 도배되었지만(만점을 받고 서울대에 떨어지는 사람이 나왔다고 화제가 된 걸로 기억한다), 공부와 담쌓고 살았던 나는 불수능이든 물수능이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우연히 들어간(...?!) 나의 인문계 고등학교(부산 지산고에 대한 당시 독특한 학교 분위기는 이 링크를 참고하시라-링크)는 공부하는 녀석들은 그야말로 '미친듯이' 공부했고, 노는 녀석들은 드라마에나 나올 것처럼 '막장'으로 놀았다. '미친듯이 공부' 쪽에 섰던 아이들이 제법 된 모양인지, 부산의 한 귀퉁이에 있는 평범한 인문계임에도 불구하고 서울대를 10명 넘게 보낸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우리 때는 서울대를 몇 명 보냈는지가 학교 평판이었다). 물론 이 조차도 나와는 전혀 관계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어느쪽도 아니었고 좋은 점수도 받지 못했으니까. 

 

결국 경북에 위치한 대학교 한 곳, 부산에 있는 대학교 한 곳에 합격했다. 나는 경북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기로 했다. 어머니는 기숙사를 등록할 때, 함께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 지원한 이유는, 나를 둘러싼 환경을 바꿔야 지금까지 쌓아온 우울과 부정을 떨쳐 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를 그렇게 살게 했던 가족의 자취에서 벗어날 전환점이 필요했다. 더 이상 부모로부터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고, 더 나은 사람들과 더 많은 경험을, 부모님의 간섭 없는 곳에서 해보고 싶었다.

 

허나 그렇게 다짐하고 기숙사 등록까지 마친 나는 결국 경북에 있던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기숙사를 등록하고 집으로 돌아온 며칠 뒤, 어머니가 강경히 반대하셨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학교는 안 되겠다."

 

"어? 왜?"

 

"거~ 여자애랑 남자애랑 붙어 다니는 거 보이 연애나 하고 살림이나 차리지 공부 하긋나? 안 되겠다."

 

어머니는 아마도 기숙사를 등록하고 돌아오는 길, 학교 정문에서 버스를 탈 때 꼭 껴안고 같이 승차하던 커플을 보고 엉뚱한 생각을 하신 모양이다. 말문이 막혔다. 대학에 진학하고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연애하기 마련 아닌가?

 

"대학 가면 연애도 하는 기지 그럼 연애를 언제 하노? 사오십 돼서 주름 자글자글 해가꼬 맞선보고 연애하나?"

 

"고마 시끄럽다. 가까운 데로 가라."

 

어머니는 내가 선택한 전공의 전망이 어떤지는 관심 없었다. 부산에 있는 학교에 가면 기숙사비나 생활비를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속마음이 슬며시 보였다. 가고 싶지 않았던 대학, 그것도 대학은 가야한다는 어머니의 등쌀에 떠밀려 억지로 진학하게 되었는데, 그마저도 내가 원하는 과가 있는 학교에 가지 못하고, 성인이 된 자식을 통제하려는 어머니의 태도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라믄 나는 학교 안갈란다. 돈 벌러 갈란다."

 

"또 이란다. 대학 안 나오면 핫바리 인생 되는기다. 니도 아빠 엄마처럼 살래?!"

 

나는 아무 말 없이 TV를 보고 계시던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자가 옥신각신하고 있어도, 아들이 어느 대학에 가든지 아니면 대학에 가든지 말든지, 그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출발 드림팀>에서 이상인이 이번 도전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았다. 심지어 ‘핫바리’ 라는 단어를 듣고도 아버지는 못 들은 척했다.

 

놀랍게도 그 순간, 이 집을 떠나 나만의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안정감을 느끼며 살고 싶단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개선하려는 의지 없이, 노력 없이, 살아 있어도 죽은 것 같은 그런 인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모습이 지긋지긋했다. 집에 머무르며 이런 기조에 물들어 부모님과 함께 살면, 그저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살며 후회 남는 삶을 살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두려웠다. 

 

'학교는 1학기만 다니고, 휴학하고 돈 벌어서 집을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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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일 대학교 1학년 1학기. 맛만 보자는 마음으로 다닌 학교는 역시 재미 없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억지로 먹으려면 맛 없기 마련이다. 나는 세상 어려운 일 없이 자라 부모로부터 용돈 받으며 하하 호호 편하게 학교 다니는 아이들과 달랐다.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돈’과 ‘독립’ 두 가지 뿐이었다.

 

학기 중엔 햄버거 가게에서 일했다. 방학이 다가오고 한 달에 받는 보수가 30만 원 내외라 차비와 밥을 사 먹고 나면 남는 돈이 없었다. 아르바이트 하나를 더 늘려 볼까 생각했다. 집을 떠나려면 적어도 내 손에 100만 원 돈은 있어야 했다.

 

막상 일자리를 알아보니 갈 데가 마땅치 않았다. 나는 돈 없는 여느 대학생처럼 막노동부터 시작할 생각이었다. 그러던 차, 고등학교 친구였던 동근이에게 전화가 왔다.

 

"야 요새 머하노?"

 

"햄버거 꿉고 있지. 마! 내가 바로 햄버거 요리사다."

 

"햄버거? 돈 마이 주나?"

 

"이십에서 삼십만 원 왔다 갔다 한다."

 

"노예네 노예! 킥킥킥 돈 안모자르나?"

 

"모자르지 밥묵고 차비하면 돈 없다. 살기 힘드네."

 

동근이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리고  일자리 하나를 제안했다.

 

"니 돈 버는 일 좀 해볼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