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 일반에 보급되기 시작한 지 30년이 넘었고 아이폰이 등장한 지도 17년이 되었다. 이제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세상이 이렇게 크게 변하면서 미디어 환경도 급격하게 변화했다.
땡전뉴스
쿠데타에 성공한 신군부는 언론 통폐합 조치를 통해 많은 언론사를 통폐합했고, 방송사도 그리 많지도 않았던 자잘한 방송사를 통폐합하여 KBS와 MBC만 남겼다. 겉으로 내세운 목적은 ‘언론사 구조 개선’이었지만, 실제로는 언론을 장악하고 보도를 통제하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은 같은 언론과 방송을 접하게 되었고, 정부를 비판하는 소식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언론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사회의 다양성을 지향하는 것은, 독점적 언론이 하나의 목소리만 내고 획일화된 사회를 지향하는 것보다 당연히 바람직하다. 특히, 그 독점적 언론이 독재정권의 관영 언론이고, 한가지 목소리는 독재정권의 메시지라면 최악의 상황이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언론을 통폐합한 결과로 전 국민이 비슷한 문화양식, 비슷한 가치관,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반작용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80~9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방송이 거의 같았다. 토요일에는 KBS의 토요 명화, 일요일에는 MBC의 주말 명화를 모두가 볼 수 있었다. 그것도 중간광고 없이. 외국 TV 시리즈도 전 국민이 다 같은 걸 봤기 때문에,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전국 어디서나 A-특공대, 맥가이버, 에어울프를 알고 머나먼 정글, 블루문 특급, 제시카의 추리극장 같은 것도 방송사에서 붙인 한국어 제목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인기 드라마가 방영된 다음 날이면 학교에서 모두가 그 얘기를 했다.
이런 방송 환경을 ‘획일적’이라며 부정적 가치가 담긴 표현으로 평가할 수도 있지만, 좋든 나쁘든 간에 그런 방송 환경은 우리의 관습, 가치관, 역사적 경험, 문화 등이 비슷해지도록 만들어서 ‘문화적 동질성’을 강화한 것은 분명하다. 문화적 동질성은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을 강화해서, 부정적으로는 외국인을 배척하고 차별하지만, 긍정적으로는 내부를 단결하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방송 환경은 독재정권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이른바 <땡전 뉴스>에서는 9시가 ‘땡’ 하면 “오늘 전두환 대통령께서는…”으로 뉴스를 시작하고, 이어서 “한편 이순자 여사께서는…”으로 다음 문장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전두환의 호는 ‘오늘’, 이순자의 호는 ‘한편’이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1980년대 방송의 민낯, <땡전 뉴스>
언론통폐합이 기대하지 않았던 효과
독재정권은 자기들의 정치적 메시지만 주입하고 싶었겠지만, 사람들은 당연히 예능이나 드라마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 시절 드라마는 어지간하면 시청률 30% 이상은 기본이었다. 만약, 이런 정도의 시청률에 역사적 사실이나 경험을 다룬 드라마가 결합한다면 이만한 역사교육도 없을 거다. 역시 81년에 드라마 <제1공화국>을 시작으로 해서 현대사를 다루었고, 민주화 이후인 90년대에는 근현대사를 제대로 다룬 드라마가 나왔다.
1991년 10월부터 1992년 2월까지 방영된 MBC TV 드라마인 <여명의 눈동자>는 일제강점기 일본에 징병 되어 동남아에서 싸우다 탈출해 중국 팔로군, 소련군이 되었다가 제주 4.3, 여순사건을 겪고 지리산 빨치산이 된 최대치, 일본에 징병 되어 731부대에서 생체실험을 목격하고 탈출해 미군 특수요원이 되었다가 지리산 토벌대가 되는 장하림, 일본군 ‘위안부’로 만주와 사이판에서 고생하다가 일본군의 위안부 집단 학살에서 살아남아 미군 특수부대원이 되는 윤여옥의 이야기를 다룬, 아주 스케일이 큰 드라마였다.
<여명의 눈동자>의 시청률은 MBC 자체 조사 결과 매회 50%, 점유율 70% 이상이었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분위기, 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가혹행위,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과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한 학살, 731부대의 생체실험 등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고 일본과 한국의 친일 반역자들이 숨겨왔던 충격적인 역사의 일부를 직접 보여줌으로써 훌륭한 교육자료가 되었다. 이렇게 전 국민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까지 이어지는 역사를 일부라도 이해하게 된 것은 통폐합된 방송 덕분이었다.

1991년 10월 12일 매일경제 8면
그 무렵에 SBS가 만들어졌다. 1990년에 방송법이 개정되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그것은 민주화의 결과였다.
1995년 1월에서 2월까지 SBS에서 방영된 <모래시계>는 박정희, 전두환 시절의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빨치산 경력으로 육사 진학이 좌절되자 정치깡패가 되어 YH 사건에 개입하고, 5.18에서는 시민군이 되고,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가, 카지노 슬롯머신 사건, 용팔이 사건 등을 겪는 박태수, 5.18에 계엄군으로 현장에 투입되어 학살을 경험하고 제대한 후 검사가 된 박태수의 친구 강우석, 재벌의 딸이지만 학생운동 하다 고문도 당하고 이래저래 하다 카지노를 인수하는 윤혜린의 이야기를 다룬다.
‘광복 50주년 기념드라마’였던 <모래시계>의 시청률은 40~60% 정도였고, 방영 시간대에는 교통량이 감소했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로 인기가 굉장했다.

아마도 이 드라마는 5.18을 다룬 최초의 드라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1995년은 5.18이 있은 지 15년밖에 안 되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2009년의 사건을 다룬 느낌이다. 거의 2개월 동안 월화수목 집중적으로 방영했고, 이 드라마 역시 당시 학살자들과 부역자들이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고 숨겨왔던 삼청교육대와 5.18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훌륭한 교육자료가 되었다.
이렇듯, 문화적 동질성은 양날의 검과 같다. 잘못 활용하면 우리 사회를 극단주의로 이끌 수도 있지만, 잘만 활용하면 우리 사회를 올바른 역사의식과 비판적 사고가 충만한 건강한 사회로 만들 수 있다.
다양한 미디어와 과몰입
지상파 프로그램조차도 유튜브로 보는 지금의 미디어 환경에서는 전 국민이 다 같이 보는 프로그램이라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유재석조차도 시청률 3%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채널이 있고, 유튜브를 볼 수 있는 매체를 모두가 하나 이상 갖고 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서 TV를 본다는 건 매우 드문 일인데, 그나마도 손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다른 걸 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미디어 환경이 파편화되어 사회 구성원이 문화적 동질성을 갖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가족구성원도 공통된 가치관을 갖기 어려운 시대다.
지상파, 종편과 마찬가지로 유튜브도 자신이 원하는 채널만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 보다 보면 그 범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과몰입하게 된다. 그래서 스포츠만 보는 사람은 계속 스포츠만 보게 되고, 정치만 보는 사람은 계속 정치만 본다. 주변에서 종편과 지상파만 보는 사람들이 매우 좁은 세계관을 자랑하듯 떠들며 항상 화가 나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유튜브는 종편에 비해 훨씬 넓고 많은 세계를 볼 수 있지만, 그것도 본인의 도파민 분비를 자극하는 분야만 과몰입하여 살다 보면 세계관이 좁아지고 항상 화가 난 채로 살아가게 될 수 있어서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이러면, 채널이 아무리 많아 봐야 소용없다.
정치 과몰입보다 더 위험한 요소가 있다. 바로 알고리즘이 사용자가 구독한 것 이외에도 사용자의 정보를 이용해서 다른 유사한 채널을 띄운다는 것이다. 그것도 매우 자극적인 썸네일과 함께. 이 알고리즘이 시키는 대로 계속 보다 보면, 언젠가는 알고리즘이 유도한 대로 인간이 생각하게 되어 알고리즘에 조종당하게 될 위험성도 있다.
이러한 사용자의 정신건강을 지키고 알고리즘의 사악한 음모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바로 인간이 미디어 편성표를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무엇을 볼 것인지 알고리즘이 결정하기 전에, 인간이 먼저 결정하자는 것이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오히려 인간의 일이 더 많아지는 느낌이지만, 사실 원래 인간이 다 해왔던 일이다.
미디어 편성표
유시민 작가는 ‘저널리즘은 무엇이 뉴스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김어준은 저널리스트라고 했다. 그렇다. 김어준은 무엇이 뉴스인지를 결정하는 저널리스트다. 하지만, 이런 미디어 홍수 속에서는 '무엇을 볼 것인지 결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1997년 12월 7일 동아일보 19면
IMF에서 구제금융 550억 달러를 받는다는 소식을 전한 주의 주말 TV 편성표
대공황 시기의 사회상을 다룬 ‘분노의 포도’를 선택한 EBS 담당자의 감각이 돋보인다
2020년, 뉴욕타임스라는 미국의 변두리 지역 언론사는 TV 편성표를 없애겠다고 발표했다.

재래식 미디어 회사가 제시하는 아무도 관심없는 채널의 TV 편성표 따위는 이제 없어도 상관없다. 지상파나 종편 같은 방송들은 지금과 같은 환경의 미디어 소비자들에게는 그들도 수많은 유튜브 채널 중 하나일 뿐이다.
공영방송 같은 건 오래전에 없어진 것과 다름없지만, 공영방송에서 하던 프로그램과 같은 성격이면서 그것보다 더 좋은 프로그램은 유튜브에 넘쳐난다. 오히려, 공영방송에서 만들어야 했지만 만들지 않았던 좋은 프로그램들도 훨씬 많아졌다. 이제 그것들을 다 모아서 편성표를 만들어야 한다.
나만의 미디어 편성표

TV 편성표와 마찬가지로 하루 종일 이걸 보고 앉아 있을 일은 없다. 그냥 그 시간에 시간이 남아서 뭔가 볼 일이 생기면 이런 채널을 중심으로 시청하라는 얘기다.
유튜브 채널도 과거 TV와 마찬가지로 생방송과 녹화방송이 있지만, 굳이 생방송을 보지 않더라도 언제든 볼 수 있으니 적절한 시간에 편성하면 된다. 위의 예시에서 생방송이 있는 것은 생방송 시간을 위주로 적었고, 그렇지 않은 것은 적당한 시간에 넣었다. 이렇게라도 미리 정해서 보면, 포털에 올라오는 클릭 장사용 기사 제목에 빡치거나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빨려들어 시간을 낭비하고 과몰입으로 인해 정신건강을 해치는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마트에 갈 때 과소비를 예방하기 위해 쇼핑목록을 적어 가는 것처럼.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이 채널은 다스뵈이다와 달리 공영방송을 지향한다. 그래서인지 김어준도 여기서는 비속어를 쓰지 않는 나름의 기준이 있는 것 같다. 뉴스브리핑은 언론사의 기사를 인용하며 김어준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핵심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취재와 보도 기능이 없는 것 같지만, 각 분야의 전문가나 당사자를 직접 인터뷰하기 때문에 취재와 보도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무엇보다 질문의 수준과 깊이가 뛰어나다.
정치적으로는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에 가깝지만, 국민의힘 정치인도 출연하여 본인과 당의 얘기를 하고 현재 민주당 최고위원이 과거에 국민의힘 소속으로 고정 출연하기도 했다. 광고 없이 멤버십 가입비로만 운영해서인지 화면이 깨끗하다.
뉴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패션, 스포츠, 미디어 비평, 음식, 역사, 음악, 영화, 과학, 기술, 외교·안보, 국방, 통일, 문학 등 인간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거의 매주 찔러보는 구성의 시사 프로그램은 현재까지 알려진 우주에 없다.
진행자인 김어준의 나이는 55세로, 생물학적인 나이로는 다음 정부에서 환갑을 맞이하겠지만, 격동의 80~90년대를 살던 20대 감성은 여전하다.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하고, 경기가 맘에 안 들 땐 야구장에 불을 지르고, 영화가 재미없으면 환불을 요구하며 의자를 뜯고, 시위를 하다 목숨을 잃기도 하고, 최루탄을 쏘는 전투경찰에게 화염병을 던지고, 개소리하는 자에게는 그 자리에서 가차 없이 귀싸대기를 날리고, 한라산 백록담 물로 라면을 끓여 먹고, 가진 것 없어도 결혼해 단칸방에서 애 키우며 꾸역꾸역 살아가고, 생판 모르는 남의 자식이 경찰한테 맞아 죽었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수백만 명이 길에 쏟아져 나오던 시절의, 무모하지만 쪼잔하지 않고, 선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화끈하고 낭만적인, 일본식 표현으로 ‘아쌀하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그런 시대를 20대의 왕성한 호기심으로 보낸 사람의 감성이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진부하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의 시대를 읽는 감각, 추진력, 호기심, 상상력만큼은, 잃을 것도 많고 겁도 많고 엄마 뒤에 숨은 어린애 같은 지금의 어느 20대보다 탁월하고 왕성하다. 김어준의 시간은 흐르지만, 그의 20대 시절 영혼을 유지한 채 변해가는 세상을 업데이트하며 나이를 드는 것 같다.
홍사훈쑈
내그럴줄알았다
공영방송 출신의 베테랑 앵커들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미디어 관련 이슈나 지나갔지만 중요한 사건에 대해 심층분석 한다. 방송의 구성과 내용이 좋고 방송을 진행하는 앵커들은 오랜 취재 경험 덕분인지 사건의 핵심을 잘 짚고 기존 언론이 놓치는 부분을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공영방송 출신답게, 우리말보다는 기자어를 써서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어떻게든 반론을 끼워 넣어서 기계적 중립을 맞추려고 하거나, 명백한 사안에 대해서도 ‘~하는지 의문이 있다’, ‘~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는 식의 말 흐리기나 돌려 말하기 화법으로 사람 속 터지게 하는 편이다. 아마도 오랫동안 공영방송에서 훈련된 탓인 것 같은데, 세상의 균형은 앵커가 혼자 만들 수 있는 게 아니고, 각 미디어가 자신들이 가진 공정한 기준에 따라 자기주장을 할 때 그것이 언론 시장에서 전체적으로 균형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걸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홍사훈쇼>는 월수금에 고정패널이 출연하여 주요 이슈에 대해 심층적인 인터뷰를 하고, 화목에는 경제 분야를 다룬다. 진행자인 홍사훈 기자는 여전히 이 사회의 시스템과 상식이 작동한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본인의 희망 사항과 기대는 이해하지만, 현실 속 권력과 언론의 행태를 '일부의 일탈'로 바라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렇게 미래를 낙관적인 사람도 필요하긴 하지만 답답한 건 어쩔 수 없다.
<내그알>의 뉴스브리핑은 그날 나온 언론사의 기사를 인용하고 앵커의 시각으로 해석한다. 주요 이슈 또는 가려진 이슈에 대한 인터뷰, 미디어 비평, 정당별 보좌관들의 토론, 민주당과 국민의힘 패널의 토론 등이 있다. 그동안 기대만큼 인기를 얻지 못해서인지, 최근에 개편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도하려는 것 같다. 동시간대의 프로그램과 경쟁하려고 스트레스 받을 게 아니라, 아예 아무도 안 하는 걸 시도해야 할 것 같다.
아침부터 옳은소리
시동위키
박종훈의 지식한방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국제적 사건을 간략하고 명쾌하게 설명하는 채널이다. 짧은 시간에 핵심을 요약하는 능력이 탁월하고 진행자들의 전달력이 좋다.
그것은 알기 싫다
정치, 사회, 문화, 노동 등 주요 이슈와 사건에 대해 심층 분석하는 <그것은 알기 싫다>와 소소한 일상을 다루는 <요즘은 팟캐스트 시대> 등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공영방송에서 꼭 해야만 하는데 절대로 하지 않았던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선거, 지방선거, 보궐선거 등 각종 선거에서 모든 지역구의 모든 후보자에 대한 행적과 공약을 분석하는 ‘데이터센트럴’과, 국정감사에서 언론사가 보여주는 짤막한 영상 뒤에 언론사가 주목하지 않았지만 매우 중요한 내용에 대해 해석하는 ‘국정감사 기록실’이다.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채널에 과몰입하여, 누군가를 한없이 비난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현실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런 채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반드시 그렇게 나쁘기만 하거나 또는 훌륭하기만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과, 정치인은 그냥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팟캐스트에서 성장했기 때문인지, 오디오 기반이므로 지하철, 운전 등 이동할 때나 설거지, 청소 등 집안일할 때 듣기에 좋다.
빨간아재
공영방송에서 꼭 해야만 하는데 절대로 하지 않았던 것 중에 재판에 관한 방송이 있다. 언론사 직원들이 형사사건의 한쪽 당사자인 검찰의 주장만 그대로 받아쓰는 것은, 하루에도 몇 개씩 포털에 기사를 올려서 클릭 장사를 해야 하는데 하루 종일 법정에서 어려운 말을 듣고 요약하고 기사를 내는 것보다 검찰의 보도자료를 받아쓰고 분노의 클릭을 받는 것이 가성비가 높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벌어지는 검찰과 피고인 측의 공방에 대한 보도는 가성비가 떨어지는 보도이지만, 분명히 필요한 보도이기 때문에 이 시장에 뛰어든 독보적인 채널이다.
법정 공방 같은 거 어렵고 재미없는데 누가 보겠나 싶고, 중년 아저씨 혼자서 차에 앉아서 떠드는 것 같은데 그거 누가 보겠느냐고 싶지만, 카메라 앞에서 열심히 먹는 먹방 같은 거나 보면서 시간 보내는 것보다 훨씬 낫다. 어렵고 따분한 법정일 것 같지만 자초지종에 대한 설명도 있고, 한번 보면 꽤 흥미진진한 내용이 많아서 계속 보게 되는 법정 드라마나 코미디 같은 성격이 있다.
검찰의 일방적인 주장만 받아쓰는 언론에 빡친 사람이라면, 그딴 언론은 버리고 그냥 이 채널을 보면 된다. 만약 검찰의 일방적인 주장만 받아쓰는 언론에 화를 내는 사람이 이런 채널을 재미없다고 안 보면 그 사람이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다.
뉴스타파
탐사보도 전문 독립 언론으로서, 이명박 시절 언론탄압 과정에서 해직된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탄생해 12년을 이어오고 있다. 탐사보도 기능이 중심이며, 다큐멘터리 등 스케일이 큰 프로젝트도 과감하게 진행하는 보도채널이다. 시민의 후원으로 운영되어 광고가 없으며, 무엇보다도 후원금은 소득공제 대상이다. 후원들 하시라.
과학하고 앉아있네
팟캐스트 과학 커뮤니케이션 영역에서 가장 먼저 시작했지만, 유튜브 진입에 소홀했던 탓인지 그 내용에 비해 저평가된 채널이다. 최신 과학기술 또는 오래된 과학기술에 대해 전문가들이 전문적인 얘기를 길게 하기 때문에, 쇼츠나 요약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어려울 수 있으나, 보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는 자기 머리로 이해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도 여러 번 보고 듣다 보면, 어느새 어려운 말을 알아듣는 느낌도 들고 심지어 어디 가서 아는 척도 할 수 있게 된다. 더 중요한 건, 누군가가 어디서 유튜브 요약본 같은 거 보고 와서 아는 척할 때 그 요약본에 나오지 않았을 디테일까지 아는 척하며 상대를 제압하는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곽재식 작가가 출연하는 ‘격동 500년’은 역사적인 과학자 한 명의 삶과 과학적 업적 등을 다루는 프로그램으로서, 과학 덕후에게 시간제한 없이 마음대로 썰을 풀도록 내버려뒀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깨닫게 된다.
미디어 편성표뿐만 아니라 예전에 은행에 가면 늘 꽂혀 있었던 잡지인 TV 가이드와 같은 미디어 안내서도 필요하다. 채널이 몇 개 되지도 않던 시절에도 있었던 안내서, 지금처럼 채널이 넘쳐나는 세상에서야말로 미디어 안내서가 더 필요하다.
만약 편성표를 만들고 안내서를 발행하고 이게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을 제공하는 매체는 ‘무엇이 뉴스인가’를 결정하는 저널리즘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저널리즘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때마침 <내 그럴줄알았다>에서 새로운 기획을 한다고 하니, ‘미디어 가이드’를 만들기 바란다. 다른 유튜브 채널의 진행자와 제작진들을 찾아가서 인터뷰도 하고 방송에 대한 소개도 하고 그러면 서로 좋지 않겠냐.

1983년 12월 123호 TV가이드(표지인물 박구용 교수 아님)
동질성 회복
문화적 동질성이 매우 강했던 시절에는 생판 모르는 남의 자식이 경찰한테 맞아 죽었을 때 함께 분노할 수 있었고, 독도를 일본과 나눠 쓰겠다는 미친 소리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6시 국기강하식 음악이 나올 때 부부싸움도 중단해야 했던 사람들이, 바로 그 소리에 맞춰 거리에 나와 독재 타도를 외칠 수 있었다. 광주의 시민군이 더 이상 폭도가 아니게 되었으며,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에게 공감했다.
지금처럼 파편화된 사회에서는 남들의 억울한 죽음은 그저 조롱거리고 클릭 장사의 수단에 불과한 지경이 되었다. 우리 사회가 문화적 동질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우리가 같은 운명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식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욱 파편화되어 인간성마저 잃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현재로서는 요일별 미디어 편성표를 만들고, 미디어 가이드를 만드는 쓰잘데기 없는 짓은 거대 미디어 재벌 딴지그룹 정도에서나 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파편화된 우리 사회가 문화적 동질성을 조금이나마 회복하기 위해, 누구든 뭐든 해야 하지 않겠냐.
덧
최근에 일부 사용자들이 자신들이 ‘내부의 적’으로 규정한 방송인, 정치인이 출연하는 방송을 열심히 쫓아다니며 비난하기도 하는데, 그게 다 과몰입해서 생긴 증상이다. 대부분은 실시간 채팅창 같은 거 관심도 없으니 그냥 잠시 쉬거나 책을 읽거나 운동이라도 하면서 정신건강을 되찾기를 바란다.
덧 2
이 글을 쓰는 와중에 주기자 라이브가 리부트로 돌아왔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는지 불현듯 모든 언론 인터뷰를 거절 중인 김형석 관장을, 독립기념관 안에서 1박 2일 동안 밤새서 잡았더라. 고생이 많다. 앞으로 현장에서 더 고생해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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