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베트남 기행은 베트남 피해자가 받지 못한 돈 3,000만 원 때문이었다. 우발적인 사건이 터지며 피해를 받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한국 정부가 보상해 주어야 할 돈이다.

베트남 민간인 원고
참전 군인들과 전두환의 악연
미군은 베트남 전쟁 당시 밀림에 초목을 고사시키는 제초제를 다량 살포했다. 우리가 ‘고엽제’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이 사실은 1970년대부터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던 미군과 호주 뉴질랜드 참전군인들이 1978년 미국 고엽제 제조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고엽제 소송은 미국 의회에서 청문회가 열리고 전 주월 미군 총사령관 웨스트 모어랜드 육군 대장이 증인으로 출석해야 할 만큼 큰 문제가 되었던 다국적 초대형 소송이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이길 수 없는 재판이었다. 왜냐하면 ‘정부조달계약자 항변원칙(Government Contractor Defense)’이라는 대법원 판례에 따라, 정부조달물품 제조사는 제조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적인 보장이 되어 있어도 고엽제 제조사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재판으로 인해, 기업 이미지가 엄청나게 추락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기업에게는 다른 어떤 것보다 무서운 일이었다. 그래서 고엽제 제조사들은 법정화해를 택했다.
1984년 미군과 호주(7,000명 참전) 뉴질랜드(600명 참전) 참전 고엽제 환자들은 2억 4,000만 달러를 피해 보상금으로 받았다. 그러나 8년 5개월 동안 미군 다음으로 많은 346,393명이 참전해서 고엽제 환자가 발생한 대한민국은 단돈 1달러도 받지 못했다. ‘전두환 각하’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에선 철저한 보도 통제가 이뤄졌기 때문에 고엽제 피해자들은 이런 재판이 열리는 사실조차 알 수 없었다. 당연히 소송의 일원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유신시대는 말할 것도 없었고, 5공 전두환 정권은 베트남전으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미국의 심기를 겨우 고엽제 문제 따위로 어지럽히는 불경죄를 저지를 수 없었던 것이다.
고엽제 문제 보도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1984년 J일보에서 고엽제 문제를 보도했다. 그러자 전두환 정권은 그 보도 기자를 해고하고, 다른 언론이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여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인터넷이 없었던 세상이었고, 1989년 해외여행 완전 자유화가 된 후에나 겨우 고엽제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었다.
월남전에서 공로는 없으나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전두환이다. 월남전 당시 9사단장 조천성은 사병들은 마실 물도 마땅치 않은데, 전두환은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등 호화생활을 한다는 이유를 들며 29연대장 전두환을 해임해야 한다고 상부에 보고 했다.
실제로 베트남전 파병 이후 복귀한 연대장급 이상은 모두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전두환의 경우는 직속상관인 9사단장 조천성, 주월사령관 이세호가 모두 전두환에 대한 훈장 수여에 반대한 일화까지 존재한다. 지나치게 과시 행사 및 민간인 상대가 잦았으며, 그 과정에서 작전지휘권을 참모 이하에게 인수인계한 사례가 많다는 것, 전투 수행 능력이 부족했다는 것, 연대장 부임 이후 파티가 너무 잦았다는 것 등 전쟁을 하러 간 건지 놀러 간 건지 모르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직속상관 2명이 모두 반대했지만, 전두환은 결국 훈장을 받게 되었다. 박정희에게 하나회를 키워야 했던 깊은 사정이 있던 탓이었다.
전두환이 베트남에서 복귀했다고 참전군인과 악연이 끝난 건 아니었다.
1975년 남베트남이 멸망하면서 더불어 참전군인의 존재도 잊혀져 갔다. 참전군인 단체를 결성하려는 노력은 1966년경부터 있었으나 소규모의 친목 단체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고, 집단적인 응집력을 가진 조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별다른 힘이 없던 조직이었는데, 1980년 12월 신군부 권력을 잡으면서 재향군인회 산하 38개의 임의단체를 해체했다. 이로 인해, 그나마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월남참전전우회도 해체되었다.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민주화 바람이 불어온 1987년 12월 2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참전군인 350여 명이 모여 ‘따이한 클럽’의 창립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1988년 문화공보부 제415호로 ‘따이한’이 등록됨으로써 베트남 참전군인 단체가 공식적으로 출현했다.
따이한이 나타나면서 대한해외참전전우회(1991년 10월 창립),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1992년부터 활동, 1997년 12월 사단법인화),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2004년 8월 창립) 등 다수의 베트남 참전군인 단체가 만들어졌다.
고엽제 피해 단체가 공법단체가 된 건 베트남전이 끝나고 30년이나 흐른 2007년 12월 21일이었다. 연대장, 대대장으로 월남전을 다녀오고 그걸로 훈장을 탔던 전두환이나 노태우 정권 때는 오히려 인정받지 못하다가 노무현 정권에서야 마침내 공법단체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상한 법
대한민국에는 비정상적인 정권이 제정한 이상한 법이 많다. 그중 ‘이중배상금지’라는 법이 있다. 군인, 군무원, 경찰공무원이 직무 중 죽거나 다쳐도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는 제도이다. 민간인과 일반 공무원은 보상금도 받고 국가에 대해 손해배상도 따로 청구할 수 있으나 정작 죽을 가능성이 더 많은 군인, 군무원과 경찰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의 최대 악법 중에 하나인 이 법이 생겨난 원인은 바로 ‘베트남 전쟁’이다. 참전 이후 사상자가 많이 나와 그에 대한 배상금이 급증하자 박정희 정권은 1967년 배상청구권을 일부 제한하는 입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4년 뒤인 1971년 이런 박정희 정권의 움직임에 대해 위헌 결정이 나왔다. 월남전 당시 순직 상이군인 유가족 및 피해 당사자들이 국가배상법에 의한 참전 피해 보상금이 소액이라며 소송을 했는데, 대법원이 박정희 정권이 통과시킨 법률에 대해 위헌 결정(대판 1971. 6. 22 70 다1010)을 내리며 유가족 및 피해 당사자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당시에는 헌법재판소가 없어서 대법원에서 위헌 심사를 했는데, 정권의 엄청난 압박에도 불구하고 대법관 9:7로 위헌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위헌 의견을 낸 대법관들에게 압력을 가해 퇴진 시켜버렸다. 이후 유신헌법으로 알려진 1972년 제7차 개헌 때, 이 조항을 헌법 29조 2항으로 못 박아 버렸다. 세계 민주주의 헌정 역사에서 유례 없는 사법유린극을 벌인 것이다.
그 이전엔 전사 장병 유가족이나 부상 장병들은 법이 정하는 보상금을 받고, 지휘관의 잘못된 지시 등에 대해 국가에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전사 장병과 유가족, 부상 장병들에게 보상금을 적게 주기 위해 국가배상법을 제정해 직무수행 중 입은 손해에 대해 보상을 받을 경우 국가에 잘못이 있어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고, 대신 개정된 연금법 법정 액수만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당시 군인 월급 36개월 치 정도의 액수였다.
남북한의 군사 충돌인 2002년 2차 연평해전에서 몇 명이 전사한 일을 계기로 보상금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으나, 헌법상 문제로 이중배상금지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였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정부에 들어와서 전사자 유족들에게 국민 성금을 모아 우회적으로 보상했고, 2002년 연금법 개정 법안을 발의하여 2004년 1월에야 겨우 통과시키며 피해 보상 방법을 마련하였다. 참여정부는 군인연금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적과의 교전 과정에서 전사한 군 장병의 유족들이 최고 2억 원의 사망 보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했고, 연금 대상자인 부사관 이상 간부에 대해서는 보상금을 높였다.
두 사람의 사령관

채명신 장군 인터뷰
8년여의 월남 참전 기간 두 사람의 주월남사령부 사령관이 재임했었다. 채명신 장군과 이세호 장군이 그 두 사람이다. 먼저 채명신 장관이 사령관으로 파견되었고, 그 후에 새로 부임한 사령관이 이세호 장군이었다.
나는 이세호 장군이 사령관이었던 시기에 파병이 되었었기에 초대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과는 관계가 없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후반기에 파병되었던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에도 사령관이 이세호가 아닌 채명신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나는 검증 차원에서 이 글을 먼저 월남참전용사 사이트에 올리면서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 같은 사병이야 사령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있을 리가 없지만 장교들 사이에서 이세호 장군의 별명이 ‘돈세호’라는 것이었다. 별명이라는 것이 그냥 붙여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월남전 후반기 한국군 사령관으로서는 적임자(?)인 것도 같다. 그렇게 돈을 사랑하는 분이야말로 철수할 때 월남에서 한 푼이라도 더 챙겨와야 하는 한국군의 사령관으로서는 적임자일 테니깐. 과연 박정희의 용병술에 감탄(?)을 금할 수 없는 부분이다.
채명신 장군은 사령관직에서 물러난 후 박정희로부터 철저히 견제를 당했고, 생을 마칠 때까지 조용히 침묵을 지키면서 살았다. 후임 이세호 장군은 개인적으로 박정희와 친구 사이여서 박정희 치하에서 4년 7개월 최장수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그러나 자신의 부하였던 전두환이 집권하고 나서 재산을 탈탈 털리는 복수를 당하는 등 나락으로 떨어지는 대접을 받았다. 월남전에서 복귀한 뒤, 전두환이 충무무공훈장을 받는 걸 반대했던 것에 대한 복수를 톡톡히 한 것이다.

채명신 장군
이세호 장군의 경우는 본의 아니게(?) 공익제보자가 되기도 했었다. 때는 2012년 04월 18일이었다. 오전 7시 30분에서 오전 9시까지 서초동 전자랜드 12층에서 통일교 교주 문국진(문선명 아들)의 강연이 열렸다. 이세호 장군은 이 자리에 참석하여 축사를 했다.
그리고 축사를 하던 중, 중요 비밀을 하나 누설했다. 월남전 당시 한국군 병사 1인당 봉급을 매월 500달러씩 미국으로부터 받았으나, 병사들에게는 그 돈의 50 달라만(병장 기준) 지급했고, 나머지 450달러는 국고에 귀속시켜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행사 정황으로 볼 때 이세호 장군이 이날 한 발언은 본인이 사전에 계획했던 건 아니었던 듯하다. 당일 행사에 참전 군인들이 많이 참석한 분위기에서 나온, 즉흥적 발언이었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중대한 발언을 하려고 계획했다면, 통일교 집회 같은 음성적인 모임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취재 목적으로 문선명이 직접 등장하는 자리를 비롯해서 통일교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몇 번 참석해 본 적이 있다. 내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통일교 행사란 주로 주류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인사들을 돈을 듬뿍 주고 초청하는 자리이거나 그럴듯한 명분을 걸어놓고 둘러치기 식으로 행사를 치르는 자리가 허다했다. 이세호 장군이 계획적으로 비밀을 누설하기에 적합한 자리가 아니다.
그가 진심으로 국가가 해결해야 할 엄청난 숙제로 생각하고 사실을 밝히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보다 더 공식적인 자리에서 명분을 가지고 했을 것이 틀림없다.

폭로 당시 이세호 장군
내 돈 돌리도!
50년 전에 월남에서 참전군인이 받은 돈이 쌈짓돈이었다면, 박정희에게 떼어 먹혀서 지금 받아야 할 돈은 뭉칫돈이다. 아마도 세계 역사에서 가장 큰 삥땅으로 기록될 이 돈은 추측건데, 현재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에서 착실하게 이자를 늘리고 있을 것이다.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지만 달나라에 몇 번 왔다 갔다 할 정도는 될 것이다.
월남전 참전자가 돈을 받는 문제는 과거사 문제의 하나로 진상조사가 우선이다.
투명성이 보장되는 정상적인 국가 예산에 들어가지 않은 돈을 설령 정부가 주고 싶어도 어디서 무엇을 근거로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여기에 불행한 일이 있다. 대부분의 사안에 대하여 정치인들이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감각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문제는 참전자들이 정치인들의 감각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즉 개인에 의해서 갈취당한 것을 국가가 갈취했다고 보는 것에서부터 방향을 잘못 잡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참전 보상 문제는 범인이 박정희인데, 아직도 박정희를 추앙하고 있으니, 방법이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선 못 받은 돈을 받으려면, 그 돈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없는 돈을 받을 수는 없지 않나. 또 누구에게 달라고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규명해야 할 일이다. 돈 달라는 사람이 번지수를 잘못 찾아 남의 집 문 앞에 가서 돈을 달라고 하면 될 일인가?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국힘당 의원들은 정권에 부담되는 참전자들 문제에 진지한 관심이 있을 리가 없다. 민주당 의원들에게 참전자들의 이미지는 가스통 부대와 다를 바 없다. 때문에 일부 의원들이 나서기는 해도 당력을 기울여 참전자들을 위한 법을 개정할 가능성은 낮다. 민주당을 마냥 탓할 수는 없는 게 민주당 의원들이 느끼는 참전자 이미지가 맞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정동영 의원에게
해당 사안을 설명하는 모습
2019년 5월 정동영 의원이 참전자들을 위한 법안을 발의한 적이 있어서 만났을 때, 놀랍게도 대한민국 국회 개원 이후 70년 동안 국회를 통과한 법률이 1,400개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특히 재정이 소요되는 법안은 관계 부처 간의 협의를 거쳐 예산 소요 판단에 따라서 심의 통과되는데, 현재의 예산과 법리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국회에서 법 제정하는 것에는 우선순위가 있고, 그 우선순위에 따라 여야 간에 합의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참전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는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데다가 예산 소요가 많이 일어날 수 있어서 합의도 쉽지가 않다.
내일 모래면 저세상으로 주민등록을 옮길 노병들이 모이면 “몇 사람이 광화문 광장에 가서 분신자살을 하자!”라는 비분강개 소리가 터져 나오지만, 아무도 지원하는 사람은 없다. 즉 누군가 희생물이 되어주기를 원하지만, 비록 내일 죽을지도 모를 연명치료를 받고 있어도 그럴 사람은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틀딱들이 분신의 고귀한 의미를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인 것이다. 피해자가 정당한 방법으로 호소하지 않으면 응답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동안 수많은 참전자들이 여러 방법으로 애를 써보았지만, 아무런 결과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국가 폭력 피해자로서 보상을 받아낸 노하우가 있는 강제징집피해자 대책위로부터 기술을 이전 받아 역사적인 사명감을 가지고 월남 참전 미지급급여 환수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목표는 설령 참전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 해결이 되지 못하여도 대를 이어 추진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돈을 받을 사람은 돈을 달라고 요구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며

베트남에서 철수할 당시 모습
베트남전에 관한 마지막 글을 돈에 관한 이야기 이런 글로 마치게 될지 몰랐다.
지난 2편 글(링크) 마지막에 했던 스토리를 다시 한번 이야기해야겠다.
나는 8년 6개월간 파월되었던 한국군 34만 명 중 일병으로 갔다가 일병으로 귀국한 유일한 사람이다. 이를 알게 된 것은 파리평화회담의 종전 결정으로 철수해서 육군본부중앙경리단에 월급을 수령하러 갔더니 담당자가,
“뭐? 일병! 일병으로 갔다가 일병으로 돌아오다니 천연기념물이네”
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눈물 없이도 들을 수 있는 사연은 이렇다.
월남에서 사병의 진급은 간혹 처벌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날짜만 차면 저절로 되는 법이다. 더욱이 돈을 미군이 주기 때문에 한 명이라도 더 진급을 시키는 원칙이 불문율이었다. 그래서 월남을 다녀오면 무조건 병장이었다.
일병에서 상병으로 진급할 달에 사단 본부 중대 서무계가 진급을 하면 봉급에서 오른 부분을 부관부 사병계에게 주어야 한다는 정보를 제공(?) 했다. 내가 그렇게 못 하겠다고 했더니 서무계는 "너 그러면 끝까지 진급 못 해."라고 했다. 설마 그럴 수가 있을까 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우리 부대에서만 있는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백마 사단 본부 중대에서 진급하는 첫 달치 월급의 증가분을 떼어먹는 관행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런 현상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것은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돈 때문이다. 월남전은 한국군에게 돈맛을 알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군대에 부패가 있었지만 먹을 것이 없었는데 남의 돈으로 싸우는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먹을 것이 많아졌으니 완전 먹자판이 안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월급이 오르지 않아 손해를 볼지언정 이런 흐름에 따라 흘러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진급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일이지만 부패에 협조하지 않음으로 소극적 저항을 했던 것은 나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현실적으로 주월 한국군에는 실제로 일병이 없어 상병이나 병장뿐이어서 나도 상병 계급장을 달고 다녔고 군종 사병으로서 다른 중대원들과 같이 내무반에서 생활을 하지 않고 다른 막사에서 지냈었기 때문에 실제 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
최근에 떼어 먹힌 돈을 받기 위해 '월남 참전 미지급급여 환수위원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했다.
승소해서 돈을 받으면 그 이상 좋을 수 없겠지만 받지 못하더라도 잘못된 과거를 청산해야 한다는 역사적인 의미에서 소송을 시작한 것이다. 야무진 꿈대로 이번 소송에서 승소해서 돈을 받게 된다면, 천연기념물로서 내가 받는 액수가 가장 적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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