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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기사의 조수

 

"니 돈 버는 일 좀 해볼래?"

 

친구는 자신이 일하고 있던 트럭 기사 보조 아르바이트를 나에게 소개했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매일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하면 월급 70만 원. 최저시급보다 조금 더 쳐주는 괜찮은 제안이었다. 일단 한 푼이 급했던 시기라 친구가 말을 끝내자마자 곧장 제안을 수락했다. 방학 전까지는 금·토요일만 일하다가 방학부터 전일제로 일하게 되었다.

 

아침 7시에 구서동 큰 길가에 대기하고 있으면, 그날 내가 탑승할 2.5톤 트럭이 도착한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강OO입니다. 잘 부탁해요."

 

기사이자 고용주였던 강 씨(편의상 강 씨라 하자)는 서글서글한 인상에 호탕한 성격을 지닌 것 같았다. 부산에서 양산으로 이동하는 길에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군인을 하다 전역하고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아직 일을 시작한 지는 몇 달 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업무 보조 역할이기 때문에 일이 그다지 힘들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성격 좋아 보이는 사람과 일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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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도착한 물류창고엔 상차하기 위한 트럭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이리저리 짐을 옮기는 지게차와 사람들로 부산스러웠다. 트럭 뒤쪽으로 택배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창고 내부에는 천장에 닿을 정도로 많은 물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이야 물류센터 노동강도가 악명 높다 보니 지옥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오지만, 그때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처음 보는 광경에 이런 세상이 있구나 신기하기도 했다.

 

강 씨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의 손에는 주방에서 쓰는 크린랲보다 몇 배는 큰 사이즈의 랩이 들려 있었다.

 

"이거 들고 빠레뜨 위에 쌓인 물건 래핑 좀 해줘요. 우짜는지 내가 한번 보여줄게요."

 

그는 팔레트 아래쪽 무거운 박스 아래로 랩을 끼우더니 팔레트를 빙글빙글 돌며 물건을 싸기 시작했다. 흡사 거미가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을 거미줄로 칭칭 감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자, 해봐요."

 

팔 길이만큼 큰 랩을 넘겨받은 나는 두 번째 팔레트를 재빨리 랩으로 감쌌다. 빠릿빠릿한 모습을 보여줘서 점수를 얻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래야 편하게 일할 수 있다는 건 다른 알바를 하면서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최선을 다했다. 빠르고 깔끔하게 래핑을 끝내자 그가 흡족한 듯 나에게 따봉을 날렸다.

 

"잘하네! 허허, 에이스네!"

 

에이스가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빙글빙글 돈다고 어지러운 와중에도 칭찬을 받으니 기분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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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일의 기본 과정은 이랬다. 아침 7시, 트럭을 타고 부산에서 양산 물류센터로 올라간다. 짐을 싣고 자판기 커피 한잔 마신 뒤 9시 출발. 부산 전역의 백화점, 대형마트, 중형 슈퍼마켓 등에 물건을 배달하고 12시쯤 다시 양산으로 돌아가 밥을 먹는다. 다시 짐을 싣고(2차 배송) 오후 5~6시까지 아침의 과정을 반복한다.

 

주요 배달 품목은 쌀, 음료수, 생수, 참치통조림, 과일 통조림 등 박스 단위의 무거운 품목이 대다수였고, 가끔 정체를 알 수 없는 쇳덩어리도 품목에 있었다. 짐을 실을 때는 가끔 물류센터 직원이 지게차로 팔레트를 떠서 화물칸에 밀어 넣어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핸드자키를 이용하거나 우리 손으로 실어야 했다. 짐을 내릴 때는 일일이 무거운 짐을 들고 매장 안까지 옮기는 소위 '까대기'를 쳐야 했다.

 

4대 보험도 없고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고 시작한 일. 지금 생각해 보면 힘들고 하기 꺼려지는 일이지만, 이십 대 초반의 나는 열정과 의욕이 충만했고, 무엇보다 큰돈을 만질 수 있다는 즐거움에 몸이 상하는 건 생각하지도 않고 신나게 일했다.

 

첫 월급을 받은 날. 당시에 받은 70만 원이라는 돈은 태어나 처음 손에 쥐어 보는 거금이었다. 그것도 내가 일해서 번 큰돈이었기 때문에 의미가 컸다. 이 돈으로 무얼 할지 생각하다가 어린 시절 내내 신어보고 싶었던 메이커 신발을 사기로 했다.

 

부산대학교 앞에 있던 신발 가게들을 몇 바퀴나 돌아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십만 원이 나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정품은 너무 비쌌다. 생애 첫 메이커 신발을 나에게 선물로 사줄 법도 했지만, 돈 없이 커오던 버릇이 몸에 박여 돈을 쓰자니 손이 오그라드는 듯했다. 어쩔 수 없이 길가 리어카에서 팔던 흰색 나이키 짝퉁 운동화를 7만 원에 구매했다.

 

이게 뭐라고 나는 지금까지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친구들을 부러워했을까...?

 

갑자기 서글퍼졌다. 그래도 내가 번 돈으로 어릴 적부터 이루고 싶었던 것을 하나 이뤘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뒤섞여 싱숭생숭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저녁은 천 원짜리 길거리 토스트가 아닌 평소 잘 사 먹지 못했던 롯데리아 햄버거도 사 먹었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바라는 바를 이루어 가면 된다’, ‘점점 좋은 일이 많아질 거야’ 스스로 격려하며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역시 살아가면서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다.

 

한여름의 참치통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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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본격적으로 여름 더위가 시작되었다.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여름은 또 하나의 페널티다. 나는 차가 멈춤과 동시에 화물칸에 올라 아침에 해놓은 래핑을 커터 칼로 자른 뒤, 허리가 아프건 말건 간에 정신없이 박스를 옮겨야 했다. 무거운 짐을 빨리 옮기는 것도 힘들지만 철로 이루어진 화물칸이 이동 내내 뜨거운 여름 태양에 달궈지니 한증막 수준으로 열기가 후끈거렸다. 격렬하게 움직이는 내내 머리와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흘러 눈에 들어가 눈이 쓰라린 와중에도 손은 멈출 수 없었다.

 

참고로, 강 씨와 내가 하는 작업은 속도가 생명이었다. 배달 목적지에 도착하면 나는 재빨리 화물칸으로 들어가서 물품을 차곡차곡 화물칸 입구에 쌓고, 강 씨가 먼저 짐을 매장으로 나른다. 물품을 입구 근처에 다 쌓으면 나도 차에서 내려 박스를 옮기는데, 간단하지만 최대한 빨리 진행하는 것이 중요했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는 주차하기에 쉬웠지만 중·소규모 마트는 길가에 차를 잠시 대고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주차하기가 까다로웠고, 좁은 골목을 지나가는 차라도 오면 작업을 하다 말고 우리 차를 빼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 밥맛도 없어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뻗어서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6시에 기상하면 간단히 씻은 뒤, 곧바로 7시에 오는 트럭에 탑승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처음엔 이십 대의 체력과 패기로 어떻게든 버틸 만했지만, 한여름이 되자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후 시간대가 되면 물건을 옮기는 속도가 느려지고 집중력도 떨어졌다. 마음은 급한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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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동원산업>

 

그날은 유난히 참치통조림 상자가 많던 날이었다. 아침에는 별 어려움 없이 배송을 마쳐서 오늘은 좀 쉬엄쉬엄 넘어가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점심을 먹고 물류센터에 도착했을 때, 래핑 된 참치 상자가 또 한가득 우리 자리에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Jot됐다…

 

통조림 상자 몇 개를 옮기는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제한된 시간에 백여 개를 ‘빨리’ 옮겨야 하는 것은 내 몸을 갈아 넣어야 한다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대형마트의 경우 가끔 자기네들의 지게차로 떠서 꺼내 가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배송 동선 때문에 화물칸 안쪽으로 넣어놓으면 결국은 우리 손으로 다 내려야 하는 것이다.

 

그날 이 네다섯 팔레트 분량의 참치를 시킨 곳은 간판도 없는 어느 한 창고였는데, 조금은 외진 곳에 있어 지나가는 차를 신경 쓸 필요 없이 짐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산비탈에 주차하고 작업을 했기에 몸의 중심을 잡으며 짐을 내리는 것이 힘들었다. 기울어진 바닥에 서서 온종일 달궈져 찜통처럼 후끈거리는 화물칸에서 참치 상자 백여 개를 옮기다 보니 땀은 둘째치고 어지럽기 시작했다. 문득문득 눈앞이 까매지기도 했다.

 

화물칸 입구에 상자를 쌓는 나의 작업 속도가 상자를 창고 안까지 옮기는 강 씨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자 차 밖에서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그가 한마디를 내뱉었다.

 

"머하노? 시발. 빨리빨리 안 하나?"

 

"???"

 

강 씨의 감정 쓰레기통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수월해진다. 나에게 처음 욕을 튼 강 씨는 점점 아무렇지 않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그가 성격이 더러워서 그랬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군인이었던 과거를 생각해 보면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군인들은 처음 신병이 들어오면 처음 2주 동안은 실수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아도 특별히 터치하지 않는다.

 

그도 처음 몇 달간은 나에게 별말 없이 허허 웃기만 했다. 그리고 새롭게(?) 보인 그 성격에서 빠지지 않은 군인물이 드러났다. 그리 성격 급하고 욕 잘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때까지 참았던 건지 지금 돌이켜 보면 한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 생활을 하면 별 쓸데없는 것에도 화를 내고 목숨 거는 일이 많다는 것을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강 씨는 날씨가 더우면 덥다고 욕을 했고, 짐을 내릴 때 필요한 카트를 다른 트럭 기사들이 써서 우리가 쓰지 못할 땐 ‘왜 니가 빨리 가서 먼저 가져오지 않았냐’고 욕했고, 차가 흔들리는 동안 어디론가 굴러가 버린 상자 한두 개를 배송지에 도착해 찾지 못하면 나에게 ‘그것도 신경 쓰지 못했냐’고 욕을 했다. 아, 말이 없으면 말이 없다고 또 욕했다. 내 잘못은 당연히 내 잘못이었고, 자기 잘못도 내 잘못이었다.

 

욕이라고는 아버지에게 “소 새끼!” 정도의 욕만 듣고 살았던 나로서는(어머니에게는 쌍욕도 잘하시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는 소 새끼 정도의 욕이 최대였다) 그의 다채로운 욕의 향연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했다. 무섭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남자였기에 나는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체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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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귀에 피가 날 정도로 욕을 들으며 일하던 어느 날이었다.

 

"새끼야. 동선 생각하면서 짐 넣어 논 거 딱 보면 어디 어디 배송갈지 모르냐. 왜 그리 생각이 없노? 이 새끼야."

 

"네 아빠."

 

내가 갑자기 아빠라고 부르자 그는 운전하다 말고 눈이 뚱그레져 물었다.

 

"으잉? 내가 왜 니 아빠고?"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내 말의 의도를 파악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다혈질은 그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보고 새끼라고 하니까. 내 아빠죠."

 

"캬하하! 미친놈"

 

그는 그저 내가 웃기려고 한 말로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내 의도를 파악하고도 '좆까. 나는 계속 욕할 거야'라는 의미로 웃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강 씨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저 사람이 왜 저럴까?'하고 속을 태우는 것보다 '아 원래 저런 사람이지!'하고 포기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는 것 역시 자라면서 내가 터득한 삶의 지혜였다.

 

강 씨는 나와 계속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트럭 기사들은 조수들이 일을 못 한다고 자르기도 했다. 사회 초년생 아이들이 뭣도 모르고 와서 강도 높은 노동량에 놀라 몇 주 못 버티고 도망가는 경우도 많았다. 애초에 오전 한번 오후 한 번의 물량을 혼자서 쳐 내기도 힘들뿐더러 큰 실수는 하지 않고 적당한 일머리를 가진 내가 몇 달 동안 욕을 먹으면서도 붙어있는 것은 그의 처지에 나쁜 것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목적에 의한 불편한 동행을 이어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