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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언어의 차이로 인해 적절히 번역되지 못하고 적당히 의역된 곳이 있다. 반대로, 오히려 더 재미있게 번역된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든 덕후에겐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공부하는 사람에겐 흥미롭다.

 

돌격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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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왕의 존 프레스를 뚫는 활약을 기대하며 안 선생님이 송태섭에게 붙여준 별명이 돌격대장이다. 원작에서는 시합 중 작전타임에 처음 등장하고,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는 시합 전날 긴장을 풀기 위해 밤 조깅하는 장면에 등장한다.

 

돌격대장의 원어는 切り込み隊長(키리코미 대장)이다. 농구 등 스포츠에서의 切り込み(키리코미)는 우리말로 주로 ‘돌파’로 번역되는 것 같다. 영어로는 penetration을 뜻한다. 뒤에 붙어있는 隊長(대장)에 맞춰 번역을 돌격대장으로 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찰진 어감이 귀에 쏙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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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밑에 작은 컷, 강백호가 바지 올리고 깐족거리는 장면은 무슨 뜻일까? 한국어판은 그대로 ‘돌격대장’으로 나와서 의미를 알기 어려웠다. 원어는 切れ込み(키레코미) 대장으로, 切り込み(키리코미)와 토씨만 다른 비슷한 단어이다.

 

일본어 동사 切り(키리)와 切れ(키레)는 간단히 타동사와 자동사 관계라고 이해하면 쉽다. 切(끊을 절, 자르다/베다)에서 여러 의미가 분화한 다의어로, 의미와 쓰임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맥락에 따라 해석은 크게 달라진다.

 

切り込み(키리코미)의 뜻풀이 중에는, 적진 한가운데를 베듯 파고든다는 의미가 있다(타동사, 능동형). 돌격대장이 여기서 나온 말이다. 切れ込み(키레코미)는 반대로 베이다, 찢어진다는 피동적 의미의 자동사이다. 칼 등 날카로운 것으로 베인 상처나 흔적, 길고 깊게 파인 모양에도 이 말을 쓴다.

 

수영복이나 속옷 디자인에서 다리 옆선이 허리까지 높게 파인 걸 切れ込み(키레코미)라고 한다. 일명 하이레그(ハイレグ)라고 불리는 야한 수영복을 강백호가 까불까불 흉내 낸 것이다. 확인해 보고 싶으신 분들은 구글 이미지에서 切れ込み水着(키레코미 수영복)을 검색하면 금방 이해할 것이다. 다만 후방에 주의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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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장면은 영어판의 번역이 기깔난다. 돌격대장은 Speedster가 되었다. 切り込み(키리코미), 돌격과 같은 뜻은 아니지만, 재빠른 움직임이 특기인 송태섭을 표현하기에 딱이다. 그리고 강백호는 바지를 올려붙이며 Speedos라고 까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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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용 삼각 수영복의 정식 명칭은 swim brief지만 speedo라는 말도 널리 쓰인다. 호주의 수영용품 제조사 스피도의 인기에 보통명사화 되었다. 접착식 메모지와 ‘포스트잇’의 관계와 같다.

 

하라 타이라 씨에게 300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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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가와현 예선 8강. 북산고와 상양고의 경기를 앞두고 구경꾼들이 점수 내기를 한다. ‘상양이 10점 차로 이긴다’는 매우 매정한 현실적인 전망을 내놓은 이정환과 달리, 변덕규는 비장한 표정으로 근본도 없는 숫자를 말한다.

 

원대사 : はらたいらさんに3000点..!!

뜻 : 하라 타이라 씨에게 3000점 (걸겠다)

한국어판 번역 : 어느 쪽이든 무조건 3000점...!!

 

70~80년대 일본 방송사 TBS의 인기 퀴즈프로그램인 퀴즈 더비(Quiz Derby, クイズダービー)에서 탄생한 유행어이다.

 

이 퀴즈쇼는 경마 방식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출연자는 해답자(解答者)와 출장자(出場者)의 두 그룹이다. 해답자는 사회자가 낸 퀴즈를 맞히고, 출장자는 해답자가 퀴즈를 맞히는 것에 베팅하여 점수를 얻는다. 해답자가 경주마, 출장자는 마권을 사는 도박꾼인 셈이다. 문제의 난도와 해답자의 성향에 근거하여, 문제별로 배율도 정해진다. 예를 들어, 어떤 해답자 A가 음악 문제에 유독 높은 정답률을 보였거나 또는 직업이 음악가라면, A는 음악 문제에서 낮은 배율(이를테면 2)을 할당받는다. 반대 성향의 해답자는 높은 배율(이를테면 8)을 할당받는다. 출장자는 본인이 원하는 해답자에게 점수를 베팅한다. 그 해답자가 정답을 맞히면, 본인이 베팅한 점수에 해당 해답자의 배율만큼 곱한 점수를 받는다. 방송이 끝나면 출장자는 누적된 점수에 따라 현금을 받아 갔다. 퀴즈쇼의 재미에 도박의 스릴도 맛볼 수 있어서 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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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 더비의 해답자들. 가운데가 하라 타이라 씨다. 그의 배율이 2로 가장 낮다

 

해답자는 연예인이나 방송인 등 주로 유명인이 출연했다. 시사 만화가인 하라 타이라(原平)는 이 프로그램의 해답자로 15년이나 장수 출연하였다. 정답률은 통산 75% 정도였다고 한다. 정답률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대체로 배율은 낮게 책정되었다. 많은 출장자가 그에게 높은 점수를 걸며 “하라 타이라 씨에게 3천 점”이라고 말했고, 이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상대의 예상에 동의하거나, 신뢰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변덕규가 이 말을 사용한 맥락을 보면 약간 헷갈린다. 직전에 이정환이 10점 차로 상양이 이길 것이라 했는데, 언뜻 변덕규도 이에 동의하는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면에서 백호 군단의 노구식이 “여윽시 변덕규! 이쪽도 벌써부터 불꽃 튀기는걸~ (サスガボス猿!! こっちでも早くも火花がちっているぜ…!!)”라고 말하기 때문에, 변덕규가 이정환과는 다른 예상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변덕규의 행적을 보면, 북산과 시합할 때를 제외하고는 채치수’빠’ 급으로 채치수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특히 산왕전에는 신칸센에 택시까지 타고 가서 큰 힘이 되어준다. <슬램덩크> 전체에서 이 정도로 모범적인 라이벌리를 보여주는 캐릭터는 변덕규가 유일하다. 따라서 변덕규의 이 대사 “하라 타이라 씨에게 3000점”은 채치수에게 3000점, 즉 채치수가 이길 것이라는 신뢰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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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본 네티즌 사이에서는 해외판의 이 대사가 ‘마이클 조던에게 3000점’으로 번역됐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적어도 영어판은 아닌 것 같다. 그대로 하라 타이라라고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두었다. 중국어판, 스페인어판과 아랍어판에 마이클 조던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가자미가 돼라

 

변덕규 얘기가 나온 김에 가자미도 보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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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 최고의 명장면인 ‘무 썰기’ 장면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회자하는 걸 보며 이노우에는 아주 뿌듯할 것 같다. 작중 막판에 나오는 장면이지만, 비교적 일찍부터 구상해 둔 장면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물고기 어(魚)자가 들어가는 변덕규의 본명인 우오즈미 준(魚住純)과 일식 요리사라는 직업부터가, 이 장면을 위한 빌드업이라고 생각된다. 변덕규는 북산고교가 아닌 타학교 캐릭터 중 가장 먼저 작중에 등장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는 이 장면이 다른 내용으로 개변(改變)되어 많은 원작 팬이 아쉬워하였다. 이유는 아무래도 영화만의 완결성을 위해서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변덕규와 채치수는 초반부터 꾸준히 라이벌 서사를 쌓아왔다. 산왕전에서 변덕규가 갑툭 등장했을 때, 이 서사를 천천히 따라온 원작의 독자들은 맥락을 이해하고 감동할 수 있겠지만, 원작을 모르고 영화만 본 관객이라면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영화의 테두리 내에서 채치수와 가장 갈등을 많이 겪은 선배로 바뀐 것이다. 사실, 다중이 밀집한 공공시설에 식칼을 들고 등장하는 것이 사회상규상 용인이 어렵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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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간신히 출연은 한 변덕규

 

어쨌든, 이 장면 덕분에 원래 밥상에서나 좀 불러주던 가자미가 스포츠 밈의 주인공으로 떡상했다. 왜 망둑어나 미꾸라지가 아니고 가자미일까. 가자미의 진화와 생태에 관한 다큐멘터리까지 찾아보았다. 그러나 원서를 읽고 수수께끼는 바로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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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사 : 華麗な技をもつ河田は鯛…お前は鰈だ…

원대사(독음) : 카레이나 와자오 모쯔 카와타와 타이... 오마에와 카레이다...

뜻/한국어판 번역 : 화려한 기술을 가진 신현철은 도미... 넌 가자미다... (진흙투성이가 돼라)

 

뭔가 심오한 의미가 있을 줄 알았던 가자미, 사실은 언어유희였다. 일본어로 화려(華麗)의 독음(발음)이 카레이(かれい)다. 가자미(鰈)도 독음이 카레이(カレイ)이다. 이 장면의 키워드는 도미와 가자미가 아니라 ‘화려’였다.

 

실제로 가자미는 바닷속 맨 밑바닥에서 흙을 헤치며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 크게 억울할 일은 아니다. 아니, 밈의 주인공이 되어 인지도가 올라간 것이 오히려 기쁠지도?

 

3년 네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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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부 첫날, 상견례하는 자리에서부터 강백호는 서태웅을 견제하느라 여념이 없다. 서태웅이 잠자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자 거듭 놀리는데, 이 정도면 뇌절이다. 그런데 잠자는 것 좀 좋아하기로서니, 무식하다고 하는 것은 너무 심한 말이 아닌가?

 

원대사 : この3年寝太郎!

뜻 : 이런 3년네타로 (같은 녀석)!

한국어판 번역 : 무식해! 무식해! 무식한 놈!

 

‘3년 네타로’는 일본의 민속 전래동화(무카시바나시)의 주인공이다. 원래 이름은 타로(太郎)지만, 3년 3개월 동안 잠만 자서 주변으로부터 3년 네타로라고 불린다. 타로에 잠잔다는 뜻의 동사 네루(寝る)의 어간을 붙여서 네타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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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도 하지 않고 오랜 시간 잠만 자다 보니, 이웃들 사이에서는 게으름의 아이콘으로 손가락질을 한몸에 받는 존재였다. 3년 넘게 잠에 빠져있던 어느 날, 마을은 심한 가뭄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런데 갑툭 네타로가 일어나더니 동네 뒷산을 오른다. 산꼭대기에 오른 네타로는, 괴력으로 큰 바위를 굴려서 강줄기를 막아버린다. 방향이 바뀐 물줄기는 동네 논밭으로 흘러들어, 가뭄의 피해를 일거에 해소했다는 스토리이다.

 

동네별로 다양한 버전이 있지만, 핵심은 3년간 잠만 자던 청년이 일어나서 관개(灌漑)를 한 것이다. 농사가 경제의 근간인 시대였으니 민속 수퍼히어로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위엄찬 결말보다는, 잠을 많이 잔다, 게으르다는 게 3년네타로라고 놀릴 때의 뽀인뜨이다.

 

진상을 알고 나니 ‘무식한’ 번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게 이해가 된다. 마치 곰이 쑥과 마늘만 먹고 사람이 됐다는 얘기를 외국인이 이해할 한마디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나마 무식하다는 말을 3회 반복하여 3년네타로의 흔적은 남겼다. 영어판에서는 ‘Loo-zer’라고 번역하였다.

 

능지처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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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백호 때문에 수많은 관중 앞에서 엉덩이를 보인 채치수가 화가나서 소리친다.

 

원대사 : 戦国時代だったらてめーなんか叩っ斬ってやるところだ!!

뜻 : 전국시대였으면  네 녀석은 참수형 감이야!!

한국어판 번역 : 조선시대였다면 네 녀석은 능지처참이야!!

 

번역이 찰떡같이 잘 됐는데, 심지어 번역문이 너무 재미있는 표현이다. 바로 써먹을 수 있겠다. 영어판은 어떻게 번역되었나 봤더니, “If this were the 16th Century, I’d have YOUR HEAD ON A PLATTER!”였다. 이것도 재미있긴 하지만 능지처참을 이기기는 어려울 것 같다.

 

참고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능지처참의 바른 이름은 거열형이라고 한다. 사람을 대짜로 펼쳐놓고, 팔다리를 소나 말에 묶은 후 사방으로 달려 나가게 하여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이 거열형이다.

 

뿅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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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나지 니텐다뿅

 

특이한 말투를 쓰는 산왕의 주장 이명헌. 한국어판으로만 볼 때는 무슨 특이한 말투인가 싶었는데,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개봉 이후에 '뿅'이라는 게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만화책은 번역을 왜 '용'으로 했을까용? 우리말도 기본 어미가 '~다'라 그런지, 뿅을 붙여도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뿅.

 

번역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뿅 이전에는 '베시'였다고 한다. 오나지 니텐다베시? 한창 유행어에 민감한 10대 청소년이니 시기에 따라 특정 말투에 꽂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같은 팀의 동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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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송태섭이 적극적으로 반응해 준다. 스피드라면 넘버원 가드는 바로 나! 송태섭이다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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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뿅키치(ピョン吉)’라는 별명도 지어준다. 한국어판에는 이 별명이 나올 수가 없었다. '뿅'을 살리지 않는 번역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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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는, 송태섭이 지어줬다기보다는 말버릇에 걸맞은 이름을 급한 와중에 주워다 붙인 것에 가깝다. 70년대 인기 만화 <명랑 개구리 뽕키치>(ど根性ガエル)의 노랑 개구리 뿅키치가 그 녀석이다. 말하는 개구리가 주인공의 티셔츠에 갇혀 살며 우당탕하는 에피소드를 다룬 개그만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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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집 <만화가 시작된다>에서 이토 히로미는 ‘뿅스케’라고 착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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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판에서는 ‘몬(Mon)’으로 번역했다몬.

 

요코즈나

 

한나는 스모를 좋아하는지, 스모에 빗대어 설명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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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능남고와의 연습 시합. 수세에 몰린 능남이 천재 윤대협의 한마디에 자신감과 침착성을 되찾는다. 이것을 본 한나는 한 스모선수를 떠올린다. 절대 당황하지 않고 상대를 응시하는 침착한 선수. 국내 독자들이 스모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떤 실력 있는 선수’로 번역됐지만, 원서에는 코니시키(小錦)라는 선수의 이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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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출신의 스모 스타 코니시키는 스모 역사상 두 번째의 거구였다. 187cm의 키에 현역 시절 275kg까지 나갔다. 실력도 엄청나서 우승을 여러 번 했는데, 스모의 최고 타이틀인 요코즈나에는 오르지 못했다.

 

이 선수를 계기로 일본 스모계의 외국인 차별이 널리 알려졌다. 90년대 초반, 실력으로 보나 우승 경력으로 보나, 코니시키가 요코즈나에 오를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수적인 스모협회는 일본 국민 스포츠의 챔피언 자리를 외국인에게 내주려 하지 않았다. 이미 시류가 바뀐 것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듬해인 1993년, 미국 출신의 아케보노 타로(曙太郎)를 시작으로 외국 출신 요코즈나가 다수 등장한다.

 

현재 일본 스모판은 선수의 약 1/3이 외국인(또는 외국 출신)이며,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는 외국 출신 선수도 점점 늘고 있다. 특히 21세기 들어 탄생한 요코즈나는 총 6명 중 5명이 몽골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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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왕전에서도 스모에의 비유가 두 차례 등장한다. 강백호와 신현필의 매치업. 초반에는 강백호가 일방적으로 밀린다. 벤치에서 이를 보던 서태웅이 한마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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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사 : まだあの横綱に力だけで対抗してやがる

뜻 : 아직도 저 요코즈나에게 힘으로만 대항하고 있네

한국어판 번역 : 아직도 저 뚱땡이한테 힘으로만 대항하고 있어.

 

신현필을 요코즈나라고 표현했다. 키 210cm, 체중 130kg에 달하는 거구이니 스모선수라 해도 믿을 체격이긴 하다. 일본의 국민 스포츠 스모의 최고 실력, 최고 권위, 최고 영예의 타이틀인 요코즈나를 뚱땡이로 번역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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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에 이미 등장했던 뚱땡이라는 말의 원어를 따라가 보면, 극초반 안 선생님이 처음으로 등장한 날, 바보 백호는 안 선생님을 뚱뚱이라고 표현한다.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デブ(데부).

 

예전에 일본어 회화 수업을 들을 때, 일본인 강사가 デブ라는 말의 어감에 대해 알려준 적이 있다. 그냥 비속어가 아니고 대단히 심한 욕이니 절대 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나라 못지않게 비만에 대한 편견이 많고, 멸시 또는 조롱하는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다(강백호가 얼마나 무례한지도 알 수 있다).

 

번역이라는 게 1:1로 딱 맞아떨어지듯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걸 다시 일본어로 번역(Reverse Translation)하면 요코즈나 → 뚱땡이 → デブ가 될 것이다. 요코즈나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국내 상황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테다. 그래도 이노우에가 이 사실을 알면 한 사람의 일본인으로서 슬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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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백호가 분전하기 시작한다. 한나는 거구 신현필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강백호를 보고 감탄하며 한 스모선수를 떠올린다.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자의 S로고가 SUMO로 바뀌었다. 여기도 역시 실제 스모선수 이름을 써봤자 국내 독자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적절히 의역되었다.

 

원대사 : 彩子はその時先代貴ノ花の土俵際の粘りを思い出したという…

뜻 : 한나는 그때, 스모판의 가장자리에서 절대 밖으로 밀리지 않는 선대 타카노하나의 끈기를 떠올렸다...

한국어판 번역 : 한나는 문득 생각했다. 상대보다 체격이 작지만 절대 밀리지 않는 스모 선수를...

 

타카노하나는 스모 명문가다. 아버지인 타카노하나 토시아키(貴ノ花利彰)는 요코즈나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한 단계 아래인 오제키(大関)까지 올랐다. 그의 장남과 차남은 각각 제66대와 제65대 요코즈나가 되었다. 아버지를 선대 타카노하나라고 일컫는다.

 

스모는 밀어내거나 버티는 힘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씨름과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씨름은 샅바를 당겨 중심을 무너뜨리는 힘이 중요하다. 이런 이유로 현대의 스모는 점점 체중과 덩치 경쟁이 되어가는 추세다. 물론 스모도 격투기이니 여러 기술이 있지만, 아무래도 덩치가 크면 밀거나 버티기에서 유리하다. 최대 중량 제한과 체급 구분이 없다는 특성의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와중에 상대보다 체격이 작은 선수가 스모판의 경계에서 밀리지 않고 버틴다면, 그러다 종국에는 이긴다면, 매우 재미있고 인상적인 경기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강백호가 그런 활약을 해주고 있다. 이노우에는 특정 경기의 특정 장면을 염두에 두고 이 컷을 그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덩크와 오함마

 

“백호 너, 덩크라는 거 알아?” 소연이는 농알못 백호에게 덩크가 무엇인지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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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크라는 말을 처음 들어 본 강백호는 알고 있는 단어를 총동원한다. 탱크는 이해가 되지만 망치는 왜 등장했을까?

 

덩크(Dunk)를 일본 문자인 카타가나로 표기하면 ダンク(당쿠)다. 탱크(タンク)는 당쿠와 철자도 발음도 비슷하다. 망치는 일본어로 槌(つち, 츠치)인데, 외래어인 함마(ハンマー)도 흔히 쓴다. 어느 쪽도 덩크와 비슷하지 않다. 원서로 보니 망치가 아니라 목수였다. 목수 또는 목조 건축 기술자를 大工이라고 하며, ダイク(다이쿠)라고 읽는다. ダンク(덩크), タンク(탱크), ダイク(다이쿠) ..비슷한가?

 

남룡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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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전전에서 에이스 킬러 남훈에게 호되게 당하는 서태웅. 왼쪽 눈을 거의 뜰 수 없는 상태가 됐지만, 개의치 않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과 양 눈을 모두 감은 자유투 등 혼신의 플레이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이런 서태웅의 투지는 가해자 남훈에게는 심한 스트레스가 되어 그는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 전국적으로 소문난 악당에다 감독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무서운 선수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 그도 18세에 불과한 소년이었다. 이후의 행적도 참으로 놀라운데, 일부러 찾아와서 사과도 하고 정우성의 존재도 알려준다. 작중 가장 입체적인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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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사 : うち薬局やねん 南龍生堂

뜻 : 울집 약국 한다아이가 남룡↗생↗당↘

한국어판 번역 : 우리집, 약국 하거든. 꽤 유명해~!

 

남훈은 서태웅에게 약(연고)을 주며, 부모님이 하는 약국의 상호 南龍生堂(남룡생당, 미나미-류세이도)을 말한다. 어차피 한국 독자들은 말해도 모르기 때문에, “꽤 유명해” 정도로 적절히 의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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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龍生堂(류세이도, 용생당)라는 약국이 존재한다. 1933년 창업하여 현재는 일본 전국에 28개의 점포를 가지고 있는 ‘꽤 유명한’ 약국 체인이다. 이 상호에 남훈의 성인 南을 앞에 슬쩍 붙여 넣었다.

 

풍전고교는 오사카 대표로 인터하이에 출장했다는 설정이다. 따라서 남훈의 집도 오사카시 또는 그 주변 지역일 것이다.

 

오사카 시내에는 도쇼마치(道修町)라는 지역이 있다. 이곳은 일명 약의 마을로 일본 약제업의 총본산과도 같은 곳이다. 에도시대(17~19세기)에 청나라와 네덜란드 등으로부터 수입되는 약재는 모두 오사카항을 거쳐야만 했기에, 전국의 약재상이 오사카로 모여들었다. 오사카는 옛날부터 무역항으로 번성했지만, 특히 약제업은 오사카에 뿌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일본 최초의 약학대학도 오사카에서 시작되었고, 이름난 제약회사들도 본사를 오사카 도쇼마치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오사카에서 꽤 유명한 약국집 아들이 준 연고에 대한 신뢰도가 팍 올라가지 않는가?

 

현재는 도쇼마치에서 시작한 제약회사들이 대부분 대기업에 인수되었거나 또는 제약업을 넘어 종합 약품(화공) 회사로 사업을 확장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도쇼마치도 소매약국이 늘어선 상점가의 모습이 아니라, 으리으리한 고층 건물이 즐비한 여느 도심 오피스 지역의 모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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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 거리에서 류세이도 약국의 광고판을 쉽게 볼 수 있다

 

남훈의 부모님께서 하시는 龍生堂(류세이도) 약국은 사실 오사카에서 창업한 약국은 아니고, 도쿄 한복판 요도바시(현재의 신주쿠구)에서 창업되었다. 현재도 대부분의 점포가 도쿄도내에 있고, 오사카 등 칸사이 지역에는 한 개도 없다. 이노우에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사카의 약국집 도련님 캐릭터를 창조하며 교묘히 도쿄의 유명약국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은, 이노우에 나름의 위트라고 생각된다. 재미있었다. 자연스러웠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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