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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튜브 알고리즘에서 뜬 ‘What's inside of the Gateway arch?(게이트웨이 아치 내부에는 무엇이 있나요?)’라는 제목의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영상의 내용은 미국의 미주리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게이트웨이 아치에 승객을 전망대까지 옮겨주는 트램이 있다는 그냥 그런 얘기다. 영상의 3D 그래픽과 한국어 설명이 깔끔했는데, 썸네일과 제목을 보았을 때 당연히 영어 영상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유창한 한국어로 나오는 것이 이상해서 아래쪽에서 더보기를 눌러 확인한 결과, 이 영상은 AI를 이용해 14개국의 언어로 더빙을 한 것이었다. 그것도 원본 언어인 영어와 같은 목소리로.

 

AI가 음성을 인식해서 다른 언어로 입 모양까지 맞춰 더빙하는 기술이 나온 지는 벌써 1년이 넘었지만, 이것을 생활 속에서 직접 체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 것은 어릴 적 외국영화에서 봤던 예쁜 여배우와 한국말로 대화하며 즐겁게 노니는 꿈속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는데, 현실에서 경험하다니. 마치 FTA로 관세가 낮아진 미국산 체리를 식탁에서 마주한 느낌이었다.

 

미디어 장벽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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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지난 알릴레오 북스 시즌5 28~29회(유시민과 김어준이 분석한 뉴스의 미래 [뉴스를 묻다])에서 얘기했듯이, 기술의 발달로 인해 언론의 영향력은 기존의 재래언론사에서 저널리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뉴미디어로 이동하는 중이다.

 

알릴레오 북스에서는 기술 발전에 따른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김어준 총수가 어떤 방식으로 그것들을 활용하며 언론 생태계를 주도했는지, 또 더 이상 저널리스트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시시한 재래 언론사의 행태를 중심으로 다루었다. 하지만, 사실 기술의 변화는 정치와 시사를 다루는 언론 분야를 넘어서 미디어 시장 전체를 이미 크게 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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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에서도 잠시 언급한 것처럼 재래식 지상파에서 코미디를 하기 어려워지니 코미디언들이 유튜브나 쿠팡으로 옮겨갔고 문화, 예술, 역사, 국제, 교양, 오락 프로그램도 대부분 유튜브로 이동했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 최근에 올림픽을 제외하면 지상파를 본 기억이 없다.

 

재래식 미디어가 기술의 발전이나 변화된 미디어 환경을 이해하든 말든 상관없이, 유튜브를 중심으로 이미 거대한 미디어 플랫폼 산업 생태계는 형성되었다. 유튜브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유튜버뿐만 아니라 그들과 콘텐츠를 제작하고 마케팅이나 광고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도 많아졌다. 이러한 산업이 형성되면서 그동안 거대 미디어 기업이 누리던 기득권은 많이 줄었으며, 다양한 소규모 채널들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렇게 재래식 방송에서 운영되던 거의 모든 프로그램이 이미 새로운 매체인 유튜브로 이동했고, 다양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지상파에서 시청률이 낮았을 것이 분명한 교양 프로그램들이 그 이전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달하고 있다. 물론, 정보의 질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어쨌거나 이러한 현상은 기성 언론 시스템에서 기득권을 누렸던 사람들을 제외한 시민사회 전체에는 분명 좋은 일이다.

 

무너진 언어 장벽

 

일반적인 상품이나 서비스를 거래하는 시장은 자국민의 소비를 중심으로 하는 국내시장이 있고 국가 간의 교역을 중심으로 하는 해외시장이 있는데, 국가 간 거래인 무역에서는 관세나 수량제한 등 다양한 규제 장치를 통해 국내시장을 유지하고 국내 기업을 육성하여 해외시장에 진출하도록 지원하기도 한다. 이러한 규제 장치는 그동안 많은 국제 무역 기구가 무역장벽으로 규정하고 WTO 협정이나 FTA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없애고자 해왔다.

 

미디어 시장도 마찬가지여서 국내 미디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직접 배급 금지 조치를 하고 스크린쿼터를 시행하거나, 또는 특정 국가의 미디어를 정치적 차원에서 허용하지 않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의 65년 국교 정상화 이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98년까지 일본 대중문화의 수입과 유통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 그 예이다. 그런 특별한 규제 장치에 더해 미디어 시장은 지역의 관습과 문화, 그리고 언어라는 특수성 때문에 미디어를 수입, 수출하기에는 애초부터 일정한 한계가 있는 시장이었다.

 

유튜브 플랫폼은 그 시작부터 특정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자유로운 접근이 가능했기 때문에, 유튜브 서비스를 하는 나라에서는 유튜브가 정책적으로 규제하는 영상을 제외하면, 유튜브 시장에서 유통을 저해하는 거의 유일한 한계는 언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처럼 고유한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는 다른 나라의 언어로 제작된 영상이 진입하기 어렵고 반대로 우리말로 제작된 것이 외국으로 나가기도 어려웠다.

 

유튜브에는 우리말로 제작된 수준 높은 영상이 꽤 많지만, 영어로 제작된 그저 그런 영상의 조회수가 압도적인 걸 보면 유튜브 환경은 한국어 사용자에게 불리한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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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구독자가 3억 6천만 명이 넘는 예능 유튜버는 45만 6천 달러를 걸고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모티브로 실제 게임을 한 예능 영상 하나로 조회수 6억 5천만 회를 기록하고 있다. 지구인 80억 명 중 약 5%가 구독하는 채널이고, 지구인 중의 최대 8% 정도가 저 영상을 봤다는 말이다. 예능이야 그냥 그렇다 치고, 거의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영상의 경우에도 여러 화면을 짜깁기 한 영어 영상은 3D 그래픽으로 직접 공들여 만든 한국어 영상보다 조회수 면에서 약 50배 정도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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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환경은 유튜브가 그렇게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영어가 세계 공용어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처럼 소수 언어를 쓰는 모든 나라에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조건이다. 일종의 핸디캡처럼.

 

그런데, 바로 이 언어장벽이라는 어쩔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조건이 AI 기술 발달과 함께 무너졌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미디어 시장 전체에서 체결된 거대한 FTA처럼 느껴졌다.

 

미디어 시장 FTA

 

한미 FTA 협상이 진행되던 때, 장밋빛 미래와 암울한 미래에 대한 각계각층의 우려가 있었고 한참 시끄러웠다. 10년 정도가 지난 지금 한미 FTA를 평가하면 양국 간 교역이 2배로 증가하고 수출과 투자도 늘어 숫자로 나타난 성적 자체로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물론, 이런 얘기할 때는 ‘피해를 본 산업과 계층에 대한 대책과 심화한 양극화 문제에 대한 사회적 비용은 앞으로도 계속 있어야 할 것’이라는, 당연한 얘기도 같이 해야 한다).

 

AI를 통한 더빙 이전에도 구글 번역에 의한 자막은 있었지만, 봉준호 감독의 얘기처럼 ‘1인치의 장벽’인 자막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장벽이다. 게다가, 자막을 정성스럽게 만들지 않으면 자막이 엉망이고, 특히 한국어 자막은 더 엉망이다. 그런데, AI 더빙은 목소리의 톤까지 비슷하게 입혀진다. 이 기술로 인해 기존 방송사에서 번역가와 성우를 불러 오랫동안 큰 비용이 들어가야 하는 더빙 작업이, 10개 넘는 언어를 번역에서 더빙까지 짧은 시간에 적은 비용으로 할 수 있는 작업이 된 것이다.

 

더 나아가, 이것은 단순히 비용을 줄이는 차원이 아니라, 자막이라는 낮은 장벽마저도 없애는 효과를 가져와서 조만간 유튜브 시장 전체를 국내외 구분이 무의미한 시장으로 만들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마치 FTA로 인해 무역장벽이 없어진 시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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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A 때와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한국어 사용 유튜버들이 앞으로는 훌륭한 컨텐츠를 만들기만 한다면, 다양한 언어로 더빙해서 전 세계에서 구독자를 확보하고 조회수를 늘려 시장을 더 넓힐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금 유튜브에 넘쳐나는 맨날 중국은 망한다는 썸네일 또는 국뽕 썸네일을 달고 기계음으로 더빙한 허접한 영상이나, 남의 나라에 대해 아무 말이나 하는 엉터리 전문가나, 그동안 남의 영상 가져다 짜깁기한 저질 컨텐츠가 줄어들어 전체적인 미디어 시장이 좋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1998년에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기 전까지 일본 음악이나 예능프로를 한국 가수들이나 방송사들이 많이 베껴 쓰다가 개방 이후 줄어든 것과 유사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다.

 

부정적인 측면은 이렇다. 한국어 유튜버들은 앞으로 전 세계의 엄청난 구독자를 이미 확보한 대형 유튜버와 같은 시장에서 경쟁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 놓이게 될 수도 있다. 영어권의 대형 유튜버와 경쟁하다 보면 더 자극적인 썸네일이나 무리수를 두다가 엉망진창이 될 지도 모르겠다.

 

좋은 컨텐츠를 더 열심히 만들면 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겠지만, 인류 역사상 시장은 좋은 것만 살아남는 곳이 아닌 경우가 꽤 많았다. 알릴레오 북스 프로그램과 카메라 앞에서 뭘 자꾸 처먹는 먹방 조회수를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미 유튜브에서 압도적인 구독자를 확보한 영어권 유튜버들은 지금처럼 그들이 이미 확보한 자원을 기반을 이용해 전 세계 사용자에게 익숙한 포맷으로 그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에 대한 고품질 영상을 계속 만들 거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미 유튜브 알고리즘을 잘 알고 있고 기존에 확보한 많은 구독자로 인해 더 많이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과 경쟁하는 한국어 유튜버들은 그들이 얼마나 오래 해왔던지 상관없이 시장에 새로 들어온 신입 취급을 받게 될 거다. 그렇게 수백만 명의 구독자를 확보한 영어권 유튜버가 만든 고품질의 한국어 더빙 영상이 더 많이 노출되다 보면, 언젠가는 오히려 양질의 한국어 유튜버가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렇게 세계적으로 소수 언어 유튜버가 거의 사라지고 대형 유튜버만 살아남게 된다면, 전 지구적으로 똑같은 문화를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 극단적인 상상도 해보게 된다.

 

콘텐츠 산업의 미래

 

알릴레오 북스에서 얘기했듯이, 저널리스트 김어준은 <딴지일보>, <나는꼼수다>,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까지 뉴미디어의 맨 앞에서 달려온 사람이다. 특히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은 겸손멤버십으로 운영되는 공영언론으로서 역할을 하는 전 세계 뉴미디어의 역사 맨 앞에 있는 방송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구독자는 165만 명 정도로 국내 기준으로는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고작 KBS 뉴스 같은 것도 구독자 305만 명인 마당에, 뉴미디어 역사를 만들어가는 방송이라는 역할과 사회적 가치에 비해 165만 명은 적은 것 같다. 마찬가지로 노무현재단에서 제작하는 알릴레오 북스도 그 수준에 비해 구독자 150만 명은 너무 적고 영상의 조회수도 너무 적다.

 

나는 요즘처럼 한국에 관심있는 외국인이 많은 상황에서 뉴스공장이 여러 언어로 더빙되어 더 많은 지구인에게 도달한다면, 다른 나라에서도 뉴스공장과 유사한 포맷으로 자신들의 방송을 만들고, 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더 상식적인 나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제 메시지를 더 멀리 보낼 수 있는 좋은 도구가 생긴 것 같다.

 

그런데, 지난 9월 23일 방송에서 로버트 갈루치 교수와 인터뷰를 내보내는 방식은 과거의 방식이었고, 그래서인지 그 특유의 어수선함이 있었다. 물론, 매우 중요한 정치외교적 인터뷰였기 때문에 언어의 뉘앙스를 명확히 전달하는 게 중요했고 그래서 전문 통역사의 감수는 당연히 필수적이지만, 동시통역도 아닌데 굳이 여성 동시통역사의 목소리로 나오는 건 좀 어색했다. 게다가 사전 녹화였으니 AI를 활용해 갈루치 교수의 목소리로 한국어 더빙을 했다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아래 링크에서 유시민 작가의 발언을 AI를 활용해 영어 더빙한 것을 한번 들어보자.

 

 

무료버전의 한계가 있어서 아직 어색하긴 해도, 이렇게 하는 것이 여성 동시통역사의 목소리보다는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AI 기술이 더 발달하면, 언젠가는 라이브 방송이 모든 언어로 동시통역과 더빙까지 되어 송출되는 날도 올 거라고 믿는다. 그때는 뉴스공장에서 한국어로 하는 라이브 방송이 다른 나라에서 그 나라 언어로 동시 통역되어 거의 동시에 시청자에게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릴레오 북스의 수준 높은 담론도 전 세계 언어로 더빙되어 도달할 것이고, 반대로 다른 나라의 수준 높은 이야기도 우리에게 더 많이 도달할 것이다. 그것도 그들의 목소리로.

 

FTA와 마찬가지로, AI에 의한 언어장벽의 해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기술 발전으로 변화하는 세상의 맨 앞을 달리는 뉴스공장이나 알릴레오 북스에서 만드는 훌륭한 콘텐츠가, AI로 인해 언어장벽마저 없어진 세상에서 더 멀리까지 도달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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