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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에 대한 경례' 안 한 김태효, 파면 결의안에 _국기 못 봐 착오_ (2024.09.26_뉴스데스크_MBC) 0-52 screenshot.png

출처 - (링크)

 

윤석열이 대통령이 된 2022년에 시작했던 세종대왕과 훈민정음에 관한 글은 총 5편의 연재 글(관련 기사: 576돌 된 한글과 그 루머(링크))로 마감했다. 기회가 되면 모방설과 공동창제설에 관련해 못다 한 이야기를 한 두 편 정도 부록처럼 쓸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2023년은 개인적 사유로 글을 싣지 못했고 올해도 이런저런 이유로 포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친일 토착 왜구 무리인 뉴라이트가 대한민국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바람에 글을 실어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다.

 

뉴라이트와 세종대왕이 무슨 상관일까 싶겠지만, 친일토왝 뉴라이트의 대표주자 이영훈이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 바로 세종대왕이다. 그는 세종 대에 노비가 늘었고, 기생제를 확대했으며, 사대주의가 강화되었다고 주장하며 세종대왕을 지금에 와서도 성군으로 추앙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비판한다. 그가 세종대왕까지 깎아내리는 이유는 조선과 조선인이 스스로 근대성을 획득할 수 없는 구제 불능한 존재로 만들어야 근대화되었다고 믿는 일제와 대비되며 자신의 식민지 근대화론이 조금이라도 그럴싸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모방-공동 창제론도 이 연장선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훈민정음 모방-공동 창제론의 기본 구조는 세종대왕의 능력을 폄하하고 훈민정음을 유목 민족이 가졌던 여러 표음 문자의 아류 정도로 치부하려는 생각이 근저에 깔렸다. 식민사관이나 식민지 근대화론은 전근대적 조선과 강렬하게 대비되는 근대적 일제라는 비교 대상이 있다. 훈민정음 모방-공동 창제설에도 세종대왕을 폄하하며 비교하는 대상으로 세종대왕보다 정보 수집력과 학습 능력이 월등히 뛰어난 불교를 상정한다.

 

현재까지 발견된 모든 역사적 증거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혼자 만드셨다는 사실만 증언한다. 하지만 모방-공동 창제설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훈민정음이라는 전대미문의 문화적 성취는 불교 지성의 협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일관된 해석이 어려운 사료들을 마치 증거 자료인 것처럼 이것저것 제시하며 모방-공동 창제론을 주장하지만,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역사적 증거는 단 한 줄도 없다. 이들이 애용하는 논증 방식은 일제가 없었으면 대한민국의 근대화는 거의 불가능했다고 말하는 식민사관이나 식민지 근대화론의 논증 방식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훈민정음에 드리운 일제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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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우리가 서양 학문의 학제와 연구 방법론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일제 강점기였다. 거의 망한 의대 문제도, 항상 터지는 사립학교 재단 비리 문제도, 검찰 조직의 정치 세력화도 일제 강점기에 그 뿌리가 있다. 훈민정음이 서양 학제의 방법론으로 연구되고 모방설과 공동 창제설이 만들어져 유포되기 시작한 것도 일제 강점기였다.

 

식민사관은 ‘사관’이라는 명칭이 주는 선입견 때문에 역사학에서나 쓰이는 협소한 개념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관은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 구축한 자기 정체성의 다른 표현이다. 우린 ‘사관’을 통해 지나간 역사뿐 아니라 나와 연결된 대상과 사건, 세상 만물을 바라본다. 사관으로 과거를 해석하고 현재에 대응하며 미래를 예측한다.

 

식민사관은 주체적이고 우월적 존재인 일본인 아래 피동적이고 열등한 아시아의 모든 타 인종을 두는 위계를 전제하고 있다.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의 계급적 위계에는 계급 간 간극(차이)이 있고 그 간극은 자기 힘만으로는 결코 뛰어넘을 수 없다고 가정한다. 간극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표면화되며 실제적 힘을 갖고 작동하는데 우리는 이를 ‘차별’이라 부른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를 비인간적이고 가혹한 차별의 시대로 인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제는 일제 강점기 내내 이런 식민사관을 조선인의 의식에 내면화시키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일본인(일본 문화)과 조선인(조선 문화)의 차이를 부각하고 차이의 서열을 정하며 서열에 따른 차별이 당연한 것처럼 교육했고 사회제도를 운영했다. 서구 식민지 역사와 비교하면 36년 일제 강점기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그럼에도 조선인의 심상에 일본, 일본인에 대한 상대적 열등감을 각인하려는 시도는 일부 세대와 계층에서 꽤 성공적으로 작용했다. 해방 후가 더 문제였다. 식민사관을 적극 수용하며 친일 부역자가 된 이들을 일소하지 못하고 미군정-이승만-박정희 정권 내내 이들이 사회 모든 분야의 권력 핵심을 차지하도록 방치했다. 식민사관을 대한민국 사회와 시민의 자연스러운 기본값이 되게 더욱 은밀하게 내면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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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화<나랏말싸미>

 

훈민정음을 둘러싼 모방설과 공동 창제설도 이 같은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훈민정음이 문창살을 모방했다는 식의 헛웃음이 터져 나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은 사라졌지만, 고대 문자를 베꼈고 결정적인 조력자가 있었다는 주장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고대 음운학, 문자학, 주역을 섭렵한 세종대왕은 그 이전까지 누구도 갖지 못했던 언어와 문자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갖고 훈민정음을 창제하셨다.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훈민정음의 음성학은 19세기 비로소 시작된 서구 음성학에 비하면 자그마치 500년이나 앞선, 현대적 관점에서도 여전히 최첨단에 있는 음성학이고 문자다.

 

용비어천가의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뮐 새”와 같은 구절에서 깊고 단아한 한국어의 시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막강한 표현력을 가진 훈민정음이라는 문자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물리학 분야에 아인슈타인이 있다면 음성학이나 문자학 분야에는 세종대왕이 있다. 음성학이나 문자학에서 세종대왕이 갖는 지위는 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이 가진 위치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처럼 훈민정음은 문자학과 음성학에서 빈틈없이 그 자체로 완전한 체계이고 그 어떤 문자보다 탁월한 효용을 증명한 유일한 문자다.

 

아인슈타인은 안 까도 세종대왕은 깐다고?

 

물리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의 독창성과 보편성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이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우주를 기술하는 상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세종대왕과 훈민정음도 아인슈타인과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하지만 우리 학계의 자세는 좀 다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흠집을 내려는 이들이 다수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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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70호 훈민정음해례본

출처-<KBS 한국의유산>

 

이들은 훈민정음해례본이 나와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만든 사람을 증언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가진 승려나 가족의 도움이 없었다면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증언을 전혀 찾을 수 없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1 이들은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학술 논문을 꾸준히 출판하지만 인용하는 대부분 사료가 훈민정음 창제와는 상관없는 사료들이다.

 

왜 자기 비하에 가까운 모방-공동 창제설을 가열차게 주장할까 처음에는 매우 의아했다. 한때 학자적 양심이나 종교적 편향과 같은 개인 차원의 문제인가 싶었다. 하지만 최근 친일 토착 왜구들이 수면 위로 부유하여 날뛰는 세상을 만나니 모방-공동 창제설도 식민사관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그렇다고 모방-공동 창제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친일 토착 왜구 뉴라이트처럼 식민사관을 의식적으로 수용하고 내면화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극적인 식민사관 수용자는 아니더라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식민사관으로 얼룩진 대한민국 학계의 어두운 그림자, 자기 비하의 그림자에 갇혀 있다는 의심은 든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돌이켜 보면 필자도 그랬던 때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그림자를 걷어내려는 의식적 노력이다.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식민사관에 개인적 종교 발심까지 덧씌워지면 식민사관의 영향을 감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경계가 희미한 식민사관의 그림자를 감지하고 걷어내는 것이 어렵지만 잊거나 걷어내려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된다. 나쁜 일의 반복은 신의 저주가 아니라 내 망각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자, 이번 연재에선 신미와 파스파가 등장하는 최신 모방-공동 창제설을 디벼보자.

 

<계속>

 


 

 

주.

1. 공동 창제설을 주장하는 이들 중에는 세종대왕의 딸인 정의공주가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의공주 시집인 죽산 안씨 대동보에 남아있는 정의공주가 변음과 토착 문제를 해결해서 세종대왕으로부터 많은 노비와 함께 큰 상을 받았다는 기록을 근거로 삼는다. 변음과 토착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가장 합리적인 추론은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난 후, 당시 조선말 발음 변화(변음)과 한자음 표기(토착) 문제를 훈민정음을 이용하여 해결하고 ‘동국정운’과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에 기여를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기록을 제외하면 정의공주의 공동 창제설을 지지할만한 기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