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쓰지 않는 원나라 시대 파스파 문자까지 알아야 하나 싶긴 하다. 상식적으로 그런 문자가 있었다는 정도만 알아도 훌륭한 일인데 누군가 파스파 문자로 세종대왕과 훈민정음의 위상을 훼손하려 하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힘들고 벅차지만 불굴의 깨시민 정신으로 먼지를 뒤집어써 가며 고서와 암호문 같은 학술 논문을 뒤져 볼 필요가 있다.
파스파 문자에 해박했던 신미라는 승려 덕분에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대표적 모방-공동 창제론자 정광 교수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는지, 파스파 문자가 정말 훈민정음 창제에 영향을 미칠만한 문자인지 확인하려면 별수 없다. 정광 교수를 비판하는 전문가 중에 신미에 대해서도, 파스파 문자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해 주는 이가 별로 없으니 말이다. 인공지능보다 인류에게 더 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최첨단 문자, 훈민정음을 쓰며 이 정도 자세는 갖고 있어야 한다. 그게 또 훈민정음을 만들어 주신 세종대왕에 대한 최소한의 감사 표시이고 예의라 생각한다.
파스파 문자를 전공한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도 한 줌이 되지 않는다. 창제자가 분명한 문자 체계라 문자학을 하는 이들에게 연구할 가치가 충분한 소중한 유산이지만 이미 사멸한 문자라 전문가가 아니라면 굳이 주목할 만한 문자는 아니다. 연구자가 적으니 생산되는 학술 논문이나 정보의 양도 매우 적다. 당연히 평소에 일반 대중이 파스파 문자와 접할 일은 거의 없다. 이 점을 고려해서 가급적 쉽게 써보겠다.
파스파는 사람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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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사료로는 승려 신미에게 훈민정음의 공동 창제자 반열을 마련하기가 어렵자, 정광 교수를 위시한 모방-공동창제론자들은 주요한 간접 증거(혹은 정황 증거)로 13세기 원나라에서 만든 파스파 문자를 골랐다. 파스파는 글자를 만든 승려의 이름이다. 사람 이름을 문자 이름에 그대로 붙였다. 이런 이유는 파스파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사용했던 또 다른 몽골 글자가 있기 때문이다.
정광 교수가 굳이 파스파 문자를 모방-공동 창제설의 결정적 증거로 택한 것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훈민정음이 파스파 문자를 모방했다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전해오기 때문이다. 성호사설을 쓴 이익도 이런 주장을 했다. 이익이 훈민정음과 파스파 문자를 연구한 뒤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니고 떠도는 소문을 수집해서 받아 적은 것이다.
소문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했던 훈민정음의 파스파 문자 모방설은 20세기 들어 미국, 중국, 일본의 파스파 문자 연구자들 사이에서 학문적 꼴을 갖추며 논의되기 시작했다. 말이 학문적 논의지 당시 생산된 파스파 문자와 훈민정음의 관계를 다룬 논문들은 조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학자들이 파스파 문자도 훈민정음도 제대로 몰랐다. 훈민정음의 ‘ㄷ’이나 ‘ㅈ’과 비슷한 글자가 파스파 문자에도 있으니, 훈민정음이 파스파 문자를 모방했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이런 식이면 훈민정음이 '영문자'를 베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영문자'의 ‘o’와 훈민정음의 ‘ㅇ’가 똑같기 때문이다.
가설이나 논지가 아무리 수준 낮고 천박해도 학문의 장에 한 번 들어오면 잘 사라지지 않는다. 운 좋게(또는 의도적으로) 대중매체의 관심을 받아 기사로 유통되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그럴듯한 이론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학자의 이름값이 높고 종교계처럼 자기 보호가 가능한 준거 집단이 있으면 유통과정에서 엄청난 프리미엄이 붙고 더 잘 팔리기 마련이다.
전공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주제나 분야라면 유명한 학자의 잘못된 주장은 더 질긴 생명력을 갖게 된다. 이에 맞서 논박할 만한 중량을 가진 학자들이 없기 때문이다. 파스파 문자 모방설이 그랬다.
왕의 명령으로 승려가 만든 문자들
톤미 삼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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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파 문자가 다른 문자보다 훈민정음의 원형으로 치부되며 질기게 살아남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파스파 문자도 훈민정음처럼 만든 사람과 만든 목적이 분명하고 소리글자이기 때문이다. 글자는 훈민정음과 비슷한 네모꼴이고 세로로 쓴다. 파스파 문자 말고도 만든 사람이 분명한 문자가 또 있다, 서장 문자라고 불리는 티베트 문자인데 이 글자도 소리글자다. 파스파 문자와 티베트 문자를 함께 이야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두 문자는 왕의 명령으로 승려가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파스파 문자는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의 명령을 받아 티베트 출신 승려인 파스파가 만들었고 티베트 문자는 티베트 33대 왕인 송첸감포(Songtsen Gampo)가 톤미 삼보타(Thonmi Sambhota)를 시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두 문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왕과 승려가 등장하기 때문인지 국내 학자가 주장하는 모방-공동 창제설도 신미라는 승려를 등장시킨다.
두 문자 모두 승려가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창제 목적은 달랐다. 티베트 문자는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불경을 제대로 읽기 위해 만든 것이었고 파스파 문자는 황제의 권위를 드높이고 광활한 제국을 원활하고 체계적으로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신미라는 승려를 굳이 훈민정음 공동 창제라는 시나리오에 등장시키기에는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었던 파스파 문자보다 종교적 목적으로 만들었던 티베트 문자가 더 적합하다. 하지만 정광 교수나 모방-공동 창제론자들은 파스파 문자를 고집한다. 파스파 문자가 음성학과 문자학 관점에서 훈민정음과 더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는 잘못된 이해다.
파스파 문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스파 문자가 베낀 티베트 문자부터 살펴봐야 한다. 티베트 문자는 파스파 문자와는 달리 아래 그림처럼 가로로 쓴다. 그리고 중성(모음) 기호를 초성(자음)자 위아래에 적어 넣는다.
티베트 문자 표기 구조
이런 표기 방식은 티베트 문자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를 표기하는 싯담문자(범자)나 현대의 히브리어도 사용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이렇게 표시된 모음 성분의 표시는 글자가 아닌 보통 모음 성분을 표시하는 기호로 분류한다.
반면 파스파 문자는 한글처럼 세로쓰기하되 네모꼴 안에서 초성, 중성, 종성을 모아 쓴다. 하지만 훈민정음처럼 초성과 중성의 조합이 기본값은 아니다. 아래 그림 맨 왼쪽처럼 중성(모음)만 쓰기도 한다. 아니면 가운데 글자처럼 중성(모음) 없이 초성과 종성(자음+자음)만 표기하기도 하고, 오른쪽 글자처럼 초성, 중성, 종성을 모두 쓰기도 한다.
파스파 문자 표기 방법
자음 없이 글자를 쓰거나(맨 왼쪽) 모음 없이 글자를 쓸 수 있는 것(가운데)은 파스파 문자가 훈민정음처럼 자음소와 모음소가 완전히 분리된 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맨 왼쪽에 있는 글자(우/u/)에는 훈민정음의 ‘ㅇ’에 해당하는 자음소가 섞여 있다. 가운데 글자 초성에는 ‘아/a/’가 포함되어 있어서 자음과 모음 없이도 쓰고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훈민정음 표기는 모든 글자 조합에 최소한 초성(자음)과 중성(모음)이 결합하여야 쓰고 읽을 수 있다.
아래 표는 같은 음가를 가진 파스파 문자와 티베트 문자를 대응시킨 표다. 도상적으로 두 문자는 매우 닮았다.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첫눈에 창제 시기가 늦은 파스파 문자가 티베트 문자를 베꼈을 거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파스파 문자와 티베트 문자 대조표
전해지는바, 파스파가 문자를 만드는 데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1261년 쿠빌라이 칸이 파스파를 국사로 임명하는 자리에서 명령했고 1269년에 반포되었다고 전해진다. 8년 정도 걸린 셈이다. 결과물은 티베트 문자의 가로쓰기를 세로쓰기로 바꾸고 세로쓰기에 맞게 글자 모양을 다듬었고 티베트 문자에서 사용했던 모음 기호를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는 초성이 포함된 독립 글자로 만들었다. 표의 맨 아래 파란 점선으로 표시한 것이 정광 교수가 말하는 소위 ‘모음자’다.
역량도 부족하고 시간도 없다, 일단 베끼자
쿠빌라이 칸 시절 몽골제국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이었다. 몽골 초원에서 말갈기를 휘날리며 시작한 정복은 쿠빌라이 칸 시절에 이르러 한반도 머리 자락에서 동북부 유럽, 중동, 서남아시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가진 제국으로 성장했다. 칭기즈칸의 손자였던 쿠빌라이 칸은 원나라를 제국다운 권위와 위용을 갖추고 제국을 다스릴 효과적 수단을 여럿 강구하는데 그중 하나가 제국에 복속한 여러 지역의 말소리를 표기할 수 있는 보편적 문자를 만드는 일이었다.
황제의 통치는 말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황제의 말은 덜 함도 더함도 없이 백성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셀 수도 없는 나라와 부족을 발 아래 복속시킨 쿠빌라이 칸에게 표준 문자의 제정은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었다. 티베트 라마 불교에 매우 심취해 있던 쿠빌라이 칸은 앞서 말한 것처럼 1261년 라마승 파스파를 국사로 임명하는 자리에서 파스파에게 문자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목적은 원대했지만 파스파 문자의 실상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에 비교하면 너무 초라하다. 파스파는 세종대왕처럼 심도 있고 체계적인 음성학적 이론을 세우기엔 능력도, 시간도 부족했다. 8년을 매진했지만 티베트 문자보다 더 나은 문자를 만들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파스파는 티베트 문자를 대놓고 베꼈다. 파사파 문자가 티베트 문자를 기초로 만들어진 글자라는 데에 학계의 이견은 없다.
고민할 필요 없다, 쓰던 대로 쓰자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정광 교수 주장처럼 파스파 문자는 훈민정음처럼 초성-중성-종성이라는 음성학 구조를 갖추고 자음과 모음을 꼭 갖추어 표기하는 문자가 아니다. 중성(모음)만 쓰기도 하고 중성(모음) 없이 쓰기도 한다. 파스파는 범자나 티베트 문자의 표기법을 따라 쓰던 대로 쓰되 쓰는 방향을 바꾸고 거기에 맞게 글자 겉모습만 바꾸기로 했던 것 같다. 문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음성학적 시스템은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파스파 문자는 훈민정음해례본 같은 창제 원리를 밝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글자의 실체를 추적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금석문처럼 비문이나 기물에 파스파 문자를 새겨 넣은 유물은 있지만 파스파 문자 음운을 다룬 사료는 매우 드물다. 다행히 한자음을 파스파 문자로 음사한 ‘주본 몽고자운’이라는 운서가 남아 있어 파스파 문자의 음운을 추적하는 데 그나마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운서에는 정광 교수의 주장과 반대로 파스파 문자의 순수한 모음자들이 독립된 모음자가 아닐 거로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남아 있다.
아래 그림은 파스파 문자를 한자의 성모에 맞춰 적은 주본 몽고자운의 내용이다. 맨 오른쪽 파란 상자로 표시한 부분에 중성(모음)을 표시하는 글자들이 있다. 상자 아랫부분에는 ‘이 일곱 자는 유모에 해당한다(此七字歸喩母)’라는 부기가 달려 있다. 이런 설명을 붙인 것은 이 글자들이 초성과 조합 없이 단독으로도 쓰였기 때문이다. 몽고자운이라는 책이 중국 운서가 전통적으로 사용했던 반절법으로 파스파 문자의 음운을 설명하다 보니 덧붙이게 된 설명인 것이다.
파스파가 세종대왕처럼 음절의 구조가 초성-중성-종성으로 이루어진다는 음성학적 통찰을 갖고 있었다면 중성(모음)만 덜렁 쓰는 식으로 글자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무조건 초성(자음) 성분에 (중성) 모음 성분의 기호를 붙여 표기했던 티베트 문자보다 초성 글자 없이 중성(모음) 글자 하나만 떨렁 쓰는 파스파 문자는 문자 진화의 관점에서 퇴행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황제의 위용을 보여주지!
파스파는 문자를 만들 때 음성학적 고민보다 글자 디자인에 더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파스파는 자신이 만든 글자를 네모난 각진 형태 안에서 최대한 획을 굵게 해서 현대 고딕체나 한자의 해서체보다 더 또박또박 쓰도록 고안했다. 덕분에 파스파 문자는 경직되고 권위적으로 보인다. 티베트 문자에서 초성(자음) 옆에 작게 부기했던 중성(모음) 성분을 초성(자음) 글자와 같은 크기와 두께로 쓰게 만들어 티베트 문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변조도 힘들게 만들었다. 일본학자들은 이런 모양을 보고 ‘몽고전체(蒙古篆體)’라는 이름을 붙이며 아름답다 극찬하지만 아름답다는 상찬은 어울리지 않는다. 좀 답답하고 고지식한 느낌, 마초의 냄새가 느껴진다.
이렇게 글자체를 만든 것은 쿠빌라이 칸의 의도에 부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쿠빌라이 칸은 여러 언어와 문자를 쓰는 거대한 제국 구석구석에 일사불란하게 자기 절대 권력과 권능이 미치고 자신의 위용을 만천하에 영원히 드러내기 위해 파스파에게 문자를 만들도록 명령했고 파스파는 황제의 이런 의도가 잘 반영되도록 글자를 디자인했다.
파스파 문자에서는 음성학적 통찰이나 고된 연구의 흔적을 감지할 수 없다. 파스파 문자는 훈민정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준의 문자가 아니다. 훈민정음이 파스파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힌트를 얻었다는 주장은 매우 부정확하고 허술한 진술이다. 아인슈타인에게 뉴튼이 우주 배경 복사 같은 것이듯 세종대왕에게도 파스파 문자나 티베트 문자는 우주 배경 복사 같은 것이다. 훈민정음이 파스파 문자나 범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진술은 이런 전제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정광은 왜 일본에서 논문을 발표했을까?
정광 교수는 자신이 파스파 문자에서 모음자를 찾은 연구가 2011년 ‘동경대학교 언어학회지’에 발표되었다며 자신의 이론이 학문적 검증이 끝난 것으로 주장한다. 이 논문은 2011년 ‘동경대학언어학론집(東京大學言語學論集)’ 제31호에 게재되었는데 누구나 인터넷으로 찾아볼 수 있다.
하필이면 국내도 아니고 일본 동경대학언어학론집에 논문을 발표했을까? 물론 동경대학언어학론집이 권위 있는 학술 잡지인 것은 맞지만 훈민정음과 관련된 내용이니 국내의 언어학이나 국어학 학술 잡지에 발표해 국내 학자들과 먼저 내용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것이 더 의미 있었을 것이다. 발전적 논의도 더욱 활발했을 텐데 정광 교수는 굳이 일본 동경을 찾아갔을까?
파스파 문자의 모음 문제는 정광 교수 이전에도 학계에서 항상 주목받는 내용이었다. 일곱 개의 파스파 문자가 정확히 독립적인 모음자가 아닐지라도 모음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학계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동경대학교가 노학자의 논문에 주목한 것은 모음자 규명 때문이 아니라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이 파스파 문자의 모음체계를 답습했다는 주장 때문으로 보인다. 현대에 이른 지금도 세계 최고의 첨단 문자인 훈민정음이 원제국의 파스파 문자의 음성학 체계를 답습했다는 내용은 일본인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주제였을 것이다. 그것도 한국인 학자가 일본어로 논문을 써서 주장을 하니 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았을까?
논문을 들고 일본 동경으로 달려간 정광 교수를 보면 교수의 등 뒤로 어른거리는 식민사관의 어두운 그림자가 보인다. 요모조모 따져 봐도 신미 등에 파스파 문자를 얹어 훈민정음 공동 창제를 주장하는 것은 넌센스다.
티베트 문자는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쓰이는 것과 달리 파스파 문자가 원제국의 몰락과 함께 사라지게 된 것은 쓰기에 불편했고 일상적인 문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아주 제한된 범위에서 아주 작은 규모의 소수 집단이 썼던 문자라 정치적 목적이 사라지자, 그 소용도 금세 사라졌다. 파스파 문자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기 위한 힌트를 얻을 만큼 세계 문자 역사에 특별한 자리를 마련해 줄 만큼 뛰어나거나 영향력 있던 문자가 결코 아니다.
주.
1. 왕옥지, 몽고자운 연구, 전남대학교, 1997
2. '몽고자운’의 원저자와 발간연대는 알려 지지 않았다. 원본은 사라졌고 1308년 주종문이 개정 증보한 판본만 전해진다. 파스파 문자의 음운 연구에 이용될 만한 운서나 자서(사전류의 고문서)는 대부분 실전되어 현재는 다른 문서에 책이름과 개략적인 문서의 성격만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파스파 문자의 음성학적 구조와 문자학적 위상을 연구하는 데는 ‘몽고자운’과 ‘사림광기’에 실린 ‘몽고자백가성’ 외에 풍부하게 남은 비문이나 공문서 등이 이용된다. 이 중에서 운서인 ‘주본 몽고자운’은 파스파 문자들의 소리 운용과 문자 표기 운용들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문서다.
3. 정광교수는 이 설명이 파스파 문자가 모음소와 자음소가 분리된 글자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 설명은 파스파 문자가 모음소와 자음소가 분리되지 않고, 여전히 티베트 문자나 싯담문자를 답습하는 문자임을 보여주는 설명으로 보아야 한다.
4. 정광, 중국 북방민족의 표음문자 제정과 훈민정음 – 훈민정음 제정의 배경을 중심으로, 한국어사 연구, 2022, p 198.
5. 鄭光, 〈蒙古字韻〉喩母のパスパ母音字と訓民正音の中声, 東京大學言語學論集 第31號, 2011, pp 1 –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