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비타 OST
출처 - (링크)
1978년 초연된 뮤지컬 <에비타>. 그리고 흘러나오는 Don't Cry For Me Argentina.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나는 그대를 떠나지 않아요.”
뮤지컬이나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노래다. 아마 전 세계의 영부인들 중 가장 유명한 이를 꼽으라면, 많은 정치학자나 대중들은 그녀를 첫손가락으로 꼽을 것이다. 재클린 케네디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파급력과 인지도, 유명세 측면에서 에비타(Evita) 앞에선 한 수 접어야 한다.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재클린 케네디 역시 드라마틱한 삶과 당대를 풍미했던 패셔니스타로서의 면모를 자랑(?!)할 수 있겠지만, 현실정치 영역까지 더한다면 재클린 케네디는 에비타를 쫓아올 수 없다.
에비타는 21세기 아르헨티나의 현실정치에서도 당당히(?!) 그 이름이 거론되는, 살아있는 ‘역사’이자 정치인이다. 물론, 그 유명세가 좋은 쪽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생전 에비타가 그토록 원했던 소망이 결국 이뤄졌다는 것이다.
"저는 단 하나의 커다란 야심을 품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에비타라는 이름이 언젠자 조국의 역사속에 남는 것입니다."
에비타가 생전에 했던 말이다. 이 말대로 그녀는 아르헨티나 역사 속에 자기 이름을 각인했고, 죽은 지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는 아르헨티나 현실정치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평가가 극단으로 갈린다. 한쪽에서는,
“여성과 노동자 같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싸웠던 영웅”
이라고 추켜세우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아르헨티나를 말아먹은 개xx”
라고 말한다. 명성황후가 드라마와 뮤지컬로 제대로 세탁기를 돌린 것처럼 에비타 역시 뮤지컬과 영화가 없었다면, 후자로 기록되었을 지도 모른다.
에비타 그리고 후안 페론
16세 무렵의 에바 페론
에비타의 삶은 한 마디로 ‘파란만장’이었다. 부유한 농장주였던 아버지의 ‘혼외자’로 태어났다. 1남 4녀의 막내로 큰 사랑을 받으며 태어났을 것 같으나, 아버지는 어머니를 버리고 본처에게 돌아 갔다. 에비타가 1살 때였다.
하루아침에 버림을 받은 이들의 삶은 비참했다. 어머니는 바느질부터 농장 주방일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고, 에비타의 형제들도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가난 보다 더 힘든 건 그녀가 ‘사생아’라는 점이었다. 아르헨티나는 가톨릭 국가였다.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 답게 사생아는 알게 모르게 차별을 받았다.
이런 경제적, 사회적 압박 속에서 에비타는 ‘배우’라는 꿈을 꾸게 되고, 15살이 되던 1935년 초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난다. 어쩌면 당연한 ‘행보’였을지도 모른다. 당시 전 세계를 휩쓴 대공황으로 아르헨티나 경제는 폭망한 상태였다. 한 순간에 실업자가 된 농민들이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몰려가 일자리를 찾았다.
수도로 밀려들어온 실업자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빈민층’을 만들어 냈고, 이는 역설적이게도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성장시킨다. 이건 하나의 수순인데, 빈민층도 여가를 즐기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 연극, 라디오 드라마가 활성화될 수밖에 없다(인도사람들이 영화에 미치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저렴한 비용으로 2시간을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를 생각해 보자).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는 에바 페론
그녀의 시작은 연극이었다. 코미디 극장에서 단역을 맡았고, 이후 닥치는 대로 일했다. 모델도 했고, B급 멜로 영화에도 출연했다. 그녀의 인생을 바꿔 놓은 건 라디오였다. 1942년 일일 라디오 드라마에서 엘리자베스 1세를 비롯해 서양 역사에 촘촘히 박혀 있는 ‘유명한 여인’들을 연기했던 것이 대박을 터트렸다. 그녀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참고로, 당시 라디오는 지금의 TV와 같은 영향력을 가졌다.
그리고 운명의 1943년. 아르헨티나에서 쿠데타가 일어난다. 이 쿠데타에 참여한 인물 중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ón)도 있었다.
시대의 격랑 속에서 에비타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대외적인 이미지로 보면, 이 당시 후안 페론과 에비타의 만남은 운명적인 사랑(?!) 같은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에비타는 철저한 계산으로 남자들을 골랐다.
“이제 권력은 군인들이 잡고 있어! 내 인생을 바꿀 기회가 저기에 있어!”
에비타는 쿠데타에 참여한 군인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차근차근 군부 권력의 중심을 향해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기회는 곧 찾아왔다.
운명의 1944년 1월, 산 후안 화산이 폭발한다. 아르헨티나를 강타한 대지진 앞에서 사람들은 망연자실했다. 재난 앞에서 정부는 이재민 구호와 이를 위한 모금 행사를 하는데, 모금 행사에 동참한 에바는 여기서 후안 페론과 만나게 된다.
이때 에비타의 나이 25세 후안페론의 나이 50세였다. 당시 후안 페론은 아내를 암으로 잃고, 딸 아이 하나를 키우던 홀아비였다. 둘은 첫 눈에 서로의 ‘가치’를 알아봤다.
당시 후안 페론은 정권 내에서도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 자신이 기득권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를 대변했다.
“앞으로 최저임금제를 실시한다!”
“농가부채에 대한 전면적인 탕감을 실시한다!”
노동복지부 장관이라는 타이틀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의 출생. 그러니까 메스티소(백인+원주민 혼혈)라는 이유로 차별 받아왔다는 점과 그가 이탈리아 주재 무관으로 있으면서 무솔리니가 어떻게 대중들의 지지를 얻었는지를 지켜봤기에 ‘자기세력’을 만드는 데 귀신 같았다.
에비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노련했다. 연예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는 노련한 화술과 함께 권력에 민감한 ‘촉’이 있었다. 그리고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스타라는 점은 서로에게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에비타 추종자들은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이 첫 눈에 사랑에 빠졌다고 포장하지만, 누가 봐도(당대의 증언을 참고하면) 이들은 서로가 파악한 장점에 끌렸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가치를 잘 알았고, 그 가치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동거를 시작한 이 연인은 서로의 ‘필요성’을 더 돈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군부의 실세를 등에 업은 에비타는 연예인으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고, 이렇게 얻은 영향력으로 에비타는 후안 페론의 지지층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에비타는 라디오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후안 페론을 지지했다.
1945년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
개인적으로는,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은 유년기의 상처와 정신적인 결함이 서로에게 강력한 동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바 페론의 경우는 앞에서 언급했듯 사생아라는 타이틀과 유년기의 가난이 화려한 삶과 이후 명예욕과 과시욕으로 이어졌다. 후안 페론은 메스티소란 타이틀에 의해 차별 받았고, 어머니의 불륜에 의한 반항으로 군사학교에 입학하고, 스스로 엄격한 규율 속에 넣고 좀처럼 타협하지 않는 독불장군의 성격을 만들어 냈다. 둘은 보수적인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배척 받은 기억이 있었고, 이로 인해 과잉된 자아를 형성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에비타의 지지를 등에 업고 후안 페론은 부통령직에 올랐다. 하지만, 이때부터가 문제였다. 후안 페론은 기득권층의 과두 지배를 비판하고 나선다.
“이게 좋게 좋게 봐주니까 한없이 기어오르네?”
1945년 10월 12일, 군부 세력들의 담합에 의해 후안 페론은 체포 구금됐다. 그리고 에비타의 활약이 시작된다. 에비타는 공장을 돌며 노동자들을 독려했다.
“나도 빈곤층이었어! 없이 사는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아. 너희들 편 들어줄 사람이 아르헨티나에 누가 있어? 우리 남편 밖에 없잖아? 그럼 우리 남편을 구해야지!”
에비타의 노력 덕분이었을까? 노동자들은 대규모 총파업을 벌였고, 수십 만 명의 노동자들이 후안 페론 편에 섰다. 이런 압박에 놀란 군부는 체포 5일 만에 후안 페론을 석방했다.
(첨언: 후안 페론의 절대적인 지지 세력은 ‘노조’였다. 그는 공산당 계열 노조는 탄압했지만, 나머지 노조는 적극적으로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페론주의는 ‘反 지식인, 親 노동자’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노동자들이란 관제화 된 노동조합을 의미한다. 이 노동조합들은 페론의 입맛에 맞게 통제 혹은 동원됐다. 페론 집권 당시, 후안 페론 정권은 외국 자본을 배제했고, 산업을 국유화 했으며, 복지 확대와 임금인상을 추진했다. 1946년 대통령이 된 이후 1947년부터 2년 연속 노동자 임금을 연 25%이상 인상시켰고, 노동자들에게 연말 특별 보너스를 지급하게 했다. 이들 노동자들은 페론 집권 내내 페론을 배신하지 않았다)
1946년 대통령 선거 중 남편 후안 페론을 위해 유세하는 에바 페론
석방 5일 만에 후안과 에비타는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에비타의 설득이 이어졌다.
“당신이라면 충분히 대통령이 될 수 있어요!”
에비타는 후안 페론에게 대통령 선거에 나갈 것을 설득(종용)했다.
“당신이라면 충분히 대통령이 될 수 있어요!”
“아니, 그래도 군부의 분위기도 좀 보고...”
“당신 체포 됐을 때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난 거 못 봤어요? 충분히 승산 있어요!”
이듬해인 1946년 대통령 선거유세에서 에비타는 말 그대로 ‘내조의 여왕’이 됐다. 후안 페론은 피부병 때문에 사람들과 많이 접촉하는 게 힘들었다(심한 경우 진물이 흐를 정도로 피부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 빈자리를 메운 게 에비타였다. 20대 여성, 그것도 아름다운 슈퍼스타가 나타나 선거운동을 했다. 특유의 친화력과 화술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그 결과 1946년 선거에서 후안 페론은 52.8%의 득표율로 대통령이 된다.
26세 영부인의 탄생이었다.
검색어 제한 안내
입력하신 검색어는 검색이 금지된 단어입니다.
딴지 내 게시판은 아래 법령 및 내부 규정에 따라 검색기능을 제한하고 있어 양해 부탁드립니다.
1. 전기통신사업법 제 22조의 5제1항에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삭제, 접속차단 등 유통 방지에 필요한 조치가 취해집니다.
2.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청소년성처벌법 제11조에 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11조에 따라 아동·청소년이용 음란물을 제작·배포 소지한 자는 법적인 처벌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4.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에 따라 청소년 보호 조치를 취합니다.
5. 저작권법 제103조에 따라 권리주장자의 요구가 있을 시 복제·전송의 중단 조치가 취해집니다.
6. 내부 규정에 따라 제한 조치를 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