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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페론 집권 후, 아르헨티나는 급변한다. 페론이 내놓은 정책들, 소위 말하는 페론주의(Peronism)는 지금도 뜨거운 감자다. 페론은 대통령이 된 이듬해 경제 독립을 외치며, 철도, 전화, 가스, 전기 등의 산업을 국유화했고, 외국 자본을 배제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노동자 임금을 급격하게 올렸다.

 

누가 봐도 좌파 정책이지만, 페론의 성향을 보면 좌파보다는 우파에 가까운 인물이다. 여기서 페론주의를 말하려는 건 아니니 이 정도에서 갈음하겠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건, 지금도 페론주의는 뜨거운 감자이고 한때 미국을 앞서던 아르헨티나 경제가 몰락한 배경에 페론주의가 있다는 주장이 꾸준히 대두되고 있다.

 

후안 페론이 페론주의를 가열 차게 추진하고 있을 때, 에비타는 전국을 다니며 남편의 정책을 선전했다. 이때 인상 깊었던 것이 가진 자, 기득권층에 대한 ‘악마화’였다. 에비타와 후안 페론은 연설할 때마다 기득권층의 특권을 빼앗아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돌려줘야 함을 역설했다(당시 아르헨티나의 상황을 보면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대목이 있다. 그러나 그 부작용은 상상 이상이었다). 소위 말하는 데스카미사도(Descamisado) 그러니까 셔츠를 입지 않은 노동자와 농민을 페론의 ‘영원한 우군’으로 만들게 된다.

 

후안 페론과 에비타의 인기는 아르헨티나 국내를 넘어 해외를 넘나들었다. 소위 말하는 ‘외교활동’에서 에비타는 최고의 스타였다. 프랑스, 스위스 등 유럽 각국을 순방할 때 언론은 에비타를 주목했다. 20대의 꽃다운 영부인,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남편 대신 유세를 하는 영부인은 그 자체로 파격이었다.

 

당시 보수적인 남미에서 아내가 선거운동에 나서는 경우는 없었다. 세계적으로 봐도 아내가 이렇게 나서서 라디오 연설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에비타는 그 자체로 파격이었다. 당시 <타임>의 표지까지 그녀가 등장한 것을 보면, 에비타의 엄청난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내 성녀도 권력에 취하기 시작했다.

 

퍼스트레이디였던 그녀는 엄밀히 말하면, 아무런 권력이 없는 민간인 이었다. 그러나 늘 복지부 사무실에 출근해 빈곤층을 위해 신경을 썼다. 좋게 보면, 서민을 챙기는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냉정하게 보면, 권력남용이다. 그녀에게 누구도 권력을 주지 않았다. 나중에는 도를 넘어 남편이 없는 데도 군대 사열을 받을 정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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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타 재단 활동 중인 에비타

 

에비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자기 이름을 딴 복지재단을 만들고 지원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늘 그렇지만, 정치인이 시작한 재단은 결국 그 끝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에비타가 만든 재단도 마찬가지였다. 기부금 모금에서 강제성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2차 대전 나치 전범들의 돈까지 받았다는 의혹을 받는다. 참고로, 아르헨티나는 나치 전범의 도피처로 유명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이히만’도 아르헨티나에서 살았다.

 

에비타의 어두운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에비타의 죽음

 

후안 페론의 집권 2년 차부터 아르헨티나 경제에 빨간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1948년 공공지출이 GDP 대비 40%를 넘어서며 국가 재정을 압박하고, 1949년이 되면 무역 적자로 돌아선다.

 

아르헨티나의 몰락에 대해서는 단순히 페론주의 하나만을 가지고 말하기는 어렵다. 2차대전 직후 아르헨티나의 경제 호황을 이끌었던 건 아르헨티나의 농축산물 수출 덕분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미국과 영국 등이 자국 농축산물을 지키기 위해 수입제한 조치를 내렸고, 하필 이때 아르헨티나에 가뭄이 들어 생산에 차질을 빚었다.

 

후안 페론은 집권과 동시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경공업 중심의 경제개발을 시도했으나, 갑자기 불어닥친 대외경제의 악재를 극복하기 위해 무리수를 둔다. 바로 중공업 중심으로의 ‘퀀텀 점프’였는데, 그 결과 공업 기반은 자리 잡지 못하고 자본만 까먹고, 기술 축적은 되지 않는 상태가 된다. 결국 후안은 외국인 투자 유치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도 IMF 겪어봐서 안다. 이 경우에 외국자본들은 국내의 고용조건, 근로조건, 복지 환경에 대해 참견한다. 즉, 후안 페론이 가열 차게 추진했던 페론주의가 흔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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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밍도 절묘하다. 에비타가 암에 걸려 투병 생활에 들어가면서부터 페론 정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2차 대전과 그 이후 아르헨티나가 반짝 호황기를 누렸을 때 페론주의가 치고 나올 공간을 확보했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까지가 페론주의에 대한 당시 상황이다.

 

후안 페론 정권은 에비타에 상당히 의지했고, 실제로 에비타의 이미지가 정권 유지에 상당한 도움이 됐다. 문제는 그녀가 ‘완벽한 성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에바는 점점 사치하기 시작했다. 아니, 원래 연예인이란 게 화려한 직업이 아니던가? 복지재단의 기금을 유용해 사치를 즐긴다는 말이 나왔다. 실제로 그녀의 옷가지들과 액세서리들은 고급품들이었다.

 

이 와중에 다시 한번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여성들이 최초로 투표권을 행사했던 이 선거는 후안 페론의 압승이 기대되는 선거였다. 그동안 노동자들에게 뿌린 돈만 생각해도 후안 페론의 승리는 당연했다. 거기에 에비타의 활약까지 더해졌으니 대통령 당선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노동자들의 압도적인 지지, 에비타의 지원, 그리고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초로 여성 투표권이 행사될 선거였기에 누가 봐도 후안 페론이 이길 거로 예상했다. 이렇게 되자 에비타와 그녀를 둘러싼 이들은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퍼스트레이디가 아니라 정치인으로!'

 

에바 페론에게 퍼스트레이디가 아니라 후안 페론의 러닝메이트가 돼 달라고 한다. 즉, 그녀에게 부통령으로 나서라는 제안이었다. 거리에는 에비타에게 선거에 나와 달라는 시위대가 등장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후안 페론 시대의 노동자들은 관제화 됐던 이들이었다. 추대의 모양새였지만, 에바의 권력욕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니, 사실은 에바가 원했다고 봐야 한다.

 

당시 자궁암을 앓던 에비타는 그런 상황에서도 끝내 부통령 지명을 받아냈으나, 결국엔 도저히 부통령 직위를 수행하지 못할 거 같아 이를 포기한다(후안 페론의 첫째 부인에 이어 두 번째 부인도 자궁암에 걸렸다).

 

에비타는 암 투병 중에도 후안 페론의 선거운동에 나섰다. 아니,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권력욕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후안 페론 정권 자체가 그녀에게 의지하는 게 많았다. 후안 페론보다는 에비타가 대중 접촉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결국 대통령 연임 선거에서 후안 페론은 64% 득표율을 자랑하며 상대 후보를 넉넉하게 이겼다. 그러나 에비타의 인생은 딱 거기까지였다. 후안 페론의 대통령 취임식이 끝나고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에비타는 암으로 사망한다. 짧지만 굵었던 33세 여인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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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후안 페론은 1955년 군부에 쫓겨나 망명길에 올랐다가, 1973년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이때 후안은 망명지에서 만난 이사벨 페론과 결혼한 상태였는데, 이사벨을 부통령직에 앉히게 된다. 에바 페론의 향수를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당선되고 10개월 만에 그는 죽음을 맞이했다. 이사벨 역시 남편의 대통령직을 물려받았으나, 군부에 의해 다시 쫓겨난다.

 

에비타와 김건희의 평행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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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캐네디 대통령 부부

 

에바 페론의 모습을 보면, 김건희의 모습이 연상된다. 윤석열 집권 초기부터 김건희의 모습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보아왔던 ‘유명한’ 퍼스트레이디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해외에서의 패션은 재클린 케네디의 그것을 연상케 했고, 국내 정치에서의 행보는 에바 페론의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 아닌 거 같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당장 두 부부의 나이 차만 해도 그렇다. 에비타의 경우까지는 아니어도 윤석열 김건희 부부의 나이 차는 12년이나 된다.

 

결혼 전 기록을 필사적으로 감추려는 것도 어느 정도 비슷하다. 에비타의 경우 유년 시절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초기 정착 생활에 관한 삶을 철저히 감추려 애썼다(이때 몸을 팔았다는 루머를 반대편 당에서 퍼뜨리기도 했고, 후안 페론 이전에 다른 군인을 사귀었다는 등 숱한 말들이 있었다). 김건희 여사의 과거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만 있을 뿐 제대로 된 설명이나 해명을 들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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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남편의 조력자 이상의 역할로 대통령 도전을 종용하고, 당선 이후에도 단순한 퍼스트레이디 이상으로 활동하는 것도 비슷하다. 에비타는 후안 정권의 아이콘 같은 존재로 지내다 결국 내각의 일부처럼 활동했다. 남편이 없어도 군 사열을 받았고, 복지부에 매일 나타나 복지 정책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 나중에는 부통령 후보로까지 나설 뻔했다. 김건희의 경우도 점점 단순 퍼스트레이디가 아님이 드러나고 있다.

 

해외순방을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에바 페론은 해외순방을 무지개 여행이라 칭했다. 순방 시에는 화려한 드레스와 값비싼 액세서리를 풀 ‘장착’한 후 나섰다. 김건희 여사 역시 해외순방 때마다 재클린 케네디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패션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각종 비리 혐의도 비슷하다. 에바 페론은 죽을 때까지 자기 이름을 딴 복지재단 기금 유용 의심을 받았다. 가난한 자들의 성녀 이미지를 구축했지만, 실제 그녀의 행동은 달랐다. 김건희 여사도 그녀를 둘러싼 여러 비위 의혹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국회에 계류된 특검법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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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의 아이콘으로 있으며, 정권의 생명과 자기 운명을 같이 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에비타는 대외 활동을 하면서 페론 정권의 아이콘이 됐지만, 윤석열 정부에서 김건희는 실세를 넘어서 이제 정권의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말이 들린다. 세계 자살 예방의 날을 맞아 마포 대교에 나가 대통령이 할 법한 행동을 보여준 것은 그녀의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의 영부인은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퍼스트레이디의 족적을 그대로 쫓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에비타의 경우엔 대중 친화적인 모습과 연예인으로서의 영향력, 그리고 직접 노동자들을 챙겨주는 모습,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목소리를 가지고 남편의 빈자리를 메우며, 정권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반면, 김건희의 모습은... 롤모델로 에비타를 고른 것까지는 맞았지만, 에비타를 따라갈 능력은 갖추지 못한 듯하다. 다만, 한 가지 불안한 점은 에비타의 흥망성쇠에 따라 페론 정권의 성쇠가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결딴난 것을 생각해 보면, 괜히 불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