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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일본이 고도성장을 거치면서 야쿠자가 뿌리를 내리던 노동 현장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종전에는 노동자가 직접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하게 됐다. 이런 노동 현장의 변화가 노동 집단을 매개로 묶어진 지역사회까지도 변용하기 시작한다. 이제 야쿠자는 노동 현장과 지역사회에서 나름 그 역할을 하는 입지를 잃으며 고도화 되어가는 산업 사회에 기생하는 집단으로 그 성질을 바꿔 간다.

 

야마구치구미 역시 그 예외가 아니었다. 항만 하역 노동과 연예 공연을 통솔하는 조직으로서의 성질은 후퇴하고, 산업사회가 낳는 이익의 일부를 이권으로 확보하고자 세력을 확대・방위하는 일이 조직 유지의 핵심이 된다. 사업자임을 유지하면서도 폭력 조직의 측면이 눈에 띄게 되는 것이다. 특히 사업 부문과 폭력 부문의 분업이 비교적 뚜렷했던 야마구치구미는 후자의 역할에 그 무게감을 키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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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야쿠자의 퇴락을 한 남자 일생으로 담은

넷플릭스 영화 <야쿠자와 가족>

 

그리고 싸움 자체도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50년대까지만 해도 조직 차원의 싸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 조직끼리 싸운다고 해도 당시에는 조직원이 산발로 일으키는 비교적 소규모의 싸움에 가세하거나 중재 역할을 맡아 줄 정도였다. 조직이 전면에 나서서 싸운다 해 봤자 조직 자체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60년대에 접어들면서 야마구치구미는 야쿠자계에서 새로운 전투 방식을 도입하기 시작한다. 그게 바로 "조직원의 대량 동원". 한번 싸움이 일어나면 야마구치구미 본가뿐만 아니라 하부 조직 구성원까지, 압도적인 인원수를 동원해서 적대 조직을 격파해 가는 방식이다. 이번에는 야마구치구미 전국 제패의 프롤로그로서 평가되는 고마쓰시마(小松島)투쟁을 소개하면서 그 "대량동원 방식"의 원시적 모습을 살펴본다.

 

1. 전국 제패는 3대째 두목의 본뜻이 아니었다?

 

야마구치구미의 역사를 그린 책이나 기사를 보면 입을 모아 야마구치구미가 애당초부터 전국에 산하 조직을 거느려 영향력을 확대할 것, 이른바 "전국 제패"를 노렸던 것처럼 기술하며, 제목에도 <피의 역사-야마구치구미 전국 제패의 길>이라든가 <야마구치구미 전국 제패의 야망>과 같은 문구가 난무한다. 하지만 조직을 급성장시킨 3대째 두목 타오카 카즈오(田岡一雄)는 애초 그런 의도가 없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를 회상하는 전 간부에 따르면

 

"오야붕(3대째 두목 타오카)은 오히려 소수정예화시키고 싶었지. 고베의 오야붕으로서 지신과 직참(直參, 타오카와 직접 오야붕·꼬붕의 관계를 맺은 조직원)인 야마구치구미 본가를 중심으로 (조직을 운영하지), 키우고 싶진 않았었어. 직참은 늘리지 않지만, 고베하고 도쿄, 오사카쯤에는 사무소를 놔둘까라는 정도. 얼굴도 본 적이 없는 하부 조직 꼬붕까지 돌봐주고 싶어도 못 하기도 하고…"

 

라고 한다. 실제로 1946년 6월에 타오카가 야마구치구미 쿠미쵸(두목)를 물려받았을 때 고베 신카이치에 있는 하나야식당에서 열린 대관식에 참석한 조직원은 하부 조직 소속까지 합해 30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동네 조직이 1965년에는 420여 조직을 산하에 두고 1만 명을 넘는 조직원을 안게 된다.

 

그러나 야마구치구미는 2대째 야마구치 노보루도 그랬듯이 자기부터 싸움을 걸어가진 않고, 남이 걸어온 싸움에는 응한다는 방침이 말하자면 전통이었다. 타오카 역시 계속 늘리기만 하는 조직원이 먹고 살 수 있게 하게끔 사업 확장, 특히 연예 공연 네트워크는 넓히며 산하 연예인은 늘릴 의향만큼은 유지하되, 조직 자체의 성장을 노리지는 않았다는 것이 실정이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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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인물이 타오카 카즈오

출처-<위키피디아>

 

하지만 오늘날 결과로서 사실만 보면 달랐다. 야마구치구미는 마치 전국의 야쿠자 조직을 자기 산하에 짜 넣으려고 했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침공작전을 벌려 간 것이었다.

 

2. 고마쓰시마(小松島)

 

이곳은 일본 시코쿠(四國) 지방, 도쿠시마현 동부 바닷가에 위치하는 중소 도시다. 2차대전 전부터 도박꾼(博徒, 바쿠토)계 조직인 코텐류(小天竜) 구미와 노점상(的屋, 테키야)계 조직인 히라이구미(平井)구미가 때때로 사소한 싸움을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 5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에서 파칭코 붐이 불기 시작되자 히라이구미가 파칭코 가게를 열기 시작한다. 파칭코는 그 구조상 도박성 유희이기 때문에 도박꾼 조직인 코텐류구미로서는 노점상 조직인 히라이구미가 파칭코 가게를 여는 자체가 자기 사업 분야에 대한 부당한 침공으로 비쳤던 것도 당연한 이야기다. 코텐류구미는 즉시 항의에 나섰으나 히라이구미가 이렇게 대응한다.

 

"기계는 노름판과는 다르다".

 

코텐류구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1956년 7월 13일, 코텐류구미 조직원 3명이 일본도를 들고 히라이구미 사무소를 급습당한 코텐류구미 조직원 1명이 사망한다. 사건이 일어나자, 동네 출신의 도쿠시마현 의원과 간사이 지방에서 야마구치구미와 세력을 이분하던 혼다카이(本多会) 최고 간부가 중재에 나서 사흘 후에는 화해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사건의 여운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던 이듬해 10월13일, 전년에 히라이구미를 급습한 코텐류구미 사무소 앞에서 조그마한 사건이 일어났다. 후쿠다(福田) 구미 즉, 히라이구미와 함께 카츠우라(勝浦)구미 산하 조직이자 종전부터 코텐류구미와 대립하던 일파의 소속 깡패가 코텐류구미 사무소 바로 앞, 칸다세가와(神田瀬川) 안벽에서 젊은 남자하고 싸우다 익사시켜 버린 것이다. 원래 코텐류구미와 상관이 없는 일반인하고 후쿠다구미 조직원 사이의 싸움으로 시작한 사망 사건이었지만 자기 사무소 앞에서 수상한 사건을 일으킨 후쿠다구미 조직원에 대한 코텐류구미의 적의가 구체적 행동으로 발현되어 버린다. 코텐류구미 조직원이 사무소 밖으로 나와서 방금 일반인 남성을 강물에 빠뜨린 후쿠다구미 조직원을 바로 같은 강물에 밀어 떨어뜨린 것이다.

 

후쿠다구미 쿠미쵸인 후쿠다 사카에(福田栄)는 전년에 코텐류구미와 싸운 히라이구미의 쿠미쵸인 히라이 타츠오(平井龍雄)와 함께 카츠우라구미의 직계 조직원이자 의형제 관계다. 전년의 파칭코 사건의 여운도 남아 있는 상황에서 코텐류구미가 후쿠다구미를 상대 삼아 싸우게 된다면 히라이구미도 가세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카츠우라카이, 심지어는 혼다카이(本多会)까지 나올 가능성도 부정하지 못한다. 사소한 사건을 계기로 안게 된 코텐류구미의 긴박감은 정점에 달하고 있었다.

 

3. 지미치 유키오의 "체면(가오)"

 

고민 끝에 코텐류구미 2대째 두목(쿠미쵸) 아라이 요시오(新居良男)는 고베를 찾는다. 야마구치구미 본가에 사건 수습 방안을 상담하기 위해서였다. 아라이는 당시 야마구치구미 내 No.2, 즉 '와카가시라(若頭, 부두목격)'인 지미치 유키오(地道行雄)와의 면회가 허용되며 사건의 경위를 설명했다. 아라이의 이야기를 들은 지미치는 그 전년에 타오카 직계 꼬붕이 된 야마모토 히로시(山本広), 본인이 운영하는 지미치구미 와카가시라를 맡던 사사키 미치오(佐木道雄)를 동반해서 혼다카이 사무소를 방문할 것을 약속했고, 실제로 야마구치구미와 혼다카이 사이에 사건을 종식하는 방향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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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의 바다 건너편에 있는

고마쓰시마(왼쪽 아래)

출처-<구글맵>

 

그런데 말이다. 10월20일, 페리를 타고 고베에서 고마쓰시마항에 도착한 아라이를 후쿠다구미 조직원이 총격해 버린다. 급습당한 아라이는 3발의 총탄을 맞았으나 목숨만은 겨우 건졌다. 아라이를 총격한 후쿠다구미 측에서 아라이가 고베를 방문한 목적을 알았는지 여부는 이제 문제가 아니다. 후쿠다구미가 쏜 총탄이 깨뜨린 것은 지미치가 공들여 회복한 고마쓰시마 야쿠자계의 균형이었고, 이제 문제 되는 것은 바로 지미치의 "가오"였다.

 

※ 중간 조직 간 관계 정리

야마구치구미(No.2가 지미치 유키오) 산하: 코텐류구미(2대째 두목이 총격당한 아라이 요시오).

혼다카이와 가까운 카츠우라구미 산하: 히라이구미, 후쿠다구미.

 

야쿠자에 있어서 경제적 이익이 중요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야쿠자 영화에서 중견 야쿠자가 젊은 불량아를 스카우트할 때 상투적으로 "너도 맛있는 거 먹고, 좋은 차 타고, 예쁜 여자 안고 싶지?"라는 문구가 나오듯 화려한 생활은 야쿠자에 있어서도 동경의 대상이다. 그러나 야쿠자가 야쿠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오"다. 야쿠자 세계에서 가오가 한번 깨져 버리면 그 야쿠자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 후쿠다구미는 아라이를 습격함으로써 지미치 유키오의 가오를 깎아버린 꼴이 되어 버린다. 그때 당시 이미 칸사이 야쿠자의 2대 세력 중 하나였던 야마구치구미의 와카가시라 자리까지 올라간 지미치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지미치의 속마음은 격노 그 자체였다.

 

4. 고마쓰시마 습격 부대의 편성

 

지미치는 바로 움직였다. 후쿠다구미의 본거지 고마쓰시마를 습격하는 부대를 편성한 것이다. 지미치를 필두로 야스하라 마사오(安原政雄), 요시카와 유지(吉川勇次), 오자키 아키하루(尾崎彰春), 야마모토 켄이치(山本健一)가 중장급 대원들이 동원되며, 직계꼬붕, 산하단체 조직원까지 모두 100여 명이 습격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동원된 인원수도 인원수이지만 이때 부대를 이끈 주요 인물들을 보면 말 그대로 쟁쟁한 멤버들이다.

 

야수하라 마사오는 타오카 3대째 체제 초기에 와카가시라를 맡았다. 친형이 타오카의 명을 받아 야수하라운수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와카가시라 자리를 지미치한테 이양한 뒤 새로 타오카의 꼬붕이 된 인물이다. 3대째 초창기의 중심인물이자 타오카 카즈오의 측근 중 측근이다.

 

시카와 유지는 타오카의 3대째 쿠미쵸 취임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타오카 본인한테 사카즈키를 받은, 즉 직접적인 두목과 부하의 연을 맺은 처음의 꼬붕이다. 젊은 시절부터 고베의 난폭자로 알려졌다. 야수하라가 열던 노름판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야수하라한테 스카우트 된 맹자(猛者)다.

 

오자키 아키하루 역시 야수하라의 꼬붕이자 야마구치구미 산하단체에서 무투파의 주력 인사로 유명했다. 그리고 야마모토 켄이치는 후일에 (그의 이른 죽음과 맞물려) "전설의 야쿠자"로 유명세를 치렀다. 당시부터 이미 야마구치구미 내 무투파의 핵심 인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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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치 유키오

출처-<suruga-ya.com>

 

이러한 멤버들이 100명을 넘는 조직원과 함께 고마쓰시마행 페리를 탄 것이다. 경찰은 고베와 고마쓰시마에 긴급 경계 체제를 선포하고 고베를 관할하는 효고(兵庫)현 경찰에서 형사가 페리를 타고 지미치 일행한테 고마쓰시마 상륙을 포기하게 하려고 설득에 나섰다. 그러나 지미치는 "(총격당한) 아라이를 문병할 뿐"이라며 설득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태를 전해 들은 혼다카이의 부회장 사카이 고이치(酒井吾意智)가 급히 같은 페리에 몸을 싣기도 했다.

 

실제 경위가 어땠는지는 알려지지 않으나 사태의 흐름을 보니까 마지막에 페리에 탄 혼다카이 사카이에 의한 설득이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10월 21일에는 고마쓰시마 습격 부대를 이끌던 야수하라가 혼다카이 사카이와 함께 고마쓰시마 경찰을 찾아가 사태를 수습할 의향을 전했고, 24일에는 관련한 조직 사이에 화해(手打ち, 테우치)가 이루어졌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 테우치가 이루어짐에 있어서는 야쿠자 출신이자 자민당 소속 대물 국회의원(중의원 7선)이었던 코니시 토라마츠(小西寅松)도 공을 들였다고 한다.

 

이때 고마쓰시마에 결집한 습격 부대가 그 폭력을 발휘하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야마구치구미의 조직 동원력은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하다는, 생생한 인상을 세간에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이후 간사이 지역에서 규슈에 이르기까지 서일본의 야쿠자 조직에 있어 "야마비시(야마구치구미 문장)"를 건드리면 큰일이 난다는 공포와 경계의 대상이 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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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구미의 문장

출처-<위키피디아>

 

【오늘의 야쿠자 용어(20)~코소(抗争)】

이 연재(라 부르기가 꺼려질 정도 띄엄띄엄 쓰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를 죽 애독해 주는 분들은 알겠지만, 저번 회까지는 일본 야쿠자 조직의 대표격인 야마구치구미(山口組)가 겪어온 경제・사회적 변화와 그 속에서 먹고 살고자 야마구치구미가 보여 왔던 생존 전략이나 조직 구조의 특징 등을 소개해 왔는데요. 이번 회에는 일전 야마구치구미가 그 폭력을 전면으로 내세우며 (의도 했든 말았든) 일본 야쿠자사에 소위 말하는 "전국제패"를 시작하는 무렵을 살펴봤죠. 거기서 언급했듯이 야마구치구미가 그 세력을 일본 전국으로 늘려 넓히는 과정을 보면 야마구치구미가 행사하는 폭력의 질이 달라지죠. 그것은 당초 "싸움"이라면 작은 규모로 그때그때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노동자이기도 한 야쿠자에 의한 "동네 싸움"이었던 거죠. 그래야지 "우리 동네 오야붕"이란 말도 있었던 거고요. 그런데 덩치가 커지면서 먹거리를 확보할 영역을 전국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싸우는 방식 역시 대규모화・조직화하여 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들리게 된 게 바로 "코소"입니다. 한자로 적으면 "抗争"가 되고 이를 한국어로 읽으면 "항쟁"이죠. 주로 국가권력에 의한 억압이나 외국의 침략에 대해 맞서 싸우는 것을 일컫는 말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본어 "抗争(こうそう)"은 전혀 다르게 "야쿠자 조직 사이에 일어나는 싸움 중 대규모로 이뤄지는 싸움" 정도가 될 겁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코소라는 말 자체는 주로 경찰이나 보도기관이 쓰지 야쿠자 본인이 쓰는 것은 드문 인상입니다. 그럼, 야쿠자 본인은 온 조직이 나서는 싸움을 어떻게 부를까요? 야쿠자 둘에 의한 아래 대화를 보면 바로 아실 겁니다.

 

야쿠자A : 어이, 오야지(親父/오야붕)가 ○○구미 새끼한테 칼 맞았어!!

야쿠자B : 뭐라꼬? 전쟁이야!! 바로 도구(권총, 칼 등 무기를 뜻함) 챙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