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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출처-<문학동네>
자국민 제노사이드,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
이승만 정권의 자국민에 대한 학살은 1948년 고립된 섬, 제주도에서 시작되어 이듬해 육지로 번졌다. 섬에서 3만 명 이상이 죽었고, 육지에서는 20만 명 이상이 죽어야 했다. 이것이 이른바 ‘제주 4•3 사건’과 ‘보도연맹 사건’이다. 학살의 선봉에 선 것은 ‘군’도 ‘경’도 아니었다. 북한의 사회주의 정권 수립 과정에서 남쪽으로 피신해 온 부일 매국 인사들과 개신교 신자들로 이루어진 민간단체이자 이승만의 사병 조직이었던 ‘서북청년회’였다.
그 어떤 공적 지위나 권한도 없는 이들이 선봉에서고, 국민 보호가 존재 이유인 군경이 힘을 보태며 저지른 자국민 대량 학살 사건, 자국민에 대한 제노사이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매국의 면죄부이자 흔들리는 권력의 탈출구. 이것이었다. 빨갱이로 낙인찍는 것. 어찌 보면 2024년 지금까지도 유효한 그것이 이 학살을 가능하게 했다.
새에게 물을 줘
‘경하야.’ 12월 하순, 영하의 추운 날씨에 인선이 전송한 내 이름이 문자 창에 단출하게 떠 있었다. 이십 년을 친구로 지냈기에 나는 그녀의 습관들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다. 인선이가 이렇게 내 이름만 먼저 부르는 것은 급한 용건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와 줄 수 있어?’, 제주도에 있어야 할 인선이는 서울에 있었다. 그것도 병원이었다. 신분증을 가지고 오라는 말에 나는 서둘러 택시를 탔다. 택시에서 내려 병원 입구를 향해 걷는 내 눈에 ‘봉합수술 전문병원’이라는 현수막의 글씨가 낯설게 다가왔다. 병원 로비에 들어서자 손가락 발가락이 잘린 사진들이 보였다. 그것은 볼수록 고통스러운 사진이었다.
「잘렸어, 전기톱에.
마치 손가락이 아니라 목을 다친 사람처럼 성대를 울리지 않으며 인선이 속삭였다.」
나는 인선이 천천히 내미는 손을 보았다. 잘렸다가 봉합된 검지와 중지의 첫 마디들이 붕대 위로 노출돼 있었다. 선홍색 핏물과 검게 산화된 핏물, 이 피들이 수술 자국을 덮고 있었다. 인선은 나를 향해 어렴풋이 미소를 지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핏기가 빠져나간 입술은 보랏빛에 가까웠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인선을 처음 만났다. 나는 잡지사 기자였고, 인선은 프리랜서 사진가였다. 우리 둘은 동갑내기였고 인터뷰나 여행 기사들을 진행하며 길게는 3박 4일을 함께 지내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우정은 이십 년간 이어졌다. 형제자매 없이 마흔둥이로 태어나 자란 인선은 팔 년 전 제주 중산간 마을로 돌아갔다. 어머니의 노환을 돌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사 년 만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그곳에 자신만의 목공방을 차려 놓고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 사고는 목공 작업 중에 일어난 것이었다.
「안 그러면 죽어.
누가?
새.
새라니, 라고 되물으려다 말고 나는 지난해 가을 인선의 집에서 만났던 작은 앵무새들을 기억했다.」
왜 인선이가 나에게 신분증을 가지고 오라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제주 집에 가줘, 지금 당장.’, 인선이는 절박하게 부탁했다. 아미와 아마, 인선이가 키우던 두 마리의 앵무새를 기억했다. 아미는 몇 달 전에 죽었고 아마만 남았다고 했다. 아마가 아직 살아 있다면 물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
인선은 갈 수 없었다. 인선은 3분에 한 번씩 이십사 시간 내내 3주간 바늘로 상처를 찔러 피를 흐르게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나는 지난해 가을 제주 인선의 집에서 내 집게손가락에 올라탄 앵무새를 떠 올렸다. 조그맣고 가칠가칠한 발로, 거의 무게가 없는 몸으로 내 손가락으로 건너오던 새. 그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던 기억. 나는 서둘러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실톱을 깔고 자는 엄마와 인선의 가출
강풍이 먼바다의 먹구름을 흩고 있었고 수천수만의 새 떼 같은 눈송이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P읍까지 간다는 내 말에 무엇이라 말하는 버스 기사의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버스 차창 밖에는 눈보라가 거세게 불고 있었다. 버스에 승객은 오직 나뿐이었다. 인선의 집이 있는 중간산 마을은 P읍에서 한참 더 들어가야 했다. 가로등 없는 들길을 이 눈보라를 뚫고 가야 했다. 이건 미친 짓이야,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고향 이야기, 엄마 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았던 인선이 처음으로 말문을 연 것은 내가 잡지 일을 그만두었던 연말 때였다. 일을 사이에 두지 않은 순수한 친구로서는 처음으로 인선을 만났던 그때, 국숫집 통창 너머로 고운 소금 가루 같은 눈발이 반짝이는 것을 보며 인선은 조금씩 말했다.
「허이고, 수수깡 같은 내 똘. 아방 닮앙 신경이 명주실 같아그네......」
인선은 자신이 어릴 때, 배앓이를 할 때마다 엄마가 했다던 혼잣말을 들려주었다. 인선의 엄마는 바늘로 손톱 아래를 따주고 밤새 한없이 배를 문질러주며 이 말을 중얼거렸다고 했다. 그땐 불만이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더 조용해진 엄마와 자신, 세상엔 오직 둘 뿐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해엔 왜 그렇게 엄마가 미웠는지 몰라.」
그런데 열여덟 살 무렵, 이유 없이 엄마가 싫어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버스 정류장까지 삼십 분이 넘게 걸어야 하는 집에서, 흠집투성이 밥상을 꼼꼼히 행주질하는 엄마의 뒷모습이 끔찍했고, 옛날식으로 틀어 올린 엄마의 하얗게 센 머리가 싫었다고 했다. 그냥 세상이 역겨운 것처럼 엄마가 역겨웠고, 자기 자신이 혐오스러운 것처럼 엄마가 혐오스러웠다고 했다. 벌받는 사람처럼 구부정하게 걷는 엄마의 걸음걸이를 보며 미움이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무슨 불덩이 같은 게 쉬지 않고 명치께에서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고 했다.
「결국 집을 나온 건 살고 싶어서였서. 그러지 않으면 그 불덩이가 나를 죽일 것 같아서.」
12월 이맘때, 가출을 단행했다고 말했다. 품앗이로 귤을 수확하는 때라 엄마는 새벽부터 일하러 마을로 갔기에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먼저 수확한 자기네 밭의 귤 판 돈, 제법 큰 돈을 들고. 집을 나서기 전에 엄마가 쓰는 안방을 돌아봤다고 했다. 전기장판이 깔린 요가 펼쳐져 있었고 그 요 아래에는 실톱이 있었다고 했다.
「날카로운 쇠붙이를 깔고 자야 악몽을 안 꾼다는 미신을 엄마는 믿었거든. 하지만 실톱을 깔고도 엄마는 자주 꿈을 꿨어. 숨을 죽여 몸서리를 치고, 이따금 들고양이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흐느껴 울었어. 그 모습, 그 소리가 나한텐 지옥이었어.」
무작정 서울로 온 인선이는 터미널 근처 일식당 서빙 일을 구했다고 말했다. 첫날 두 시간의 테스트를 통과한 인선이는 얼마간 흥분상태에서 가슴 한편으로 조여드는 불안감을 느꼈고, 한편으로는 자유를 느끼며 길을 걸었다고 했다. 지독한 한기를 느끼며 코트 깃을 세우고 고개를 수그려 걷다가 살얼음 위로 얇게 쌓인 눈을 밟고 그만 축대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고 했다.
다음 날 정오에 발견돼 인근 종합병원으로 실려 간 인선이는 열흘간 의식이 없었다고 했다. 마침내 눈을 떴을 때 어두운 병실에서 새카맣게 눈을 빛내며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엄마를 보았다고 했다. 엄마는 울지도, 자신을 나무라지도 않았으며 새카맣게 눈을 빛내며 자기의 손을 꽉 붙잡고만 있었다고 했다.
눈보라를 헤치며 인선의 집으로
출처-<아산시청>
P읍에 도착하자 숨 막히는 밀도의 눈보라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마치 태풍의 눈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었다. 그러나 더 큰 폭설이 곧 올 것처럼 하늘은 어두웠고 거리엔 인적이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마와 뺨에 부딪혀 맺히는 눈의 차가움이 아니라면 꿈이라 생각할 만큼 고요했다. 나는 인선의 집으로 향했다.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다. 해안도로에서 보았던 회백색 눈안개와 구름의 덩어리 속으로 버스가 들어선 거다. 어느 사이 도로변에 인가가 사라졌다.」
인선의 집은 P읍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세천리로 간 후 30분 정도를 걸어야 하는 곳에 있었다. 다시 나는 P읍에서도, 세천리로 가는 버스 안에서도 몇 번을 망설였다. 지금이라도 포기해야 한다고. 무딘 칼로 안구 안쪽을 후비는 듯한 편두통과 다시 무거워지는 눈, 그리고 짙어지는 어둠 때문이었다. 20그램, 인선이가 말한 새의 무게였다. 나는 계속 가기로 했다.
「엄마가 어렸을 때 군경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그때 국민학교 졸업반이던 엄마랑 열일곱 살 이모만 당숙네에 심부름을 가 있어서 그 일을 피했다고 엄마는 말했어.」
턱이 떨리고 이가 부딪히며 딱 소리가 났다. 눈보라가 다시 시작되었다. 다시 눈보라가 시작되었고 눈송이들이 내 눈동자로 떨어졌다. 옆으로 몸을 돌려 보았다. 뼈가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기억을 되살리며 숲 사이 비탈진 길로 들어섰다. 그 순간 시야가 하강했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눈더미 속으로 들어가며 구른 것이었다. 그나마 패딩과 쌓인 눈이 충격을 줄여주어 무사했지만 이제 보이는 것은 암흑뿐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여덟 살 여동생 시신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포개지고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하는데, 간밤부터 내린 눈이 얼굴마다 얇게 덮여서 얼어 있었대. 이모가 차마 맨손으론 못하고 손수건으로 일일이 눈송이를 닦아내 확인을 했대. 내가 닦을 테니까 너는 잘 봐, 라고 이모가 말했다고 했어.」
일어나서 움직여야 했다. 더 체온을 잃어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인선이는 이렇게 눈만 오면 가출 후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른다고 했다. 인선은 엄마의 고백을 들으며 점점 엄마에 대한 미움이 사라져갔다고 말했다. 두통이 조금 잠잠해지며 끔찍한 추위가 나를 파고들었다. 내가 미끄러진 이곳은 아마 길이 아니라 건천인 것 같았다.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 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인선의 말이 떠올랐다. 이 건천을 경계로 원래는 마을이 나뉘어 있었다고 했다. 내 너머로 사십 호 안팎의 집들이 모여 있었는데, 1948년 소개령 때 모두 불타고 사람들이 몰살되며 폐촌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인선의 집이 외딴집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걸었다. 예전 인선과 함께했던 모든 기억을 되살리며, 눈보라 속에서 몽롱해져가는 의식을 되잡으며, 무시무시한 추위와 싸워가며 걸었다. 어느덧 눈이 그치고 창백한 반달이 숲 위로 떴다. 거대한 검은 구름들은 강풍을 타고 전진하고 있었다.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가르며 나아가 어느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멀리 불빛이 보였다. 눈언저리를 닦아 보았다. 꿈이 아니었다. 그 불빛은 인선의 목공방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작별하지 않는다
「부드러운 것이 손끝에 닿는다.
더이상 따스하지 않은 것이.
죽은 것이.
아무것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내 숨소리, 떨리는 패딩 코트 소매가 철망에 스치는 소리 뿐이다.」
공방 바닥, 사방에 튄 인선의 핏자국을 보며 안채로 들어오자마자 새장으로 향했다. 아마, 내가 살리러 왔어. 그러나 아마는 이미 죽어 있었다. 방금까지 따뜻한 피가 돌았을 그 조그만 몸을 들여다보았다. 그 끊어진 생명이 내 가슴을 부리로 찔러 심장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새를 감쌌다.
「죽으러 왔구나, 열에 들떠 나는 생각한다.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나는 인선의 옷들을 찾아 닥치는 대로 입었다. 그리고 인선의 매트리스에 누워 솜이불을 올려 쓰고 덜덜 떨었다. 문들은 누가 두드리는 것처럼 겨울바람에 덜컹거렸다. 식탁 등이 진저리 치다가 꺼졌다. 폭설로 인한 단전이었다. 보일러가 꺼질 테니 난방도 중단될 것이었다. 흐려지는 의식 속으로 예리한 꿈들이 파고들었다. 내 눈앞에서 바다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수평선은 검은 사막의 지평선으로 바뀌고 있었다.
삐이, 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너는 죽었잖아. 꿈일까, 나는 의심했다. 아마는 분명히 죽었고 새가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마에게 물을 줘.’ 인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경하야.’ 잠에서 막 깨어난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선이었다. 병실에서만큼은 아니지만 창백하고 야윈 얼굴로 인선이 나를 보고 있었다. 어둠 때문에 더 커 보이는 인선의 두 눈이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 보고 있었다. 서울 병원이 아닌 지금 내 앞에 인선이가 있는 것이다.
꿈과 생시 사이에서 검은 나무들이 서 있는 벌판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인선에게 검은 나무들을 심고 그것을 영화로 찍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인선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사진을 전공한 인선은 늘 가난했지만 이십 대 후반부터 끈기 있게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곤 했었다. 인선의 공방에는 그녀가 모은 나무들이 있었다. 인선은 내 제안을 정말로 실현하려고 한 것이었다. 언젠가 인선은 나에게 이 프로젝트의 제목을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
주전자와 머그잔 두 개를 양손에 들고 걸어오며 인선이 되뇌었다. 작별하지 않는다.」
밤의 대화, 학살의 기록들
어느 사이, 인선이는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촛불의 빛이 눈동자에 어려 갑자기 생기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촛불이 흔들렸다. 새어 들어오는 바람 때문일 것이다. 인선이 식탁 위에 두 손등을 얹었다. 열 개의 깨끗한 손가락들이 가지런히 펼쳐져 있었다. 봉합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인선은 그 손으로 식탁을 짚고 일어서며 말했다. 보여줄 게 있어.
「해거름에 트럭으로 두 대 가득 사람들이 실려와서. 못해도 백명은 되실 거라. 군인들이 저 모살왓에 총검으로 네모지게 금을 그어놔그네, 사름들신디 그 안에 다 서 이시랜 하데.」
출처-<제주4.3희생자유족회>
「어둑어둑해지는데 총소리가 멈춰서 문구멍으로 내다봤더니, 피투성이로 모래밭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을 군인들이 바다에 던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옷가지들이 바다에 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다 죽은 사람들이었어요.」
「서청-서북청년단- 사름들이 잔인해그네, 내내 같이 댕기던 민보단원들도 수틀리민 죽여분다는 소문이 이시난 나는 걱정되었주게. 파출소 마당에다 산사름 각시를 총검으로 찔렁 눕혀놔그네 민보단 사름들헌티도 다 한 번씩 죽창으로 찌르렌 했다는 이야기도 들어난.」
2007년 뒤로 손이 묶인 채 발견된 4.3 희생자 유해
출처-<제주 4.3 연구소>
인선이 들고 온 것은 철제 책장에 꽂혀 있던 상자 중 하나였다. 그 안에는 날짜와 표제어가 적힌 노란 포스트잇, 그리고 여러 책자가 들어 있었다. 인선은 그것들을 식탁에 쌓았다. ‘세천리 편’이란 부제가 적힌 자료집이 있었고 이 섬의 학살에 대한 구술 증언을 담아 놓은 자료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읽으며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도, 바람이 멎어 촛불이 흔들리지 않는 것도, 모두 잊었다. 그저 침묵에 싸인 검은 유리창을 멍하니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이 집은 엄마의 외가였어. 인선이 나에게 말했다. 그 학살의 시간에 이 집도 불탔고 이후 돌벽만 남은 걸 다시 올린 것이라 말했다. 나는 지금 불길이 번졌던 자리, 들보가 무너지고 재가 솟구치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거기 있었어, 그 아이는.
처음에 엄마는 빨간 헝겊 더미가 떨어져 있는 줄 알았대. 피에 젖은 윗옷 속을 이모가 더듬어 배에 난 총알 구멍을 찾아냈대. 빳빳하게 피로 뭉쳐진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은 걸 엄마가 떼어내 보니 턱 아래쪽에도 구멍이 있었대. 총알이 턱뼈의 일부를 깨고 날아간 거야. 뭉쳐진 머리카락이 지혈을 하고 있었는지 새로 선혈이 쏟아졌대.」
2008년, 4.3 사건 당시
집단 총살된 후 암매장된
희생자들을 발굴한 모습
인선은 어린 시절의 엄마가 이모와 함께 널브러진 시체들 얼굴의 눈을 닦으며 오빠와 막냇동생을 찾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신이 흐려져 가던 시기의 엄마가 가장 많이 한 이야기라고 했다. 말을 하는 인선의 눈동자에서는 불꽃과 그을음이 함께 타고 있었다. 인선은 눈을 감았다. 그 불꽃을 눌러 끄듯이. 이모와 엄마, 두 어린 여자애들이 의식 없는 동생을 교대로 업어가며 당숙네까지 걸어갔다고 했다.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과 삼십사 년간의 침묵
인선은 몸을 일으켜 캄캄한 책장으로 가더니 상자 하나를 가슴에 받쳐 들고 왔다. 그 상자 속에는 여러 신문 조각과 사진들, 그리고 교도소에서 온 편지들이 회색 무명실로 묶인 채 들어 있었다. 인선이 나에게 말했다. 엄마 옷장 서랍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인선의 외삼촌, 인선 엄마의 오빠는 그날 학살의 현장에 없었다. 산으로 도망쳤던 외삼촌이 내려온 것은 자수하면 처벌하지 않겠다는 (미군 정찰기가 뿌린) 삐라 때문이었다. 인선의 외삼촌뿐만이 아니었다. 중간산이 불타고 민간인 삼만여 명이 살해된 초토화 작전이 일단락된 1949년 봄, 한라산에 가족 단위로 숨어 있던 이만여 명가량의 민간인들이 그 삐라를 믿고 내려왔다고 했다. 아이들과 노인을 등 뒤로 숨기고, 총에 맞지 않기 위해 흰 수건을 나뭇가지에 묶어 들고 내려오는 깡마른 남녀들의 행렬이 자료 사진 속에 들어 있었다.
「그렇게 헤어지기 전에 두 자매가 함께 대구 형무소에 찾아간 게 1954년 5월이야.
인선의 고요한 목소리가 정적 가운데 울린다.
엄마가 열아홉 살, 이모가 스물세 살 되던 해에.
그곳에 외삼촌은 없었어.」
국군에 의해 연행되는 4.3 희생자들
처벌하지 않겠다던 약속은 거짓이었다. 인선의 외삼촌을 포함해 수천 명이 체포되어 육지로 실려 가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고문이 자행되었고 십오 년, 십칠 년씩 징역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끝나고 인선의 엄마와 이모는 오빠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오빠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1950.7.9. 진주 이송’, 일련번호가 매겨진 수기 명부 사본에 찍힌 이 스탬프가 인선이 외삼촌의 마지막 흔적일 뿐이었다.
「그해 여름 대구에서 검속된 보도연맹 가입자들이 대구형무소에 수용됐어.
바스락거리는 습자지에 싸인 사진 묶음을 집어들며 인선이 말한다. 날마다 수백 명씩 트럭에 실려 들어오는 사람들을 더 수용할 공간이 없게 되니까 재소자들부터 골라내 총살했어. 그때 죽은 좌익수 천오백여 명에 제주 사람 백사십여 명이 포함돼 있었어.」
학살된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들
보도연맹 학살 사건, 좌익으로 분류해 수많은 사람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켜 놓고, 이승만 정부에서 내려보낸 할당량을 채우느라 이장과 통장이 아무렇게나 임의로 적어 올린 사람들까지...... 전쟁이 발발하자 서북청년단 등을 내세워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학살해 암매장한 사건, 이십만에서 삼십만 명의 자국민을 학살한 사건, 이것이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었다. 제주 4.3에서 살아남은 인선의 외삼촌은 끝내 육지 감옥에서 살해당한 것이었다.
「그후로는 엄마가 모은 자료가 없어, 삼십사 년 동안.
인선의 말을 나는 입속으로 되풀이한다. 삼십사 년.
...... 군부가 물러나고 민간인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인선과 나는 정적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는 깊이 내려가고 있었다. 굉음 같은 수압이 짓누르는 구간, 어떤 생명체도 발광하지 않는 어둠 속으로.
눈과 혀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불꽃
「대답 대신 나는 손을 뻗어 뼈들의 사진 위에 얹었다.
눈과 혀가 없는 사람들 위에.
장기와 근육이 썩어 사라진 사람들.
더이상 인간이 아닌 것들.
아니, 아직 인간인 것들을 위해.」
인선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들의 나무를 심을 땅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정적을 견딜 수도 없었다. 인선을 따라나섰다. 어둠 속에서 인선을 따랐다. 속눈썹에 눈송이들이 맺힐 때마다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인선을 쫓았다. 인선은 눈과 어둠에 싸인 숲으로 들어섰다. 지금 내 앞의 인선이 혼이라면 그녀는 어디까지 나를 데려가려는 건지.
「섬으로 돌아온 뒤 가끔 그날을 생각했어.
급격히 상태가 나빠진 엄마가 밤마다 아이처럼 기어서 문턱을 넘어오면서부터는 더 자주.」
인선은 어머니의 마지막 즈음에 대해 말했다. 땀범벅이 되어 몸부림치던 엄마, 잠들려던 자신을 깨워 도와달라고 외치던 엄마, 어느 순간 정신이 돌아왔을 때 끝없이 피투성이 기억들을 쏟아 내던 엄마에 대해. 인선은 어쩌다 잠든 엄마의 젖은 뺨을 만지며 생각했다고 말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구해......
정적에 쌓인 숲속에서, 눈의 벽 속에서 나와 인선은 드러누웠다. 그때, 내 눈앞에 한 여자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포기하자. 이감된 날짜를 기일로 하자. 섬으로 돌아오는 배에 혼자 올라 방금 들은 말을 곱씹는 사람. 수만 조각의 뼈들 앞에 다다른 사람. 머리를 숙이고, 굽은 허리를 더 구부리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인선의 엄마가.
잠이 몰려왔다. 여기서 잠들면 안 돼. 인선이 나에게 속삭였다. 나는 팔을 뻗어 인선이 내민 종이컵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 초를 감싸고 있는 종이컵은 전체가 따스했다. 그게 불꽃의 열기 때문인지 인선의 체온 때문인지는 구별할 수 없었다.
인선에게 손을 내밀었다. 인선의 손이 잡히지 않는다면 인선은 지금 서울 병상에 있는 것이다. 3분마다 한 번씩 바늘로 상처를 찔러 피를 빼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인선아, 사라지지 마. 네 얼굴에 쌓인 눈을 닦아 줄게. 내 손가락을 이로 갈라 피를 나눠 줄게.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무탈한 인생을 위해 작별하지 말아야 할 것들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 살해, 대량 학살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주로 정치적 목적이나 다른 민족 다른 종교에 대한 혐오와 증오감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참으로 끔찍한 범죄입니다. 단어 자체가 사라져야 할 만큼 말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제노사이드는 숱하게 일어났습니다. 십자군이란 이름 하에 벌어진 이슬람인들에 대한 학살, 유럽인들에 의해 자행된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등이 그것입니다.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 희생자들
가까이로는 20세기 말에 일어난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구 유고 연방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세르비아계 민병대를 중심으로 한 군사 집단이 보스니아계 무슬림인들을 집단 학살당한 사건입니다. 소년 여자 할 것 없이 9,000명에 달하는 죄 없는 민간인들이 잔인하게 비참하게 죽어야 했습니다. 제노사이드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단어, ‘인종 청소’란 말까지 등장했습니다.
12세기 무렵부터 20세기 말까지 지중해에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칸 반도에서 벌어진 제노사이드의 사례들을 보노라면 한반도 이남 땅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먼 시공간의 일들로 느껴집니다. 우리의 인생과는 관계없는 세계사 속 여러 사건 중 하나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야말로 가장 많은 제노사이드를 경험한 민족입니다. 제주 4.3 학살, 보도연맹 학살, 그리고 가장 최근인 광주 학살까지 말입니다. 더욱 놀랍고 비참한 것은 이 학살들이 타민족, 타종교, 타국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 아닌 바로 우리 공동체 스스로가 저지른 자국민 학살이었단 것입니다. 땅을 치며 통곡하고 피를 토해도 풀리지 않을 일들입니다. 잘못 끼운 첫 단추,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시작하여 박정희를 거쳐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독재 권력 집단에 의해 자행된 자국민 학살입니다.
5.18 당시 학살당한 시민들
출처-<한겨레>
억울하고 분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토록 소중한 각 개인의 인생들이 무자비한 권력 앞에서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얼마나 빠른 시간에 비참하게 스러질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우리 인생이란 권력이란 이름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는 20g짜리 작고 연약한 앵무새 같은 것입니다.
「살인자.
목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다.
살인자.
더, 더 크게 말해야 한다.
......어떻게 할 거야, 네가 죽인 사람들을?」
권력이 주먹을 쥐는 순간, 작은 새는 온몸의 뼈가 부러지며 즉사할 것입니다. 막강한 권력 앞에서 그저 하염없이 연약한 것일 뿐인 각 개인의 인생들. 그 인생들이 무탈하고 평온하게 삶을 누리려면 권력이 주먹을 쥐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인생을 걸고 말입니다.
학살의 기억, 권력의 만행들과 작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작별할 수 없습니다. ‘인선’이 3분에 한 번씩 절단된 손가락 접합 부분을 바늘로 찔러 피를 내듯이 우리는 수시로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처벌해야 합니다. 처벌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계속 시간이 흘러 점점 더 먼 과거의 만행이 될지라도 반드시 처벌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 인생이 무탈하게 진행되도록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과업입니다.
“권력은 인간을 타락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은 권력을 갖게 되면 권력을 타락시킨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
‘민주주의의 함정’에 빠진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이 땅의 유권자들은 손바닥에 ‘王(왕)’자를 새기고 나온 인물에게 국가 권력을 위임했습니다. 타락에 빠져들고 있는 권력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며 살고 있습니다. 흔들리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이라는 절대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단어까지도 서슴없이 나오고 있는 시기입니다. 전쟁이 나도 죽지 않을 것이며 전쟁이 나도 책임지지 않을 자들의 입에서 말입니다. 우리 인생이 많이 위태롭습니다. 위 작품 속 ‘인선’과 그녀의 어머니가 겪어야 했고 살아야 했던 인생이 더 큰 무게로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타락한 국가 권력의 피해자들, 그들의 대를 잇는 고통과 상처들. 두 눈 크게 뜨고 그것을 직시하는 것. 외면하지 않고 잊지 않는 것. 권력이 타락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 이미 타락한 권력이라면 그 힘을 박탈하는 것. 이것이 내 인생을 무탈하게 하는 것이란 생각을 전하며 이른 번째 인생 탐구를 마음 무겁게 마칩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며
이육사(좌)와 윤동주(우)
출처-<이육사문학관, 윤동주기념사업회>
일제강점기라는 현실 앞에서 윤동주 시인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습니다. 이육사 시인에게 일제강점기는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절망 속에서 시인은 ‘강철로 된 무지개’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노천명은 식민지가 된 조선의 청년들에게 ‘남아라면 군복에 총을 메고’ 일본 제국주의 전쟁에 총알받이로 나가 죽으라고 선동했습니다. 이보다 한술 더 떠서 서정주는 조선 경기도 개성의 스물한 살 청년을 ‘마쓰이 히데오’라 부르며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이란 싯구로 식민지 청년들에게 ‘가미가제’ 특공대로 지원할 것을 선동했습니다.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반인륜적 미친 짓거리인 자살특공대 ‘가미가제’로.
노천명(좌)과 서정주(우)
일제강점기에 대한 윤동주와 이육사, 그리고 노천명과 서정주 같은 이들의 인식과 대응 방식의 극명한 차이는 현실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위대한 예술의 토대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를 통해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해 섬찟하면서도 섬세한 문학적 형상화를 보여주었고, ‘소년이 온다’를 통해 시와 소설의 경계를 허무는 놀라운 문체로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당한 민중들을 보듬고 그 넋을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를 통해 타락한 권력의 만행 앞에 파괴된 인생들에게 고통스러우면서도 따뜻한 연대를 보냈습니다.
왜곡된 우리 현대사 속 선량한 피해자들에 대한 연대와 타락한 권력에 대한 예술적 저항. 이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소식이 기쁘고 반가웠던 이유입니다. 스웨덴 한림원은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해 “역사적 상처에 직면하고 인간 삶의 취약성을 노출시키는 한강의 시적 산문”이라 평했습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고 또 축하합니다. 한강 작가의 친필을 딴지 독자분들께 보여드리는 것으로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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