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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굴이 공개되었다

 

한 여중생이 무인점포에서 샌드위치를 계산하던 중 기계가 오작동하였다. 스마트폰 간편결제로 결제해서 돈은 분명히 빠져나갔는데 기계에는 결제가 제대로 안 된 것으로 뜬 것이다. 이는 무인점포의 기계에 종종 일어나는 오작동 가운데 한 가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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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Pexels>

 

여중생은 잠시 고민하다 시시티브이 카메라를 향해 돈이 빠져나간 내역을 당당하게 보여준 뒤,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얼마 후, 이 여중생은 큰 곤경에 처한다. 그 무인점포에 자신이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는 장면과 함께 얼굴 정면이 나온 사진이 붙은 것이다. 가게 주인은 사진과 함께 이런 문구를 함께 기재했다.

 

"샌드위치를 구입하고는 결제하는 척하다가 '화면 초기화' 버튼을 누르고 그냥 가져간 여자분!! 잡아보라고 CCTV 화면에 얼굴 정면까지 친절하게 남겨주고 갔나요? 연락주세요."

 

분명히 결제하고, 기계가 오작동한 것을 배려해 결제된 스마트폰 화면까지 CCTV를 향해 보여줬는데 점주가 도둑으로 오인한 것이다. 이 점주의 행위는 불법이었다. 설사 진짜 도둑이라 해도 얼굴 사진을 막무가내로 공개하고 저격하는 것은 위법하기 때문이다. 결국 여중생의 부모는 점주를 고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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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MBC>

 

이 사건에 대한 사람은 누구라도 점주의 편을 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이 사건에 대한 반응은 주로 점주에 대한 비난이었다. 그런데 비난 중에서는 전후 사정을 충분히 헤아리지 않고 다소 과격하게 비난한 사람들도 있었다.

 

"고작 3천 원대로 생사람을 도둑 취급했으니 합의금 3천만 원 정도 맞아봐라."

"점주 얼굴은 왜 공개하지 않는 거냐"

 

등등, 신랄한 비난들이 있었다. 점주는 분명히 잘못했으나, 기계가 오작동해 결제 내역이 뜨지 않은 것도 사실인데 이 부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비난들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전후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스스로 정해 응징한 점주의 행동이 그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점주는 한 명에게 그런 행동을 했지만, 그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에게 비난받았다.

 

2. 점주의 실수

 

점주의 편을 들려는 것은 아니지만, 점주의 행위에서 잘못된 점은 ‘얼굴이 찍힌 사진’을 공개하고 저격했다는 점뿐이다. 기계가 오작동해 결제 내역을 확인하지 못하고 여중생을 도둑으로 착각한 것은 따지고 보면 도덕적으로 큰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무인점포에서의 도난 사건을 실제로 비일비재하고 그중에서는 계산하는 척하다가 계산하지 않아놓고 나중에 걸리면 ‘계산된 줄 알았다. 실수다.’라고 변명하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아마 상대가 미성년자라는 사실도 점주는 몰랐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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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Pexels>

 

만약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 불륜을 저지른 배우자와 그 상대방의 얼굴을 공개했다면, 그 행위가 설령 위법한 것일지언정 사람들은 그 행위를 저지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편들어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위법한 행위라고 해서 언제나 비난받는 것은 아니다. 점주로서는 기계가 오작동해 도둑으로 오해한 것은 실수이고, 얼굴 공개는 위법인 줄 몰랐기 때문에 또 실수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변명은 사람들의 비난을 가라앉히기는커녕 오히려 불을 지필 뿐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점주가 ‘3,800원’이라는 적은 금액을 손해 보는 것에 과한 대응을 했고, 결과적으로 그 손해 역시 오해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것’에 대한 과잉 반응은 언제나 혐오감을 일으킨다.

 

간혹, 아주 작은 피해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되갚아 주겠다고 이를 가는 사람들이 있다. 상대에게 작은 꼬투리라도 발견하면 그냥 넘어가거나 좋게 말할 수도 있는 것을 꼭 비꼬아 이야기하며 무안을 주고, 큰 소리로 지적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이 어떤 피해를 보지 않았는데도 앞으로 어떤 피해를 당할 것이라고 망상을 하거나 상대를 잠재적 가해자로 여긴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은 항상 약간은 화가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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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MBC>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사람들은 참 안타깝다. 보통 사람은 큰 스트레스 상황에 놓였을 때, 아주 작은 피해를 보는 것에도 예민해지고, 아주 작은 손해를 보는 것도 견딜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속은 전쟁 후 황폐해진 마을과 같다. 자신들이 먹을 것도 부족하기 때문에 부모 잃은 어린아이가 먹을 것을 달라고 문을 두드려도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는 사람들, 살해당하고 약탈당할까 봐 낯선 이를 보면 인사를 건네는 대신 총구를 겨누는 사람들로 가득 찬 마을이다.

 

3. 마음이 황폐한 사람들

 

이런 마을에 평화롭게 살던 한 사람이 발을 디뎠다고 생각해 보자. 아무런 잘못 없이 총을 맞기 십상이며, 운이 좋다 해도 마을 사람들의 날 선 눈빛에 마음의 상처를 입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마을에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라면, 우리는 그 마을에 좋은 인상을 느끼기는 어렵다. 좋은 인상을 받기는커녕 머리끝까지 화가나 이 마을 따윈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얘기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운이 좋을’ 경우다. 만약 이 마을에서 총을 맞아 차가운 시체가 된다면 마을을 비난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게 될 테니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마을에 방문하게 된다면, 그 마을을 혐오하는 것을 넘어 공포심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내 안위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마을이 전쟁을 겪었든 말든, 내가 그 마을에서 다치거나 비난당하거나 죽을 수도 있는데 그 마을의 사정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는 대부분의 ‘혐오스러운 사람들’은 이런 황폐해진 마을과 같다. 그에게는 분명 그렇게 못되고 각박한 사람이 될 만한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만나 방어적인 태도에 상처받고, 우리는 각박한 마을에 대해 혐오감을 갖는 것처럼, 각박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도 본능적인 공포와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전쟁으로 각박해지고 위험해진 마을을 탱크로 밀어버리고 마을 사람들을 공격한다고 해서 우리가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대응은 세계를 점점 더 황폐하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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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Pexels>

 

황폐화된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과한 비난과 응징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반성하게 하거나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럴 경우, 응징당한 사람은 피해의식을 더 키우고 더 각박한 사람이 된다. 결과적으로 황폐해진 사람들을 향한 과한 비난과 응징은 오히려 세상을 더 각박한 곳으로 만들 뿐이다.

 

황폐해진 마을에 들어섰을 때 가장 좋은 대처는 곧바로 그 마을을 빠져나오는 것이다. 황폐해진 사람을 만났을 때도 우리는 그 사람을 피하는 것이 좋다.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을의 재건을 돕듯, 그 사람의 마음이 회복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만, 전문가가 아닌 이상 그런 사람들에게 섣불리 다가갔다간 해를 당할 수도 있다.

 

우리가 응징하지 않아도, 그들은 이미 스스로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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