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가 결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트럼프 당선이 한국과 국제정세에 미칠 영향” 같은 걸 말하려는 것이냐. 그렇지 않다. 그런 복잡한 주제는 전문가에게 맡기자.
이 글에서는 트럼프가 당선됨으로써, 미국인들의 실제 분위기는 어떤지 현지 거주민의 시선에서 느끼고 경험한 것을 간단히 말해보려 한다.
트럼프 당선에 대한 반응
1. 내가 거주하는 북버지니아, 워싱턴 디시 지역은 미국 대선의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지역 중 하나다. 공무원들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 연방정부 관리자 대부분은 정무직이다. 백악관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각 부처의 관리자들도 대폭 물갈이된다.
애들 학교 학부모 중에도, 민주당 정권 쪽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과 대선 이후에 얘길 나눠보진 않았지만, 아마 그 사람은 민주당계 싱크탱크에 들어가서 다음 기회를 노리든가, 원래 본업 쪽으로 재취직을 알아볼 것 같다.
이처럼 직접 영향을 받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워싱턴DC 인근에는 연방정부에 국방/컨설팅 업무를 제공하거나, 공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주민들 대다수는 간접적으로 이번 대선에 영향을 받는 셈이다. 우리 부부 예를 들어보자.

워싱턴 D.C. 전경
2. 내 와이프는 Fannie Mae/Freddie Mac 같은 금융 공기업에 다닌다. 이들 공기업은, 2009년에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완전히 국유화되었다. 현재는 사소한 비품을 구매하는 것까지도, 상급 기관인 FHFA(연방주택기업감독청)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 직원들 급여 부분에서도 사기업에 비하면 아쉬움이 많다. 구체적으로는, 기업은 계속 역대급 실적을 내는데, 직원들은 주식을 받거나 성과급을 받지 못한다. 이익금 대부분은 현재 주인인 연방정부로 흘러간다. 그래서 내부적으로는 지금을 ‘정부 강점기’라고 부른다.
트럼프는 1기 집권 당시 중요 공약 중 하나로 금융 공기업의 민영화를 내걸었다. 시장 논리에 맡겨서, 주택담보 대출비용을 더 낮추자는 것이다. 하지만 재선에 실패하면서 금융 공기업의 민영화는 흐지부지됐다. 그 뒤 들어선 바이든 행정부는 반대로 금융 공기업을 적극적으로 동원해서, 서민 대출을 늘리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180도 선회를 해온 셈이다.

서민대출 올리라고!
그런데 다시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트럼프 정권은 연방정부에 속한 금융 공기업의 민영화를 재추진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1기가 민영화의 밑그림을 그리는 수준이었다면, 2기에는 본격적인 시행이 이뤄질지 모른다.

바이든 정책 다시 뒤집어!
와이프 회사 사람들 대부분은 민영화를 반기는 분위기다. 미국에서는 공기업도 직원을 쉽게 자르는 분위기다 보니, 딱히 민영화한다고 해서 고용 안정성이 바뀌는 것은 없다. 게다가 최근 공기업들은 좋은 실적을 내고 있다. 연방정부로부터 빌린 돈을 다 갚은 지 오래고, 지금은 이익금을 꼬박꼬박 배당으로 갖다 바치고 있다. 만약, 민영화가 이뤄진다면 그 이익의 상당한 부분은 직원들에게 인센티브로 지급될 가능성이 크다. 덕분에 회사 사람들은 요즘 부쩍 활력이 넘치는 분위기다.
3. 내가 일하는 사기업도 이번 트럼프 집권에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트럼프가 당선된 직후에 내가 다니는 회사의 주가가 두 자릿수 이상 크게 올랐다. 내가 속한 회사는 다른 금융기관을 인수·합병하는데 회사의 명운을 걸었는데, 바이든 행정부로부터 빡센 독과점 심사를 받으면서 인수합병이 지체되고 있었다. 그런데 금융권 규제 완화에 적극적인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인수합병 승인의 청신호가 켜졌다. 덕분에 트럼프 당선 직후 우리 회사 주식이 떡상했다.

직원들 반응
주가가 급등한 회사의 분위기는 당연히 좋다. 주가에 따라 보너스가 결정되는 경영진은 물론이고, 일반 직원들도 자사주 매입 프로그램/스톡옵션 등으로 자신이 속한 회사의 주식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평소보다 업무시간에 주식 창을 들여다보거나, 주식 얘길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회사에선 누가 대통령이 되었는가 하는 것보다는 주식계좌가 얼마나 올랐느냐가 더 큰 관심인 느낌이었다.
4. 이번 트럼프 당선이 첫 번째 당선 때와 가장 다른 부분은, 트럼프 당선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다는 점이다. 대선 레이스 내내 앞선 지지율을 보였던 힐러리와 달리, 해리스는 선거 막판까지 (여론조사상으로) 트럼프와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그래서 나와 같은 민주당 지지자들은 해리스의 당선을 바라면서도, 트럼프가 이길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오래전부터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돼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이미 대통령 트럼프를 한번 겪어봤다. 이미 "아는 맛"이라는 거다. 이해관계 그리고 정치적 성향에 따라 그 경험은 크게 갈리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대체로 "코로나 방역에 실패했지만, 그럭저럭 먹고살 만했던 시절"로 기억된다. 적어도 이 사람이 무슨 짓을 벌일지를 몰라 전 세계가 패닉했던 첫 번째 당선에 비하면 상당히 차분한 상태로 트럼프의 당선을 맞이하고 있다.
트럼프가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를 생각해 보면, 미국은 그럭저럭 잘 굴러갔다고 기억하니깐. (걱정하는 사람들의 경우) 이제 걱정하는 부분은 정치인 트럼프가 상징하는 가치나, 불러일으킬 혼란이다.
5. 원래 이긴 놈은 별말이 없다. 주변에 트럼프 지지자들은 대선 얘기가 나올 때마다 조용히 웃을 뿐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계속해서 내가 물어보니까, 이제야 나라가 정상화될 것 같아 다행이라는 속내를 드러낼 뿐이다. 이미 유튜브에는 PC주의와 미국 민주당을 조롱하는 영상이 넘쳐난다
선거 결과를 가지고 투덜대는 건 주로 민주당 지지자들이다. 이들은 트럼프가 다시 집권했을 때 찾아올 사회적 혼란과 미국 민주주의 시스템의 붕괴를 가장 걱정한다. 트럼프는 지난 대선 결과에 불복해서 1월 6일 국회 의사당 점거 폭동을 부추겼다는 전과가 있다. 주로 언론계나 학계 종사자 중에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다시 된 것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반면, 금융권 종사자들은 트럼프 당선에 환호성을 질렀다. 트럼프의 경제 정책은 세금 감면과 규제 완화로 대표된다. 이는 기업들과 주주들이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실제로 트럼프 당선된 날 다우지수는 1,500포인트 이상(3.6%) 상승하면서, 축포를 터뜨렸다.

가장 애매한 건 나같이 정치적으론 민주당을 지지하지만, 경제적으론 공화당 집권으로 덕을 보는 사람이다. 트럼프 당선으로 미국 사회에 더 큰 혼란이 찾아올 것 같아 마음이 어둡다가도, 주식계좌를 보면 (내가 속한 회사의 자사주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마치 우는데 웃는, 이런 느낌이랄까
출처-<영화 ‘악마를 보았다’>
6. 대통령 선거와 함께 치러진 상원, 하원 선거에서도 공화당은 다수당을 차지했다. 게다가 이번 공화당 후보로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트럼프가 이기는데 영혼을 건 사람들이다. 단순히 공화당이 과반을 차지했다는 것보다, 트럼프한테 충성하는 의원들로 상하원이 채워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미국에서는 과도한 의회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연방대법관 제도가 존재한다. 9명의 대법관이 종신직으로 직무를 수행하면서, 입법부와 행정부를 견제한다. 그런데 현재 연방대법관 9명 중 6명이 보수/공화당계이다. 심지어, 6명의 보수파 대법관 중 3명은 트럼프가 임명한 사람이다 (대통령이 이렇게 많은 대법관을 지명하는 건 드물다). 어쩌면 트럼프 임기 중에 대법관 9명 중 과반이 트럼프 지명인사로 채워질 수도 있다.
그러니까, 트럼프는 슈퍼 권력을 얻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본인 대선에서 이겼을 뿐만 아니라, 충성파 의원들을 의회에 박아두었고, 이걸 견제할 대법관들까지 조정할 수 있다. 트럼프 2기는 유례없이 강력한 파워를 가질 확률이 높다.

후훗~!
나는 너무나도 많은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상황이 두렵다. 트럼프는 막강한 권력이 쥐여줬을 때, 그것을 휘두르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다. 좋게 말하면, 트럼프 2기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미국 사회가 그동안 쌓은 신뢰와 가치를 훼손하면서, 엄청난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나는 내 걱정이 쓸데없는 것이길 바란다. 이번 트럼프 행정부 2기가 1기 때보다 더 안정적으로 미국을 이끌어가길 바란다. 잘사는 사람만 더 잘사는 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살기 좋았던 시절로 기억하는 시절이 되길 바란다. 무엇보다도, 미국 내 혐오나 사회적 갈등이 예전보다 줄어들었으면 한다. 새로운 행정부의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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