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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전편에 항씨 집안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먼저 초나라 최후의 명장 항연의 자손들의 행적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1


진시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항씨 가문은 초나라 수호의 상징이었다. 항연의 장렬한 최후는 눈엣가시를 없앤 쾌거인 동시에 초나라 독립운동의 밑거름이기도 했다. 이 거름을 먹고 가장 먼저 자라날 새싹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의 자손들이다. 이들은 가문과 조국의 원한도 품고 있었지만 능력도 있었다.


당시엔 교육시설이란 게 없다. 스승은 가르치고 제자는 배우는 교육집단, 즉 ‘학파’는 당사자들이 ‘결성’하는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교육은 주로 집안에서 이뤄진다. 명문가에서 능력 있는 인물들이 배출된 이유는 유전자 때문이 아니다. 가문 내에 교육시스템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항씨는 ‘싸우는 법’을 아는 가문이었다.


진시황은 처음엔 멸망한 초나라 일대에서, 중국을 통일한 다음엔 제국 전역에 항씨 일족 수배령을 내렸다. 진시황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 악명 높은 연좌제였다.


항씨들은 모여 있을 수 없었다. 뿔뿔이 흩어져 도망 다녀야 했다.


그래서 이 시기 항씨들, 특히 항연의 직계 가족들은 엉뚱한 곳에서 불쑥불쑥 등장한다.


어떤 학자들에 따르면 항씨들이 초나라 지역이 아닌 곳에 등장하는 이유는 진시황 특유의 정책 때문이라고 한다. 진시황은 전국칠웅 중 진나라를 제외한 6국의 왕족과 귀족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전통 기득권을 걷어냄으로써 항거의 구심점을 없애버리는 정치술수였다. 항연의 일족도 강제 이주되었을 거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나는 어느 정도는 자신감을 가지고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사료들을 대차 비교해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초한쟁패> 시리즈 첫 회의 주인공 장량이 진시황 암살에 실패하기 전까지 항씨 일족은 제국 공공의 적 1호였다. 그래서 일족이 모여 살 수 없었고, 함께 이동할 수도 없었다. “여기 지명수배자 있다”고 광고할 일 있는가.


최초의 통일 중국 시대가 열렸을 때 우리의 두 번째 주인공 항우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항연의 맏아들이었다. 항연과 최후를 같이했을 수도 있고, 진나라 공권력의 수배/추적 과정에서 죽었을 수도 있다. 물론 병으로 일찍 죽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항우는 고아였다. 숙부(둘째 친삼촌) ‘항량’이 형의 자식인 어린 항우를 품고 도망생활을 했다. 막내 친삼촌 ‘항백’은 살아남은 형과 조카와 함께할 수 없었다.


우리의 주인공은?


여전히 논두렁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2


중국이 최초로 통일되자 보잘 것 없는 마을 패택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중앙집권적 군현제가 실시되면서 패택은 ‘사수군 패현’이라는 정확한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다. 유방이 사는 마을은 ‘사수군 패현 풍읍 중양리’가 되었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중국인들, 당시에는 진나라와 망한 6국의 백성들은 역사상 처음 제국의 시스템에 편입되었다.


'중앙집권'


그렇다. 중앙에서 천하의 제1인자, 황제가 임명한 지도자들이 각지에 파견된 것이다. 패현에도 역시 현령, 즉 현의 행정수반이 왔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이상보다 낮은 곳에 위치한다. 동아시아 최초의 제국의 행정력은 여기까지였다. 지방을 관리하려면 현지인의 도움을 받는 한편, 현지인들을 제국 내부에 끌어들여야 한다.


현령은 우리 식으로는 ‘사또’다. 사또는 자신이 부임한 구역을 통치하기 위해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현지인 관리를 우리 식으로는 ‘아전’이라 부른다. 아전을 통상적으로 리(吏)라고 부른다. 리(吏)는 지금은 그냥 관리 전반을 뜻하는 말이 됐지만 원래는 아전이다. 아전을 정의해보자. ‘중앙 정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지방정부(즉 관아)에 속한 현지 출신 전문 인력’이다.


그런 면에서, 춘향전에 등장하는 사또와 아전의 관계는 진시황의 영향력 아래 있다. 패현에 부임한 최초의 현령은 역시 최초의 아전들을 채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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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령의 비서이자 회계사는 유방의 친구 중 하나였던 소하(蕭何)였다. 소하는 동네에서 일처리가 깐깐하고 성실하기로 정평이 났다. 유방과는 정 반대의 인물이었다. 이 남자는 평소에 유방을 한심하게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미워하지도 않았다. 소하는 요즘으로 치면 평민 출신의 고소득(동네 사람들의 두 배 정도) 전문직 종사자다. 건달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사실 유방을 좋아했다. 유방은 한심하긴 해도 술자리에서는 좋은 친구였을 테니.


소하의 빈틈없는 일처리 능력은 현령과 패현을 드나드는 진나라 관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들 기준에서 소하는 유학과 같은 사상이나 통치체계를 본격적으로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었다. 일자무식까지는 아니어도 학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기능인이었다. 외려 이런 사람이 실무엔 더 강할 수 있다. 소하는 ‘평민을 관리하는 데 동원된 평민’이다. 야심과는 거리가 먼 안정지향적인 인물이었다. 이런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된다. 야심과 능력은 별개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소하는 필요한 일만 하되, 필요한 일은 확실하게 끝내 놓는 타입의 인물이었다.


진나라 관료들은 소하를 천거해 중앙정부에 진출시키려고 했다. 물론 소하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다. 좋은 인재를 발굴하면 공이 생겨 승진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관료들은 소하를 발견할 때마다 추천인에 자기 이름을 새기려고 달려들었지만 그는 번번이 거절했다. 소하는 패현에 가족이 있었고 먹고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소하가 진나라의 붕괴를 예상하는 혜안을 지녔다고 하는데 이건 지나친 비약이다. 소하는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지역적 한계가 있다. 촌구석에서 무슨 수로 천하의 앞날을 예상할 수 있는가? 그가 처한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 아마도 중앙 정계의 정치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유방에게도 자그마한 기회가 왔다.





3


직업도 없고 허풍만 센 유방에게 제국의 직책이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닐 만한 자랑거리다.


그의 친한 친구들 중 벌써 두 명이 관리가 되어 ‘있어 보이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소하, 다른 하나는 조참(曹參)이었다. 진나라는 엄격한 법가 사상(사실 사상이라기보다는 군주를 위한 매뉴얼-방법론에 가깝지만)에 따라 지역마다 죄수를 가두는 감옥을 운영했다. 감옥은 변경을 지키고 강제노역에 동원할 인력을 저장해두는 제국의 냉장고였다. 감옥에도 관리자가 필요하다. 조참이 패현의 감옥 관리 업무를 맡았다.


그렇다면 파출소장과 동장, 동네 청년회장 사이 어딘가 쯤의 역할을 해 줄 사내도 하나 필요하다. 진나라는 십진법을 적용해 10리(里)마다 하나의 정(亭)을 두었다. 여기서 리를 거리나 넓이로 생각하면 안 된다. 진시황은 다섯 가구를 묶어 한 단위를 만들고 다시 다섯 단위를 묶어 리(里)로 정돈했다.


그래서 정이란, 250가구(T.O가 250이니 실제로는 더 적었을 것이다)마다 배치된 마을 회관이다. 제국의 관리가 여행하다가 머무는 숙소 역할도 했다. 하지만 관리들은 이런 데 머무를 이유가 없다. 관리들은 웬만하면 지역 유지나 사또의 관사에서 머문다. 그래서 정은 할 일 없는 남자가 시간을 보내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머무르는 곳’, ‘정자’등의 뜻이 말해주듯 대단한 시설은 결코 아니었다. 아무튼 이 정의 책임자인 최말단 관리, 관리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명예직 비슷한 자리를 누군가 맡아야 했다.


패현의 적임자는 당연히 유방이었다.





4


유방은 돈이 있든 없든 어차피 노상 싸돌아다니는 사람이다. 마음껏 누워있을 잠자리도 필요하다. 허풍이 세니 세상에 나서지 못할 일이 없다. 방범대장 역할을 하기도 좋다. 논두렁 조폭 아닌가? 그를 형님으로 따르는 젊은 장정들이 많다. 다들 한 성질 하는 성격이니 도둑을 때려잡기엔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형님’인 유방이 정장이 되면 그들 자신이 사고를 덜 치리라.


정장 정도는 국비가 안정적으로 지급되는 대상이 아니었다. 거마비 정도 나왔을라나? 그도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지방 아전이 되기 위해서는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 말고도 한 가지 조건이 더 붙는다. 일상의 노동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어 있어야 한다. 고대의 기준에서는 상당히 먹고 살 만 해야 한다. 그런데 어차피 유방은 가난해도 일을 안 했다.


한편 유방의 유일한 ‘큰형님’인 왕릉은 이미 위치가 지역 유지 수준이라 정장 같은 자잘한 자리를 맡기에는 사이즈가 안 맞았다. 그래서 유방은 이상적인 정장 후보였다. 깡패 잡는 자리에 깡패를 앉히는 것 보다 좋은 수가 어디 있을까?


유방이 정장이 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일부에서는 그가 부농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 첫째 방금 말한 대로 그는 원래 일을 안했다. 노동에서 해방된 계층이 아니라 ‘노동을 거부한 노동계급’이다. 둘째, 동네 아전이 돈으로 관직을 사는 관습은 군현제, 즉 중앙집권제가 완전히 정착된 후의 폐단이다. 당시는 최초로 전국적 군현제가 실시된 직후다. 유방은 ‘동아시아 문명 아전 1기생’이다. 진나라에서도 아전 자리를 차지하면서 돈을 낸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 경우는 뇌물이나 매관매직이 아니라 ‘보증금’이다. 사고를 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유방은 사고뭉치인데다가 돈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이 보증을 서야 했다. 소하가 연대책임의 위험을 감수하고 기꺼이 보증을 서 줬다. 유방, 30대 후반의 나이에 드디어 직업이 생겼다! 비록 허울뿐이긴 했지만...


그렇지만 말이다.


유방은 정장이 되자마자 보증을 서 준 소하의 속을 뒤집어놓는다. 정장 밑에는 부하 격으로 구도(求盜)라는 사내가 하나 붙는다. 문자 그대로 도둑 잡는 인력, 즉 방범대원 내지는 자경단원이다. 유방은 정장이 되자마자 구도를 현재의 산동성으로 보낸다. 지금의 강소성에서, 걸어서 산동성에 갖다 오려면 걸리는 시간이 얼마겠는가? 그 사이에 도둑한테 집이라도 한 채 털리면 소하는 뭐가 되는가. 법률이 가혹한데다가 연좌제가 적용되는 진나라 체제였다. 거기다 보증까지 섰으면...


구도를 산동성에 보낸 이유도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질 좋은 대나무 껍질을 구해오라는 게 이유의 전부였다. 산동성은 대나무가 크게 자라는 자생지였다. 지금도 산동성에는 다양한 색깔을 자랑하는 대나무가 많다. 대나무 껍질-죽피(竹皮)-는 공예품이나 일상용품의 좋은 재료였다. 그런 만큼 유방이 사는 곳까지 상품으로 유통되었음은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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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부하가 직접 갔다. 한마디로 돈은 없는데 가지고 싶어서 자연에서 직접 벗겨 오라고 보낸 것이다. 보낸다고 제꺽 간 구도도 할 말은 없다. 정장의 구도이기 이전에 논두렁 주먹의 ‘꼬붕’이라 봐야 한다(일본어의 잔재를 쓰긴 싫지만 이 이상 적합한 표현이 없다.). 마음에 드는 죽피를 손에 얻자 유방은 더 황당한 짓을 한다. 죽피를 정성껏 다듬어 관을 만든 것이다! 광택이 살아있는 고급 죽피는 청동이 가진 금속질의 느낌과 얼추 비슷하다. 그는 이 기괴한 물건, 일명 ‘죽피관’을 언제나 쓰고 다녔다.


고대 중국은 계층 간의 문화 차이가 엄격했다. 평민은 건(巾 두건)을 썼다. 돈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습관이기도 했다. 평민인데도 부자가 되면 비단을 건으로 쓰면 썼지, 관을 쓰는 일은 없었다. 관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유방은 돈도 없는데 관을 쓰고 다니겠다고 이딴 짓을 벌인 것이었다. 허세는 허세인데,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 보니까 아예 귀여운 느낌이 들고 만다. 죽피관은 훗날 유방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5


유방은 죽피관을 쓰고 관아와 행정구역을 들쑤시고 다녔다. 그러면서 자신의 위에 있는 모든 관리들을 함부로 대했다. 명령 같은 건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이 꼴을 보면서 누구보다 안정지향적인 성향의 소하는 심장이 타들어갔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방은 죽피관을 쓰고 여전히 술과 여색에 빠져 살았다. 그러다 진짜 제대로 된 사고를 치고 말았다.


패현에 하후영(夏侯嬰)이라는 묘한 사내가 있었다. 나이도 젊고 아무 배경도 없는데 진 제국이 수립된 이후에 덜컥 관아의 마부가 되었다. 농경문화에서 말을 다루는 것은 중책이다. 일단 말 자체가 귀중품이다. 또한 다른 가축이 있는데도 말로 옮긴다는 것은, 빨리 이동시켜야 한다는 뜻. 물자든 사람이든 소식이든, 중요한 내용물을 다루는 사람이다. 말을 관리하는 직책이라는 뜻의 사마(司馬)가 괜히 중국에서 명문가의 성씨가 아니다. 자랑스러운 타이틀이기 때문에 원래 성씨를 버리고 사마씨가 된 것이다(따라서 사마씨의 조상은 한 혈통이 아니다.). 물론 사마의 급은 마부와는 차원이 다르게 높지만.


하후영은 훗날 조조의 충신인 하후돈, 하후연의 조상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때는 말 다루는 솜씨 하나로 괜찮은 직업을 꿰찬 한량이었다. 패현은 사수군에 소속되어 있다. 군의 이름이 사수(泗水)다. 흐르는 물이란 뜻인데, 그냥 흐르는 물이 아니다. 사(泗)는 비어져 나오듯 슬그머니 흐른다는 뜻이다. 그래서 콧물이라는 뜻도 있다.


사수는 얕고 탁하고 질척거려서 늪 같지만, 그래도 약하게나마 흐른다는 점에서 늪이 아닌 물이다. 하후영은 업무 루트상 사수를 자주 건너야 했다. 말과 마차에 사람과 물자를 싣고 이런 질척한 곳을, 그것도 시간에 맞춰 건너는 것이다. 기사에 이런 표현을 쓰기는 싫지만 참으로 거지같은 일이다. 단지 일을 하느라 그랬을 뿐인데, 이 때문인지 하후영은 기마술의 달인이 된다.


하후영, 그는 사수를 건널 때마다 정(亭) 하나를 지나게 된다. 사수정 혹은 사상(泗上)정이다. 사상정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사수 강변에 있다가, 물이 불어나는 계절엔 아예 사수 위에 뜬 수상가옥 형태가 되어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이 정에는 죽피관을 쓴 이상한 중년 남자가 노상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이 인간은 마부인 자신이 훨씬 상관인데도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하후영도 특유의 성격상 나이 따지지 않고 상대를 막 대했을 게 분명하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한 사람은 신분을 까고, 한 사람은 나이를 까서 죽고 못 사는 친구가 되어버렸다.


하후영이 사수를 건널 때면 두 사람은 사수정에서 하루 종일 수다를 떨고 장난을 치며 업무태만을 만끽했다(사실 핑계야 대면 그만이다. 물이 불어났다든가...). 그러다 하루는 어디서 검이 났는지 두 사람은 협객 흉내를 내며 칼싸움 놀이를 했다.





6


하후영의 검술 실력은 유방보다 월등했다. 왜 지방의 말단 공무원이 값비싼 청동 검을 능숙하게 다뤘던 걸까?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과거’가 있는 사내가 분명하다. 반면 유방은 실력이 낮다기보다는, 실력이란 것 자체가 아예 없었다. 주먹은 곧잘 썼지만 본격적인 무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이럴 때는 초보자의 검이 더 위험하다. 실력이 높은 사람은 알아서 상대를 봐주지만 초보자는 그럴 기술이 없는 데다 흥에 취하기 때문이다. 유방은 그만 실수로 하후영에게 꽤 큰 상처를 내고 말았다.

두 사람은 굳이 사과니 용서니 할 것 없이 그냥 넘어갔지만, 누군가가 관아에 고발해 버렸다.


"하후영 다친거 저거 유계가 그런 거다!"


리가 났다. 진나라는 같은 잘못을 해도 공직자는 더 강하게 처벌했다. 게다가 하후영은 관직서열상 상관이었다. 유방은 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하후영은 친구를 지키기 위해 딱 잡아뗐다. 이대로 넘어가는 듯 했으나, 그러면 법가가 통치이념인 진나라가 아니다. 소박한 농촌에서 감히 마부를 칼로 찌를 만큼 정신 나간 놈은 하나밖에 없었다. 죽피관 쓰고 다니는 바로 그놈.


사건은 재심에 들어갔다. 하후영은 위증죄의 피고가 되어 심문을 받는 처지가 됐다. 입을 열면 다음 타켓은 물론 유방이었다. 그러나 하후영은 수백 대를 맞을 때까지 입을 다물고 의리를 지켰다. 현령의 비서였던 소하는 이 광경을 현장에서 지켜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자신의 안정된 생활이 절벽 끝에 매달려 있는 풍경을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진나라 법률 체계의 세련된 측면을 볼 수 있다.


1. 물증과 증언으로 유죄가 판단된다.


2. 고문이 비록 가혹하지만, 고통을 주되 생명이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자백이 나오지 않을 경우 건강을 유지하는 선에서 방면된다.


3. 의심인물일지라도 합당한 사유 없이 피고가 되지 않는다.


4. 재심제도가 있으며, 한 번 종결된 사건을 재개하지 않음으로써 피고였던 이들의 행복추구를 더 이상 방해하지 않는다.


5. 권한=책임. 공직자는 더 강력히 처벌받는다. 엄격했던 만큼이나 공정하다.


진시황은 백성을 짜내는 군주였지만, 한계점까지 짜내려면 오히려 내적 설득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법가가 비록 철학이나 사상의 반열에 오르기 힘든 방법론이라 해도 당시는 2200년 전이다. 저 정도의 근대성은 놀람을 넘어 경악할 정도다. 더불어 서로 경쟁했던, 법가를 포함한 제자백가의 수준을 새삼 깨닫게 된다(이 이야기는 기회가 될 때 자연스럽게 풀도록 한다.).


아무튼 소하에게는 유방이 패현을 떠나 있는 것이 속 편한 일이었을 게다. 그 소원은 곧 이루어졌다.



7


패현 주민들도 징집을 피해갈 수 없었다. 북쪽의 만리장성, 남쪽의 운하, 신축 궁전인 아방궁, 그리고 진시황의 사후를 대비한 여릉(통칭 진시황릉)... 거기다 국경 수비까지. 국방과 부역에 제국의 전 신민이 동원되다시피 했다. 패현은 운이 좋았다. 저 중 어느 곳도 걸리지 않고 수도 함양에 걸린 것이다. 진 왕국의 수도였던 함양은 이제 제국의 수도가 되어 인프라를 확장해야 했다. 패현 장정들은 기반시설 공사에 동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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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인 유방은 젊은이들을 통솔해 함양에 갔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의 상황은 지옥도 그 자체였다. 만리장성의 경우 진시황이 총기를 잃기 전에도 사망률이 25%에 달했다. 물론 만리장성 건설 현장은 포로로 잡힌 옛 6국의 병사들이 투입됐고, 할당량을 채우면 고향에 돌아가는 시스템이긴 했지만 공사란 게 이상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다른 부역자들도 벌칙 삼아 곧잘 만리장성에 끌려갔다. 팀원 중에 하나가 티끌만한 실수만 저질러도 한 마을의 장정 대부분이 고향의 논밭에서 수 년 간 실종될 지경이었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유방과 그의 동료들에게서는 불행의 정황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특유의 융통성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넉살이 작용했음이 틀림없다.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진시황의 행차를 직접 구경할 기회까지 얻었다. 진시황은 신분이 불확실하면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에 다가갈 수도 없는 존재였는데 말이다. 유방은 진시황의 위엄 넘치는 행차를 가까이서 보고 감탄했다. 시골의 정장인 유방. 그 앞을 지나가는 제국 제1인자의 행차.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오호라! 대장부라면 마땅히 저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함께 구경하고 있던 패현의 촌놈들은 등골이 얼어붙었을 것이다. 다행히 진나라 병사들이 듣는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유방은 멀쩡한 몸으로 패현에 돌아왔다.



8


한편, 다시 항씨 일족.
진의 천하통일 직후로 시간을 조금만 되돌려보자.


어린 항우를 데리고 다니던 항량은 결국 역양이라는 지역에서 체포되고 만다. 역양은 진-초 대결 시기를 기준으로 진나라의 영토다. 항연은 고향인 초나라로 돌아가는 데 실패한 채 진시황의 홈그라운드에서 잡혔다. 밑에 설명할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가 없었다면 초한쟁패의 역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나아가 동아시아의 현재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역양의 ‘옥연’, 지금 말로 교도소 관리소장은 사마흔(司馬欣)이라는 인물이었다. 감옥은 제국의 냉장고인 만큼 전도유망한 직책이었다. 한편 항씨 일족은 비록 도망자의 신분이었지만 귀족층과 민중의 지지가 있었기에 강호에서 영향력이 컸다. 살아남은 항연의 친아들 중 연장자였던 항량은 교도소 바깥의 상황을 움직일 수 있었다.


항량의 목표는 ‘기현’이라는 지역의 옥연인 조구(曺咎)라는 인물. 그는 항량과 친분이 있으면서도 사마흔의 동료 관료였다. 아마도 관직생활 동창 정도는 됐던 모양이다. 이 상황은,


'알고 보니 친구의 친구'


였다. 항량은 협객들을 움직여 조구에게 자신의 체포 사실을 알리고, 사마흔에게 편지를 쓰라고 했다. 조구는 냉큼 항량의 말에 따라 사마흔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를 읽은 사마흔은 항량을 풀어줬을 뿐 아니라 숨겨 보호하기까지 하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 사마흔도 조구도 태생부터 진나라 귀족에다 현직 고위관리이고, 항연은 진나라 최후의 적의 친아들이다. 두 사람이 한 행동은 적발되었을 경우 삼족이 멸하는 중죄 중의 중죄였다. 이런 일이 전언(傳言) 하나, 편지 한 통에 기름칠하듯 해결된 것이다.


강호(江湖)라는 말은 멋지다. 나도 이 표현을 좋아한다. 하지만 합법적인 정부 입장에서 보면, 더욱이 진 제국의 속성을 고려하면 강호는 ‘암흑세계’다. 수감자가 교도소장 두 사람을 움직여 위기에서 벗어나는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항연이 조구와 어떻게 친분을 만들었는지, 사이사이에 어떤 곡절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모습에서 ‘조직’이나 ‘카르텔’의 보스가 연상되는 건 나뿐일까.



9


위험에서 벗어난 항량은 중대한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사람을 죽인 것이다. 나라를 읽고 떠도는 귀족인 만큼 도적이든 공권력의 집행자든, 무력을 가진 자들과 얼마든지 충돌할 수 있었다. 현상수배자인 항량이 고의적으로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무공을 지닌 항량으로서는 위험에 처했을 때 검을 놀리기를 주저했을 리 없다. 그 전까진 신분을 세탁했겠지만, 이제는 세탁된 신분으로도 추격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위험을 감수하고 동족이 사는 옛 초나라 땅으로 최대한 빨리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항량은 어린 항우를 데리고 망한 조국의 땅에 들어서는 데 성공했다. 초나라의 자욱한 삼림에 들어가자 그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그는 회계군(會稽郡)의 오(吳) 지역까지 순식간에 잠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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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군은 옛 춘추시대에 피를 튀기고 싸웠던 오나라와 월나라의 세력권을 아우르는 지대였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서슬 퍼런 이야기는 알아서 찾아보도록 하자.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이곳은 중국문명에 편입된 지역 중 ‘야만’에 인접한 곳이다. 여차하면 양자강 유역의 삼림 루트를 타고 묘족들의 생활권으로 도피할 수도 있다. 바다로 빠지는 방법도 있다.


오(吳)는 이름 그대로 옛 오나라의 중심지역을 뜻한다. 오(吳)는 중화문명이 닿는 최남단, 최동단의 도시생활권은 아니었다. 아마도 회계군의 행정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을 회계성이 조금 더 남쪽에 있다. 그러나 양자강 유역의 정글에 보다 인접해 있다는 점에서 초나라의 가장 깊숙한 홈그라운드였다. 세력을 키우기에 이보다 이상적일 순 없다.


항량은 (아마도 강호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천하에 흩어진 항씨 일족을 일거에 흡수했다. 몰락했던 가문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물론 회계군도 진시황이 직접 임명한 군수가 다스리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A급 전범’이 어떻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을까?


이 얘기는 다음 편에 하겠다.



Outro


한편, 역시 A급 전범인 항량의 동생 항백은 일족 결집에 낙오하고 고립되고 말았다. 그도 살인을 저지르고 도피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하비(下邳)’로 도망쳤다. 하비는 하비 성(城)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도시의 조건을 충족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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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에는 진나라에 대항하는 협객들을 도와주는 소녀 같은 외모의 미청년이 있었다.


그게 누구인지는, 다 알면서.


다음 회에 계속




P.S.

팟캐스트를 시작하게 됐다. 비장한 마음이다. 대한민국의 병환은 반창고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다. 지금과 같은 난세를 관통하려면 역사와 철학이 시사와 하나가 되는 인문학적 죽창 방송이 필요하다. 교양은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보는데서 시작하는 법.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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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탈모 방송이다.


* 팟빵 : <안 물어봐도 알려주는 남 얘기>

* itunes : 아직 동기화 안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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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초한쟁패
텅 빈 그릇
이 남자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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