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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5. 29. 금요일

sydney






-그들과 우리, 어떻게 다른가?- 


이 글은 시드니에서 15년간 택시 운전을 하며 얻은

문화인류학적 느낌을 정리한 글입니다.






둘째 아들이 호주에 온지 십년 만에 한국으로 나가서 몇 년째 영화판에서 일을 하고 돌아왔을 때이었다. "한국에 살아 보니 무엇이 제일 어렵더냐?"고 물으니 한 마디로 "가오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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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슨 소린지 단 번에 척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한국인들이 대체로 객관성이 부족한데 남에게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무섭게 객관적으로 변해버린다. 즉,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한국 영화판의 가장 심각한 문제도 역시 다른 사회에 마찬가지로 '가오'라는 것이더라는 것이다. 영화산업의 속성이 여러 기술을 가진 팀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각 팀들의 협조를 구해야 하는 조연출의 입장에서 서로들 '가오'를 내세우는 것이 가장 힘들더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내용을 전달하면 "감독이 직접 와서 나에게 이야기를 해야지 감히 조연출이 이야기를 해?" 이런 식이란다. '가오'가 안서면 해야 될 것도 안하고, '가오'가 서면 안 해도 될 일도 해 준단다. 기술과 실력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가오'에 승부를 거는 것이다.


우리 동양 사회에는 서양 사회와는 비교가 할 수 없을 정도로 '권위'라는 것이 주요하다. '권위'라는 것이 때로는 사람을 잡는 수도 있지만 때로는 질서를 잡아주는 데는 한 몫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구 사회는 권위 대신 professionalism이 있다. 한국은 자격증을 따도 써먹을 곳이 없는 경우가 많지만 호주는 어떤 자격증이든 따면 바로 돈이 된다. 그 말은 모든 직업에는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말도 된다. 즉, professionalism, 전문성이 인정받는 사회라는 말이 되겠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이 전문성과 권위가 짬뽕이 되어 사용되어지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전문성과는 상관없이 권위가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권위라기보다는 속어인 '가오"라고 해야 맛이 살아난다. '가오'란 일본말로 얼굴이란 뜻인데 한국에서 (권위 보다는) 체면에 가까운 의미로 정착한 듯 하다.


옛날에 다방에 가면 으레 '가오' 마담 이란 것이 있었다. 실제로 주인은 아니지만 인생 짬밥이 좀 있고 얼굴 반반한 중년 여자들을 내세워 아가씨들 관리하며 다방 주인행세를 해서 손님을 상대하던 여자들이었다. 이런 쓰임새를 보면 한국에서 쓰이는 '가오'란 단어는 권위도 얼굴도 체면도 아니고 그냥 '가오' 같다. 체면이 지켜져야 하는 수동적인 의미라면 가오는 내세워야 하는 능동적인 것이다. 체면이 사회적이라면 가오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스스로 점수를 매겨서 '내가 이만큼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오다. 가오는 철저히 자기가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그 기준이 뭔지 알 도리가 없다. 예를 들어 그럴만한 처지가 안 되는 사람이 내 앞에서 담배를 피웠다, 인사를 안 하고 지나갔다 등등의 나름대로 처절한(?) 사연들이 모두 본인의 가오에 손상을 줄 수 있는 사건들이다.


이러니 제기랄 상대방이 어떻게 맞출 수가 있겠나? 도대체 상대방이 얼마만큼 가오를 느끼는지 알아야 맞추어서 대접을 해줄 것이 아닌가?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에는 눈치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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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하면 '눈치가 있어야 절에 가서 새우젓국이라도 얻어먹는다'라는 속담이 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절에 새우젓이 있을 리가 없지만 눈치가 있으면 안 될 일도 되고 눈치가 없으면 될 일도 안 된다는 말이다.


정작 일본에서는 가오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가오'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이런 한국의 애매모호한 가오와 서구 사회의 피도 눈물도 없는 전문성에 근거한 권위는 도저히 비교될 수가 없다. 전문성을 기준으로 설계된 사회와 '가오'를 기준으로 설계된 사회의 차이는 얼마나 클까? 그것은 3.1 운동 때 측량을 시작하고 1932년에 완공되어 지금도 건재한 시드니의 하버브리지와 70년대 건설되어 80년대 무너진 성수대교만큼이나 큰 것이다.


한국인의 생활에서는 눈치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눈치' 즉, '남의 눈', 바꿔 말하면 '체면' 이거 우리 나라사람들이 살고 죽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노처녀나 백수가 명절이 괴로운 이유가 무엇인지 경험들 하시지 않는가?


우리나라에서는 굳이 마약이나 범죄 같은 적극적인 사회적 일탈이 아니라 공부를 안 하거나 남들처럼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지 않고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은 소극적인 '일탈'의 경우에도 주변에서 태클이 심하게 걸린다. 반면 그렇게 태클을 하면서도 매일 술 마시고 놀고 먹고 룸펜생활을 해도 집에서 내쫒는 경우는 드물고 심지어는 서른이나 마흔이 넘어서도 술 먹고 사람들한테 주사부리고 떼쓰는 사람도 용인을 해준다.


그러나 백인들 사회에서는 지나가는 장애인은 감싸줘도 집안의 술주정뱅이는 감싸주지 않는다. 백인 사회에서는 가족이 문제 있는 사람들을 보듬어 주지도 않는다. 결국 어디까지나 본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립이 시작되는 스무 살 전후쯤에 어느 정도 자신을 추스를 수 없다면 백인 사회에서는 이미 패배자, 즉 loser로 낙인이 찍히고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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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 처음 와서 호주 사회가 훨씬 질서정연하고 체계가 잘 잡혀 있는 것이 어려서 부터 교회에서 배운 데로 기독교의 영향력을 받아서 그런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다년간의 택시 운전 경험으로 알고 보니 그게 전혀 아니었다. 아시다시피 택시 기사라는 직업은 온갖 종자들을 다 태우고 다니는 것 아닌가? 비록 영어는 잘 못 알아듣지만 나보다 더 다양하게 백인들 접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말하고 싶다.


말끝마다 'fucking'이 붙는 거칠고 무식한 인간들을 태울 때가 있는데 이런 놈들을 만나면 영어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를 잘 하지만 기분이 나빠서 말 안 하는 사람처럼 어금니 꽉 깨물고 인상 팍팍 써가면서 목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내리까는 연기를 해야 한다. 그러나 폼은 그렇게 잡지만 속으로는 초긴장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놈들이 하는 말을 한 마디라도 못 알아들었다가는 태도가 돌변해서 당장 영어 못하는 것을 트집을 잡아서 시비를 붙기 때문이다. 교양과 내숭 겸비한 백인들은 운전사가 영어를 좀 못해도 "이민자니까 그렇겠지"하고 넘어가주지만 무식한 백인들은 이민자 보다 영어 잘하는 것 하나로 위세를 떨기 때문이다. 내 참 더러워서!


백인 양아치의 공통적 특징은 택시에 오르자마자 라디오 다이얼을 만지작거린다는 것이다. 교양 겸비한 일반인들은 반드시 라디오를 틀어도 되느냐고 묻는데 양아치는 묻지 않고 제 멋대로 다이얼 돌린다. 옆 차들이 놀라서 다 쳐다볼 정도로 볼륨을 최대로 트는 놈도 흔하다.


호주에서 대부분(99%)의 백인 젊은 놈들이 모이면 나같이 점잖은 한국 양반은 불안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분위기가 거칠어서 언제 사고를 칠지 알 수 없는 영락없는 양아치들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백인들은 개인으로 있을 때는 얌전하다가도 집단이 되면 달라지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 멀쩡한 사람도 예비군복만 걸치면 사람이 이상해지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축구경기의 홀리건 같은 일이 자주 벌어지는 것이다.


연말연시가 되면 손바닥만 한 시티를 중심으로 해서 짜증나는 짧은 거리 손님을 수 없이 태워야 한다. 들떠있는 젊은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지치지 않고 "Happy New Year!"를 외쳐댄다. 심지어는 신호등에 걸려서 기다리고 있는 중에도 옆 차에다 대고 "Happy New Year!"를 외치는 마당이니 그 분위기를 짐작할 만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집단적 흥분 상태는 점잖은 동양인에게는 어딘지 불안함을 느끼게 할 정도이다. 좋은 일이 있을 때도 그런 판이니 나쁜 일이 있을 때는 어떻겠나?


실제로 2005년도 시드니 남부 크로눌라 해변에서 시민들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대규모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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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 봉사를 하는 해상 구조 요원이 주변을 시끄럽게 하면서 족구를 하고 있는 중동계 청년들에게 "너의 동네에 가서 해라"라고 한 마디 던진 것이 불씨가 되었다. 격분한 무슬림들은 구조요원을 집단구타를 했고 이에 흥분한 주변 백인 청년들이 중동계를 다구리를 놓고 얻어터진 중동계가 "크노눌라로 집결하라"고 긴급하게 문자 메시지를 날리자 원근각지에서 검은 수염을 나부끼며 중동인간들이 몰려들고 백인 청년들은 눈에 띄는 중동계를 닥치는 대로 폭행해 결국 5,000여 명이 시가전을 벌이는 호주 역사상 초유의 '인종차별적 폭동'이 전개되었다. 흥분 잘하고 쉽게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는 백인들의 공격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었다.


백인들의 역사가 바이킹의 해적질로 시작해서 최근의 이라크 침공까지 기본적으로 싸움과 정복, 살육의 역사였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로마제국 이후 유럽의 백인 사회는 한 번도 통합된 적이 없었다. 유럽 전체의 땅 덩어리나 인구가 중국에 비해서 별로 크지 않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백인들은 수십 개의 왕조로 갈가리 찢기어져 너무나 오랜 동안 지겹게도 싸워댔다. 한 마디로 '중원의 평화'라는 것이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영국의 경우도 한반도보다 그리 크지도 않은 땅덩어리를 둘러싸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가 불과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끝없이 전쟁을 해댔다. 


상대적으로 조선이나 고려조의 왕가에도 집안 간의 싸움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단일 왕조로서 500년 가까이 존속했던 것과 비교한다면 큰 차이가 나는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


'위대한 기사, 윌리엄 마샬'이라는 전설적인 중세 기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었다. 그런데 도무지 무슨 놈의 죽고 죽이는 집안 간의 싸움이 그리 많았는지 도표를 그리면서 이해를 하려다가 복잡해서 포기를 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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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경우에 있어선 일찍 싸움을 끝낸 영국 섬나라를 제외하고 수많은 농민봉기에 종교적 유혈충돌이 있었고 국내 공국들 사이의 전쟁을 배제하더라도 십자군 전쟁을 비롯해 30년 전쟁, 나폴레옹 침입 등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물론, 백인들이 투쟁적이고 공격적이었던 이유는 물론 한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역사의 결과가 백인들의 공격성을 만들어 낸 것인지, 아니면 백인들이 가진 유전자 속에 원래부터 공격성이 있어서 그런 역사를 만들게 된 것인지는 그야말로 '통닭이 먼저냐? 계란후라이가 먼저냐?' 의 문제다.


그렇다하더라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싸움은 많이 해 본 놈이 잘하는 법이라는 것이다. 싸움을 많이 하다 보면 어떻게 하면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는 지 터득하게 되는 법이다. 어디 조폭 두목이 일일이 부하들과 싸워 이겨서 부하들을 지배하는가?


백인들은 어떻게 하면 덜 싸우고 가오를 지킬 수 있고 분쟁이 생기면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를 오래 전부터 익힌 것 같다. 이미 몇 백 년 전부터. 


그것이 현대에 와서는 그 많은 분쟁거리들이 사회 문화적 합의와 관례, 법률 등을 통해서 아주 효과적으로 해결 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그래서 서구 사회는 변호사가 그렇게 많은 것이다. 왜 있잖은가? 미국사회는 변호사 먹여 살리기 위해서 있는 거라는 말이. (어떤 사람은 변호사들은 모두 지옥 갈 놈들이라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지옥이야 말로 변호사가 많이 필요한 곳이다. 자신이 지옥에 오게 된 것이 부당하다고 변호를 요청할 사람들이 잔뜩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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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세계사는 오랜 세월 동안 전투와 전투 속에 단련된 백인들 앞에 황인종과 흑인들이 판판히 당한 역사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닌 것이다. 백인들의 수많은 탐험과 개척의 사례만 보아도 진취적이고 창조적이며 개척 정신이 넘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인은 반만 년의 역사 동안 끊임없이 외침을 당한 역사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객관적으로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보면 그렇지도 않다. 


우선 가까운 조선시대만 해도 정확히 1400년에서 1850년까지 나라는 평화로웠다. 이 450년 동안 단 3회의 외국침입이 있었을 뿐이고 이마저도 1592년부터 1637년까지로 꽤 짧은 기간에 끝났다. 


오히려 19세기 중반에 이르기 까지 250년 간 평화로워 군대가 군기가 빠진 탓에 군대가 군이 아니고 실질적으로 내부질서를 순찰하는 수준의 일반경찰화되었었다. 아마 한국인들이 전쟁에 대한 피해 의식이 유난히 심한 것은 최근 1.5세기 동안 외국침략을 비롯해 독립을 박탈당하고 나라가 갈라지고 전쟁을 치룬 뼈저린 경험 때문일 것이다.


그런 역사적 경험 탓에 한국인들은 힘이 길러진 것이 아니고 눈치만 발달되었다. 외국에서 한국인들을 외모가 비슷한 다른 동양인과 비교해 보면 눈빛에서 구별이 된다. 한국인에 비하면 중국, 대만, 일본인들의 눈빛은 상당히 선해 보인다고나 할까? 악의가 좀처럼 감지되지 않는 편인데, 한국인들만의 뭔가 기분 나쁜 눈빛, 뭔가 도전적인 눈빛이라고나 할까? 다른 동양인에 비해서 경쟁적, 투쟁적, 독선적, 도전적인 느낌이 드는 눈빛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표정, 특히 여자들은 뭔가 굉장히 도도해 보이는 표정들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라 50m 전방에서도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의 부정적 아우라가 풍긴다. 


반면 현재의 백인들은 한국인을 포함해 다른 동양인들보다도 훨씬 친절하고도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런 백인들의 모습 깊은 곳에는 공격성이 숨어 있다가 특정한 상황이 되면 그 모습이 유감없이 드러나게 된다. 마치 자신이 자제할 수 없는 자극이 오면 옷을 찢으며 괴물로 변해서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하는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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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들이 성질 날 때 나타내는 감정의 분출의 정도와 공격적인 뉘앙스는 도저히 동양인과는 비교가 안 된다. 인상 쓰는 당사자가 실제로 폭력을 쓰려는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옆에서 보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하도 험악해서 익히지도 않고 생사람 잡아 먹기라도 할 것 같은 서늘함이 느껴질 지경이다.


흔히 영화 속에서 우리 같은 동양인의 눈으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사소한 일에서도 심하게 감정을 노출하는 모습을 볼 때가 많다. 영화에서 보면 실제로 사소한 부부 싸움에서도 '저럴 것까지 있나?'하게 만들 정도로 심하게 싸우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이 부부 싸움할 때처럼 상대방이 끝까지 참고 들어주리라고 믿고서 감정이 풀릴 때까지 계속 악을 박박 써대며 소리를 지르다가는 세상을 일찍 하직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참다가 더 이상 못 참으면 '가정상비약'처럼 항상 비치되어 있는 총이 언제 쓰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호주는 총기소지가 불법이기 때문에 그 대신 부부싸움에서 가정폭력이 훨씬 자유롭(?)다. 뉴스를 보면 자주 가정에서의 내란 중 전사한 여성 전사, 가끔 남성 전사들의 이야기가 나오니 말이다. 따라서 정부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어서 막대한 예산을 투자해서 '말로 하자'고 캠페인을 벌리고 있다. 


그런가하면 심하게 싸운 부부들이라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Honey!"하면서 뽀뽀 하고. 키스 하고, 입 맞추고 난리 부르스를 추어서 우리 같이 점잖은 사람들은 도저히 감을 잡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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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적인 백인 사회에서는 대화나 분쟁 중에 일단 위험을 느낀 상대가 언제 반격이나 심지어는 선제공격을 기도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리 치고 빠지는 것을 잘 해도 지나친 공격성이 오랜 동안 표출되거나 폭력 상황이 자주 연출되면 자칫 서로간의 감정을 파괴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까닭에 동양 사회 같으면 그렇게까지 가지 않을 문제에서도 서구 사회에서는 종종 관계의 파멸로 몰아가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이렇게 갈등을 키우지 않으려면 감정을 먼저 폭발시킨 측에서 최대한 빨리 감정을 절제하고 수습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들은 감정을 폭발시킨 당사자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한국인의 눈으로 볼 때는 저게 진심인가 연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금방 사과를 한다.


한국 사람들은 일단 사과는 했어도 속으로는 꽁하고 있는 '뒤끝 미열'의 경향이 있는 반면에 백인들은 편리하게도 일단 상대방이 사과를 하면 "apology accept"라고 수용해서 그야말로 화끈하게 갈등 상황을 마무리할 줄 안다. 물론 백인들이 앞에서 말한 이런 걸 전부 계산하면서 위선적으로 이런 행태를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사회적인 학습의 의해 체득이 되어 그럴 것일 것이라는 나름 산전수전을 거친 짐작일 뿐이다.


백인들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야기할 때는 면전에서 '사람이 어쩌면 저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상대방의 자존심을 싹 무시하고 냉정하게 대하다가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허물없이 대할 때가 많다. 한국인들의 정서에서는 저 정도면 원한이 아무리 못가도 삼 대까지는 가겠다 싶은데 끝나고 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니 어이가 상실될 지경이다. 백인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그 감정의 수위와 강도를 이성과 제도를 통해 조절하는 능력이 탁월하게 발전되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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