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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츠야의 마지막 고시엔 예선전을 앞두고 메이세이 고교 야구부 감독 니시오는 지병인지 꾀병인지 모를 핑계로 입원해버린다. 그런 니시오 감독의 요청으로 야구부를 맡게 된 카시와바 감독대행은 마치 야쿠자스러운 그 요란한 첫 등장에서부터 시작하여 강력한 포스를 내뿜으며 그저 즐겁고 행복하게만 운동을 해왔던 메이세이 고교 야구부원들을 순식간에 휘어잡고서 가혹한 훈련으로 인도한다. 야구부의 인원수는 곧 절반으로 줄어버리고 어떻게든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부원들에겐 그저 지옥 같은 나날들이 계속될 뿐이다.


고시엔(甲子園) 원래는 일본 혼슈 효고현 니시노미야시(日本本州兵庫県西宮市)의 남동부 지구의 지역명으로 프로야구팀 한신 타이거즈(阪神タイガーズ)의 홈구장이 위치하고 있다. 이 구장을 한신 고시엔 구장(阪神甲子園球場), 또는 고시엔 구장이라 부르며, 전통적으로 일본의 전국 고교야구 대회가 이곳에서 행해져 왔다. 이로 인해 두 차례(봄철의 선발대회와 여름철의 본대회)에 걸쳐서 행해지는 일본의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자체를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물론 고시엔의 본무대를 목표로 하는 팀에게 피나는 노력이야 당연하지만, 왠지 이 감독대행이라는 작자의 목적은 고시엔 진출을 포기시키려는 것처럼만 느껴진다. 사실 이 사람은 니시오 감독이 대행을 부탁한 '카시와바 에이로'가 아니라 그의 동생인 '카시와바 에이로'.


아다치 미츠루의 최고 히트 만화인 <터치>라는 작품의 이야기다. 주인공 우에스기 타츠야와 작품의 중반부에서야 등장하게 되는 카시와바 에이지로 두 사람 모두 카인콤플렉스(Cain complex)를 가질 만한 형제 관계에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정반대의 처지에 놓여 있다. 그림자였던 타츠야는 덧없이 죽어버린 동생 카즈야를 대신해 빛으로 나아가게 되었지만, 에이지로는 살아있는 형 에이치로로 인해 원래부터의 그림자라는 위치를 결코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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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츠야와 에이지로의 조건이야 완벽하지만, 실제로 이 두 사람이 카인 콤플렉스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타츠야의 경우 카즈야의 고시엔 지역 예선 결승전 전날 밤 아버지의 대사를 통해 작품에서 직접 보여주기도 하거니와 카즈야가 오히려 자신보다 뛰어난 선천적 자질을 가진 타츠야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카즈야 또한 카인콤플렉스를 지닌 인물은 아니며, 이것은 타츠야의 고시엔 지역예선 결승전을 TV로 지켜보던 어머니의 대사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카즈야의 타츠야에 대한 두려움은 단순히 자기보다 앞서는 사랑의 라이벌에 대한 것일 뿐 형에 대한 적개심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이지로의 경우는 객관적으로 훨씬 잘나 보이는 형 에이치로가 오히려 카인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작품 속에서 드러나진 않지만 아무래도 카시와바 형제 중 선천적인 능력이 뛰어났던 것은 동생인 에이지로였던 모양이다.


에이지로보다 3살이 많은 형 에이치로는 스포츠 만능에 성적도 우수한 모범생으로 집안의 자랑이었고, 메이세이 고교 야구부를 고시엔에 진출시킬 것으로 온갖 기대를 받는 명망 높은 주장이자 팀의 에이스이기도 했다. 반면 동생 에이지로는 열심히 야구를 하고 있고 형에 못지않은 야구 재능을 가지고는 있는 듯하지만 너무 잘난 형을 가진 반작용 탓인지 몰라도, 늘상 싸움질이나 하고 다니는 말썽쟁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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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고교 3학년인 에이치로가 자신의 마지막 고시엔 예선을 앞두고 오토바이 사고를 일으키게 되고, 에이지로는 형의 고시엔 진출을 위하여 그 책임을 대신하여 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형 에이치로는 고시엔 진출에 실패한 채 메이세이 고교를 졸업하게 되었고, 동생 에이지로는 형의 못다 이룬 꿈을 자신이 이어가겠다는 마음으로 메이세이 고교에 진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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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에이지로가 메이세이 고교 야구부에 입부하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부원들의 악랄한 이지메였고, 그 시절에도 야구부의 감독이었던 니시오는 그러한 상황에 대한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였다. 부원들이 에이지로에게 이지메를 가했던 표면적인 이유는 중학 시절의 행실이 불량했다는 것이었고, 그 결정적인 이유는 메이세이 고교 야구부와 형을 위해 자신이 대신하여 책임을 뒤집어썼던 형의 오토바이 사고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부원들의 그토록 지독한 이지메를 사주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형. 에이치로는 동생 덕택에 자신의 모든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음에도 자기가 이루어 내지 못한 고시엔 진출을 그저 말썽쟁이로만 인식되어 있는 못난 동생이 혹시라도 이루어낼까 시기하여 오히려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려 버린 사악하고 비열한 형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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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지로는 메이세이 고교 야구부와 형을 위한 자신의 희생,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야구 재능과 고시엔을 향한 뜨거운 열정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야구를 할 수 없는 기막히는 상황에 처해져버렸고, 이후 냉소주의와 패배주의에 빠진 채로 인생의 낙오자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된다. 게다가 어린 시절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마저 자신을 바로 그 지경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인 자기 친형의 아내가 되어있고, 설상가상으로 현재는 시력조차 잃어버릴 위험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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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동생을 잃은 타츠야의 슬픔과 그로인한 힘겨움이야 <터치>를 읽는 독자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미나미를 두고서 동생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자격지심은 만회할 수조차 없어지고,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그저 동생이 죽어준 덕택에 모든 행복을 독차지한 것 같은 죄책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 타츠야의 갑갑하고 억울한 심정도, 그리고 정신없이 동생을 대신하여 살아오다 보니 어느 순간 찾아온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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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한창 열정을 불태우고 싶었던 시기에 자신의 친형으로 인해 어처구니없는 부당함을 겪으며 의지할 데 하나 없이 살아온 에이지로의 처참한 상태와 비교해 보면 그저 복에 겨운 투정일 뿐이다. 에이지로에게 허락된 것이라곤 탄탄대로를 달려나가고 있는 번드레한 악귀 같은 형의 그림자로서의 삶. 살아는 있지만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삶이다.


그런데 이런 에이지로에게 어느 날 자신을 나락으로 내몰았던 친형과 메이세이 고교 야구부에 동시에 빅엿을 선사할 복수의 기회가 찾아왔고, 에이지로는 그 기회를 놓지지 않고 복수의 화신이 되어 메이세이 고교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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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시엔을 향해 불타오르는 청춘의 열정들을 지켜보며, 늦게나마 자신의 어리석음을 참회하며 용서를 구해오는 니시오 감독의 눈물겨운 부탁의 말을 들으며, 아울러 자신에 대한 신뢰심으로 온통 가득찬 야구부 아이들을 계속 대하며 그 복수심은 어느새 점점 옅어져 가고.. 고시엔 예선 결승에서 피가 터지도록 공을 던져대는 타츠야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부질없는 복수심을 거두고 만다. 결과적으로 에이지로는 자신의 처음 계획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메이세이 고교 야구부의 고시엔 진출을 위한 최고의 조력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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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애초부터 에이지로는 악한이 될 수도 없는 사람이었고, 실제로 작품 내에서 악행이라고 평가될 만한 것도 딱히 없다. 불타는 복수심에 가려져 있었을 뿐 그의 본질은 진정으로 야구를 사랑하는 어찌할 수 없는 열혈 야구소년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처음 복수를 위해 메이세이 고교에 와서 청춘의 열정으로 가득한 야구소년들을 만났을 때부터 그의 실패는 예정된 거였다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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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에이지로에게 이제 남은 거라곤 끝모를 공허감과 허탈함, 복수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무력감뿐이다.


그런데, 그런 에이지로에게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기를 비참하게만 만드는 존재인 타츠야가 찾아와 자신이 고교 시절 동안 쏟아부은 모든 열정의 결정체인 '피 묻은 사과'를 건네주고 간다. 잊어버린 것들을 기억해 내라면서. 그것을 손에 쥐게 된 에이지로는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둔 채 잊고 지내온, 아니 차라리 부정해버리고 싶었던 바로 그 청춘의 열정들을 더이상은 외면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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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츠야가 인솔해 온 메이세이 고교 야구부원들의 응원 속에서 안과 수술을 무사히 받아내고 시력을 회복한 에이지로는 곧바로 메이세이 고교 야부부가 경기를 펼칠 고시엔으로 향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때까지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짓눌러 왔던 친형과 메이세이 고교 야구부라는 트라우마에 대한 완벽한 응징이었다.



<터치>를 처음 봤었던 중학 시절의 나는 에이지로를 그저 성질 더러운 악마 같은 감독이었다가 히어로인 타츠야로 인해 착한 심성으로 변모해 가는 정도의 단순한 악역 캐릭터로만 막연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다시 펼치게 된 <터치>에서의 에이지로는 내 기억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였다. 처음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와 만났던 그 시절,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던 카즈야의 그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서늘했던 기억을 뒤엎고서 나에게 가장 진한 페이소스를 느끼게 한 것은 바로 이 에이지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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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다시 좋아하게 된 에이지로에겐 이제 자신의 삶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생성되어 있다. 그는 그렇게도 잔인한, 진창 같은 삶 속을 걸어왔으나 결국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잊어버린 청춘의 열정을 되살려 낸다. 잃어버린 자신의 자리를 굳이 되돌려 놓으려 몸부림칠 필요 없이 자신의 자리를 새롭게 만들어 갈 것이고.


에이지로는 작품의 중반부에 처음 등장한 이후 결말에 이르기까지 타츠야와는 포지션에서 대비되거나 유사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터치>의 또 다른 축이다. 타츠야가 <터치>라는 작품 속에서 성장드라마를 진행해 온 표면적인 히어로라면, 에이지로는 그야말로 '등번호 없는 에이스'로 인생역정의 드라마를 진행해 가는 이면의 히어로이다.


아다치 미츠루의 <터치>. 카시와바 에이지로라는 캐릭터로 훌륭한 성장드라마 그 이상의 감동을 선사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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