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쓴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하여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말하는 무지몽매한 자들을 계몽하기 위함이요.
둘째, 상업영화에 채 담지 못한, 의거 이후 사상가 안중근의 이야기를 만천하에 알리고자 함이다.
담아야 할 생각과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가 많다 보니 부득이하게 <상, 하> 두 편의 글로 나누게 되었다.
안중근의 두 차례 각성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의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배에 점이 7개 있어서 아명은 ‘응칠’이었다. 세례명 토마스로 인해 도마 안중근으로도 불린다. 아버지 안태훈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이자 수 천석지기 지주였다. 그러나 그는 자식들을 성리학의 테두리 안에 가두지 않았다. 안중근은 아버지로부터 천주교를 포함한 개화사상을 배웠고, 삼촌과 포수들로부터 사격과 말타기를 익혔다.
그러나 안중근의 위대함은 뛰어난 육체 능력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재판장에서 서양의 기자들을 매료시킨 높은 학식과 언변, 일본인 간수마저 그를 존경하게 만든 인품 또한 안중근이 갖춘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듯하다.

출처-<눈빛>
안중근이 20대 후반이 되던 때, 대한제국에는 큰 위기가 닥쳤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었다. 안중근에게 불행은 다각도로 찾아왔다. 같은 해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났다. 안중근에게 제일 힘든 시기 중 하나였지만, 동시에 그가 영웅으로서 각성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안중근은 나라의 주권을 온전히 되찾기 전까진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안중근과 형제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삼흥학교를 세웠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집 안에 있던 가락지까지 끌어모아 힘을 보탰다. 그러나 침몰해 가는 나라에 돈을 붓는 일은 우물물로 바다의 염도를 낮추는 일보다 어려웠다. 천석지기 가산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안중근의 아버지이자
독립운동가 안태훈
출처-<눈빛>
고종은 일본의 눈을 피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한 일로 1907년 강제 퇴위 되었다. 1907년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정미 7조약으로 인해 얼마 남지도 않았던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기까지 했다. 이제 안중근은 마음을 달리 먹었다.
“교육으로는 늦다. 늙은 도적이 작정하고 나라를 삼키려는데 달리 방도가 없다. 내가 저 자를 멈추어 세워야 한다.”

헤이그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
최재형과의 만남
안중근은 상해의 거부들을 찾아가 무장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그가 가장 먼저 찾은 이는 민영익이었다.
민영익은 대한제국으로부터 받은 홍삼과 인삼으로 상해에서 막대한 부를 이루었다. 당시 상해는 국제 도시였고, 많은 인삼 상인이 은밀하게 독립운동에 자금을 대고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민영익의 낯짝조차 보지 못했다. 타국에서 호의호식하는 부자 민영익은 일면식도 없는 대한제국의 20대 청년의 의도가 뻔하다고 여겼다.
“저런 놈들 다 돈 달라고 찾아오는 것 아니겠냐?”
또 다른 재력가는 안중근에게 일본 제국주의가 내세우는 논리로 훈계질까지 했다.
“이보게 젊은이. 자네가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래. 자네 혼자 뭘 어쩌겠다는 건가? 자네가 무슨 영웅이라도 되는 줄 알아? 나라를 구하기 전에 자네 앞가림이나 잘하게.”
“나라가 없는데 나 혼자 호위호식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요!”
“그야. 내 알 바 아니지.”
안중근은 상해를 떠나 동포가 많이 모여있는 연해주로 건너갔다. 그리고 운명처럼 하얼빈행 기차의 티켓을 마련해 주는 최재형을 만났다.
안중근보다 스무 해 일찍 태어난 최재형은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이었다. 그가 9살 되던 해 조선을 덮친 가뭄으로 가족 모두가 연해주로 떠나야만 했다.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이민이 아니라 좁쌀 한 톨이라도 얻기 위해 조국을 탈출해야 했던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경제적 궁핍함은 오히려 그에게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한인 학교를 다닐 돈이 없어 러시아 학교에 다니며 자연스레 러시아어를 배울 수 있었다.
말이 입에 붙자, 그는 11살의 나이에 가출하여 러시아 상선에 올랐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돈 많이 벌어서 돌아오겠습니다.”
선원으로 보낸 7년의 시간은 그에게 세상을 보는 식견을 안겨주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를 위해 농장을 사들였다. 성실한 자에게는 운도 따르기 마련이다.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으로 러시아 군과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그는 막대한 부를 쌓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부자가 된 이후에도 당시 상해의 부자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9살의 나이에 가난에 쫓겨 떠나야 했던 나라지만, 그는 자신의 나라를 잊지 않았다. 그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할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교육 같은 계몽운동 외에 항일무장투쟁과 같은 무력 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러던 차에 안중근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 앉게나. 마침, 적절한 때에 나를 찾아왔군. 사격에 일가견이 있다고?”
참모중장이 된 안중근과 세 번째 각성
1908년, 최재형을 총장으로 한 의병대가 조직되었다. 안중근은 거기서 3개 중대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끄는 참모중장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가 훗날 일본 법정에서 군인자격으로 이토를 쏜 것이니 자신을 전쟁 포로로 대우해 달라고 주장하게 되는 배경이다.
“우리가 비록 몸은 고국을 떠나 있지만, 이번 국내 진공 작전을 통해 반드시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
안중근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두 번의 전투에서 작은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이때 생포한 포로의 처리 과정에서 자신이 내린 결정으로 인해 안중근은 큰 시련을 겪게 된다.
“민간인 한 명 포함 세 명의 일본군을 즉살하겠습니다.”
“안 되오! 그들은 전쟁 포로요. 우리마저 일본처럼 야만적인 행동을 해야겠소? 일본의 사천만 인구를 모두 죽인 다음에 나라를 되찾으려는 것이 아니잖소!”
그의 결정에 반대하는 병사는 물론이고 이탈자까지 발생했으나 안중근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안중근이 국제법에 따라 풀어준 포로들은 일본군의 길잡이가 되어 다시 찾아왔고, 엄청난 화력 앞에 안중근의 부대는 궤멸하고 말았다. 겨우 목숨을 구한 그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을까. 그러나 이 시련은 안중근을 다시 한번 각성하게 한다. 이 사건은 안중근이 하얼빈행 기차에 오르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재기를 도모하던 안중근은 11명의 동지를 규합한다. 21세기까지도 절반 이상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이 비밀조직은 1909년 2월 7일 모처에서 의식을 치른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다 함께 손가락을 잘라 맹세합시다.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면 다음에는 목을 내놓겠습니다.”

출처-<투데이광주전남>
안중근을 시작으로 단지동맹의 비밀회원 전원이 각자의 약지를 잘랐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손바닥 도장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안중근은 동료들의 피를 모아 태극기에 네 글자를 쓰며 결의를 다졌다.
“대 한 독 립”

당시의 실제 태극기
출처-<해동사 전시실>
몇 개월 후, 최재형의 후원으로 명맥을 이어가던 대동공보사(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한국국민회의 교민 신문)에 들른 안중근에게 우덕순이 신문을 내밀었다. 우덕순은 안중근이 이끌던 의병부대원이었으며, 대동공보사의 수금원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기사를 본 안중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늙은 도적이 내 손에 끝나는구나!”
그는 동시에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세 명의 자식과 아내 김아려를 떠올렸다.

이토 히로부미
일본 총리를 4번이나 역임했으며, 정한론의 신봉자이자 행동가로 제국주의 최전선에 있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토는 자신의 아버지가 모시던 주인의 양자가 되며, 이토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토의 집 인근에는 ‘요시다 쇼인’이라는 괴인이 살고 있었다.

요시다 쇼인
그는 정한론의 창시자이자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적 지주로 불리는 자이다. 이토의 망령된 생각은 요시다 쇼인과 함께 보낸 2년 동안 완성되었다. 무지한 자가 한 권의 책을 읽고 그 신념을 실현해 나가는 것이 인류 평화에 얼마나 무참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요시다 쇼인의 위패는 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버젓이 놓여있다.

젊은 시절의 이토
이토는 스무 살이 되자 일본 주재 영국 공사관에 방화를 저질렀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지식인을 살해하며 테러리스트로의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요시다 쇼인의 영향을 받은 다섯 명과 영국으로 넘어갔다. 돈도 지식도 없었던 그들이 영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밀항뿐이었다. 그들은 영국 대학교에서 청강하며 영어 외에 대영제국이 인도를 비롯한 다른 나라를 통치하는 수법을 함께 배웠다.

조슈파이브
당시 영국으로 유학했던
조슈 출신 영국 유학생 5인
서른 살이 되던 해에는 서양 12개국을 순방하는 이와쿠라 사절단에 뽑혔다. 사절단의 목표는 서양 강대국과 일본이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는 것이었는데, 단 한 건의 성공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약삭빠른 이토는 이때의 실패를 거울삼아, 즉 서구 열강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적용하여 1876년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다.

이와쿠라 사절단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토
1885년, 사십 대 초반의 나이의 이토는 드디어 일본 제국의 초대 총리에 올랐다. 이후 1901년까지 수차례 총리직을 맡던 그는 1906년 2월, 초대 한국 통감으로 부임했다.
19세기 일본의 격동기를 실질적으로 이끈 이토 히로부미는 새로 생기는 직책에 늘 자신이 스스로 올라서, 이토는 날 것을 좋아한다는 말이 일본 정계에서 떠돌았다.
이토는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것을 빌미로 고종을 황위에서 끌어내렸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7년 7월 20일 오전, 이토는 전 세계 역사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짓을 저지르며 안중근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고종이 없는 상태에서 황제 양위식이 열리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황제는 물론이고 황태자 순종조차 금시초문의 일이었다.
“아니 통감님께서는 황제와 황태자도 없이 어떻게 양위식을 치른다는 거야?”
“그 양반이 또 머리가 비상하잖아. 무슨 방도가 있으시겠지. 우리는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고.”
잠시 후 이토가 황제와 황태자 역할을 할 환관 두 명을 데리고 들어섰다.
왜 하얼빈인가
조선과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러일전쟁마저 승리로 이끈 이토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이토는 러시아 재무장관을 만나기 위해 대련에서 출발하는 기차에 올랐다. 그 기차는 이토 인생의 종착지인 하얼빈행이었다.
중국 10대 도시 중 하나인 하얼빈의 인구는 2020년 현재 천만이 넘는다. 중국은 하얼빈역을 새 단장했으나, 역사의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

하얼빈역에 표시된 의거 위치
안중근이 쏜 위치와
이토가 저격당한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출처-<한국NGO신문>
하얼빈역에는 안중근이 제국주의 심장을 향해 쏜 자리와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자리가 명백히 표시되어 있다. 두 지점의 거리는 7미터 남짓이다. 일면식도 없던 두 사람이 하얼빈역에서 조우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가 점유하고 있던 조차지였는데, 제정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건설을 목적으로 하얼빈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고 있었다.
1909년 10월, 제국을 꿈꾸는 일본 추밀원 의장과 러시아 재무장관이 만주 철도 부설권을 놓고 협상을 위해 만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는 조선과 중국의 운명이 걸린 문제이자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열강들의 이권이 걸린 일이었다. 하얼빈 역사상 전 세계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은 시기였다. 이때 이토도 같이 러시아 재무장관을 만나기 위해 하얼빈행 열차에 올랐다. 그리고 이토를 따라 안중근 역시 하얼빈으로 향했다.

당시 하얼빈역 모습
출처-<눈빛>
안중근이 이토를 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토가 탄 제국주의 열차를 멈추게 하기 위함이고, 더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말하기 위함이었다. 하얼빈은 약소국 무명인의 말을 들어줄 최적의 장소였으나, 말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토를 처단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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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팩토리공장장이 이제와서(?!?!) 유튜브를 시작했다.
기나긴 역사 중 흥미로운 주제를 집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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