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BRYAN 추천14 비추천0

 

“피의자가 게시한 글이 공공의 이익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점 등으로 보아 피의자는 고소인에 대해 비방의 목적을 가지고 위 범죄사실과 같은 글을 게시한 것으로 판단된다.”

 

“고소인의 사회에서 가지는 지위나 평가 즉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라 보여진다.”

 

“… 피의자가 해당 글을 게시한 행위에 대해 특정성, 공연성, 비방의 목적, 허위 사실에 대한 적시 모두 인정되어 … 기소의견으로 송치합니다.”

 

커다란 장막

 

기소의견으로 허위사실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뒤 보게 된, 수사보고서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 중 일부.

 

수사가 진행되고 조사를 받을 때만 하더라도 담당 수사관은 그간의 판례들을 참고해 충실히 나의 진술 및 의견도 반영하겠노라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기록된 보고서에는 내가 했던 얘기는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았다.

 

고소인이 직접 작성했다고 봐도 무방한 수사보고서.

 

수사보고서에 기술되어 있는 ‘나’라는 사람은 떠도는 소문을 확인도 하지 않고 진실이라 믿는, 그리고 남을 비방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특정인을 지목하고 정보통신망을 이용해 공공연하게 헛소리를 끄적거려 놓은 파렴치한 사람이었다.

 

해당 보고서의 결재 시간이 어느 정도 소요됐는지 확인해 보니, 기안은 20여 분 만에 검토되고 6분 만에 결재 되어 검찰로 넘겨졌다. 상급자는 보고서를 읽어보기는 했을까?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될 만한 사안이라 판단할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가졌을까. 아님, 애초부터 이렇게 작성이 되도록 약속이 되어 있어 검토하는 데 오래 걸릴 필요가 없었던 걸까.

 

111.jpg

출처 - <링크>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루 만에 압수수색 영장이 청구/승인되고, 수개월이 지난 뒤에도 입국한다는 소식만 듣고 새벽부터 공항으로 경찰을 보내 체포하려 했던 부지런함, 소환에 임하겠다고 수차례 확인해 주었음에도 부모님께 전화하고 집으로까지 찾아와 겁박하고 2시간 남짓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초범이니 괜찮을 거란 말을 줄기차게 이어왔던 상황들까지. 마치 “넌 범죄자야”라고 쓰인 포스트잇이 사방팔방에 붙여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상대가 외교부의 고위공직자이기 때문에 그랬을까? 엘리트 카르텔, 여기저기 연결된 수많은 네트워트 앞, 커다란 장막에 부딪혀 있는 내 자신은 초라고 나약한 존재였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2004년 7월, 외교부 간부가 여기자를 성추행 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당시 주요 언론에 보도된 자료에 따르면,

 

- 모 외무관이 일본의 언론사 서울지국의 여기자와 서울 강남에서 단둘이 술을 마셨고,

- 여기자에게 다가가 강제로 입을 맞춘 것으로 드러났으며,

- 진술서에서 술이 취해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실수를 저질렀다고 잘못을 시인했고,

- 이에 반기문 장관이 사과의 뜻을 전했다.

 

222.jpg

출처 - <링크>

 

해당 외무관은 보직 해임됐고, 징계 절차를 통해 감봉 3개월 등에 해당하는 경징계를 받았다. 이는, 2004년에 이미 확인된 사실이고, 성추행 가해자가 스스로 인정한 사안이었다. 그런데, 2016년에 내가 쓴 “2004년 여기자를 성추행 했던”이라는 문구 하나 때문에 경찰 조사에서 질문들을 받게 된다.

 

“고소인이 여기자를 성추행 사실이 있나요”

“여기자 누구를 성추행 하였나요?”

“언제, 어디에서 성추행 했나요?”

“성추행은 어떤 방법으로 한 것인가요?”

“이를 목격한 사람이 있나요?”

 

이미 주요 언론사에서 보도된 사실이다. 해당 보도를 인용해 쓴 글인데, 그것도 문제가 되느냐고 물었다. 사실 이런 식의 질문은 성추행으로 징계를 당한 이에게 질문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외교부장관이 직접 나서서 사과까지 한 사안인 데다 언론에서 보도까지 한 마당에, 이 기사를 인용한 나에게 어떻게 성추행을 했느냐 묻는다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진 않았다.

 

누가 성추행을 했는지, 피해 여성이 누군지, 언제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성추행 했는지는 이미 다 밝혀진 사실이다. 게다가, 가해자 스스로도 인정해 언론을 통해 이미 보도된 내용. 하지만, 경찰은 마치 내가 성추행이라도 한 사람인 양 구체적인 성추행 사실에 대해 추궁하며 물었다.

 

그리고, 경찰 측에서 최종적으로 승인한 보고서에 따르면, 성추행 사실의 근거를 뉴스 기사라고 한 점, 기사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지 않은 점, 그리고 고소인이 여기자를 상대로 성추행 한 사실이 없다고 진술한 점을 고려해 나를 허위사실을 유포자로 판단했다. 언론에 보도된 자료에 대한 사실 확인을 하지 않아 허위사실 유포라면, 도대체 기자들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이며, 언론에 보도되는 자료들은 모두 두세 번의 사실 확인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단순한 키워드 몇 개만으로도 검색이 가능한 과거의 사실에 대해, 경찰은 제대로 된 조사조차 하지 않고 나를 범죄자로 판단했다. 당시에는 제대로 느끼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슴을 짓누르던 답답함, 어쩌면 애초부터 조사할 의지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경찰에서 작성했던 글에 문제를 삼았던 부분은 세 가지다. 여기자 성추행, 여직원과 불륜 스캔들 그리고 대사관 내의 성추행 사건.

 

첫 번째 여기자 성추행과 관련해서는 이미 주요 언론사를 통해 보도된 바 있고, 가해자 역시 이를 인정해 징계 절차까지 끝난 사안이다. 따라서 경찰이 진짜 조사를 해야 하는 부분은 남겨진 두 건, 여직원과의 스캔들과 고소인이 대사관 제직 시절 벌인 또 다른 성추행 사건이다.

 

재판을 시작하며, 경찰에서 검찰에 송부한 기소 의견서를 보고 알았지만, 당시 경찰은 나를 고소했던 고소인에게 위에 제시된 세 가지 해당 사안에 대해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단 17번의 질문으로 조사를 마쳤고, 대부분 고소인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경찰은 고소인의 진술에 대해서는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주장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있느냐 물었을 때도, 고소인의 진술만 경청할 뿐 추가적인 질문이나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고소인은 억울하게 명예가 훼손된 사람이었다.

 

나와는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지명수배가 되어 체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차치하더라도,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시간은 공정해야 했다. 하지만 온도차는 확연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 여성이 거짓을 말할 수도 있지 않나요?”

 

경찰이 처음으로 사건과 관련해 했던 질문이다. 성범죄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건 피해자의 진술이다. CCTV 영상이나 녹취 파일과 같은 증거를 수집하기에 가장 어려운 범죄 중 하나가 성범죄이기 때문이다. 부지불식간에 벌어지는 일,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 인식하기도 전에 벌어지는 범죄가 성범죄다. 따라서, 실시간 CCTV 녹화지역에서 피해를 당한 게 아닌 이상 증거를 수집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여러 차례 성범죄 피해를 당할 것을 예상해 작정하고 증거를 수집해야 하는 어려움, 결국 여성들은 범죄자의 범죄 혐의를 위해 두 번 세 번 위험을 감수하며 증거수집을 해야 한다. 성범죄 사건은 피해자의 진술을 가장 중요한 증거이자 단서로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당시 경찰은 이러한 성범죄 사건에 대한 특수한 상황을 무시하고, 되려 피해 여성이 거짓으로 진술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한 것이다. 만약, 나를 고소했던 성범죄 가해자 의혹을 받고 있던 이에게도 같은 질문으로, 해당 사실에 대한 진위 여부를 확인했다면, 그나마 이해가 될 만한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정반대였다. 경찰은 조사 과정에서 피해자를 대신해 알리려 했던 나에게는 86 차례에 걸쳐 집요한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고소인에게 했던 17번의 질문에 5배에 해당하는 질문량. 유죄를 확실시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까지 들게 했다.

 

영국에 있을 때, 처음 연락을 취해 유죄라고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고, 또 조사를 해 봐야 아는 사안이라고 몇 차례 언급을 하긴 했지만, 압수수색 영장 발부를 시작으로 경찰서에 조사를 받으러 와야 한다는 고지를 하는 과정에서 보여진 경찰의 태도는 이미 답이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전 세계에 있는 대한민국 대사관은 총 116개. 직원들만 하더라도 수 천명에 이른다. 그중 영국의 대한민국 대사관 직원이 인터넷에 남긴 글이 뭐라고, 그리고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건 어떻게 알았는지 언론에 기사로 보도된다. 경찰에 접수되는 고소/고발 건수만 해도 상당할 테고, 검찰이나 법원에서 진행 중인 재판도 하루에만 수 천 건에 이를 텐데, 어떻게 이 사건을 콕 집어 보도를 했을까. 게다가, 보도되는 기사마다 뉘앙스가 비슷했다.

 

333.JPG

 

출처 - <링크>

 

일방적으로 소문만 듣고, 말 몇 마디에 폭로 글을 쓴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주기에 충분한 제목들로 지면이 채워졌다. 마치 경찰에서 나에게 씌우려 했던, 한 쪽 말만 듣고 진실을 곡해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기사화되는 언론 보도였다. 여전히 의아하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상황이 이렇게 흐르다 보니 마치 내가 혹시 피해 망상에 빠져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30여 년을 넘게 인생을 살아오며 그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일들이기에, 여기저기서 말로 전해 듣던 일들이 내 앞에 놓여 있었기에 혹시라도 내가 뭔가 잘못 판단한 건 아닌가 하는, 현실을 왜곡해 받아들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스스로를 돌아보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면 돌파하던지, 아님 억울하더라도 눈 딱 감고 인정해 순간을 피하던지 둘 중에 하나였다. 무죄든 유죄든, 검찰에 기소가 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심리적 압박으로 다가오고 그러다가 인생을 허비한다는 논리, 그래서 이러한 방법으로 상대방을 괴롭힌다는 얘기, 거대한 장벽이니 기울어진 운동장이니 하는 얘기들은, 나에겐 먼 나라 이웃나라 얘기였다.

 

하지만, 지금도 수 백 페이지가 넘는 형사소송기록과 재판 기록들 여기저기를 훑어가며 느끼는 소회는, 기울어진 운동장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으로 중심잡기를 하고 있었다.

 

성폭력 사건은 일반적인 범죄들과 달리 평생 동안 트라우마를 을 안고 갈 수밖에 없는 고통이 수반된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흐른다 한들 절대로 씻을 수 없는 게 바로 성범죄다. 게다가 성범죄는 피해자가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증거를 모아야만 피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증명하기 매우 어려운 사건 중 하나다. 따라서 피해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성범죄는 절대로 진실을 파헤칠 수 없는 특성을 갖고 있다. 객관화된 사료 (음성이나 영상 녹취 등) 수집이 어렵기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는 약자 중에서도 가장 약자일 수밖에 없다. 혼자 만의 싸움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주변의 관심과 도움이 절실한 부분이 바로 성범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