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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

 

뼈아픈 실수와 세 번의 각성

 

 

 

작전명 ‘늙은 늑대사냥’

 

안중근과 우덕순은 러시아 조차지인 하얼빈에서 거사를 진행하기 위해 추가 인력이 필요했다. 

 

“러시아 말을 할 줄 아시오? 나는 모르오.”

 

“내가 잘 아는 한약방이 있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오.”

 

안중근과 우덕순은 유경집 의원의 문을 두드렸고, 그는 러시아어가 가능한 아들 유동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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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

출처-<공훈전자사료관>

 

“선생! 아드님이 너무 어리지 않소?”

 

“17살이면 내 앞가림은 하오. 나라를 구하는데 나이를 따질 작정이오?”

 

유동하에 이어 하얼빈에서 십 년 넘게 세탁소를 운영하던 조도선이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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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도선

 

안중근 일행은 거사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 네 곳의 역에서 이토를 기다리려고 했다. 그러나 사람이 부족했다. 여러 사람에게 의중을 묻기에는 비밀이 누설될 가능성이 있었다.

 

“두 팀으로 나눕시다. 먼저 역은 작지만, 환승역인 채가구역에서 두 분이 대기하고, 종착지인 하얼빈역에는 내가 대기하겠소.”

 

“그럼 나는 무엇을 한단 말이오? 나이가 어리다고 빼려고 하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소.”

 

“아직까지 도적의 도착 날짜가 정확하지 않으니, 자네는 계속해서 정보를 수집하여 양측에 전달하게.”

 

안중근은 어린 유동하를 위험한 일에서 의도적으로 제외했다. 그러나 하얼빈행 기차에 오른 결정은 이미 목숨을 내건 일이었다. 

 

두 역의 사전 답사를 마친 세 사람은 옷을 사 입고, 이발을 한 후 사진관으로 향했다. 죽음을 확신한 젊은이가 생의 마지막 사진을 찍기 위해 제 발로 사진관을 찾는 심정은 어떨지 짐작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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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우덕순, 유동하

출처-<공훈전자사료관>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때를 만든다.”

 

- 안중근 장부가 中-

 

 

채가구역

 

채가구역은 하얼빈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환승역이다. 이토가 탄 열차는 (1909년 10월) 25일 또는 26일 아침 6시경 이곳에 정차할 것이다. 이토가 피곤해서 기차에서 내리지 않을 수도 있고, 새벽 공기를 마시기 위해 열차에서 내릴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하얼빈역보다 경비 인력이 적기에 오히려 일이 쉬울 수도 있다. 여기서 두 사람이 성공하지 못하면 기차는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고 공은 안중근에게로 넘어간다.

 

 

1909년 10월 26일

 

채가구역에서 대기 중이던 두 사람은 러시아 경비들의 제지로 역 안에도 입성하지 못했고, 이토가 탄 기차는 안전하게 하얼빈으로 출발했다. 

 

안중근은 아침 7시부터 하얼빈역 2층의 찻집에서 사냥 모자를 쓴 채 승강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코트 왼쪽 주머니에는 7발의 총알이 장전된 벨기에산 브라우닝 권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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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역사팩트만 '안중근 권총의 행방' 영상 캡쳐>

 

일이 되려면 사람의 의지도 중요하고 능력도 중요하지만, 하늘이 도와야 한다. 이토가 도착하는 날 하얼빈역 경비는 의외로 허술했다. 

 

“최대한 많은 일본인이 역으로 나와 이토님을 환영해야 하니, 러시아 군은 동양인에 대한 검문을 자제하시오. 협조를 바랍니다.”

 

일본이 안중근을 도운 것이다. 안중근은 별 제지 없이 인파 사이를 뚫고 열차가 도착하는 플랫폼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오전 9시, 군악대의 나팔이 울리고, 이토가 탄 기차가 마침내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토는 열차 안에서 러시아 재무대신과 30분간 회담을 가졌다. 안중근에게는 일생에서 가장 긴 30분이었다. 온몸에 열이 올라 품 안의 총이 폭발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이지 않았을까.

 

잠시 후, 기차의 문이 열리고 군중들이 요란한 함성과 박수를 쳤다. 안중근은 이토의 얼굴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가장 직책이 높아 보이는 자를 쏘고 주변의 다른 인물을 쏘기로 작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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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영화 ‘하얼빈’>

 

객차 안에서 일본인과 러시아인이 뒤엉켜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단박에 늙은 도적을 알아보았다. 

 

“네 놈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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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영화 ‘하얼빈’>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조금 더 기다려야 했고, 이토가 사정권에 들어오자, 안중근은 망설임 없이 세 발을 쏘았다. 이토가 쓰러졌지만, 만일을 대비해 옆에 있던 세 명의 일본인을 향해 각 한 발씩 사격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 박연선작.png

출처-<박영선作>

 

경비대에게 제압되기 전 안중근은 자리에 당당히 선 채로 외쳤다.

 

“코레아 우라”

(Корея! Ура!) 

 

러시아어로 ‘대한 만세’를 외친 것이다. 휜 수염을 길게 기른 늙은 도적 이토 히로부미는 총격 30분 후 사망했다. 

 

 

재판

 

일제는 안중근을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으로 끌고 간 후, 재판을 위해 자신들의 점령지인 뤼순으로 이송시켰다. 러시아 관할인 하얼빈에서는 국제법을 어겨가며 일방적인 재판을 진행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1910년 2월 7일, 첫 재판이 시작되었다. 

 

일제의 의도는 안중근을 파렴치한 테러리스트로 만드는 것이었고, 안중근의 의중은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 이토의 사망은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끌었고, 많은 외신 기자가 공개 재판에 참여했다. 

 

왜 이토를 죽였냐는 물음에 안중근은 총 15가지의 이유를 일목요연하게 말한다.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한 죄

 

3. 을사늑약과 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5. 나라를 강제로 빼앗은 죄 

 

안중근의 위대함은 열악한 환경에서 이토를 저격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탁월한 식견과 언변으로 서방 언론은 물론 일본인까지 안중근에게 매료됐다(영화 ‘하얼빈’에서 다른 건 좋았지만, 하나 아쉬운 점을 꼽자면, 이 재판 과정이 완전히 생략된 것이었다).

 

논리에서 안중근에게 완전히 패한 일본 재판부는 다음 날부터 재판을 비공개로 전환했다. 

 

“내 입에 총이나 대포가 들었느냐? 도대체 무엇이 무서운 것이냐? 나는 안중근 개인이 아닌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자 우리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인 이토를 대한 의용군 군인의 자격으로 쏜 것이다. 그러니 전쟁포로로 나를 재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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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에서 네 사람

(유동하, 조도선, 우더순, 안중근)

 

 

외신 반응

 

영국의 한 기자는 재판장의 안중근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일본 정부가 공들여 준비하고 진행한 이 재판은 결국 안중근의 승리로 끝난 것이 아닐까? 일본 제국주의 상징 이토 히로부미는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하고, 피고 안중근은 재판의 승리자가 되어 왕관을 손에 들고 늠름하게 법정을 떠났다“

 

첫 재판 이후, 일주일간 무려 6번의 재판이 진행되었다. 일제는 시간을 끌수록 안중근의 위상만 높아지고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다. 

 

2월 14일, 우덕순과 조도선에게 각 징역 3년과 1년 6개월이 내려졌고, 안중근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안중근은 판결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었다.”

 

-대한매일신보 2월 14일 기사-

 

안중근은 감옥에 있는 동안 자식들에게 남길 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와 동양평화론 집필에 열중했다. 그 와중에도 무려 200편이 넘는 유묵을 남겼는데, 현재 세상에 알려진 작품이 60점 정도이며 이 중 25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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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문화재청>

 

놀라운 점은 대부분의 유묵을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들에게 써 주며 일제의 감옥 안에서 동양 평화를 몸으로 실천하였다는 것이다.

 

 

안중근에게 매료된 일본인들

 

안중근의 사상에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마음으로 깊이 존경하게 된 일본인은 한둘이 아니다. 정심사 주지 스님 ‘마쓰다 마사유키’는 수시로 감옥을 찾았고, 형무소장은 동양평화론 집필이 완성될 때만이라도 형 집행을 연기해 달라고 본국에 요청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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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안중근 의사 기념관>

 

한 일본 기자는 비공개로 전환된 재판 전 과정을 그림으로 남겼고, 안중근을 찾아가 유묵을 청했다. 이뿐 아니었다. 그를 취조하던 검사, 통역관, 감옥 내 의사, 세관 직원, 일본인 초등학교 교사와 심지어 통감부 경찰까지 몰래 유묵을 청해 받아 갔다. 

 

일본의 사상가 고토쿠 슈스이는 안중근의 엽사를 품고 다녔고, 하얼빈에서 통역 임무를 수행하다 안중근의 총에 맞아 부상을 입은 다나카 세이지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훌륭한 사람은 안중근이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中- 

 

이런 케이스 중에서도 유명한 건 사형수 안중근과 일본인 간수의 일화일 것이다. 이 일화는 울산 MBC에서 ‘마지막 간수’라는 제목의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암흑의 시대에 피어난 한 편의 동화를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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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살의 혈기 왕성한 군인 지바 도시치는 안중근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했다. 때마침 안중근을 특별 감시하라는 임무가 부여되자 그는 총을 겨누기까지 했다. 

 

“안중근! 너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그러나 도시치의 증오가 녹아내리고 안중근을 존경하기까지 144일은 충분한 시간이었다. 

 

형 집행을 앞두고 두 사람은 마지막 만남을 가졌다. 지바 도시치는 안중근에게 눈물로 용서를 구했다.

 

“선생님,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죄송한 마음에 가슴이 저립니다. 앞으로 선한 일본 사람이 되도록 생을 바쳐 정진하겠습니다.”

 

“아니야. 자네가 용서를 구할 일은 아니지. 자네도 나도 그저 나라의 군인으로서 할 일을 한 것뿐이야. 먼 훗날 동양에 평화가 찾아오면 우리 다시 태어나 반갑게 만나세.”

 

상등병 지바 도시치는 조선인 안중근을 끝까지 호위한 후, 다음날 스스로 군복을 벗었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그의 품에는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글이 적힌 안중근의 유묵이 소중하게 담겨있었다.

 

도시치는 철도원으로 살아가며 안중근의 위패와 유묵을 모시며 선한 일본인으로 살다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족은 1980년 안중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유묵을 대한민국에 반환했다.

 

“내가 선생님에 대한 사랑이 너무 깊어 너무 오래 간작했습니다. 선생님의 무덤도 없는데 글씨라도 고향으로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도시치의 고향에 있는 일본 대림사의 주지 스님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감동 받아 안중근 의사 기념비와 위패를 절에 모시며 매년 기일에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순국

 

1910년 3월 25일, 안중근의 두 동생이 어머니의 편지와 수의를 전달하기 위해 면회실에 들어섰다. 누구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내일 안중근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도 그들 몫이었다. 

 

“형님! 여기 어머님 편지요.”

 

조마리아 여사와 안중근 의사 국가보훈부.jpg

출처-<안중근 기념관>

 

안중근은 편지를 펴보았다. 이 편지가 우리 알고 있는 그 유명한 편지다. 안중근의 어머니이자 독립 투사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 안중근에게 “나라를 위해 딴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고 말했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있다. 안중근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가진 모성애라는 본능을 억누른 채 자식에게 공익을 위해 희생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러나 편지의 구석구석에 자식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깊게 박혀 있어 더 애통하다. 어쩌면 인류 역사상 어머니가 자식에게 남긴 가장 숭고한 편지를 소개한다.

 

「아들아!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를 낭독한 영상이 있다.

낭독 영상으로 편지를 접해보고 싶은 독자를 위해 소개한다.

 

안중근은 어머니의 편지를 읽고, 짧은 유언을 남겼다.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 해다오.”

 

안중근의 형이 집행되던 날은 비가 내렸다. 

 

10시 정각에 사형장에 들어선 안중근은 3분 동안 기도를 하였고, 10시 4분에 그의 목에 밧줄이 걸렸다. 15분 후.... 독립 투사 안중근의 절명을 확인한 형무소 간수들은 투옥 중이던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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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덕순

 

재판 내내 냉정함을 유지하던 우덕순도 통곡하며 안중근의 시신 위에 쓰러졌다. 

 

어린 유동하는 결국 일제에 잡혀 투옥되었다. 또한 감옥에서 당한 고문으로 왼쪽 귀가 실청(失聽)되었고, 손가락이 네 개나 부러진 채 고향을 찾았다. 아직도 스무 살이 안 된 소년이었다. 어머니의 억장은 무너졌다.

 

“아가! 이제 다시는 독립운동 같은 거 하지 마라”

 

“어머니! 그런 말씀 하지 마시오. 중근이 형이 죽었소.”

 

유동하는 끝내 어머니의 말을 따르지 않고 다시 독립운동을 하다 25살의 나이로 일제에 의해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일제는 안중근의 유해를 가족에게 인계해 주지 않았다. 때문에 현재까지도 안중근의 유해는 뤼순 감옥 인근 어느 묘지에 잠들어 있을 것이라 추정만 할 뿐이다.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달라”는 안중근의 바람은 아직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효창공원에 있는 그의 묘는 ‘가묘(임시묘)’다. 하루빨리 그의 유해를 찾아 그 가묘가 채워지길 바랄 뿐이다.

 

(안중근 사후, 안중근의 후원자이자 또 다른 독립운동가 최재형도 사력을 다해 싸우다 일본군에게 총살당했다. 일제는 안중근의 시신처럼 그의 시신도 인계를 거부했다. 다행히 최재형의 유해는 2023년 국내로 봉환되어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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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에 있는 삼의사묘

맨 왼쪽은 안중근 의사 가묘이며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 순이다.

출처-<비즈한국> 

 

 

 

 

 

슈퍼팩토리공장장이 이제와서(?!?!)

유튜브를 시작했다.

 

기나긴 역사 중 흥미로운 주제를 집어

한 편 한 편 이야기로 엮는다. 

 

필요할 때는 스스로 재연(?!)하는데,

가서 허접한 연기를 비웃어주자...!

 

유튜브 채널 <역사킹> 링크

 

 

 

 

 

 

필자의 지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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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찌라시 한국사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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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찌라시 세계사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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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 아직 안 죽었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