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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한 인물의 이력이다.

 

1. 엘리트 출신이지만 정치 경력 없는 신인이 대통령 출마

 

2. “저팬(Japan) 머니로 부자 만들어주겠다” 공약

 

3. ‘강력한 지도력’ 내세워 모두의 예상을 깨고 대통령 당선

 

4. 친일 정책 추진하며 일본에 국부 유출

 

5. 그러나 여소야대 정국으로 뜻대로 안 됨

 

6. 집권 2년 만에 계엄령 선언하고 친위 쿠데타 발동

 

7. 국회에 탱크 진주, 군대가 의회에 최루탄 까 넣음

 

8. 국회 해산, 대법원 판사 해임해 삼권분립 붕괴

 

9. 계엄군, 비판적 언론인 납치 구금

 

10. 자기편 정치인까지 암살조 파견

 

윤석열 내란수괴 이야기냐고? 

 

아니다. 

 

페루 대통령 알베르토 후지모리 이야기다. 흡사한 건 대통령의 이력만이 아니다. 페루의 상황도 놀랄 정도로 현재 대한민국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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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대통령 알베르토 후지모리

(재임 기간 1990-2000년)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윤석열 내란수괴는 친위쿠데타에 실패했고, 후지모리는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라를 망쳤다.

 

만약, 대한민국이 시민들의 힘으로 친위쿠데타를 저지하는 데 실패했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됐을까? 후지모리 독재 체제의 페루를 보면, 그 답을 볼 수 있다.

 

 

‘저팬 머니’ 공약으로 당선된 정치 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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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선거 운동 중인 후지모리

출처-<BBC>

 

후지모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페루로 이민 온 일본계 이민자의 아들이다. 수학과 공학을 전공했는데, 공부를 잘해서 미국 유학 후 국립대학 총장까지 역임한 엘리트였다. 그는 특히, 농업과 경제에 관한 전문가로 이름을 알렸다. 

 

이런 그에게 1985년 인생을 바꿀만한 기회가 찾아왔다. 그가 1985년에는 페루 국영 방송의 TV토론 프로그램 진행자를 맡게 된 것이다. 굉장히 유명한 방송이었다. 이 토론 방송으로 인해 그는 페루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전국민적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토론 진행자로 활동한 지 5년 후인 1990년, 후지모리는 갑자기 대선에 출마했다. 그전에 별다른 정치 경험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그가 가졌던 이력이라고는 국립대학 총장, TV토론 프로그램 진행자 정도였다. 물론, TV토론 진행자로 신뢰 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인기가 엄청나긴 했지만 말이다.

 

그의 공약은 단 하나였다.

 

“여러분, 제가 대통령이 되면 저팬(Japan) 머니를 강물처럼 흐르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아~~~!”

 

1990년은 일본 버블경제가 끝판을 달릴 때였다. 일본이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서며 전 세계 경제를 휘어잡을 때였다. 이때 일본 출신인 엘리트 경제학자가 “일본 돈으로 부자를 만들어드리겠다”고 외친 것이다. 인플레와 경제난에 허덕이던 페루 국민들은 믿음직한(!) 정치 신인 후지모리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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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에서도

남미 최초 일본계 국가원수 탄생은

화제를 모았다.

출처-<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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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KBS>

 

 

집권한 후지모리는 ‘민영화’ ‘외자 유치’를 외치며, 국영기업과 석유, 천연가스 등 각종 국부를 외국에 펑펑 팔아치웠다. 그 결과, 페루 경제도 반짝 살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외자 유치’의 상당 부분은 일본 정부의 지원금 또는 일본 기업의 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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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모리는 ‘일본계 최초 국가원수’로

모국 일본에 금의환향했다.

일본에서 아키히토 덴노(일왕)를 만나는 후지모리

출처-<게티이미지>

 

또한 강력한 군사력으로 국내 반군 및 마약 카르텔 소탕에 나서, 후지모리의 국민적 인기는 날로 높아져 갔다.

 

그러나 이런 후지모리에게 대항(?)하는 ‘철천지원수’가 있었으니 바로 페루 의회였다. 그가 소속된 여당 ‘개혁90’은 제3당에 불과했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후지모리는 자기 마음대로 정책을 추진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후지모리는 외쳤다.

 

“반국가 세력이 따로 없네. 국회 싹 쓸어버려. 저항하면 끌어내.”

 

 

친위 쿠데타의 시작

 

후지모리는 1992년 4월 5일 TV에 출연해 ‘정령 25418호’(Decree Law 25418)를 발표했다.

 

1. 헌법 효력을 정지한다.

 

2. 공화국 의회를 해산한다.

 

3. 법원 등 사법권 활동을 중단한다.

 

4. 정부 부정부패를 단속한다.

 

후지모리는 국가정보국 국장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에게 명령해 ‘친위 쿠데타’를 시작했다. 먼저 후지모리는 계엄령 선포와 함께 페루 국회와 대법원에 탱크를 진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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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페루 대법원을 점령한

계엄군 자주포와 군인들

출처-<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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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의회 앞에 출동한 계엄군 탱크와 무장 병력

출처-<lagaceta>

 

일부 의원이 의회에 모여 회의를 열려고 시도했으나, 계엄군은 국회에 최루탄을 까 넣어 의원들을 해산시켰다.

 

 

체포조, 암살조를 통한 불법 납치, 살해

 

후지모리는 또한 친위 쿠데타 당일 계엄군을 통해 체포조와 암살조를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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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언론인 ‘구스타보 고리티’

 

최우선 체포 대상은 비판적 언론인 ‘구스타보 고리티(Gustavo Gorriti)’였다. 고리티는 자택에서 체포되어 계엄군에게 끌려갔다.

 

그러나 다행히 고리티는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고, 이럴 때를 대비해 플랜을 짜놓고 있었다. 고리티가 불법 납치된 직후 고리티의 아내는 미국 및 세계 언론에 이 사실을 고발했다. 덕분에 국제적 압박을 받은 후지모리는 고리티를 3일 만에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석방된 고리티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죽을 뻔하다 겨우 살아난 것이다. 

 

후지모리의 제거 대상은 상대 정당이나 비판 언론인뿐 아니었다. 후지모리는 자신의 직전 대통령 ‘알란 가르시아’도 제거하라고 지시한다. 여기서 반전은 이 알란 가르시아는 후지모리와 대척점에 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르시아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있었던 1990년 진행된 대선에서 정치 신인 후지모리를 팍팍 밀어준 ‘은인’이었다. 그러나 가르시아가 다음 대선에 출마할 움직임을 보이자, 후지모리는 가르시아 제거까지 지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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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대통령 ‘알란 가르시아’

(재임 1985-1990, 2006-2011)

출처-<AFP>

 

후지모리의 명령을 받은 몬테시노스 국가정보국장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가르시아의 집에 암살조를 보내 죽여라.”

 

그러나 가르시아는 다행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암살조가 오기 전 받은 한 통의 익명 전화 덕분이었다.

 

“지금 즉시 몸을 피하십시오. 피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가르시아는 재빨리 콜롬비아 대사관으로 몸을 숨겼다. 대사관에서 2개월을 버틴 가르시아는 동료 정치인 몇 명과 함께 콜롬비아 공군 수송기를 타고 콜롬비아로 망명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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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 페루 국가정보국장

 

 

‘강력한 지도자’를 지지한 민중들

 

후지모리는 국회 해산 후 1993년 선거를 치러 새 헌법을 제정하고 새 의회를 선출했다. 새 헌법은 대통령 권한을 대폭 강화하고, 의회 권한을 제한했다. 후지모리는 대법원 판사도 자기 입맛대로 새로 임명해 ‘3권분립’을 붕괴시키며 명실상부한 절대 독재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페루 민중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뜻밖에도 민중들은 후지모리의 친위쿠데타를 지지했다. 

 

첫째, 후지모리는 자기 공약대로 ‘저팬 머니’를 끌어오고 있었고,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는 착시 현상을 국민들에게 보여줬다.

 

둘째, 군소정당이 난립하는 페루 의회는 매일같이 다투기만 했고, ‘여소야대’로 인해, 진행되는 일이 없었다. 의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국민들은 ‘부패한 의회를 싹 쓸어버릴’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

 

셋째, 후지모리는 계엄령 직후 경찰과 군대에 특수부대를 조직하고 반군과 마약 카르텔 지도자를 잇달아 체포, 사살하는 등 성과를 거뒀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반국가 세력을 척결해야 한다”는 것이 후지모리의 명분이었다. 그 결과 ‘반국가 세력’과 싸우는 ‘강력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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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반군 ‘투팍 아마루’가

페루 주재 일본 대사관을 점령하고

인질을 잡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후지모리는 방탄조끼를 입고

특공대를 지휘하는 모습을 연출하며

‘강력한 지도자’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강력한 지도자’ 이미지 뒤에는 불법 폭력과 처형이 잇달았다. 후지모리는 군대, 경찰 산하에 비밀부대와 민병대를 조직했고, 이들은 불법적 체포와 처형을 자행했다. 1992년 친위 쿠데타 직후, 정부를 비판하는 교수와 대학생 9명이 살해당했다. ‘라 칸투타’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후지모리가 만든 군 특수부대 ‘코리나 부대’의 소행이었다. 대학생과 노동조합의 정부 비판 움직임도 잔인하게 진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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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페루 리마에서 열린

후지모리 퇴진 시위를 진압하는 페루 경찰

출처-<게티이미지>

 

언론인에 대한 탄압도 잇달았다. 탄압의 대상은 페루 언론인뿐만 아니었다. 외국 언론인들도 탄압 대상이었다. 정부 비판 방송을 하던 이스라엘 언론인은 추방되고, 미국인 기자는 ‘테러리스트’ 혐의로 군사법원에서 종신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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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적 언론인 로리 베렌슨은

후지모리 정권하에서

‘테러리스트’로 기소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000년 후지모리 몰락 직후

풀려난 베렌슨이 기자 회견을 갖고 있다. 

출처-<게티이미지>

 

 

3선 성공, 그리고 몰락

 

후지모리는 자기가 만든 신헌법으로 1995년, 2000년 대선을 치러 3선 대통령이 되는데 성공했다. 학생 등 민주화 세력이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야당 후보가 부정선거로 선거를 보이콧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선거였다.

 

후지모리의 독재 권력이 날로 상승하며 최정점에 달하였을 시기, 그때였다. 

 

거대한 폭탄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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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기관장 몬테시노스가

야당 의원에게 현금을 주며

매수하는 장면을 촬영한 비디오

출처-<infobae>

 

후지모리의 측근인 정보기관장 몬테시노스가 야당 의원에게 현금을 주며 매수하는 장면이 언론에 의해 폭로된 것이다. 몬테시노스는 평소에도 암살과 납치 등 ‘더러운 짓’으로 민중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후지모리 10년 독재 동안 쌓인 부정부패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국가 예산의 30-35%가 군부와 정치권의 부정부패에 흘러 들어갔다. 이런 상황을 주도하는 자는 역시 ‘몬테시노스’였다. 

 

이런 상황에서 스위스 주재 페루 대사관이 “몬테시노스가 미국 원조 자금 4,000만 달러를 스위스 은행 계좌로 송금했다”고 폭로하면서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게다가 후지모리가 업적으로 내세웠던 경제발전도 망한 상황이었다. 1990년대 말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일본을 위주로 한 해외 투자가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후지모리는 몬테시노스를 해임하며 ‘토사구팽’했다. 몬테시노스는 결국 베네수엘라로 망명했다. 그러나 분노한 민심은 ‘몬테시노스 꼬리자르기’에 납득하지 않았다. 의회는 후지모리 탄핵에 돌입했다. 대통령궁 앞에 몰려든 시위대 앞에서 후지모리는 절대 퇴진하지 않겠다며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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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9월 19일

대통령 궁 문 위에 올라서서

‘절대 퇴진하지 않는다’고 외치는

후지모리 대통령

출처-<elpais>

 

겉으로는 배짱 있는 척, 강력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쫄보’였던 후지모리는 자신이 내뱉었던 말과 다르게 불과 2개월 후 ‘국제 경제 회담에 참석한다’며 출국한 뒤, 비밀리에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러고는 페루 의회에 무려 ‘팩스’로 사직서를 보냈다.

 

“일신상의 이유로 자진 사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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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대통령 사임과 일본 망명 후

기자회견을 갖는 후지모리

출처-<게티이미지>

 

분노한 페루 의회는 후지모리의 사직서를 거부했고, 새로 취임한 알레한드로 톨레도 대통령은 후지모리 형사 기소를 추진했다. 일본 정부에 후지모리의 신병 인도를 요구한 것은 물론이다. 이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후지모리는 사실 일본인이었다.”

 

페루 정부의 후지모리 송환 요구에 대해 일본 정부는 이렇게 답했다.

 

“일본인 성인은 2년 내 국적을 선택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일본 국적을 선택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후지모리 켄야(알베르토 후지모리의 일본명)는 일본 국민이다. 일본 정부는 자국민을 외국에 송환할 수 없다.”

 

후지모리는 평생 동안 자기가 ‘페루-일본 이중국적자’임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사실은 ‘이중국적자’였다는 사실은 페루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반일 감정’이 확산했다. 

 

후지모리는 페루 국민들이 열받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일본에서 편안하게 망명 생활을 보냈다. 후지모리의 뻔뻔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나서 그는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일국의 대통령’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추태가 시작되었다.

 

먼저, 2006년 67세의 후지모리는 자기 딸뻘인 37세 일본인 여성과 재혼하겠다고 선언했다. 원래 후지모리의 부인은 같은 일본계 페루인 ‘수산나 히구치’였다. 그러나 그녀는 후지모리가 대통령이 되고 5년이 지난 1995년 이혼했다. 그녀가 밝힌 이유는 다음 같았다.

 

“대통령이 되더니 사람이 변했다.”

 

이후 서류상 ‘솔로’였던 후지모리가 일본 망명 생활 중 딸뻘 일본인 여성과 재혼을 선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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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모리의 재혼 상대 ‘가타오카 사토미’

출처-<게티이미지>

 

얼마 후, 후지모리는 더 충격적인 일을 벌였다.

 

그가 2007년 일본 중의원 선거 후보에 출마한 것이다. 비록 낙선했지만, 외국 대통령까지 역임한 사람이 다른 나라 정계에 출마했다는 사실은 페루는 물론이요, 일본 사회도 경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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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일본 중의원 선거에

후보로 출마한

후지모리의 선거운동 전단

출처-<게티이미지>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믿기지 않는 후지모리의 기행에 페루 국민들의 민심은 더욱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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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모리 송환을 요구하며

페루 리마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페루 시민들

출처-<게티이미지>

 

페루 법무부는 후지모리와 몬테시노스의 불법 자금 1,800만 달러를 동결하고, 2001년에는 후지모리를 살인죄로 기소했다. 게다가 2003년에는 인터폴에 살인 용의자로 수배까지 때렸다. 집권 기간 특수부대를 동원해 정치적 반대자를 재판 없이 불법 살해한 혐의였다. 페루 특검은 후지모리가 8억 6,100만 달러를 횡령했다는 혐의로도 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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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납치, 사기 혐의로 인터폴에 수배된 후지모리

출처-<게티이미지>

 

페루 진실화해위원회는 2004년 “후지모리가 조직한 특수부대가 마약, 테러 조직 검거 및 처형에 역할을 담당했으나, 한편으로 정치적 반대자들을 대상으로 살해, 납치, 학살을 저질렀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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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모리 특수부대의

불법 처형을 수사하기 위해

무덤에서 꺼내지는 희생자의 관

출처-<게티이미지>

 

 

체포, 그리고 재판

 

이렇게까지 뻔뻔하던 후지모리였지만, 페루 일부에서는 아직도 일부 지지자들이 있었다. 후지모리는 그들을 기반으로 다시금 권력을 잡으려 했다. 그는 2006년 대선 출마를 노리며, 2005년 칠레를 통해 페루 밀입국을 시도했다. 

 

그러나 후지모리는 결국 칠레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고, 칠레에 있는 한 가택에 연금되었다. 후지모리는 이 시기에 앞서 말한 딸뻘 일본인 여성과 정식으로 재혼했다. 옥중 결혼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해 후지모리는 "인생 최고의 날"이라는 입장을 내기도 했다.

 

이후, 2007년 마침내 후지모리는 페루로 압송,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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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살인죄 재판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후지모리

출처-<Politikaperu>

 

결국 후지모리는 2007년 살인, 납치, 횡령, 사기 등의 혐의로 징역 25년을 선고받고 감옥으로 들어갔다.

 

역시, 역사의 사이다 결말은 쉽지 않았다.

 

2017년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페루 대통령은 후지모리를 사면했다. 후지모리의 아들 후지모리 켄지가 국회의원이 되면서 쿠친스키 대통령 편을 들어준 것에 대한 ‘보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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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모리의 아들이자 국회의원인 후지모리 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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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친스키 대통령의

후지모리 사면에

항의하는 의문사 유가족들

출처-<게티이미지>

 

페루 국민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페루를 지키기 위해, 사이다 결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 덕에 후지모리가 사면되고 불과 1년 후, 페루 대법원은 쿠친스키 대통령의 사면이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후지모리는 2019년 다시 감방으로 향했다. 

 

이후 후지모리는 법원 판결에 따라 병원과 감옥을 오가며 살다가 2023년 건강상의 이유로 완전 사면을 받았다. 얼마 후인 2024년 그는 설암 진단을 받고 지난 9월 11일 결국 사망했다. 향년 8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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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재판을 받는 후지모리

출처-<pagina12>

 

 

후지모리가 남긴 것 : 친위 쿠데타의 상설화

 

‘후지모리’라는 인물이 페루에 남긴 국가적 상처는 굉장히 크다. 먼저 그는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독재자’로 평가받고 있다. 2004년 ‘국제 부패보고서’는 후지모리를 가장 부패한 국가 지도자 가운데 7위로 꼽았다.

 

후지모리가 그래도 말년에 죗값을 받지 않았느냐고? 그걸로만 만족하기에는 그가 남긴 후과가 너무 컸다. 후지모리는 페루 정치권 깊숙이 악마 같은 유산을 심어놨다. 후지모리 이후 페루 대통령과 의회는 수틀리면, ‘후지모리식 필살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의회 

 

“(조금만 대립하여도) 띠바, 탄핵이다!”

 

대통령 

 

“(조금만 맘에 안 들어도) 띠바, 개객끼들아. 국회 해산이다. 친위 쿠데타 발동!”

 

다음 기사에서는 후지모리가 남긴 유산으로 인해, 페루 정치권에 탄핵과 친위쿠데타가 어떻게 벌어지는지, 성공한 친위쿠데타가 나라를 어떻게 망치는지 살펴보겠다.

 

<계속>

 

 

 

추신) 기사를 준비하며 깨어있는 국민들이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를 저지한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하고 다행인 마음을 갖게 되었다. 대한민국도 까딱하면 저런 꼴이 되지 않았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