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찾은 유학생 숫자가 20만 명을 넘었다. 이들은 케이팝이 좋아서, 한국 드라마를 즐기다가 한국문화에 빠져들어서, 군사독재를 이겨내고 민주화를 이룩한 힘을 배우러, 한국 경제발전과 첨단 기술을 공부하러 한국을 찾는다.
딴지일보와 딴지영진공에서 영화와 음악 얘기를 주구장창 떠들었던 “무려 문화인류학 박사” 헤비조는 유학생이 학생의 절반을 훌쩍 넘게 차지하는 정부 출연 연구교육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이하 한중연)에서 인류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맞다, 나다) 2024년 2학기에도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 튀르키예, 이집트, 영국, 아르헨티나,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을 공부하겠다고 찾은 학생들과 만났다.
독자들도 그렇겠지만 한국을 찾은 유학생들도 공부만 하는 건 아니다. 가끔 새벽까지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어울려 바삭한 치킨에 탄산으로 승부하는 맥주 조합을 즐기고, 냉삼에 소주잔을 기울이다 볶음밥까지 챙겨 먹다가 막차 시간을 놓치기도 한다. 학생들은 그렇게 기숙사로 돌아가는 새벽 밤거리가 놀랍도록 안전하다는 사실에 신기해한다.
다양한 먹거리에만 놀라는 건 아니다. 서유럽과 북미에서 온 유학생을 제외하면 한국 언론이 정부와 사회제도 비판 기사를 내는 모습, 심지어 몇몇 음모론적 기사까지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렇게 만날 시끄럽고 우당탕거리고, 뭔가 무지 느리지만 결국 사회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한국의 민주주의 역량에 또다시 놀란다.
결정적으로 정치와 법이 해결하지 못하는 사안이 닥치면 촛불을 들고 거리에 쏟아져나와 시민들이 직접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에 정말 큰 놀라움에 빠진다. 심지어 도심 한가운데에 몇십만 명이 넘게 모여서 집회를 했는데, 뭐 하나 파괴되지도 않고 약탈도 일어나지 않는 장면은 유학생들에게 신기함을 넘어 ‘이게 뭐임?’같은 반응마저 끌어낸다.
그런데 맛있고 재밌고 안전한 민주국가 대한민국에 지난해 12월 3일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전시나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는커녕 평소처럼 치맥을 즐기던 오밤중에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느닷없이 국회에 완전무장 한 군인을 보내며 비상계엄을 선언한 거다. 이 모든 장면은 인터넷과 TV를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 다행히 국회는 빠른 대응으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 처리했다. 결의안이 통과되기 전에 국회 본회의장으로 무장 군인들이 들이닥치지 않을까 심장이 쫄깃했던 경험, 그날 밤 다들 했을 거다.
나도 그랬다. 그리고 다음 날 학교를 찾아보니 불안해하는 유학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튜브 실시간으로 전날 새벽까지 벌어진 황당하리만큼 공포스러운 장면을 목격한 데다, 각국 대사관으로부터 안전을 조심하라는 문자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함께 수업을 듣는 동료 한국 학생들이, 그리고 교수도 주말에 우르르 여의도로 몰려가는 (다수는 밀려든 인파 덕에 국회의사당까진 가보지도 못하고 샛강역 근처에서 연락도 못하던 동창들만 만나다 돌아와야 했지만) 모습에 ‘여기가 한국이었지’하고 깨닫기 시작했고, 국회가 대통령 탄핵을 가결 시키면서 하나, 둘 안정을 되찾아 갔다.
출처 <연합뉴스>
그러나 해가 바뀌도록 내란죄에 대한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윤석열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던 1월 19일 일요일 새벽 서울서부지법에 가해진 폭도들의 무차별 폭력 사태는 한중연 구성원 모두에게 다시 한 번 충격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한중연에서 교수를 하는 우리가 수많은 유학생들에게 자랑스럽게 가르쳐 온 한국의 민주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법치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모습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을 연구해 온 연구자이자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키워내는 교육자로서 한중연 교수들은 이 황당한 사태에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43명(현재 총원은 53명이다)이 마음과 뜻을 모아 1월 23일 “대한민국을 공격한 윤석열을 신속히 처벌하라”라는 제목의 시국선언서를 발표했다.
금번 시국선언서는 발기인이 있거나 어떤 기구가 진행한 게 아니라 철저하게 풀뿌리 연대 형식으로 교수들의 의견과 뜻을 하나, 둘 모아 발표했다. 이는 12월부터 이어지고 있는 응원봉과 촛불을 든 시민들의 집회가 보여주고 있는 발랄하고 자유로운 개인의 항거라는 의미를 존중하고 함께하겠다는 한중연 교수들의 신념에 따른 것이다.
한중연 교수들은 윤석열의 내란 시도와 극렬 지지자의 법원 습격 사태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일일 뿐 아니라 그동안 한국 사회가 이룩해온 문화적 다양성과 역동성 또한 빼앗아 갈 수 있음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경고한다. 나아가 공공의 안정과 평온한 시민의 일상은 물론, 급성장 중인 한국학 연구의 확산과 다각화에도 심각한 위해를 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들은 연구자이자 교육자의 양심으로 한국의 역사적 위기에 대해 애정 어린 관심과 연대의 손길을 보내는 세계인에게 화답하며 다음의 내용을 요구한다.
첫째, 헌법재판소와 법원은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에 대한 탄핵 심판 절차와 형법적 판단을 흔들림 없이 신속히 진행할 것.
둘째, 정부는 민주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불법적인 폭력 행동에 단호하게 대처할 것.
셋째, 국내외 한국학 공동체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행동에 함께 해줄 것을 요청한다.
... 글타. 다 딴지일보 독자 분들이 원하는 바고 우리의 생각은 같을 게다. 엄청나게 많은 뉴스가 쏟아져 따라가기도 벅찬 와중에 굳이 딱딱하고 재미없는 글을 올리냐는 소리를 하실 수도 있겠다. 허나 정부출연 연구교육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들(나 포함!)도 가세했다는 사실, 그리고 오랜기간 딴지에서 활동했던 한 사람이 이제는 공공기관의 교수가 됐지만 밥그릇 걱정하느라 닥치고 있지 않고, 변절하지 않았음(?)을, 교수직을 걸고 함 증명하고 싶었다.
아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시국선언서 전문이다. 열심히 썼으니 우리 시국선언서도 함 읽어주라!
“대한민국을 공격한 윤석열을 신속히 처벌하라”
국회가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계엄군에게 공격받았습니다. 헌법을 유린한 내란의 우두머리가 구속되자 극렬 지지자들은 법원을 습격했습니다. 지난 두 달 사이에 벌어진 이 참혹한 사태는 한국인은 물론 전세계의 시민들을 경악과 분노에 빠트렸습니다.
한국이 이루어 온, 그리고 이루어 나갈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성취들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헌법 기관들은 불법적인 폭력에 노출되었습니다. 삶을 파멸적 상황으로 몰아넣을 경제 위기의 신호도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체제를 파괴하려는 이들의 시도가 성공한다면, 한국 사회가 이룩해온 문화적 다양성과 역동성도 동력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헌법과 법률에 의거한 정당하고 적법한 내란 세력 단죄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국회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불법 계엄을 중단시켰고, 시민들은 형형색색의 응원봉과 촛불을 손에 쥐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세계인은 모범적인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폭거에 당황했던 것만큼이나, 그 반역을 신속하고 유쾌하게 제압한 한국인의 역량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것은 결코 보수와 진보의 대결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랜 역사를 거쳐 한국이 도달한 민주공화정 체제를 파괴하려는 반헌법적 세력에 대항하는 정당한 항거입니다.
20세기 이후 한국은 세계사적인 기적의 주역이었습니다. 식민 지배와 군부 독재를 극복하고 아래로부터의 민주화라는 힘겨운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온 것이 첫 번째 기적입니다. 한국전쟁의 폐허로부터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도약해 온 것이 두 번째 기적입니다.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낡은 관행에 저항하며 세계인의 공감을 얻는 문화적 성취를 이루어 온 것이 세 번째 기적입니다. 오늘날 한국에 주목하는 전세계의 시민들은 한국이 어떻게 수많은 역사적 시련들을 극복하며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세계 한국학 연구를 선도하는 연구 기관이자, 미래의 한국학 연구자를 키워내는 교육 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은 바로 그러한 관심에 부응해 왔습니다. 우리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속 교수들은 이번 내란 사태가 공공의 안정과 시민의 일상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급성장 중인 한국학 연구의 확산과 다각화에도 심각한 위해를 가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연구자이자 교육자로서의 직업적 책무에 따라, 그리고 현재 한국의 역사적 위기에 대해 애정 어린 관심과 연대의 손길을 보내는 세계인에게 응답하며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첫째, 헌법재판소와 법원은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에 대한 탄핵 심판 절차와 형법적 판단을 흔들림 없이 신속히 진행해 주십시오.
둘째, 정부는 민주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불법적인 폭력 행동에 단호하게 대처해 주십시오.
셋째, 국내외 한국학 공동체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행동에 연대해 주십시오.
2025년 1월 23일
현 시국을 걱정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구난희, 김바로, 김병준, 김소희, 김우영, 김원, 김인숙, 김철식, 김현종, 남은혜, 박대권, 박성호, 박정혜, 서승희, 서호철, 소원현 손혜리, 신상후, 신익철, 신정수, 심재우, 안예리, 양영균, 연재훈. 오강원, 옥영정, 옥창준, 이대화, 이완범, 이용윤, 이정란, 이정희, 이하경, 임치균, 장신, 전용훈, 정헌목, 조융희, 조일동, 조현범, 주영하, 한승훈, 황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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